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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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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6.25 전쟁 당시4. 6.25 전쟁 이후
4.1. 1950년대4.2. 1960년대4.3. 1970년대4.4. 1980년대4.5. 1990년대4.6. 2000년대4.7. 2010년대4.8. 기타
5. 이후의 상황6. 기타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군인, 민간인을 막론하고 북한국가주민이 북한에 납치되는 것을 말한다.

2. 상세

피해자는 주로 대한민국(남한) 국민과 일본 국민이었다. 한국에서 납북은 주로 전자를 말하며 일본인 납북 문제에 대해서는 납북 일본인 문서 참조. 반대로 남한 측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납남 사례도 존재하긴 하지만 납북에 비해서는 그 수가 매우 적다.

해방과 분단 이후 경제 사정에 있어서는 남한보다 훨씬 나은 형편이었던 북한이지만 정권 수립 및 유지를 위해 필요한 인적 자원이 남한에 비해 크게 모자라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1], 이런 인적 자원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북한은 남한의 인적 자원을 북한으로 빼내오는 것에 공을 들였다. 6.25 전쟁 발발 이전부터 북한은 남한의 기술자와 지식인들을 유인해 월북시켰고, 6.25 전쟁 초반 수도 서울을 비롯해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하자 점령정책의 일환으로 남쪽으로 피난가지 못 하고 점령지에 남은 남한 민간인들을 대거 북한으로 끌고갔다. 이렇게 6.25 전쟁 와중에 북한으로 납치된 것이 '전시납북'이다.

'6.25 전쟁 납북 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 피해자 명예회복위원회'에 따르면 정부·민간 납북자 명부 12종을 바탕으로 추산된 전시납북자는 95,456명에 달하며 실제 납북자는 10만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전시납북'으로 납북된 납북자는 크게 5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는 농민, 근로자 등 단순 민간인들, 둘째는 대한민국 정계, 재계, 문화계에서 활동한 주요 인사들, 셋째는 경찰, 종교인, 반공단체 회원, 우익 인사 등 북한 체제에 비우호적인 반체제 인사들, 넷째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전문직 종사자들, 마지막이 소위 '의용군'과 노무자로 강제 징병·징용된 민간인이다. 납북자의 88.2%(84,659명)가 북한이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한 전쟁 초반 3개월(1950년 7월~9월) 동안에 납북되었으며, 그 중 80.3%(77,056명)가 자택이나 자택 인근에서 납치되었다. 민간인 납북자와 별개로 공산군에게 생포되거나 항복한 국군 포로 수만 명도 있는데, 유엔군사령부는 전쟁 중 국군 실종자 및 포로를 8만 2000여 명으로 추산했고 이들 대부분은 포로로 생포되었을 것으로 추정했으나, 북한은 최종적으로 국군 포로 중 8,800여 명만 송환하는 데 그쳤고 나머지는 전향하거나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는 핑계를 대며 송환하지 않고 억류했다.

'전후납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난 이후에 일어난 납북으로,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전후납북'으로 납북된 대한민국 국민은 총 3,835명인데, 이중 3,319명이 대한민국으로 귀환(3,310명 송환, 9명 탈북)했으며,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못 하고 북한에 억류된 이는 516명으로 추정된다. 전후납북자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어부로 전방 인근 해역에서 조업을 하다 북한 해군에 의해 납북된 경우가 대부분인데, 실제로는 조업을 하다 북한 수역으로 들어가 납치된 경우보다 공해상이나 대한민국 영해상에서 조업을 하다 불법으로 납북된 경우가 많다.[2]

납북은 이산가족이 생기게 된 주요 이유 중 하나다.납북되었다가 이산가족 방문으로 다시 만난 사례 기사 본문에서 납북자가 북한에서의 삶도 괜찮다고 말하는데 설득하는 이유가 땔감(...)을 무상으로 제공해서라고 한다. 위와 같이 납북자들은 북한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발언을 공식 석상에서 주장하거나 북한 치하에서 공직에 올라 활동하기도 한다. 사실 납북자는 북한에 가고 싶어서 월북한 게 아니라 강제로 납치당한 피해자고 저런 상황에 무조건 북한을 좋게 말하는 건 북한 정권의 지독한 감시와 강요로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모두가 알기 때문에 월북이 아닌 납북자들의 저런 활동은 적극적인 가담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크게 문제 삼지 않는 편이다. 예를 들어 영화화로 유명박열은 납북당한 후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란 단체의 회장을 역임했는데 납북되기 전 해방 정국 5년 동안 뚜렷하게 반공 우익 노선을 탔던 사람이기 때문에 북한에서 했던 활동도 강제성이 있다고 인식되었고 1970년대 박열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대한민국 언론에서도 짧게나마 이것을 보도했으며 사회장 수준으로 추도식이 열리기도 했다. 즉, 반공이 국시였던 그 시절에도 납북당한 사람은 사정을 감안해서 평가했다.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거리가 가까운 자유진영 국가인 일본도 피해를 많이 입었고 일본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직접 평양에 가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서 결국 김정일이 직접 인정하고 사과하기까지 했다. 그 외에 미국, 중국, 태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대만, 싱가포르,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레바논, 러시아, 루마니아, 프랑스, 영국, 요르단, 토고, 호주 등 국적과 인종에 관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납북당했다.[3]

재불 피아니스트 백건우 - 배우 윤정희 부부도 1977년에 온 가족이 납북 일보 직전까지 갔던 일이 있었는데 다행히 재빠르게 백건우가 눈치채서 모면했다.

3. 6.25 전쟁 당시

※ 고향이 북한 치하 북부 지방이었던 사람들은 ★ 표시를 한다.

4. 6.25 전쟁 이후

4.1. 1950년대

4.2. 1960년대

4.3. 1970년대

4.4. 1980년대

4.5. 1990년대

4.6. 2000년대

4.7. 2010년대

4.8. 기타

5. 이후의 상황

대한민국 통일부에 따르면 전쟁 중 납북된 사람이 11만여 명에 이르고 전쟁 후에도 3,800여 명이 납북되었다가 3,300여 명이 송환되거나 스스로 탈북하였으며 지금까지 516명이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YS-11기 납치 사건을 비롯한 북한의 한국인 납치 행위에 대해 대한민국 통일부와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KAL기 납치 피해자 송환을 위한 대책협의회 등이 유엔인권이사회 인권최고대표사무소 강제적·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UN WGEID)에 북한에 의한 납치 사건을 진정하여 유엔차원의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북한은 "납북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자발적 의사에 의해서 북한에 남아 살고 있다."며 논의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한편 일부 납북자들은 남한 정부에서 반공 체제 유지를 위해 자진 월북자로 날조하는 바람에 남겨진 가족들도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월북 문서에 더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6.25 전쟁 당시 한국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힌 후 억류되어 1953년부터 33년 동안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가 2001년 탈북해 한국으로 돌아온 국군 포로 2명이 2016년 10월 서울중앙지법에 북한 정부와 김정은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2020년 6월 7일 서울중앙지법은 2100만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9] 배상금은 국내 방송사나 출판사 등이 북한 조선중앙TV의 영상 및 출판물을 사용하고 지불한 저작권료 등이 대상이다.[10] 변호인단은 이 저작권료에 대하여 법원에 압류 및 추심 명령을 신청하여 지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은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이에 국군 포로 출신 2명이 소송을 냈지만 2022년 1월 14일 서울동부지법은 북한을 비법인 사단으로 보기 어렵고 경문협에 공탁된 저작권료는 북한 정부가 아닌 북한 내 저작권자의 것이라며 원고 청구를 기각하였다. 이에 국군포로송환위원회는 항소할 뜻을 밝혔다.

6. 기타

7. 관련 문서



[1] 당시 인구도 남한 인구가 북한 인구의 2배가 넘는 데다가 특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자 한반도의 인적 자원이 몰리는 최대도시 서울이 남한에 속한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2] 납북되었다가 탈북한 울산 출신 어부 이재근의 말에 따르면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만났다 한다. 이 중에는 정부의 공식 납북자 명단에 없는 경우도 있지만 심지어 제주도 앞바다에서 조업하던 중에 납북된 사례도 있다고 한다. 북한은 이들을 대남 간첩으로 이용했다.[3] 최은희의 증언에 의하면 외국의 여성들을 납치하기 위해 미남계까지 쓴다고 한다. 제법 얼굴이 잘생긴 공작원이 자신의 국적을 숨기고 여성을 유혹하여 결혼하자고 꼬신 뒤 북한으로 유인하여 납치한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납북되어 온 외국인들은 대부분 공작원들에게 외국어를 교육시키는 일을 하게 만든다고 한다.[4] 다만 그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이였는데 6.25 전쟁 이전에는 연백군이 38선 이남에 있었던 고로 대한민국 땅이였다.[5] 시인이며 김소월의 스승이지만 후에 친일파로 전향하였다.[6] 심영황철에 의해 납북당했다.(야인시대의 그 국민고자 심영과 황철 맞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청천강까지 끌려가서 탈북하는 데에 성공했다.[7] 당초에는 피랍 직전에 길용호에서 보내온 무전 내용 등을 근거로 중공 무장선에 의한 피랍으로 생각되었으나, 2000년대 들어 납북으로 밝혀졌다.[8] 당시 도이나 붐베아는 이미 루마니아를 떠나서 이탈리아에 정착해 살았으니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누굴 좋아했느냐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 게다가 국민들이 헐벗고 굶주리거나 말거나 가렴주구를 일삼은 놈이라서 자기 나라 사람이 납북되었다고 해도 신경이나 썼을 리는 만무하다.[9] 원래 국제법상 주권면제 이론으로 인하여 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한국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재판에서도 북한을 비법인사단으로 규정하여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10] 이 저작권료는 2004년 설립한 국내 법인인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이 북한 저작권 사무국과 계약하여 2004년부터 저작권료를 북한에 송금했지만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으로 송금이 중단되어 2020년 기준으로 법원에 20여억 원이 공탁되었다.[11] 당시 한국 측은 정보를 다 빼간 후 서울 구로구 오류동 공군 첩보대에서 4년 동안 무보수로 강제노동을 한 후 ‘잠재적 대공 용의자’로써 평생 사찰받았다고 한다. 그의 억울함은 2012년에야 드러났고, 2023년 피랍 67년 만에야 국가로부터 손해배상 13억 원을 받게 되었다.[12] 조사 결과 최인수는 관련 정보를 전혀 몰랐다고 하며, 최인수는 가까스로 탈출했으나 안기부에게 다시 납치당한 후 북한으로 돌아가고는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고 한다. 중국 측에서도 주권침해라고 반발하며 중국에서 활동하던 안기부 요원을 체포한 후 석방 협상 과정에서 안기부 블랙 요원들을 중국에서 대거 내보내며 삽질만 한 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