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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그리스도교련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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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orean Christian Federation seal.jpg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3cb371>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영문 명칭 Korean Christian Federation
약칭 조그련
창설일 1946년 11월 28일 ([age(1946-11-28)]주년)
주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시
중앙위원회 위원장 강명철
서기장 오경우
성격 북한의 어용 개신교 조직
이념 주체사상
1. 개요2. 연혁3. 대외 현황
3.1. 개요3.2. 평양신학원3.3. 성서와 찬송가3.4. 참고 문헌
4. 실상
4.1. 유보적 견해4.2. 부정적 견해4.3. 중국과의 비교4.4. 소련과의 비교4.5. 관련 의견
5. 참고자료6. 관련 인물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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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392013997.jpg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청사
종교는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입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으면 계급의식이 마비되고, 혁명하려는 의욕이 없어지게 됩니다.
결국 종교는 아편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저작선집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0)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 건물을 짓거나 종교 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 데 리용할 수 없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2019. 8. 개정)
제267조(미신행위죄)
돈 또는 물건을 받고 미신 행위를 여러 번 한 자는 2년 이하의 로동단련형에 처한다. 정상이 무거운 경우에는 5년 이하의 로동교화형에 처한다.
제268조(미신행위조장죄)
리기적 목적 그 밖의 동기에서 미신 행위를 조장시킨 자는 2년 이하의 로동단련형에 처한다.
앞 항의 행위를 여러 명에게 한 경우에는 3년이하의 로동교화형에 처한다. 정상이 무거운 경우에는 3년 이상 7년 이하의 로동교화형에 처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법 일부개정 2009-04-00 주체98 (2009년 4월 이후 미상 시기)

1. 개요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북한개신교 단체로, 북한 유일의 공인 개신교 단체이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정상국가에 없는 조직인데 종교의 자유가 제한된 일부 국가에서 사용하는 국가 설립 교단이다. 북한의 통치 권력인 조선로동당 산하 통일전선부에서 관리하는[1] 대외에 보여주기식 어용단체일 뿐 진정한 신도나 교회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속 신도들의 신앙심에 대한 논쟁은 있어도,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나 봉수교회, 칠골교회 등이 어용단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북한 전체 개신교 신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개신교 단체임을 표방한다. 그러나 북한의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친척이며 김일성의 중학교 시절 담임선생이었던 강량욱 목사를 비롯하여 한국전쟁 전부터 개신교 신자로 있던 조그련의 고참 간부 다수가 장로교 출신이라 장로교 직제와 비슷하다. 약칭은 조그련이며 현(現)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강명철 목사, 서기장은 오경우 목사이다. 강명철 목사는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숙부 강량욱 목사 손자이자 강영섭 목사 아들이며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양신학원에서 수학했다.

기본적으로는 가짜 신도들의 모임이 아니라는 방문자들의 의견이 있으나 이들은 친북 단체들의 포섭으로 초청된 인사들이고, 대체적으로 무신론 내지 주체사상이 국시인 전체주의 국가의 전시용이다. 지하교회 신도들도 보호하지 못하는 조선그리스도교 연맹이 그럼에도 존재하는 이유는 1989년 제 13회 세계청년축전을 앞두고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음을 대외로 표방해야 했고, 현재에는 대북제재로 서방세계 지원이 전면 차단된 마당에 식량 지원 등을 목적으로 종교단체나 국제 NGO의 소통창구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그련은 북한 정권의 어용 관제 종교 기관이지만 강량욱의 입지 때문에 북한 내 다른 종교 기관보다는 그나마 사정이 좋은 편이다. 최소한 강량욱과 친소 관계가 있던 해방 전 기독교 신자와 그 후손들은 조그련의 비호를 받아, 단지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북한 정권으로부터 박해 받는 것은 피할 순 있었다. 이는 순전히 김일성이 스스로 선생님이라 부르며 한 수 접는 강량욱의 위상 때문이었다. 타 종교는 이런 배려가 거의 없으며 불교의 경우엔 박태화 같이 해방 전에 이미 승려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해방 이후엔 북한 정권에 협조한 경우에나 살아 남았지, 천도교의 김달현은 숙청당했다. 물론 기독교에 대한 관대한 처분은 하술되겠지만 북한 정권이 이들의 종교적 자유를 허용했다고 보기보단 이들을 양지화해서 교세가 더 퍼지지 못하도록 관리하는 것이라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현재의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산하의 목사들은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종교학과 교수들로 유물론에 기반한 무신론자인 조선로동당원들이고, 신도들은 대부분 통일전선부 간부들의 아내들이라고 한다.[2] 북한에선 로동당 간부들인 가장의 사업에 가족들이 동원됨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2. 연혁

파일:kimikdoo1.jpg

조선기독교도련맹 전 총회장 김익두[3] 목사

파일:kangryanguk1.jpg

조선기독교도련맹 전 위원장 강량욱 목사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1946년 11월 28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조선기독교도련맹이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 1946년 11월 28일 조선기독교도련맹 창립대회 시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김일성의 외종조부이자 창덕학교 학창 시절 스승 강량욱 목사가 선출되었으며, 1949년 조선기독교도련맹 총회 시 총회장[4]으로 일제강점기 많은 부흥과 은사를 행한 명망 있는 개신교 부흥사 김익두 목사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총회장 김익두 목사는 1950년 10월 14일 38선 넘어 북진하던 한국군UN군을 지지한 이유로 후퇴하던 조선인민군에게 신천군 서부교회에서 예배 중 살해당했으며, 그의 죽음으로 조선기독교도련맹의 유일한 지도자로 남은 강량욱 목사는 1983년 사망할 때까지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남았다.

1946년 3·1절 기념대회 참가 여부를 두고 소련군정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와 이북5도연합노회 주도 개신교 간 발생한 갈등이 계기가 되어 친정부 개신교 단체의 필요성이 부각되자, 1946년 6월경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서기장 강량욱 목사를 주동으로 친정부 개신교 목회자들은 조선기독교도련맹 결성준비위원회를 준비했다. 친정부 성향이 아니더라도 강제적으로도 유력 목사를 이 자리에 포함시켰는데 일제강점기 중국 산둥성 선교사였던 박상순 목사, 일제강점기 유명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 그 외 김응순 목사, 조택수 목사, 홍기주 목사[5] 등이 그 위원회에 포함되어 있었다. 1946년 11월 28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했으며, 창립대회 후 교단 조직을 확대해 도·군·면 단위 지역기독교도련맹 조직을 구성하였고, 1949년 조선기독교도련맹 총회를 개최하여 김익두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했다.[6]

조선기독교도련맹은 1946년 6월경 결성준비위원회부터 1946년 11월 28일 창립까지 평안도보다는 황해도·함경도개신교 신자들을 주된 기반으로 하였으며,[7] 창립 후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조직 확장 과정에서 이북 전역의 개신교 신자들로 그 기반을 넓혀 나갔다고 알려져 있다.

강량욱 목사가 대표하는 어용 세력은 1946년 3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실시 토지개혁에 찬성하는 등 이미 연맹 창립 전부터 적극적 친정부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토지개혁 실시 후에도 (기존 이북5도연합노회가 주일 성수 명분으로 참가를 거부한) 1946년 11월 3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선거 적극 참가를 주장하는 등 일관된 친정부 성향을 보였다. 이들은 조선기독교도련맹을 창립하고 나서 이북 개신교 주도권을 놓고 이북5도연합노회와 더 적극적으로 경쟁했으며, 북한 당국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조선기독교도련맹을 지원하고 반대로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이북5도연합노회를 탄압하여, 광복 직후 결성된 이북5도연합노회는 한국 전쟁 발발 무렵이면 주요 인사가 체포되거나 월남하는 등 사실상 와해되었다.

조선기독교도련맹은 한국 전쟁 중 북한 정부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조선인민군 "서울 탈환 기념예배"를 하는 등 친정부 활동을 벌였는데, "서울 탈환 기념예배" 외에도 1950년 8월 5일 조선기독교도련맹 주관으로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전쟁 승리를 위한 기독교도 궐기대회"가 열렸으며, 1952년 11월 19일 월북한 김창준 목사가 이끄는 기독교민주동맹과 조선기독교도련맹 합동으로 "남북 조선 기독교도 항의대회"가 열려 미국을 비난하고 미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토장이 되었다.[8]

조선기독교도련맹으로 구성된 어용 세력은 정치에 적극 관여했다. 강량욱 목사는 1945년 해방되자마자 이미 교회가 파괴되고, 신자들이 박해받는 상황에서도 이미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이어 1946년 2월 16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서기장, 1947년 2월 22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서기장이 되었다. 조선기독교도련맹의 다른 신자들도 조선민주당 당원으로 입당했으며,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공직에 피선(被選)되었다. 1946년 2월 초대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 장로가 신탁통치 반대를 이유로 연금되자 강량욱은 최용건 세력과 조선기독교도련맹 세력이 조선민주당을 주도했고, 1958년 최용건 세력이 탈당해 조선로동당으로 복귀하면서 조선기독교도련맹 세력이 완전히 조선민주당 당권을 잡았다.

김일성의 바지사장인 최용건이 구색 맞춰 출범한 조선민주당은 1946년 7월 22일 북조선로동당 등 정당·사회단체들이 가입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가맹했으며, 1948년 8월 25일 초대 최고인민회의 및 지방인민회의 선거에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통하여 공동으로 후보를 공천해 출마했다. 1949년 6월 27일 남한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북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통합해 결성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는 조선민주당과 조선기독교도련맹 둘 다 가맹단체로 참가했다.

강량욱 목사 본인도 1948년 초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선거에 대의원에 당선되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이 된 이래 부주석이 될 때까지 계속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피선되었다. 정치에 적극 관여한 조선기독교도련맹 인사 중 강량욱 목사는 대의원으로만 일하지 않고 외교 부문에서 활동하여 각종 국제회의에 북한 대표로 참석하다가, 1972년 사회주의헌법으로의 개헌과 동시에 부주석으로 피선되어 1983년 사망할 때까지 직책을 유지했다. 또한 1958년 조선로동당으로 복귀한 최용건을 대신하여 조선민주당 당수에 선출되었으며, (조선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꾼) 1981년 1월 28일~29일 간에 개최된 조선민주당 제6차 당대회에서 다시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광복 시 한반도 전체 개신교 신자의 2/3 이상이 이북에 있었고, 이북 개신교는 한반도 전체의 개신교를 주도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인한 교회 파괴와 정부에 의한 교회 폐쇄로 이북에 단 하나의 교회 예배당도 남지 않게 되었고, 6.25 이후 북한의 기독교 공동체는 완전히 박멸되었다. 1989년 13차 평양 세계청년축전을 앞두고 외국과 외신에 '종교의 자유'를 보여주고자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건축되기 이전에는 어떠한 교회도 북한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에 관해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면담을 나눈 적도 있는 서울 후암동교회 전(前) 담임 조동진 목사는 6.25 전쟁 전 3천여 곳에 달했던 교회 예배당 중 500여 곳은 전쟁 중 포격이나 폭격으로 파괴되고 나머지는 용도 변경되었으리라 추정했다.

대략 신자들도 전란 와중 죽거나 대거 월남하고 더러는 북한 정부에 의해 극렬 반정부 인사로 지목되어 사형당하는 등 크게 감소했고, 살아남은 신자들도 당장 생존의 문제가 닥치고 전란 직후의 북한 정부가 조직적으로 선동하고, 종교 활동을 신고 대상으로 하여 부추기던 반(反)기독교 감정 때문에 공개 신앙활동의 어려움에 봉착했다. 더구나 1958~1960년 북한 정부와 조선로동당의 대대적 반종교 선전과 종교인 제재 조치 때문에 그나마 잔존하던 북한 개신교 신자들이 지하로 숨었다. 이로 인해 어용조직인 조선기독교도련맹의 공개 활동마저 한국전쟁 후 상당기간 사라졌다.[9]

한국전쟁 도중 북한 정부의 교회 폐쇄 외 미군 폭격으로 교회 예배당이 파괴되고 교인들이 희생된 경우도 있었는데, 신의주제1교회·신의주제2교회·의주읍교회·용천군 동상교회 등이 그런 사례이다. 또한 북한 정부에게 희생당한 개신교 신자들과는 반대로 국군이나 미군에 의해 북한 정부에 협조하던 조선기독교도련맹 신자들이 희생되기도 했는데, 용강군 진지동교회 장로 김석훈·강서군 강서교회 장로 김광한·정평군 무산교회 장로 한성도·운산군 입석교회 장로 강처인·안악군 봉산리교회 장로 김영섭·평안남도기독교도련맹 위원장 윤재만 목사 등이 그런 사례이다.

한국 전쟁으로 교회 건물이 파괴되거나 용도 변경되는 등 사라지면서 북한 개신교 신자들은 가정에서 예배모임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현재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중추를 이루는 가정예배 처소의 시초가 되었다. 가정예배 처소의 실존 여부는 전 조선로동당 간부로서 한국에 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전향한 신평길의 증언을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그는 북한 정부에서 1960년대 말 '풀어주는 사업'을 통해 원래 개신교 신자인 사람들이 자신들끼리 가정에 모여 가지는 예배를 공식 허용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김흥수 목원대학교 명예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 전쟁 직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 가정예배 처소를 운영한 개신교 신자들은 한국전쟁 전부터 북한 정부에 협조하거나 전쟁 중 북한 정부에 공을 세웠거나 조선로동당 간부와 인척 관계에 있는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일찍이 북한 정부에 협조하여 전쟁 후 가정예배 처소 예배를 허락 받은 사람 중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여동생 안신호 권사도 있었는데, 김일성의 특별 배려로 그녀는 개신교 신자라는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음에도 조선로동당과 조선민주여성동맹에 입당·가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재독교포였던 이영빈 목사의 아버지 이풍운 목사도 1960년 소천 시까지 원산에서 가정예배 처소를 운영했다고 한다.[10]

파일:강량욱19720831.jpg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당시 강량욱 목사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기점으로 조선기독교도련맹의 공개 활동이 재개되었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중 강량욱 목사가 남한의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이때 강량욱 목사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목사이며 하나님을 안 믿을 수 없다고 발언한 바 있다. 1970년대 조선기독교도련맹의 공개 활동은 거의 전적으로 대외 활동이어서, 남한에서 발생하는 여러 시국 사건에 다른 공인 종교단체들과 동시에 성명을 발표하거나,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등 개신교 국제조직과의 교류 등이었다. 하지만 1972년 9월 목회자 양성 목적으로 1950년 7월 폐교된 평양신학교를 계승하는 평양신학원을 개원하는 등 대내 활동도 아예 없지 않았다. 평양신학원은 개원하면서 강량욱 목사를 원장으로 하였으며, 전쟁 전 평양신학교나 감리교신학교에서 수학한 이영태 목사·김득룡 목사 등이 강의를 맡았고, 이렇게 재개된 신학교육을 통해 고기준·김운봉 등 나머지 조선기독교도련맹 간부들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세계교회협의회 등 개신교 국제조직을 통한 남한·북한·교포 개신교 신자 간 교류가 시작되었다. 1976년 미국 민주당 카터 정부가 취한 미국인 북한 여행 허용도 이 교류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개신교 국제조직을 통한 남·북·교포 개신교 신자 간 교류는 종교 교류보다 통일운동 확산에 그 목적이 있었으나 종교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이 때 북한 개신교와 교류하고자 한 남한·교포 개신교 신자들은 주로 세계교회협의회(WCC),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연관된 진보·개혁적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남·북·교포 개신교 삼자 간 첫 공식 접촉은 1986년 9월 2-5일 스위스 제네바 인근 글리온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국제위원회 주최 세미나에서 성사되었다. 이 회의에서 조선기독교도련맹 서기장 고기준 목사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책위원장 강문규 목사가 평화통일을 주제로 발제한 다음 삼자 간 성만찬성경공부를 함께 진행했다. 스위스 제네바 인근 글리옹(Glion)에서 1988년과 1990년 두 차례 더 회의가 개최됐다. 이렇게 스위스 글리옹에서 세차례 개최된 남·북·교포 개신교 간 회의는 각각 '제1차 글리옹 회의', '제2차 글리옹 회의', '제3차 글리옹 회의'라고 명명된다. 그러나 제3차 글리옹 회의 후 글리옹 회의는 지속되지 못한다.[11]

파일:홍동근목사조선기독교도련맹방문(1981년9월28일월요일).jpg

1981년 9월 28일 홍동근 목사 방북 중 찍은 홍동근 목사와 조선기독교도련맹 관계자들 모습. 왼쪽에서 두 번째부터 고기준 목사[12], 김득룡 목사[13], 홍동근 목사, 김운봉 전도사[14].

파일:글리온회의(1988년11월24일).jpg

1988년 11월 24일 제2차 글리온 회의[15] 중 찍은 남·북·교포 개신교 관계자들 모습. 사진의 맨 하단 좌측 세 번째 인물이 당시 조그련 서기장 고기준 목사.

1980년대는 해외 교포 개신교 신자의 방북이 활발해짐과 동시에 조선기독교도련맹이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외부에 공개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1970년대 후반 시작되어 1980년대 초반 본격화된 해외 교포 개신교 신자의 친지 상봉을 목적으로 한 방북은 북한 가정예배 처소 신앙생활의 공개 계기가 되었다.

1978년, 평양 출신 재미교포 미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USA, PCUSA) 선교부 이승만 목사가 친지 상봉 목적으로 방북했다. 이승만 목사는 여동생들과 부모 묘소를 방문하고 나서, 조선기독교도련맹 위원장 강량욱 목사를 면담했는데, 이승만 목사는 훗날 당시 면담 자리에서 강량욱 목사가 북한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회고했다. 이승만 목사는 아버지 이태석 목사를 한국 전쟁 와중 북한 당국에 잃는 아픔을 겪은 인물로서, 이집트 카이로 출장 시 이집트 주재 북한 대사관과 접촉하여 북한에 잔류한 가족 생사를 확인한 것을 계기로 당시 북한 부주석 강량욱 목사의 초청을 받아 방북할 수 있었다.[16]

1979년 4월, 평안북도 철산군 출신 재미교포 조국통일촉진회 총무 노의선 목사(1911-1993)[17]가 고향 방문 목적으로 방북했다. 노의선 목사는 방북 중 당시 조선기독교도련맹 중앙위원장 강량욱 목사를 면담했다.

1981년 6월, 평양 출신 재미교포 조국통일촉진회 회장 김성락 목사(1902-1989)[18]고향 방문 목적으로 방북했다. 김성락 목사는 방북 중 조선기독교도련맹 중앙위원회를 방문하여 강량욱 당시 위원장 목사를 면담했으며, 7월 3일 김일성을 만났다. 그는 김일성과 만난 자리에서 면담과 오찬을 같이 했는데, 식사를 앞에 두고 김일성이 그에게 식전기도를 부탁했다고 한다.

1981년 9월 18-29일, 평안북도 피현군 출신 재미교포 선한사마리아인교회 담임 홍동근 목사(1926년 5월 15일-2001년 11월 11일)[19]가 친지 상봉 목적으로 방북했다. 홍동근 목사는 피현군 인근 개천시을 방문하여 어머니와 형제·자매와 상봉하고 나서, 북한을 떠나기 전날 1981년 9월 28일 조선기독교도련맹 중앙위원회 청사를 방문해서 당시 간부였던 고기준 목사, 김득룡 목사, 김운봉 전도사와 담화하는 시간을 가졌다.[20]

이 방북을 시작으로 홍동근 목사는 지속적으로 방북했다. 1988년 북한 정부 수립 40주년을 맞아 치러지는 9·9절 행사에 초대받아 참석했고, 1989년 평양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학생축전에도 초대받아 참석하던 도중 김일성과 면담했다. 이뿐만 아니라 1990년부터 2001년 사할 때까지 매년 방북하여 평양신학원과 김일성종합대학 종교학과에서 초빙교수 자격으로 강의했다.[21]

조선기독교도련맹이 방북한 해외 교포 개신교인들에게 공개한 가정예배 처소 중에는 평양뿐 아니라 평안남도, 황해북도, 강원도 지역도 있었다. 1981년 6월, 함경남도 원산시(현 강원도 원산시) 출신 재독교포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 회장 이영빈 목사가 아내 및 이화선 목사와 함께 방북했다. 이영빈 목사는 방북 중 강원도 원산 가정예배 처소 예배에 참석했는데, 이영빈 목사 방북 시 그가 방문했던 원산 가정예배 처소 책임자는 리성봉 전도사였는데, 그는 훗날 봉수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1982년 7월, 간도 용정 출신 재캐나다교포 토론토한인연합교회(현 알파한인연합교회) 전충림 장로, 충청북도 진천 출신 재미교포 퀘이커 신자 차상달 씨가 미국 퀘이커 지원으로 방북했다. 그들은 방북 중 3곳의 가정예배 처소를 방문했다.

1986년, 평양 출신 재미교포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USA, PCUSA) 선교부 이승만 목사가 재차 방북했다. 이승만 목사는 방북 중 평양 경상골 가정예배 처소 예배에 참석했다.

1986년, 미국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the USA, NCCC) 대표단이 방북하여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를 방문하고 가정예배 처소도 방문했다. 미국교회협의회의 방북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대표단은 개성의 가정예배 처소를 방문할 수 있었다.

1987년 6월 19일-26일, 미국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the USA, NCCC) 대표단이 재차 방북하여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와 가정예배 처소 4곳을 방문했다. 미국교회협의회의 방북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미국교회협의회 방북 대표단은 아리 브라우어(Arie Brouwer) 미국교회협의회 총무, 드웨인 엡스(Dwain C. Epps) 미국교회협의회 부총무·국제부장, 윌리엄 크리비(William Creevy) 미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USA) 목사, 마틸린 로체스터(Mattilyn T. Rochester) 아프리카 감리감독 시온교회(the African Methodist Episcopal Zion Church) 평신도지도자, 함성국 연합감리교회(the United Methodist Church) 세계선교국 아시아총무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번 방북에서도 대표단은 평양뿐 아니라 지방의 가정예배 처소를 방문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대표단은 개성에서 개성시그리스도교련맹 부위원장을 만났으며 개성의 가정예배 처소 3곳을 방문했는데, 특히 대표단 중 이북 출신 재미교포 함성국 연합감리교회(UMC) 세계선교국 아시아총무는 개성 지역의 한 가정예배처소 예배에서 전쟁 전 평양 성화신학교 동기 오사문과 재회하기도 했다. 대표단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외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와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같은 다른 공인 종교단체들도 방문했으며, 조선민주여성동맹과 평양산원 등 사회단체와 복지시설도 방문했다. 대표단은 방북 일정 초반 주체사상 강의를 들었는데, 강사는 주체사상 외 니케아 공의회 등 그리스도교 역사를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루돌프 볼트만·위르겐 몰트만·아우구스티누스·박형규 등의 인물들을 전거로서 언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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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재건축 전 봉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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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재건축 전 봉수교회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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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재건축 전 칠골교회

1988년과 1992년 사회주의권 해빙과 세계청년학생축전의 영향을 받아 평양에 예배당 2곳이 건립되었는데, 바로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다. 봉수교회는 1988년 11월 6일 첫 주일예배를 드렸으며, 칠골교회는 1989년 거의 완공 단계까지 건축했다가 다시 건축해서 1992년 11월 29일 첫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 중 칠골교회는 김일성 어머니 강반석이 다니던 하리교회를 재건한 것이다. 봉수교회는 2008년 재건축되었으며 칠골교회는 2014년 재건축되었다.

1988년 11월 6일, 봉수교회에서 김운봉 목사 집례로 첫 주일예배가 있었다.

1988년 11월 4-12일, 캐나다교회협의회(Canadian Council of Churches) 대표단이 방북하여 북한의 종교시설 및 종교단체들을 방문했다. 방북단은 테리 브라운(Terry Brown) 성공회 주교, 글렌 데이비스(Glenn Davis) 장로회 목사, 캐나다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 리아 화이트헤드(Ria Whitehead) 그리고 가톨릭 테리 갤러거(Terry Gallagher) 신부 등 5명으로 구성되었다.[22]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단독 초청으로 방북한 이들은 11월 6일 봉수교회 첫 주일예배에 참석했으며 축성된 지 1달이 채 되지 않은 장충성당에 방문했다.

1989년 1월, 서울 후암동교회 전(前) 담임(1960-1978) 미국 윌리엄케리국제대학교(William Carey International University) 고려연구소 소장 조동진 목사, 미국 선한사마리아인교회 담임 홍동근 목사가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초청을 받아 방북했다.[23] 향린교회 담임이었던 홍근수 목사의 형 홍동근 목사는 이미 1981년부터 비교적 자주 북한을 방문해온 진보 성향 개신교 인사였고, 조동진 목사는 원래 한경직 목사가 위원장으로 있었던 "북한해방기도운동"에서 활동하는 등 보수 성향 개신교 인사였지만 북한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대북 교류에 나서게 된 인사였다. 1월 20일 평양에 도착한 두 사람은 1월 22일·29일 두 차례 봉수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조동진 목사는 박관오 총장·최장룡 부총장의 안내로 김일성종합대학 캠퍼스를 시찰했으며, 홍동근 목사와 마찬가지로 월남실향민으로서 방북 일정 중 평안북도 의주군을 방문하여 친척들과 상봉하고 조부모의 묘소에서 같이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1989년 3월 25일-4월 4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24] 상임고문 문익환 목사가 야당 출신 사업가 유원호, 재일교포 작가 정경모,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변인 황석영과 함께 방북했다. 문 목사는 도착 당일(3월 25일) 순안공항에서 친척 누이를 만나고, 이튿날(3월 26일) 봉수교회 부활절 예배에 참석했으며, 주일 다음날(3월 27일) 김일성과 첫 번째 면담을 가졌다. 문익환 목사는 3월 28일 봉수교회 오른쪽에 위치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청사를 방문하여 위원장 강영섭 목사, 부위원장 리철 목사, 서기장 고기준 목사, 봉수교회 담임 리성봉 목사와 함께 조선가톨릭교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 장재언 사무엘, 장충성당 초대 신도회장 박경수 바오로와 만났으며, 3월 29일 조선로동당 비서 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과 면담했고, 3월 30일 묘향산 보현사를 방문하여 조선불교도련맹 승려들과 만났다. 문익환 목사는 4월 1일 자신이 묵던 숙소에 찾아온 김일성과 두 번째로 면담을 가졌고 이튿날 4월 2일 장충성당 공소예절에 참례했으며 같은 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간부들과 면담 및 내외신 기자회견을 가졌다. 4월 3일 북한을 떠나 베이징 경유해 도쿄에 잠시 머무르며 현지 한인 교회에서 보고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3일 귀국했고 바로 체포·구속되었다.

1990년 11월 23일-12월 4일, 서울 후암동교회 전(前) 담임(1960-1978) 미국 윌리엄케리국제대학교(William Carey International University) 고려연구소 소장 조동진 목사, 데일 키츠맨(Dale Kietzman) 수석부총장, 찰스 위크맨(Charles Wickman) 개발담당 부총장이 김일성종합대학·김형직사범대학의 공동 초청을 받아 방북했다. 방북자들은 김일성종합대학과 김형직사범대학의 캠퍼스를 시찰하는 것 외에 11월 25일 옥류관에서 전(前) 국제연합 주재 북한 대표[25]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 한시해와 석찬(夕餐) 겸 면담을 가지는 등의 일정을 가졌다. 한시해 부부장과의 석찬 겸 면담 자리에서 데일 키츠맨 부총장은 그에게 미국과 북한 간의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김일성종합대학·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선로동당 인사들과 함께하는 미국 방문을 권유했는데, 한시해 부부장은 처음에 시큰둥해 했지만 데일 키츠맨 부총장의 거듭된 권유와 방미를 가능하게 주선하겠다는 약속에 이를 수락했다[26]. 한편, 이 해 조동진 목사는 홍동근 목사와 함께 평양신학원 초빙교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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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끝부터 강영섭 목사, 권호경 총무, 김일성 주석, 박경서 국장, 고기준 목사.

1992년 1월 7-13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권호경 총무와 세계교회협의회 박경서 아시아국장이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의 공동사업 및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제41차 정기총회의 북한 대표단 참석여부를 협의하기 위해 방북했다. 권호경 총무와 박경서 국장은 12일 봉수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여 두 사람 중 권호경 총무가 설교를 맡았으며, 13일 오전 김일성과 조찬 겸 면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1992년 3월 31-4월 5일, 미국 유명 보수 복음주의 성향 침례교 목사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이 방북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북한 개신교 탐방 겸 미국 정부와 북한 정부 간 외교 중재 등의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는데, 4월 2일 김일성과 면담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4월 5일 봉수교회 주일예배에서 설교하고 나서 김일성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보내는 서한을 부탁받아가지고 출국했다.

1992년 5월, 서울 후암동교회 전(前) 담임(1960-1978) 미국 윌리엄케리국제대학교(William Carey International University) 고려연구소 소장 조동진 목사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박관오의 초청을 받아 방북했다. 방북 중 5월 23일 김일성과 오찬 겸 면담을 가졌으며, 같은 날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하여 대회의실에서 개신교 관련 도서 기증식을 가졌고, 이튿날인 5월 24일 봉수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개신교 관련 도서 기증은 이미 1989년 1월 조동진 목사의 첫 방북 때부터 논의되고 있던 주제로, 김일성종합대학에 기증한 개신교 관련 도서 권 수는 2,517권이며, 기증할 도서를 마련하는 데는 한국기독교출판협회 등의 도움을 받았다.

1992년 11월 29일, 칠골교회에서 강영섭 목사 집례로 첫 주일예배가 있었다.

1994년 1월 27일-2월 1일, 미국 유명 보수 복음주의 성향 침례교 목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재차 방북했다. 이번에도 역시 북한 개신교 탐방 겸 미국 정부와 북한 정부 간 외교 중재 등의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는데, 차이점이라면 대통령과 집권당이 빌 클린턴미국 민주당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점이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29일 김일성과 가진 면담과 오찬 시간에 빌 클린턴 대통령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하여 그 답신을 받았으며, 30칠골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1999년 1월 19일-26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대표단 7명(강문규, 서경석, 김명혁, 박청수, 최창화, 박남수, 윤남중)이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위)와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의 초청을 받아 농업자재 지원 등 남북농업협력 방안 논의 목적으로 북한을 방북했다. 방북 대표단 7명 중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강문규 목사,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집행위원장 서경석 목사,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부회장 강변교회 담임 김명혁 목사, 희망친구기아대책 회장 새순교회 원로 윤남중 목사 등 5명이 1월 24일 봉수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1999년 2월, 이름을 '조선기독교도련맹'에서 '조선그리스도교련맹'으로 개칭했다.

2001년 8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평양 민족통일대축전 개최를 앞두고 조선그리스도교련맹에 VCR 300대를 지원했다. VCR 지원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일부에서 한국비디오선교회 제작 성서통신대학 교재용 강의 비디오테이프를 사용한다는 것이 알려진 뒤 그 사용을 더 촉진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27][28].

2001년 8월 15일-21일, 평양 민족통일대축전 참가 겸 북한 개신교 탐방을 위해 개신교 대표단이 남측 참가단의 일원으로 방북했다. 개신교 대표단은 NCCK 총무 김동완 목사를 단장으로 윤병조 목사·성명옥 목사·박순경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박지영 한국기독청년협의회 간사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개신교 대표단은 아니지만 통일연대 참가단 일원으로 당시 향린교회 담임 홍근수 목사와 미주교포 대표단 일원으로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USA) 총회장을 역임한 이승만 목사 등도 방북했다. 방북 개신교 관련 인사들은 8월 16일 봉수교회를 방문하여 리성봉 목사·강영섭 목사 등을 만나 간단히 예배를 드렸으며, 8월 19일 봉수교회를 재차 방문하여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1983년 1월 이를 오랫동안 맡았던 강량욱 목사의 사망 뒤 3년여 간 공석이었다가 조선적십자회, 조선사회민주당, 평양시인민위원회에서 간부로 일하던 김성률 목사가 1986년 9월에서 89년 1월까지 맡았다. 1989년 1월 김성률 목사가 퇴임[29]하고 강량욱 목사의 아들인 강영섭 목사가 2012년 1월 사망할 때까지 위원장을 맡았다. 그가 사망한 뒤 이듬해 2013년부터 강영섭 전 위원장 아들이면서 평양시그리스도교련맹 위원장을 역임한 강명철 목사가 중앙위원장을 맡고 있다.

3. 대외 현황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현재 북한에는 개신교 신자 1만 2천 명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1만 2천 명이 있는지는 증명되지 않았다 통일전선부에서 12만이라고 하면 12만이고 120명이라고 하면 120명이다. 다만 칠골교회봉수교회에 출석하는 신도들의 수를 바탕으로 추산해보면 500명 미만이다.[30] 북한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는다 해도 나머지 1만 1500여 명 신자는 북한 당국이 금지한 이후로 40여 년간 유지했다는 가정예배처소 교인이라는 뜻이 되는데, '가정예배처소'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긴 하는지 의심스럽다. 현재 2020년 통일부 산하 통일연구원 인권백서에서는 현재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 3만여 명 중 가정예배처소 교인은커녕 실제로 본 적이 있다는 증인조차 확보하지 못했음을 근거로 존재를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현(現) 중앙위원회 위원장 강명철 목사는 2014년 4월 23일 친북성향 재미교포 최재영 목사와 가진 면담에서 지하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존재를 부정한 바 있다. 반미 친북 주의자이며 재미교포 최재영 목사 본인도 북한에는 비공인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인사 중 한 명이다. 왜냐하면 조그련과 북한당국에서는 지하교회를 공식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1년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오경우 서기장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북-중 접경지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목사들에 대해 항의한 사실이 있음을 고려하면, 조선그리스도교련맹도 비공인 개신교 신자 및 그 모임의 존재를 인지함이 분명하다. 오경우 서기장이 NCCK에 제기한 항의는 중국에서 활동주인 한국인 목사를 안기부 요원으로 북한체제 전복을 도모한다는 북한당국의 입장에서 나온 것으로. 이들 목사가 안기부 지원을 받은 반공극우출신 근본주의자들이라는 말은 종북주의자와 북한당국의 주장일 뿐이다. 개신교 대북 선교단체 중 갈렙선교회는 아예 북한에 정보원을 두었는지, 북한 각지를 몰래 촬영한 영상물을 자신들의 유튜브 계정에 꾸준히 게시하고 있다.

3.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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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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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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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처소 예배 모습[31]

2005년 제일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장통합측에서 역시 100% 금전 지원으로 설립되었지만(황산성 변호사가 1억, 예장 통합 4개 노회에서 1억 5천만원씩 등 9억원) 교회 공사비만 타먹고 재촉 끝에 부지를 공개하더니 200평 1층에 한구석에 십자가도 없는 기도 처소라고 우기다가 사진 촬영은 거부했고 현재 건물 부지 400평은 1층은 온실 2층 에는 종자 보관소와 연구소로 운용이 되는걸로 확인되었다.[32] 이는 기존의 예장 통합측 이북 노회에서 조선그리스도연맹이 가짜라는 비판에도 평양신학원 제일교회 설립을 위해 욕먹어 가며 지원하던 예장통합 남북한선교통일협력위원회 박광식 장로도 인정한 사실이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중앙조직은 공식적으로 총회,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로 되어있다고 표방한다. . 총회는 연맹의 최고의결기구이며 4년에 한 번 개최한다.[33] 총회는 중앙위원회 사업 보고를 받아 그 내용을 평가하며, 사업방향·수정안건·규약채택 등을 논의하고, 중앙위원회 위원을 선출한다. 중앙위원회는 연맹의 사업총괄기구로써 1년에 2번 정기회의를 개최힌다. 중앙위원회는 직할시·도그리스도교련맹들과 교회·가정예배 처소들을 관리·감독하고 산하 4개 부서(조직부, 경리부, 선전부, 국제부)를 관리·감독하며 총회를 포함하여 연맹의 각종 선거를 관리한다. 중앙위원회에서도 사업 진행 책임자는 그 구성원인 서기장이다. 상무위원회는 한국의 정당·노동조합·학생회·시민단체 등에서 가지는 집행부 회의와 같은 성격의 기구라고 할 수 있다. 상무위원회 위원은 중앙위원회 위원장·부위원장·서기장과 중앙위원회 산하 4개 부서(조직부, 선전부, 국제부, 경리부)의 장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한 달에 한 차례 상무위원회 회의를 열어 구체적 사업 진행 상황을 논의한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청사는 1987년 건축된 3층짜리 건물로 봉수교회 정문 오른편에 있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는 창립부터 한국 전쟁까지 독립된 청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종전(終戰)부터 1987년까지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청사에 입주해 있었으며, 1987년에서야 현재의 3층짜리 건물로 독립된 청사를 가지게 된다. 청사 1층은 중앙위원회 산하 4개 부서인 조직부·선전부·경리부·국제부의 사무실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2층은 지도부인 위원장·부위원장·서기장 집무실들이 자리잡고 있고, 3층은 회의실과 강당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 3층은 1987년부터 1999년까지 평양신학원이 입주해 있었지만, 2003년 평양신학원이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지원으로 건축된 독립된 건물로 이사가면서 현재 회의실과 강당으로 사용된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지역조직은 직할시·그리스도교련맹과 그 산하 가정예배처소로 이루어져 있다. 평양시 포함 대부분의 광역행정구역에 지역그리스도교련맹이 조직되어 있으며, 각 직할시·도그리스도교련맹도 4년에 한 번 총회를 개최한다. 가정예배처소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핵심이자 말단조직을 이룬다. 그러나 자강도·량강도·라선시에는 지역그리스도교련맹이 조직되어 있지 않다. 현 강명철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피선되기 전 평양시그리스도교련맹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공식 발표에 의하면 현재 북한에는 2곳의 교회와 500여 곳의 가정예배 처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2005년에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의 전액 지원으로 건립된 제일 교회는 먹튀가 된걸로 밝혀졌고,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두 곳의 교회를 제외하면 500여 곳의 가정예배 처소에 대해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는 상태다. 조선로동당 간부 출신 신평길의 증언과 여러 외부 인사들의 방북 증언으로는 가정예배 처소가 있다고 주장하나 북한인권정보센터에서 하나원 출신 탈북자를 21년간 전수조사 하였지만 가정예배 처소 예배 참여 경험자는 커녕 실제로 보았다는 사람이 현재에도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통일연구원 인권백서에서도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간혹 재미교포 등의 종교인 방북시에 가정예배 처소로 나오는 집은 평소 관리 대상으로 행사시에 급조되는 것으로 보는데, 조총련을 제외한 80년대부터 서방세계 재외교포 친척 방문시 최소 1만 달러를 입금해야 신청이 가능한 것으로 미루어 선교 헌금 등을 지급하고 가정예배 처소 행사를 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일단 봉수교회나 칠골교회에 한국계 재외교포 목사들이 설교를 하려면 최소 4~5만 달러의 행사비를 내야 강단에 서준다는 주장에 대해서 최재영 목사 등은 부정하거나 반박하지 못하고 있으며, 캐나다 교포 출신으로 NGO 단체 지원 5천만 달러를 북한에 지원했음에도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가 3년만에 석방된 임현수 목사 또한 북한 교회의 허구성을 이점을 들어 지적했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1946년 11월 28일 창립일을 기념하여 매년 11월 28일에 창립 기념식을 가진다.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북한 최악의 시기에도 창립 기념식을 지내지 않은 해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실상은 코로나 이전 최근에도 외국인들이 부활절 크리스마스에도 불시에 찾아갔을때도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고 한다.

봉수교회·칠골교회는 예배가 끝나면 신자들이 바로 귀가하지만, 가정예배 처소는 예배가 끝나도 신자들이 바로 돌아가지 않고 식사와 친교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에도 불시에 방문시 전기가 끊기고 문이 굳게 닫혀있는걸 감안하면 가정예배처소 존재 자체가 근거없는 주장일 가능성이 높다.

3.2. 평양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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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신학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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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신학원 강의실

평양신학원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소속 신학교이다. 북한 개신교 유일의 성직자 양성 기관으로 1950년 7월 폐교된 조선기독교도련맹 소속 평양신학교를 계승하여 1972년 9월에 개원했다. 평양신학원은 1971년 5월 조선기독교도련맹 중앙위원회 회의의 결정에 의거하여 개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개원 후 1999년까지 운영하다가 2000년까지 1년여 동안 운영이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러다 2000년부터 운영을 재개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평양신학원 위치는 처음에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청사에 있었고 다음에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청사 3층에 있었다가 2003년에 한국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지원을 받아 건축한 건물로 입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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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평양신학원 강의실 모습. 사진 맨 좌측 인물은 당시 조그련 서기장 고기준 목사.

평양신학원은 1972년 9월 개원 당시 학제로 3학년 6학기제를 채택했다가 2000년 9월부터는 5학년 10학기제를 채택했다.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신학교와 달리 학사·석사 과정이 통합된 신학교육기관이다. 개원 시 초대 원장은 강량욱 목사였으며 교수로는 고학진, 김득룡[34], 임현달, 이영태 목사 등 전쟁 전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신학교 출신 목사들이 맡았다. 평양신학원 원장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위원장이 당연직으로 겸직하기에 현재 원장은 강명철 목사이며 교수로는 오경우, 정경숙 목사 등이 있다. 신학교재는 처음에 한국 전쟁 전 출판된 신학도서를 사용하다가 지금은 한국과 해외에서 지원받은 신학도서와 북한 목사들이 쓴 신학 도서를 사용한다. 특히 한국 공동번역성서를 북한 문화어에 맞춰 교정[35]장로교 출신의 이영태 목사는 《조선교회사》, 《세계교회사》, 《조직신학》, 《조선기독교도련맹 약사》 등 여러 신학 서적도 저술했다고 한다. 평양신학원은 개원 시부터 지금까지 매해 신입생을 선발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 기수가 졸업하면 다음 기수를 선발하는 방식으로 신학생 선발을 한다. 재학생 숫자는 1기부터 현재 14기까지 9~12명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입학은 입학 희망 교인이 소속된 교회나 가정예배 처소의 추천을 받고 직할시·도그리스도교련맹의 허락을 받아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입학 자격 중 학력은 고등중학교 졸업이면 되지만 거의 모든 재학생은 대졸 이상 학력을 갖고 있다. 또한 거의 모든 재학생은 중·장년 연령대의 사람이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며 평양신학원은 여성 입학을 허용한다. 신학생 중에 여성도 있다.

평양신학원에서는 구약성서, 신약성서, 조직신학, 실천신학, 조선교회사, 세계교회사, 찬송가학 등의 과목을 가르친다. 종교 외의 인문·사회학 과목들도 개설하여 가르치는데 평양신학원 교수들이 아닌 북한 내 다른 대학교 교수들을 초빙하여 가르치게 한다.

1990년에서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재미교포 홍동근 목사[36]가 매년 북한을 방문하여 평양신학원과 김일성종합대학 종교학과에서 성서강해·조직신학·기독교개론 등 개신교 관련 강의를 했다. 홍동근 목사는 2001년 11월 11일 강의를 위한 북한 방문 중 지병인 고혈압으로 사망하여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2003년에서 2008년까지 기독교대한감리회 지원을 받아 운영되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측 목사들이 정기적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계절학기 강의도 했다. 하지만 기독교대한감리회의 평양신학원 운영 지원은 이명박 정부 기간에 중단되었다. 현재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자체 능력으로만 운영되고 있다.

평양신학원의 시설은 교무실·교수실·강의실·휴게실·교육관·도서관 등 소규모 신학원으로서 큰 부족함 없이 갖추어져 있다. 강의실 정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가 걸려 있으며 옆면에는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성구(聖句)가 써진 액자가 걸려있다. 평양신학원 교육관은 봉수교회 재건축 시 봉수교회 임시예배당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봉수교회 성가대 연습장소로 사용된다. 평양신학원 도서관은 수천 권의 도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이중에는 한국과 해외교포 기독교계에서 지원한 도서가 적지 않다. 향린교회 전(前) 담임목사 홍근수 목사의 형 재미교포 홍동근 목사 역시 자신이 시무하던 선한사마리아인교회를 통해 수백 권의 도서를 기증했으며, 홍동근 목사 사후 평양신학원은 홍 목사의 생전 기증 도서 및 그의 미망인 홍정자 여사가 추가로 기증한 도서를 정리하여 도서관 한 구석에 '홍동근 목사 기념서가'를 조성했다. 한국과 해외교포들의 기증 도서 외에 북한 목사들이 쓴 신학도서 역시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다고 한다.[37]

3.3. 성서와 찬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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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학도서관[38]에 전시된 북한에서 발행된 성서와 찬송가[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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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북한에서 발행된 구약전서[40]

한국 전쟁 후 북한에서는 오랫동안 성서찬송가가 인쇄·발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가정예배 처소 교인들은 한국 전쟁 전에 발행된 성서와 찬송가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에서 1983년 신약전서를 발행하고, 1984년 구약전서를 발행했으며, 1990년 신구약 합본 성경전서를 발행했다. 그리고 2008년 성경전서를 추가로 발행했다. 찬송가도 1983·1990·2008년 발행했는데, 1935년 일제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에서 발행한 신편 찬송가의 1939년 개정판을 바탕으로, 1983년 악보 없이 가사만 수록한 수형본(手形本) 찬송가를 발행했다가, 1990년 악보를 수록한 찬송가를 다시 발행했으며, 2008년 역시 악보를 수록한 찬송가를 추가로 발행했다. 원래 1935년 발행 신편 찬송가는 한국인이 작곡한 곳이 하나도 없었지만, 1990년 발행 찬송가는 325장 김활란 작사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에 한국인 작곡가 이동훈의 곡조를 넣어 한국인 창작곡이 하나 있게 되었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에서 편집·발행한 성서와 찬송가는 봉수교회·칠골교회 및 가정예배 처소뿐 아니라 북한 유일 가톨릭 성당 장충성당과 북한 유일 정교회 성당 정백사원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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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북한에서 발행된 성경전서와 찬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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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북한에서 발행된 성경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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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북한에서 발행된 성경전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공식 주장에 의하면 한국 전쟁현재까지 발행된 성서의 부수는 35,000부지만 정말 그 정도 발행되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방법은 없다.[41]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발행 성서는 성서 원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1977년 발행된 한국의 공동번역성서를 북한 문화어에 맞춰 교정한 것이다. 하지만 공동번역성서를 100% 그대로 따르지 않고 일부 어휘에 있어서 개역성경의 어휘를 따랐다. 공동번역성서 평양교정본 편집자는 평양신학원 교수였던 이영태 목사이다. 이영태 목사는 일제강점기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이눌서의 조수로 일하면서 이미 1930년대부터 개신교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함께 했으며, 광복 후에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소속 평양신학원 교수로 일했다. 그는 평양신학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성서 편집 외에도 《조선교회사》, 《세계교회사》, 《조직신학》, 《조선기독교도련맹 약사》 등 여러 신학 서적을 저술하는 등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내에서 학문적으로 가장 뛰어난 목사였다고 한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발행 찬송가 중 1990년 발행 찬송가의 악보는 (1991년 오소운 목사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분석에 의하면) 1983년 남한 한국찬송가공회 발행 통일찬송가 악보를 그대로 베꼈. 오소운 목사는 북한 찬송가를 분석한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1990년 발행 찬송가를 편집한 사람은 신앙인도 전문 음악가도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훗날 오소운 목사 본인이 1990년 발행 찬송가가 네덜란드 국적 교포 이교열(李教悦) 목사에 의해 편집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

조선그리스도교련맹에서 발행한 성서 외에 일부 한국 선교단체들이 번역·인쇄한 북한어 성경이 탈북자들을 통해 북한에 몰래 배포되고 있다. 한국의 대북 선교단체 중 "순교자의 소리"는 따로 북한어 성경을 번역하지 않고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발행 《성경전서》 본문을 그대로 베껴서 인쇄한 성경을 몰래 배포한다.


평양시 낙랑구역 충성동 가정예배 처소의 예배 모습. 2010년 방북한 재미동포가 촬영한 영상이라고 한다.

2012년 9월 30일 봉수교회 주일예배 영상. 손효순 목사 집례. 그는 2013년 4월 사했다.

2013년 7월 칠골교회 재건축 현장 영상. 영상에 나오는 북측 안내인은 백봉일 목사.

2014년 9월 14일 칠골교회 주일예배 영상 백봉일 목사 집례

3.4. 참고 문헌

4. 실상

북한에도 봉수교회나 칠골교회 등이 있지만, 북에서 교회는 일종의 문화선전을 담당하고 복지 물자를 조달하는 기관일 뿐이다.
미국 아이오와주 심슨대(Simpson College) 종교철학부 신은희 교수; 2003년부터 4년 동안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에서 세계종교문화를 강의
1948년에 북한 정권이 수립된 이후부터 북한 당국은 지속적으로 종교 활동을 탄압해 왔다. 특히 김일성이 유일지배체제를 확립하고, 우상화와 수령체제를 강화해 가면서 종교인들과 그 가족들을 반혁명 분자로 낙인찍어 강력하게 탄압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도 배제되어야 할 대상으로써 지속적으로 교육 및 고용 차별을 받으며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가 북한 당국은 1970년대 이후 종교를 중요한 정치적 수단으로 인식하고 활용해 왔다. 이에 따라 각 종교별로 당의 통제를 받는 중앙조직을 정비하고 한국과는 물론 국제적인 교류를 활성화하였다. 1990년대 초까지 북한의 종교단체들은 대남 통일전선전략 차원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나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북한의 극심한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국 및 국외 종교기관들로부터 대북 지원을 획득하는 데 중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북한 종교기관의 대외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종교 자유 수준은 최악으로 평가받고 있다. 북한은 종교의 확산을 체제 위협으로 인식하여 철저히 통제하고 있으며, 최소한의 종교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북한인권정보센터 2020년 북한 종교의 자유 백서
북한은 사실상 모든 종교 관련 행위를 체제 전복 행위로 간주한다. 북한 주민들이 종교를 가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2020년 조사에서 대부분의 북한이탈주민들은 북한에서 종교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다고 증언하였다. 북한 당국은 주민들이 종교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한다
특히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심한 편인데, 성경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정치범에 해당되어 수용소에 보내지거나 처형당하기도 한다.
북한 당국은 교회, 성당, 사찰을 해외 종교인 및 관광객 등 방문객을 대상으로 한 정치적 목적의 대외선전용 시설로 활용해 왔다. 새로이 신축된 종교시설에 대한 인근 주민들의 출입이나 접근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고, 인근 주민들은 종교 시설을‘외국인 참관지’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1988년 9월에 세워진 평양 봉수교회의 경우, 평상시에는 관리원 가족만 거주하고 있으나, 외국인 참관 시에는 만경대구역 내 동사무소 근무자 등 노동당에서 엄선한 40~50대의 남녀 수백 명이 위장예배를 보고 있다고 한다. 북한을 방문한 외국 기독교인들이 부활절 일요일에 사전 협의 없이 교회를 방문했다가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많은 외국 방문객들은 교회 활동이 연출된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의 경우, 헌법에 법적 권리로 명시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주민이 종교란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는 등 종교의 자유는 심각하게 제한되고 있다. 종교의 자유에 관한 한 북한 당국은 지속적 통제정책을 고수하고 있고, 특히 기독교와 같이 특정 종교에 대해서는 강력한 처벌과 엄격한 통제를 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1년 통일연구원 북한인권백서
증언자들은 해당 학과(김일성종합대 력사학부 종교학과)에 진학할 기회는 매우 충성스러운 주민들에게만 한정되어 있고, 이러한 학문을 전공한 사람들 중에서 이후 당국이 인가한 교회의 성직자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조사위원회는 증언자들로부터 당국이 인가한 교회들이 외화를 벌어들이는 수단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들었는데, 이는 그런 교회 종사자들이 외국인들과 접촉하여 해외로부터 기금을 조성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한 보고서에서 과거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녔던 한 학생은 “[그 대학] 과정 졸업생들은 종교연맹, 해외 무역 부문에서 일하거나 비밀 종교 활동을 밝혀내는 국경 수비대원으로 일한다”고 밝혔다. 동 보고서[42]는 국가가 인가한 교회들은 외부 방문객들을 위한 전시품이라고 주장한다. 증언자들은 또한 조사위원회에 국가의 허가를 받고 설립된 교회들이 기독교 관례를 자유롭게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라고 언급하였다.
2014 유엔인권이사회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
국가보위성이 제작한 황해북도 사리원시 지하교회 신도 적발 영상.

이상을 종합할 때 북한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으며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그 산하 어용교회들 역시 전체적으로 가짜라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 하지만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북한 기독교인과 지하교회 신도들에 대해서 북한 당국의 입장대로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본문에 자세히 기재된 북한교회의 현황이나 연혁은 통일전선부 작가들 몇 명이 창작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쓴 수준으로 그다지 신뢰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다만 신도들 일부가 진정한 교인인지 여부는 국내외 기독교인 지원단체와 전문가들의 설이 갈린다.

4.1. 유보적 견해

국내외 진보단체와 한국 교회 일부에선, 일단은 이들이 실제로 완전히 개신교 신앙을 갖고 있는 이들로 조직된 단체로 보지는 않으나 어용조직이더라도 지원하는 게 나쁘지 않다는 시각이다. 예장 통합 측과 기장 측이 대표적이다. 특히 봉수교회 칠골교회 건축과 리모델링은 예장 통합측이 전액 재정지원을 한걸로 알려졌는데 2005년의 제일 교회 건축비는 교회를 안짓고 그대로 100만달러를 떼먹은걸로 드러났다.

조그련이 일말의 기독교인이 존재한다고 믿는 측에선 국가무신론이 국시이지만 제한적인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중국을 근거로 중국도 마찬가지 이유로 세운 개신교 어용 종교단체인 삼자애국운동(三自爱国运动), 1980년 설립한 중국기독교협회(中國基督敎協會), 가톨릭 계열 중국천주교애국회(中国天主教爱国会)의 활동을 예를 드는데, 후자는 명목상으로는 바티칸에 있는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중국공산당에 충성하는 친정부 성향의 가톨릭 신자들로만 구성되어있고 주교 서임권을 중국 정부가 행사한다. 이 단체 소속이 아닌 가톨릭 평신도와 신부, 주교들은 지하교회 취급을 받아서 상상을 초월하는 박해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점은 중국 공산당이 대외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세운 어용단체의 한계를 보여준다. 때문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임명했던 이냐시오 궁핀메이 추기경이 애국교회에 참여하라는 중국공산당의 요구를 거부하자, 2000년에 중국 정부에 의해 관할 교구인 상하이에서 쫓겨나서 미국으로 추방되기도 했다.

4.2. 부정적 견해

1970년대 종교 유화정책으로 해외 종교단체들을 초청해 가짜티가 너무 나자, 통일전선부와 외무성에서 로동당원들을 선발하여 바티칸을 비롯한 유럽에 종교 유학을 보내기 시작했다. 또한 김일성대 력사학부에 종교학과를 설치해 1년에 20여명씩 기독교, 천주교, 천도교, 불교 등에 파견하고 다른 일부는 국가보위성, 사회안전성으로 배치하여 거꾸로 지하교인을 색출하는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다.

간혹 재미교포나 한국의 진보 진영 종교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북한에 공인 기독교 단체가 진정한 기독교인이나 그러한 조직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는 이들이 오기 전에 마치 군대에서 사단장, 군단장이 전방 소초나 중대 방문시에 빡쎄게 예행연습하듯이 방문을 앞두고 철저한 사전 준비와 시나리오로 구성된 보여주기식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북한에서 외국인 방문 시에는 한달 이상 예행연습을 한다. 이 때 철저한 역할 분배와 대본 암기는 물론이고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도 숙지해야 한다. 실제로 북한이 보여주고 싶은 곳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일정도 변경할 수 없다. 따라서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 "영화나 드라마의 배우의 연기가 현실인 줄 착각하는" 정도로 순진한 것이며, 북한 사회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가짜교인만으론 교회 예배를 못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에서 신도들은 대부분 통일전선부 소속 로동당원들의 배우자들로 채우기 때문에 이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애초에 이러한 조직은 대북제재로 국제사회의 지원이 막힌 가운데 종교 단체를 통한 달러벌이 사업이나 해외 친북단체 관리와 NGO 지원을 위한 우회 창구의 일환이다.

관제목사들은 김일성대학 력사학부에서 속성으로 배출한다. 북한에 교회는 달랑 3개, 그것도 대외에 공개하는 것은 2개이기 때문에 몇 명을 선발해 목사 비슷하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물론 그들은 김씨 일가와 밀접한 관계인 핵심계층 중에서 선발된다. 일부 신도들은 개신교와 연관이 있는것은 맞다고 할 수 있는데, 당장, 조그련의 초대 위원장인 강량욱 목사부터가 김일성의 외가 친척으로, 북한 기준으로는 그야말로 성골 of 성골이다. 다만 강량욱 집안의 친척 강명도는 강량욱의 아들 손자들 조차 목사 장로 집안은 과거 일뿐 단 한번도 교회는 커녕 기독교에 들어본적이 없었고 원래 다른 직업이 있다가 가업을 물려 받은것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실제로, 현재 정상적으로 겉보기라도 교회로서 기능을 하는 곳은 평양시에 있는 봉수교회칠골교회 뿐이고, 그 이외의 지방에는 보여주기식 종교의 자유도 없다.

북한에 봉수교회 등이 북한의 공식 숫자대로 500명의 신도라고 인정해도 이는 광복 이전 신도 수에 비하면 기독교 공동체가 처참하게 파괴됨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셈이다. 대외홍보용으로 보여주는 영상에서도 500명은 커녕 반도 못 채우며 대부분이 50대 이상 여성들로 북한 체제에 빈번한 로력 동원, 김부자 옹호용 관제데모, 생활총화등의 일정이 매일같이 있기 때문에 북한 당국과 조그련의 설명을 그대로 믿더라도 북한에서 과연 합법적으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지가 의문투성이이다. "나 교회가니 로력동원 빠지겠다, 김부자 충성용 관제데모 빠지겠다, 생활총화 이번 주부터 안하겠다" 라고 말하거나 허용이 되겠냐는 것이다.

북한 고위층은 특권을 이용해 생활총화 같은 주민통제에 빠지지 않겠냐는 의문이 있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적대계층이 사는 격오지나 농촌 산간 지역의 통제가 더 느슨하고 고위직일수록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로동당원은 아예 강제적인 의무로 전염병이라도 걸리지 않은 이상 기어서라도 나와야 하고, 다른 사유가 없이 불참했다간 당성이 부족하다는 등의 비판을 받으며 사상투쟁 대상이 되어, 출신 성분이 아무리 좋더라도 가족 전체가 탄광·광산·농장·축사 등지로 끌려가 짧게는 6개월에서 3년 정도까지 혁명화를 거쳐야 하는 게 보통이다.[43] 따라서 북한 체제에서 통제 대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경제활동과 사상활동 모두) 50대 이상 장년층의 여자들만 신도로 구성되는 것이다.[44]

진정한 종교인 없이 종교단체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주장 또한 근거가 없다. 이미 북한은 1958년~1960년 주민료해사업으로 목사나 기독교 신자들을 살해하거나 수용소로 보내고, 그 연좌되는 친척은 149호 명령에 따라 국경과 휴전선 해안지역과 이격된 내륙 탄광 광산 내지 산간 오지로 추방해서 기독교 커뮤니티 자체가 와해되었다.

4.3. 중국과의 비교

북한의 현실과 개혁과 개방이 허용된 중국의 어용교회의 비교는 적절치 않다. 중국에선 명목상의 종교의 자유와 별도로 제한된 수준이나마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영국 정부 2019년 11월, 미국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통계와 China Family Panel Studies(CFPS)의 국내 조사에서조차도 어용교회 신도를 서너배 뛰어넘는 숫자의 사람들이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응답한 자료가 있다. 하지만 북한의 교회는 1950년대 초반에 이미 박멸되었고, 구색정당조선사회민주당이나 천도교청우당, 어용단체인 조선그리스도교연맹마저도 없애려다가 김일성의 바지사장 최용건과 김일성의 친척인 강량욱을 내세워 이름만 남겨놓은 것이기 때문에 전혀 맞지 않는 변명일 뿐이다.

북한에 공식적인 교회가 건축된 것은 1989년 13차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앞두고, 외신과 해외 방문객들에게 선전용으로 봉수교회와 장충성당[45](천주교)등을 급조한 것이고, 그 이전에는 북한의 주장대로라도 단 하나의 교회도 없었다.

두번째 교회 칠골교회는 한국 개신교 단체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아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이 다니던 하리교회터에 세웠고, 2005년 제일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장통합측에서 역시 100% 금전 지원으로 설립되었지만 교회 공사비만 타먹고 현재 건물 부지 에는 다른 용도로 운용이 되는걸로 확인되었다.

결정적으로 중국의 개신교 단체도 심각하게 탄압받긴 하지만, 최소한 중국은 전부 처형하거나 3대까지 연좌해서 정치범 수용소로 잡아가지 않는다.

4.4. 소련과의 비교

소련의 경우, 러시아 혁명 이전부터 존속해오던 러시아 정교회 조직이 이오시프 스탈린 시절부터 부활해서 소련 공산당의 어용 종교 단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는데, 이를 두고 구미권의 자본주의 국가와 소련을 탈출한 정교회 신자들 사이에서는 당국에서 껍데기만 그럴싸하게 흉내낸 가짜 단체라고 말이 많았다. 그래서 소련에 반대하는 재외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이 독립하여 '참 러시아 정교회'(True Russian Orthodox Church)라는 독립 교구를 세우고 자체적으로 모스크바 총대주교를 선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냉전 이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정교회는 친정부 성향을 띄긴 했을지언정 엄연히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유지되던 그 정교회 조직이 맞았다고 밝혀진 바 있다.

그러나 조그련은 기독교 커뮤니티를 박멸하고 재건한 조직이라서 기존의 신자들과 연속성이 없다. 초대 회장 강량욱은 김일성의 종조부에 초등학교 스승이고 그의 후손들이 3대 세습으로 조그련을 가업으로 이어나가고 있을 뿐이다. 목사 또한 몇주 몇달 동안의 속성 과정으로 운영되는것이라고 밝혀졌다. 기독교 신도는 커녕 성경소지나 연변에서 한국인 목사나 기독교 단체에게 공짜 밥 한번 얻어먹은 것조차 체제에 반대하는걸로 간주하여 처형 내지 정치범수용소로 보내는 판에 북한에서 목사를 자체 양성한다는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지는 국내 진보 단체들조차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는 1천여년 동안 러시아의 국교로 러시아 문화의 정체성과 러시아 민중들에게 뿌리 깊은 기반이 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고, 북한의 개신교는 구한말에 전래돼 대략 40만 명의 교인으로 구성된 개별 교회임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레닌이나 스탈린 흐루시초프가 국가무신론에 기반하여 정교회를 절멸하려고 했던 것은 마찬가지이고, 일제 패망 후 소련군 진주 기간인 1945년부터 1946년의 종교인 탄압과 종교 자산 몰수 등 일련의 조치는 소련의 종교정책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가 살아남은 것은 2차대전으로 인한 탄압 중지와 1970년대 이후 러시아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한 정책 때문이지, 어용교회 조직으로 존속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4.5. 관련 의견

4.5.1. 종북주의자 최재영 목사

재미교포이자 종북주의자인 최재영 목사[48]는 자신의 책과 기고문 등에서 북한 정부 및 조그련 측 주장을 대부분 그대로 반복하면서, 이북 지역 예배당들이 전부 한국전쟁 기간 폭격 등 포화를 입어 파괴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일성 관련 기념물로 남아있는 포평읍교회·은율읍교회나 원산문화회관으로 용도변경된 원산 광석동교회 등의 예를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님이 분명하다. 북한교회연구원 유관지 원장도 수집한 탈북자들의 증언을 근거로 함주군, 청진시 등에 용도 변경된 예배당이 있다고 주장했다.[49]

그러나 최재영 목사는 '조그련 칠판에 어디어디에 가정 처소가 있다고 적혀있는데 실제 가보니 진짜 있더라' 수준의 소리만 하면서 이미 탈북자들과 북한 전문가들이 부정한 독자 주장만 고집하는 인사이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 동상에 절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와 충돌하지 않는다."면서 목사는 커녕 최씨가 과연 기독교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게 맞나 싶을 정도로 북한을 옹호하고, 북한 교회 신도가 왜 적느냐는 지적에는 '북한의 교회는 가정이 중심(?)'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면서 북한의 인권이나 종교 탄압 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이니 이해해주자는 식의 답변만 반복하고 있다.

설령 최재영의 말을 그대로 인정하더라도, 해방 이전에 40만 명이던 교인은 북한 공식 집계 1만 2천명으로 줄어들었으며, 교회는 한국에서 돈을 거의 다 지원해줘서 지은 3개, 그것도 평양에만 존재한다. 나머지 북한의 개신교 신자들은 북한의 국가무신론 정책에 신앙을 버렸다. 실제론 1950년대에 전부 처형당하거나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 그리고 북한의 교회를 비롯한 종교 시설과 자산은 1945년 말부터 박해가 시작되어 1946년까지 전부 몰수당하고, 한국전쟁 이전까지 처형과 탄압으로 거의 해체 상태였다.

5. 참고자료

6. 관련 인물

7. 관련 문서



[1] 천도교, 불교, 정교회, 천주교 같은 다른 종교단체도 마찬가지.[2] 다른 종교협회도 마찬가지이다. 2014년 UN 인권이사회 보고서에도 선택된 소수 특권 집단만이 종교 교육의 기회를 받는다고 조사했다. 대략 20~25명의 종교학과 졸업생들이 개신교, 불교, 천주교, 천도교 등으로 배치된다. 주성하 기자에 따르면 1989년 13회 세계 청년 학생축전 북한에 종교 교육 자체가 끊긴지 오래라, 교회나 교리에 대한 지식은 김일성대 력사학부 교수들 정도만 빼면 아예 '그리스도교'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3] 깡패 출신으로 목사가 되어 회개한 걸로도 유명하다. 목사가 되어 자신이 패던 상인들 앞에 나타난 후론 맞으면서도 보복 한번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반도의 초창기 시기 개신교계의 큰 별 중 한명이기도 하다. 그 유명세 때문에 강제적으로 총회장에 추대되어 견제를 받은 것이라는 증언도 있다. 사족으론, 삼남이 대한민국 축구계의 초기 기틀을 다진 김용식이다.[4] 이미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이 있던 상황에서 총회장직은 명예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5] 감리교.[6] 이미 중앙위원회 위원장직 있던 상황에서 총회장직은 이 연맹 내 일종의 명예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오래지 않아 6.25 전쟁 시기 김익두 목사가 살해당함으로써 사라지게 된다.[7] 일례로 김응순 목사는 구한 말 최초로 창립된 개신교회인 황해도 소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조선예수교장로회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8] 강량욱 목사는 북한 정부와 김일성 수상에 전적으로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라는 점이 빌미가 되어 한 때 김일성 반대파에게 공격받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김일성에 반대한 세력 일명 종파주의자들은 내내 비주류였으며 김일성 절대 권력과 개인 우상화에 토를 달다가 숙청당했지 김일성의 권력이 제한된 적은 없다.[9] 한국 전쟁이 끝나고 조선로동당과 그 유관단체의 출판사들은 1959년에만 반(反)종교 소책자를 여섯 권이나 출판하며 종교반대하는 선전에 집중했다. 정하철이 쓴《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여야 하는가》(조선로동당 출판사, 1959년), 로재선이 쓴 《미제는 남조선에서 종교를 침략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조선로동당 출판사, 1959년), 김희일이 쓴 《인민의 아편》(조선민주청년동맹 출판사, 1959년), 노재선이 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조선민주청년동맹 출판사, 1959년), 백원규가 쓴 《종교도덕의 반동성》(조선민주청년동맹 출판사, 1959년), 작자 미상의 《생활과 미신》(조선여성사, 1959년) 이 6권이 바로 1959년 한 해에 출판된 반(反)종교 대중교육용 소책자이다.[10] 감리교 이영빈 목사는 1956-1960년 독일에서 아버지와 서신 교환을 한 것 외에 1981년 방북하여 원산 가정예배 처소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가정예배 처소 책임자였던 리성봉 장로(책임자)는 뒤에 2대 봉수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11] 제3차 글리옹 회의 후 일본 도쿄에서 삼자 간 회의가 열리기도 했지만, 이는 글리옹 회의라 명명되진 않는다.[12] 1921-1994, 당시 조선기독교도련맹 서기장.[13] 1910-1993, 당시 조선기독교도련맹 부위원장.[14] 당시에는 전도사였으나 후에 목사로 안수받는다. 1988년 11월 6일 봉수교회 입당 예배 때 설교를 맡았다.[15] 1988년 11월 23일~25일.[16] 물론 이승만 목사(1931년 3월 25일-2015년 1월 14일)는 이승만 대통령과 동명이인이다. 그는 1991년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of Christ) 회장이 되었고, 2000년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USA)의 총회장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 이태석 목사는 1950년 북한 당국에 체포되었다가, 동년 10월 UN군대한민국 국군의 평양 진격 후 그를 찾아다니던 아내에 의해 인근 방공호에서 총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17]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신자.[18] 전(前)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담임목사(1937-1958), 전(前) 숭실대학교 총장(1958-1964).[19] 향린교회 전(前) 담임목사 홍근수 목사의 형.[20] 그러나 당시 방북에서 홍동근 목사는 중앙위원회 청사를 방문했을 뿐 가정예배처소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청사 방문 전 오전 일찍 찾아온 사회과학원 교수 진철국(陣鐵國)이라는 사람에게 1:1로 주체사상 강의과외를 듣기도(...) 했다.[21] 재미교포 목사 중 홍동근 목사뿐 아니라 조동진 목사도 같은 시기 평양신학원 초빙교수가 되어 조그련 신학생들에게 강의했다.[22] 물론 가톨릭교회는 캐나다에서도 캐나다교회협의회 가맹 교단이 아니지만, 특별히 테리 갤러거 신부가 캐나다교회협의회 방북단에 참가했다.[23]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초청을 받게 된 계기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역임한 박관오를 알게 되어서이다.[24] 좌파 성향 민주화운동 단체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전신.[25] 당시 북한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국제연합 미가입 상태였고, 단지 참관국으로 국제연합에 대표부를 두고 있을 뿐이었다.[26] 실제 데일 키츠맨 부총장을 비롯한 윌리엄케리국제대학교 총장단은 귀국 후 북한 정·학·종교계의 동시 방미 성사를 위한 주선에 힘썼다고 한다. 1991년 5월, 한시해 부부장을 비롯한 조선로동당 간부들·김일성종합대학 교수들·조선그리스도교연맹 목사들이 미국에 방문하게 된다.[27] 평양 형제산가정예배처소, 평양 옥류가정예배처소 등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일부에서 성서통신대학 교재용 비디오테이프 중 감리교신학대학교 김득중 교수의 《마가복음 강해》 강의 비디오테이프를 신자 교육용으로 사용하는 것을 방북 중인 남측 개신교 신자가 목격한 바 있다.[28] 현재 한국비디오선교회는 한국미디어선교회로 개칭했다.[29] 김성률 목사는 이 때 퇴임한 것이지 사망한 것이 아니다. 김성률 목사는 퇴임한 뒤 계속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으며 등 정치인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조선사회민주당 기관지 계간 《조선사회민주당》의 보도에 의하면 김성률 목사는 2000년 12월경 사망했다.[30] 이들이 진짜 개신교 신자가 맞느냐는 논란을 차치해도 그렇다.[31]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의 사진은 평양 광복거리가정예배처소라고 한다.[32] 사실 북한에서는 노동력을 대학생이나 돌격대나 주민들을 로력동원으로 공짜로 부리고 건물 지으라고 보낸 자재를 중국에서 바꿔먹고 싸구려로 짓기 때문에 공사비 대부분은 통째로 김정일이가 먹었을 가능성이 높다.[33] 1989년 강영섭 목사의 중앙위원회 위원장 선출 후 4년이라는 개최 주기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34] 감리교신학교 졸업.[35]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공동번역 성서를 문화어에 맞게 개정하여 출판했다.[36] 향린교회 전(前) 담임목사 홍근수 목사의 형.[37] 홍 여사는 이 일을 위해 직접 방북하여 평양신학원 관계자들과 협조하기도 했.[38] 대한성서공회 부설.[39] 아래 왼쪽에 1983년 북한에서 발행된 신약전서가 보인다.[40] 인터넷 경매 사이트 코베이옥션에 경매품으로 올라왔던 1984년 구약전서의 사진. 그동안 국내 인터넷 서점이나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1990년 성경전서가 팔린 적은 몇 번 있었지만, 1984년 구약전서는 그런 적이 거의 없었다.[41] 성서 발행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대한성서공회 민영진 전(前) 총무가 83·84년에 각각 출판된 신약성서와 구약성서 실물을 확인한 적이 있고, 1990·2008년 두 차례에 걸쳐 출판된 성경전서는 다수 기독교 관련 방북자들이 실물을 확인했다. 대한성서공회 부설 성서학도서관이 북한의 1983년판 신약전서, 1984년판 구약전서, 1990년판 성경전서를 소장하고 있다.[42] KBA, 2012 White Paper on Human Rights in North Korea , p. 262.[43] 로열 패밀리 관련 이유이긴 하지만 장성택도 3번이나 혁명화를 갔다왔고, 강반석의 친척으로 칠골강씨 강명도도 한번의 혁명화로 복권 뒤에 두번째로 갈 지경에 이르자 탈북했다.[44] 비슷한 예로 90년대 고난의 행군 이전에 장마당은 50대 이상 여성들만 장사할 수 있고 젊은 여성이나 남성은 단속 대상이었다.[45] 장충성당 역시 정의구현사제단 사제가 방문한 것과 별개로 한국 천주교와 로마 교황청에서 천주교 성당으로 인정한 적이 없으며 미사 집전 또한 허가하지 않고 있다.[46] 국가보위성에서 지하교회를 묵인하는 것은 정보와 자금이 유입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47] 원래 당원의 로동당증은 자식이나 부모에게도 함부로 보여줄 수 없으며, 몸에서는 한시도 뗄 수 없고 미소지시에는 처벌을 받는다.[48] 2023년에 영부인인 김건희가 명품백을 뇌물로 받아서 물의를 일으킨 사건의 당사자다.[49] 참고로, 유관지 원장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구성원들은 개신교적 배경을 갖고 있다 생각하는 연구자이다.[50] 사실 김일성의 외가인 점 담임선생님 인연을 빼고라도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이 사망하고 김정일을 김일성의 외사촌 강보비가 길렀기 때문에 하리강씨 또는 칠골강씨 일족은 백두혈통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