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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혁명당 사건

반제민족민주전선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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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혁명당 사건
統一革命黨 事件

The case of Revolutionary Unification Party
대한뉴스의 보도
(제690호 / 1968년 8월 31일)
<colbgcolor=#bc002d,#222222><colcolor=white> 발생일시 1964년 3월 15일 ~ 1968년 8월 20일[1]
1968년 8월 24일 (사건 발표)
발생장소 서울특별시
유형 범죄
혐의 국가보안법 위반[2],
반공법 위반[3],
내란음모[4]
피고인 김종태 (?년생 / 정치인)[5][6]
김질락 (1934년생 / 언론인)[7]
신영복 (1941년생 / 군인)[8]
김진환[9]
이문규
관할[10] 중앙정보부
서울지방검찰청
서울형사지방법원
재판
사건번호
서울형사지방법원 1969. 1. 25. 선고 68고26274, 26275, 26276, 27797, 29847, 37490, 25723, 41252(병합)
확정
사형[11], 무기징역[12], 유기징역[13][14]
상태 <colbgcolor=#eeeeee,#444444>사건 종결
(형집행 완료)

1. 개요2. 시대적 배경3. 경과 및 주요 활동
3.1. 주요 관계자
4. 결말5. 여담6. 출처7. 관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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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8년 8월 24일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지하당 조직 사건.
남민전 사건(1979년),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1992년), 민족민주혁명당 사건(1999년), 통합진보당 내란선동 사건(2013년) 등과 함께 실체가 있는 대표적인 공안 사건이다.[15]

2. 시대적 배경

4.19 혁명5.16 군사정변의 파도가 지나간 뒤 1962년에 쿠바 미사일 위기가 일어나고 미국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등 국제 정세가 급격히 변동하기 시작했다. 세계 전쟁이나 미국의 공격에 대한 위기감이 쌓인 북한 정부는 우선 자체적인 힘을 기르는 데 주력하기로 결정했는데 가장 중요한 건 국방이었다. 1962년 12월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중앙회의 전원회의에서 "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 전 인민의 무장화, 전국의 요새화"를 주 내용으로 한 4대 군사노선을 발표했다.

다른 한편으로 북한은 남한에서의 혁명을 기대했지만 그건 북한이 일방적으로 지원해서 되는 게 아니며 남측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일어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 국제적인 반미 혁명세력과 단결하여 범세계적인 반제/반미 전선을 결성하고자 했다. 1964년에 열린 전원회의에서도 이와 같은 방안을 '3대 혁명역량 강화방침'으로 정리했다. 이 방침은 북한의 혁명기지 강화, 남한의 혁명역량 강화, 국제 혁명역량과의 강화를 내세웠으며 이는 북쪽의 '민주기지'를 강화한 뒤 주로 무력에 의지해서 남북통일을 달성하고자 한 한국전쟁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따라서 남쪽은 그 자체의 힘에 따라 '남조선혁명'을 이룩해야 함이 강조된 것이다.

3. 경과 및 주요 활동

북한 정부는 남한에서 4.19 혁명이 실패한 주 이유가 바로 공산혁명을 이끄는 당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판단했다. 이로써 북한이 만든 '남조선혁명론'이 남쪽에 퍼지면서 지하 혁명조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964년 3월 15일에 남한에서 비밀리에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주요 참가자들은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신영복 등이었다. 이들은 지하신문 <혁명전선>과 대중잡지 <청맥>(주간 : 김질락) 등을 발간했으며, 대학가에서 학사주점을 운영하기도 했다.[16]
1964년 3월 15일. 역사적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약속장소에 와서 보니 이미 김질락, 이문규 동지가 와 있었다. 신영복 동지가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전보다도 훨씬 고조됐다.

그러면 전원 모이셨습니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께서 교시하신 주체의 당 창건 방침을 받들고, 그 사이 동지들께서 필사의 노력으로 분투하신 결과 오늘로서 우리는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의 결성을 보게 됐습니다.

어디까지나 우리 당이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의 혁명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한국혁명의 전위당인 만큼 당원과 각계의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으로 결속해야 할 것이라는 정치활동의 목표로부터 출발해 우리 당 기관지를 <혁명전선>이라고 하면 어떤가 하고 생각합니다.

전원이 찬성했다...철필로 긁은 등사판으로 인쇄된 수십 부밖에 안 되는 신문이었지만 한국에서 발간된 최초의 김일성주의 출판물에 접했던 순간, 편집위원 전원의 눈이 잠시 뜨겁게 빛났다.

우리들은 이 힘 있는 정치선전수단으로 보다 많은 김일성주의자를 육성하고 각계각층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 통일혁명의 깃발 아래 강고하게 결집시키도록 합시다.
- 통일혁명당 기관지 <혁명전선> 중에서
1964년 3월 15일 비밀리 약속 장소에 모인 <통혁당> 무리들이 <혁명전선>의 창간을 공식 선언하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 참석자로는 김질락, 이문규, 신영복 등의 이름이 언급돼 있다.# 그러나 1983년 김정일이 '주체사상에 대하여' 문건을 내기 전까지 김일성주의라는 말은 일반화되지도 않았고 위의 뉴데일리 보도는 1980년대 후반 NL 계열 출판사 대동에서 발행한 선전용 도서인 <통혁당>에서 인용한 것이므로 위의 통혁당 기관지 창간 관련 기술은 신빙성이 있는 묘사라고 보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대동 출판사에서 나온 <통혁당>은 북에서 만든 선전용 도서를 무단 전제해 출판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80년대까지 한국의 문학적 장르로 존재하던 반공 소설과 비슷하게 북의 선전선동일꾼들이 빈약한 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선전선동용 도서에 불과하다. 당연히 과장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정확한 인용을 위해서는 대검이 펴낸 <공안사건실록>의 통혁당 부분이나 김질락의 수기 <주암산>을 참조하는 것이 맞을 듯 싶다.

학생운동에 대한 직간접적인 영향력의 행사 및 참여, 기층민중운동에로의 접근, 또 다른 혁명적 조직과의 결합시도, 무장투쟁을 위한 목적의식적인 노력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1967년의 국회의원 선거 및 대통령 선거에 대한 반대투쟁, 그리고 미국 부통령 험프리 방한 반대투쟁, 사토 일본수상 방한 반대투쟁 등에 통혁당 산하의 학생운동 조직이 동원되었다고 한다.[17]

통혁당 서울시위원회는 자신의 임무 중 "모든 조직을 장래 유격대로 발전시키기 위한 전술적 간부의 획득"과 "각지에 무기고의 설정과 무기획득 및 그 비축을 위한 방법 연구" 등을 설정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통혁당의 무장투쟁노선에 대해서 조희연은 통혁당의 성원들간에 "무장투쟁이라는 것이 원칙적인 수준에서 볼 때 혁명투쟁의 궁극적 최고의 형태이며, 구체적인 수준에서 볼 때 제3세계 혁명투쟁의 일반적 형태라고 하는 데 공감"되고 있었지만 그것이 현실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통혁당이 무장투쟁을 실제로 전개하지는 않았으며 단지 장기적 혹은 단기적 전망으로 사고했을 뿐이라고 파악했다.

통일혁명당은 전위정당으로서의 지도이념을 명확히 내걸었으며, "당면의 최고 목표는 민중민주주의혁명을 수행, 부패한 반봉건적 사회제도를 일소하고 민주주의제도 수립, 민족 재통일 성취"를 당강령으로 삼고 있었다. 이후 1979년까지 통혁당 재건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사건 적발 지역도 서울경기에서 호남과 부산 경북지역까지 확대되는 특징이 나타났다.

통일혁명당은 지도이념을 명확히 내걸었으며 노동계급의 전위당임을 자처했다.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주체사상이며 최고의 목적을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에 두고 있다. 당강령은 "당면의 최고 목표는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수행, 부패한 반봉건적 사회제도를 일소하고 민주주의제도 수립, 민족 재통일 성취"로 규정하였다.

구체적 목표로는 "첫째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 철폐와 자주적 민주정권의 수립, 둘째 파쇼독재체제의 일소와 사회민주주의의 실현, 세째 민주적 토지개혁과 농.어촌 빈곤 일소, 네째 중요산업의 국유화와 자립적 민족경제의 실현, 다섯째 민주적 노동법령의 실시와 노동자의 사회 경제적 처지 개선, 여섯째 여성의 권익보장과 사회적 지위 향상, 일곱째 민주적 민족문화 창달과 지식인의 생활보장, 여덟째 교육쇄신과 무료교육제 및 장학금제 실지, 아홉째 선진적인 의료보험제 실시와 무상치료제실시, 열번째 자위적 민족군대 창설, 열한번째 자주외교 구현과 반제평화애호국과의 교류, 열두번째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 성취" 등의 사항을 들고 있다.

<청맥>은 대중잡지로, 그 역할은 민족주체의식과 반미 의식의 선전선동의 무기, 양심적이고 애국적인 청년, 지식인 결집의 장, 당내 지도핵심 발굴의 장이었다. 전체적으로 청맥의 논조는 반정부, 반미 노선으로 향했고 반공적인 기사는 일체 게재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보안상의 이유로 사회주의를 논평하는 기사도 게재되지 않았다.

통혁당은 "선 진보적 인텔리, 후 기층인자"라는 조직화 방식 아래 조직의 확장을 추진했다. 조직방법은 처음에 포섭 대상자를 모색하되 ①가족, 친지, 동창, 친우, 직장 등 생활의 가장 가까운 주변에서 찾아내고 ②출신성분과 가족관계, 학력, 직업, 성품 등을 미리 조사, 가급적이면 특수기관이나 경찰관 등의 가족이 아닌 자를 선정 ③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람을 고르고 일단 포섭대상자가 결정된 후엔 부단한 열의로 접촉, 구두교양을 위주로 필요에 따라 문건을 사용하여 조직화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알려졌다.

한편 당시 서울시위원회의 임무는 ①혁명의 대중적 기반 축성 ②당의 조직 강화 ③각종 학술연구 써클의 조직과 당 지도 간부의 양성 ④기초 써클 강화에 의한 당세포 조직의 재편 ... ⑦모든 조직을 장래 유격대로 발전시키기 위한 전술적 간부의 획득 등이었다. 이러한 임무의 달성을 위한 조직화와 관련해 주요 대상은 학생들이었다.

민족해방전선 책임자 김질락의 회고에 따르면 서울대를 비롯 고대, 연대, 중대, 숙대 등 주요 대학에 조직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민족주의 단계의 교양이 끝난 포섭대상자들이 선정되어 있었다. 그 외 민중부문에 대한 조직화와 관련해 서울대 구농회, 농진회 등 멤버들과 접촉하거나 영등포 지구 하층 청소년의 교양, 덕소의 농민학교 운영, 화남농장, 백운산농장 등에 실무자로 참여했다고 한다.

3.1. 주요 관계자

파일:통일혁명당 조직도.jpg

파일:통혁당 머그샷.jpg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통일혁명당 관계자 명단

먼저 통혁당 서울시 위원장이던 김종태는 1946년 대구 10.1 사건 관련 혐의로 상당 기간 고향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둘째형인 김상도의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의원비서직에 전념했지만 1956년에는 서울대 문리대에 '청맥전선'이라는 비밀 써클을 조직하기도 했다. 한편 4월 항쟁 이후 경북노동연합회 지도고문, 경북피학살자유족회 고문, 교원노조 등에 개입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김종태가 서울에서 자리를 잡을 무렵 전쟁 기간 다양한 형태로 잔존하던 활동가들이 전위 조직을 형성하려는 흐름이 나타났다. 물론 이런 인식 변화는 1961년 조선로동당 제4차 당대회에서 남한의 독자적인 당 건설 노선을 채택한 배경도 있었다.

이후 김종태는 남파된 김수영과 동반 월북했던 김송무와 만나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로 가 노동당 대남사업총국으로부터 청년학생과 노동조합 간부를 포섭하고 <청맥>지를 창간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통혁당 서울시위원회의 시발점이 되었다.

김종태는 최영도 등을 데리고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김일성을 면담하고 미화 7만 달러, 한화 3,000만 원, 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다. 그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 집단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 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갖고 있었다. 다만 김종태의 방북기는 코미디 그 자체였는데 북한에서 금강산 관광을 시켜 주었을 때는 술에 취해서 1935년에 나온 목포의 눈물을 부르다가 반동 노래 부른다고 호텔 직원들에게 신고를 당하기도 했고 북한에서 군수공업단지를 보여주었을 때는 또 남침을 준비하고 있다고 비난하질 않나 남로당 숙청에 대해서도 마구 따지기도 했으며 '김일성은 가짜 아닌가?'라는 얘기를 해서 대남총국과 조직지도부 접대원들을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술만 마시면 남한에서 하던 대로 허리띠를 풀고 곱사등이나 뱀장수 흉내를 내면서 질펀하게 놀았는데 북한에서는 무슨 놈의 혁명가가 저렇게 천박하냐고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민족해방전선을 담당했던 김질락은 김종태의 친조카였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경남매일신문사 논설위원 등을 지내다가 김종태의 제안으로 청맥을 만들면서부터 통혁당 활동을 개시했다. 김질락은 이문규에 비해 대학 시절 써클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았다고 알려졌다.

마지막으로 이문규는 대구 지역 부호 집안 출신으로, 대학 시절 서울대 문리대 이념써클인 '신진회'의 핵심인물이며 4월 항쟁 이후 학생운동을 비밀리에 지도한 지도부로 알려졌다. 그 역시 <청맥>지 활동을 시작하면서 통혁당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4. 결말

통혁당 총책격인 김종태가 검거된 시기는 사건 발생 두 달여 전인 1968년 6월이었다. 김종태가 체포된 후 조국해방전선 책임자 이문규는 경남 지역을 다니며 도피하다 대구에서 검거됐으며 그의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암호문건이 발견됐다.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정보당국은 도피 상태에 있던 이문규를 북한이 어떻게든 데려가기 위해 작전을 펼칠 것이라고 판단해 이문규를 체포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7~8월 무렵 민족해방전선 책임자 김질락 등 서울 조직의 지도급들이 체포되었고 호남에선 전라남도위원회위원장 최영도, 정태묵 등이 체포되었다.

암호문건을 토대로 대북(對北) 통신 공작에 착수한 정보당국은 1968년 8월 4일 새벽 북한에서 보내온 A-3 지령문 해독에 성공했다. 북한은 그때까지도 이문규가 체포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남한 정보당국은 북한이 이문규에 대해 필사적인 구출 시도를 할 것으로 판단했다. 만약 북한이 이문규를 구출하기 위해 간첩선을 보낸다면 통혁당과 북한과의 연계를 가장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정보당국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북한 무장공작선 유인·섬멸 계획(Z작전)에 들어갔다.
파일:통일혁명당 사건 발표(김형욱, 1968년 8월 24일).jpg
1968년 8월 24일 사건 내용을 발표하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모습.

1968년 8월 20일, 군·경·정 합동작전을 통해 남한 측은 북한군 12명 사살, 2명 생포와 함께 공작선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독 안의 쥐 작전(훗날 Z 작전으로 불림)’으로 불렸던 이 작전에는 중앙정보부를 비롯해 육·해·공·해병대 작전참모부와 합동참모본부, 치안국이 동시에 참여했다. 통혁당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이로부터 4일이 지난 1968년 8월 2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김종태가 전후 4차례에 걸쳐 북한의 김일성과 면담하고 '통일혁명당'을 결성하여 혁신정당으로 위장한 뒤 합법화하여 반정부 및 반미데모를 전개하는 등 대정부공격과 반정부적 소요를 유발시키려는 데 주력했다"고 발표했다. 이때 중정은 김종태 등 3명을 포함해 관련자 158명을 검거하여 73명을 검찰에 송치했고 2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그들 중 절대 다수는 김종태 등의 실체와 북한 연루 사실을 몰랐고 심지어 ‘통혁당’이라는 조직의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이들이었다.

통혁당 사건으로 북한에 가서 로동당에 입당한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사형을 당했다. 신영복, 이재학, 오병철, 신광현, 정종소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박성준[18]은 15년형, 김종태의 아내 임영숙은 1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기타 인물들은 5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았다. 참고로 당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신영복은 전향서를 쓴 뒤 1988년에야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71년에 체포된 류낙진[19] 역시 무기징역이었으나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최영도는 1969년 1월 감옥에서 폐결핵으로 옥사했다. 북한은 최영도의 죽음에 추도식을 열었으며 부수상 리주연이 추도사를 낭독했다.

1969년 7월 10일에 통일혁명당 서울시당 위원장이었던 김종태의 사형이 집행되자 북한측은 그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한 뒤 대규모 추모집회를 열었다. 이후 평양전기기관차공장은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로, 해주사범대학은 '김종태사범대학'으로 바꾸었다. 1969년 11월 6일 이문규가 사형집행을 당하자 역시 영웅 칭호가 수여됐다. 그러나 죽기 직전 공산주의자였던 것을 뉘우친 김질락은 북한 정권으로부터 변절을 이유로 외면당했다. 조직이 와해된 뒤에도 통혁당을 재건하고자 하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줄줄이 발각되었고 1979년에 통혁당 강원도 재건위가 발각된 것을 끝으로 완전 소탕되었다.

한편 북한측의 주장에 따르면 1969년 8월에 당 중앙위원회가 지하에서 조직되었고 1970년 2월에는 당 선언과 강령이 발표되었다. 그해 6월에는 <통일혁명당의 소리>라는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후 통혁당은 1985년에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바꾸었고 방송 명칭도 '구국의 소리'로 바꾸었다가 2003년에 방송을 중단했고 2005년에는 반제민족민주전선으로 바꾸어 잔존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남쪽이 아닌 북쪽에서 활동하는 유령단체일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통일혁명당 사건이 "미제와 남조선파쑈당국이 애국적 통일혁명당의 일부 성원들을 체포하여 사형을 비롯한 무기징역에 이르기까지의 극형과 중형을 선고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또 통혁당 관계자들의 활동을 '김일성혁명역사' 교과서에 '조국통일을 위한 남조선 혁명가들의 투쟁'이라는 한 개 절로 만들어 통혁당 건설과 최후에 대해 교육하고 있다. 교과서는 "통일혁명당은 조선로동당의 붉은 혈통을 이어받아 남조선에 주체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전위부대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5. 여담

핵심 인물들인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가 북한에 직접 다녀왔고 조선로동당에 입당하는 등 북한과의 연계가 분명히 있던 사건이다. 그래서 통일혁명당 사건은 최소한 지도부 3인방에 한해서는 독재정권 시대에 정권이 고문으로 만들어낸 수많은 조작 사건들과는 달리 확실하게 실체가 있는 사건이다. 21세기의 기준으로도 통일혁명당을 주도한 지도부 3명(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은 엄연한 사법처리의 대상이다. 다만 계속해서 전향 의사를 표시했던 김질락까지 사형을 집행한 것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다.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의 잔혹한 고문이 계속 가해졌기 때문에 지도부 3인방을 제외한 나머지 하부조직원들에 대한 수사결과에 대해선 여러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지하 전위 조직 특성상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3인방 등 핵심 인물들만 북한과의 연계를 알고 있었고, 나머지는 그냥 반독재민주화 운동으로 알고 참여한 경우가 많다는 주장이다. 대표적으로 신영복은 출소 이후에 통혁당이나 하부조직으로 발표된 민족해방전선이란 이름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서 처음 들었으며 북과의 연계는 전혀 몰랐다고 언급했다. 한겨레21기사

반면 수사결과를 신뢰하는 쪽에서는 엄연한 간첩단 사건의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민주화 운동가로 포장하고 있다고 반발한다.

여기서 또 하나 골때리는 점은 그렇게 과거 군부독재 정권을 반통일 정권, 미제의 수족이라고 비난하던 NL 운동가들이 '통혁당은 김일성의 지시를 받아서 적화통일을 위해서 북이 조직한 지하당'이라는 중앙정보부의 통혁당 사건 수사 발표는 전적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평소 노골적으로 친북, 종북 성향을 보이던 사람들이라서 김일성 수령님의 지도로 만들어진 지하당이라는 독재정권의 발표에 열광하는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 정작 사건의 당사자인 신영복이나 여타 하부조직원들은 하나 같이 자신들은 북의 지하당이란 걸 몰랐고 주체사상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주장했는데도 이들은 무조건 정보부의 발표만 신뢰하면서 자기들끼리는 통혁당은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에 따른 혁명과업 어쩌구 하면서 찬양 일색이다. 사건의 실체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자신들의 이념의 잣대로만 과거를 재단하는 것이다.

통일혁명당 사건의 일부인 임자도 간첩단이 받은 공작 지령 가운데는 「혁신계통 중간 정당에 침투하라」, 「1967년 5월의 대통령 선거 때는 제1야당 후보를 지원하라」, 「국회의원 선거 때는 극렬적인 야당 인사를 지원하라」, 「출판사를 경영하되 반공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반미-반정부 사상을 고취하라」는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임자도 간첩단의 핵심인물이었던 정태묵은 당시 야당 정치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2회에 걸쳐 접촉한 사실이 있다고 한다. 이에 김대중은 "(정태묵은) 선거기간에도 2∼3차 만나서 본인의 선거에 협력하는 의사를 표시한 바 있음. 그러나 당시 누구나 그가 해방 직후의 좌익활동을 중단하고 가업인 염전업에만 전념하는 줄 알았지 그가 그런 엄청난 일을 하는 줄은 몰랐음. 그는 매일 시내에 나오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녀서 일반 시민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택돈 신민당 국회의원은 이와 관련 "(김대중이) 정태묵에게 당하려다가 만 사람으로 되어 있다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발언했다.#

2023년 5월 18일 '통일혁명당 재건 사건'에 연루돼 사형 선고를 받고 17년간 옥고를 치른 박기래가 사후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대법원 선고 2022도13084 국가보안법위반등 사건에 관한 보도자료, 법률신

6. 출처

7. 관련 문헌


[1] 활동기간은 대략 4년 5개월이다.[2] 사건 당시 법률: 국가보안법(법률 제1151호, 1962. 9. 24., 일부개정).[3] 사건 당시 법률: 반공법(법률 제1997호, 1968. 3. 18., 일부개정). 1980년 12월 31일국가보안법 개정으로 인해 타법폐지되었다.[4] 사건 당시 법률: 형법(법률 제293호, 1953. 9. 18., 제정).[5] 통일혁명당 서울시당 위원장. 둘째 형 김상도 국회의원의 비서로 정치 입문한 인물.[6] 북한에서는 이 사람을 기리기 위해서 1969년공화국영웅 칭호를 추서하고 김종태사범대학(구 '해주사범대학'),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구 '평양전기기관차공장') 등으로 일부 기관의 이름을 바꿨다.[7] 김종태의 조카로, 1964년 김종태에게 포섭됐다.[8] 체포 당시 육군사관학교교수사관으로서 경제학을 강의했다. 대한민국 육군 대위.[9] 김질락의 서울대학교 동문.[10] 최하위 관할 수사·재판관청만 표기한다.[11]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12] 신영복, 이재학, 오병철, 신광현, 정종소[13] 한명숙의 배우자 '박성준'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2022년 재심을 통해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기사(법률신문) 서울중앙지법 2021재고합1. 참고로 해당 재심 판결문의 'G'는 '통일혁명당 산하의 조직'을 의미하며 '통혁당이 아니라 해당 산하조직이 실체가 없다'고 밝힌 것이다.[14] 그 밖에 김종태의 아내 '임영숙'은 징역 12년, 나머지 피고인들은 징역 5년 이하로 선고됨.[15] 박정희 정부 시절 워낙 비슷한 이름의 간첩단 조작 사건이 많아서 헷갈릴 수 있지만 이 사건은 인민혁명당 사건(1964년), 동백림 사건(1967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1974년), 민청학련 사건(1974년) 등 상당 부분 과장되었거나 실체가 없는 조작 사건과는 결이 다르다.[16] <청맥>의 편집장이었던 이문규는 통혁당 내에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을 조직한 인물이며 1967년 5월에 월북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사실이 있다.[17] http://lmagit.jinbo.net/bbs/view.php?id=freeboard&no=11137[18] 신영복의 하부선으로서 자신의 처 한명숙, 박경호, 김국주 등을 포섭한 혐의 등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19] 배우 문근영의 외조부[20] 전국노동자정치협회라고 불리는 좌파 운동권 단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