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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8:49:44

최성국(1983)

최성국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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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U-20 대회 주장
김건형
1999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최성국
2003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백지훈
2005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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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dddddd> 최성국
崔成國 | Choi Sung-Kuk
파일:2019_Choi_Sung_Kuk.jpg
출생 1983년 2월 8일[조기입학] ([age(1983-02-08)]세)
경기도 부천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범죄 승부조작, 음주운전
학력 상지초등학교 (전학)
동곡초등학교 (졸업)
역곡중학교 (졸업)
정명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01 / 중퇴)
신체 172cm, 68kg
포지션 공격수
소속 울산 현대 호랑이 (2003~2006)
가시와 레이솔 (2005 / 임대)
성남 일화 천마 (2007~2010)
광주 상무 불사조 (2009~2010 / 군 복무)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1)
FK 라보트니츠키 (2011~2012)[2]
국가대표 26경기 2골 (대한민국 / 2003~2011)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승부 조작에 가담한 사실이 확인되어 한국프로축구연맹대한축구협회뿐만 아니라 국제축구연맹에 의해 공식적으로 축구인으로서의 모든 경력과 자격이 말소되었다.

2. 선수 경력

축구부가 없는 상지초교를 다녔지만 축구를 워낙 좋아해 쉬는 시간은 물론 방과 후에도 축구만 했고, 초등학교 6학년에 동곡초로 전학가며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그렇게 축구를 늦게 시작했지만 역곡중 2학년에 이미 대한민국 U-14 축구 국가대표팀에 소집됐고, 정명고 1학년엔 2살 월반해 대한민국 U-17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1998 AFC U-17 챔피언십에 2골을 넣으며 주전으로 활약하며 대한민국의 4위에 기여했다. 또한 정명고 3학년에는 역시 2살 월반해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2000 AFC 청소년 선수권대회 예선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학교에선 전국고교축구대회 우승 및 MVP를 차지할 정도로 동나이대 최고의 선수로 불렸다. 특히 탁월한 드리블과 돌파 능력으로 일찌감치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3] 그리고 고려대학교 축구부에 01학번으로 입학했다. 고려대에서 선배 차두리, 이천수, 그리고 동기 김정우 등과 함께 2001년 전국축구대회 우승 등을 경험했다.

2002년 월드컵 직전 거스 히딩크 감독이 특별히 눈여겨보며 주로 학교보다는 대표팀에서 생활했고, 정조국, 여효진, 염동균 등 3명과 함께 훈련 멤버로 참가시키기도 했다. 다만, 최후의 경쟁에서 이들은 나란히 탈락했다.[4] 그래도 어린 나이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훈련에 합류로 충분한 가능성을 인정받는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몇 없는 기술적인 드리블러형 선수였다.

월드컵 직후 열린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도 박항서 감독에 의해 4살 월반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됐고, 주전으로 5경기를 소화하며 동메달을 따냈다. 대회 직후에는 박성화 감독이 이끄는 청소년 대표팀 주장으로서 2002 제33회 아시아청소년대회에서 대한민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3년 3월 코엘류호에서 콜롬비아를 상대로 자신의 A매치 데뷔전을 치르기도 했다.

이렇게 화려한 연령별 대표팀 커리어를 쌓던 최성국은 당연히 대학 최고 매물이었고, 결국 고려대 2학년을 마치고 중퇴한 뒤 2003년 자유계약으로 울산 현대 호랑이당시 신인선수 계약금 최대상한선인 계약금 3억원으로 입단한다. 당시 울산은 해외진출을 앞둔 이천수의 공백을 메울 대체자가 필요했고 고대 1년 선배를 따라 울산에 입단했다.

최성국은 그 기대에 부응하여 신인임에도 27경기 7득점 1도움을 기록했고, 후반기 이천수의 공백을 잘 메우며 울산의 준우승에 기여했다.[5] 이 해에 청소년 대표 시절 동료 정조국안양 LG 치타스에서 데뷔했고, 둘은 신인상 경쟁을 벌였지만 결국 신인상은 12득점 2도움을 기록한 정조국이 차지했다. [6]

2003년 9월, 코엘류호 일원으로서 인천에서 열린 오만과의 2004 아시안컵 지역예선 경기에서 전반 막판 상대 박스 근처에서 수비 1명을 가볍게 따돌린 뒤 강력한 왼발슛으로 골네트를 가르며 이날 유일한 골이자 자신의 A매치 데뷔골을 기록했다.

2003년 11월, 예상대로 주장으로서 2003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아랍에미리트에 참가했다. [7] 부상을 안고 있던 탓에 조별리그에선 거의 출전하지 못하다가 일본과의 16강전에서 선제골을 넣는 등 분투했지만 한국의 탈락을 막진 못했다.

대표팀에서 최성국이 가장 돋보였던 활약은 2004년 3월 4일 중국과의 올림픽 지역 예선에서 한국팀 수비 진영으로 부터 중국 골에리어까지 폭풍 드리볼로 조재진에게 결승골을 어시스트 해준 장면이다. 이후 2004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에도 2살 월반해 선발되었고 말리와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상대 자책골을 유도하며 대한민국의 8강 진출에 기여했다.[8]

그러나 2004년 잦은 U-23, A대표팀 차출로 소속팀 울산에서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 못했고 플레이 스타일도 조금씩 읽힌데다 공을 많이 갖고 있는 스타일에 혹사까지 겹치며 부상도 자주 당하는 등 19경기 1골 4도움으로 부진하기 시작했다.

파일:attachment/Choi_Sung-Kuk_Kashiwa_Reysol.jpg

그 영향인지 2005년 1월 대표팀 전지훈련을 다녀온 뒤 해외 진출을 요구해 결국 J리그 가시와 레이솔로 6개월 임대를 간다. J리그 데뷔전에서 도움을 기록한 뒤 나비스코컵에서도 도움을 기록하며 2경기 연속 도움행진을 벌이는 등 초반엔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완전 이적 얘기도 돌긴 했으나 플레이가 간파당하며 5월 이후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렸다. 기존에 황선홍, 김도훈, 최용수J리그에서 성공한 공격수들의 전례가 있긴 했으나, 엄연히 이들은 이미 K리그를 씹어먹고 아시아 어느 팀과의 경기에 내놓아도 꿀릴 것 없는 대표팀의 간판급 선수였다. 반면 최성국은 갓 유망주 태를 간신히 벗은 데다 연령별 대표팀 이외에 다른 무대에서 확실한 검증조차 받지 못했으며, 더욱이 용병으로 팀에 녹아들 시간은 부족하고 고작 반년 기간내에 성과를 보여야 했다. 당연히 일본 진출은 실패로 끝나고 초라하게 귀국하고 만다.

2005년 7월 울산으로 복귀했고 복귀하자마자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나 당시 함께 복귀한 이천수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겼고 최성국 본인도 스탯을 쌓지 못하며 전성기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진 못했다. 그래도 2005년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마수걸이 득점을 기록하는 등 울산의 K-리그 우승에 함께 했다.

하지만 피지컬을 중시했던 본프레레-아드보카트 체제에서 정경호에 밀려 뽑히지 못했고 결국 2006 월드컵 참가에 실패하고 만다.


2006시즌 리그에선 그렇게 많은 골을 기록하진 못했으나 A3 챔피언스컵에선 이천수, 레안드롱 등과 함께 우승을 차지하고 AFC 챔피언스 리그 8강 1차전에서 대표팀 감독이던 코엘류가 이끄는 알 샤바브 FC를 상대로 6:0 대승을 거두며 울산에게 아시아의 깡패라는 별명을 만들어줬다. 또한 삼성 하우젠컵 2006 득점왕을 차지하며 프로 데뷔 후 첫 번째 개인 타이틀을 차지한 시즌이다. 그리고 핌 베어벡이 감독으로 승격한 뒤 다시 A대표팀에 복귀하는 겹경사를 누리며 2006시즌을 기점으로 부활한 모습을 보여줬다.

2007년 이적료와 연봉 등 30억 2년 계약으로 성남으로 깜짝 이적하면서 K리그 팬들을 놀래킨다. 물론, 성남은 측면 공격수가 절실한 상황이었으나 반면 울산은 상주 상무에서 정경호가 복귀한다고는 해도 최성국을 잉여 자원으로 분류하기는 좀 애매했다. 게다가 부천 출신인 선수 본인이 득남한 뒤 수도권으로 복귀하고 싶다는 바람이 겹쳐져 이적이 성사됐다.

2007년 성남에서 모따, 김동현, 네아가 등과 공격 편대를 구축해 22경기 무패 행진에 기여하는 등 성남의 압도적인 정규리그 1위와 ACL 4강 진출에 기여했다. 하지만 리그에선 플레이오프에서 치고 올라온 포항에 패배해 준우승을 거뒀고, ACL에서도 우라와레즈에게 승부차기 끝에 탈락하는 등 아쉬운 시즌을 보냈다. 최성국은 2년 동안 공식 경기 13골 10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고 2008년 K리그, J리그 양국 올스타팀이 격돌한 조모컵에서 최성국은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MVP를 수상한다.# 하지만 30억원이라는 이적료와 신태용의 7번을 받은 것 치곤 당시 최강 전력 성남에서 우승 한 번 못해보는 등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며 당시 K리그 몸값 거품 논란을 불러일으킨 대표 주자 중 한 명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게다가 2008년 10월, 시즌이 종료되지도 않았는데 상무에 입단하겠다며 돌연 팀을 떠나 버리며 당시 성남팬들의 공분을 샀다. 후에 밝혀진 바로는 김학범 감독과의 불화가 있었음을 밝혔다. # 한편 2007년 12월, EFL 챔피언십 소속 셰필드 유나이티드 FC에서 입단 테스트를 보기도 했으나 이적이 성사되진 않았다.

그래도 베어벡호 일원으로서 2007년 AFC 아시안컵 본선에 출전하였고,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조별리그 1차전 경기에서 염기훈의 크로스를 바로 헤더로 선제골을 득점해 사우디전 무승 사슬을 끊는 듯 했지만 페널티 킥으로 동점골을 허용해 1-1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2009년 광주 상무 불사조에 입대한다. 광주에서 다시 한 번 전성기에 버금가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광주의 돌풍을 이끌었다. 이 당시 최전방 공격수로 출전해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커리어 최다인 리그 9골로 득점 공동 9위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2009년 조모컵에서 감투상을 받기도 했고, 2010년 10월에는 조광래호에 선발되며 허정무호 이후 2년 만에 대표팀에 복귀하기도 했다. 최성국은 선발출장했으나, 시합은 득점 없이 비겼다. 광주에서 2시즌 동안 52경기 13득점 5도움을 기록하고, 2010년 10월 31일 전역하여 원 소속팀 성남으로 복귀했다. 이후 성남은 2010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FIFA 클럽 월드컵에 참가하는데, 최성국이 23인 엔트리에 들었다. 그리고 클럽 월드컵에서 3경기 1득점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알렸다. 2010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취득하고는 "프리미어리그 이적 희망' 발언을 했다. 그러자 여러 축구 커뮤니티의 반응은 "스코틀랜드 프리미어 리그 말이냐?" 반응을 보일 정도로 영 좋지 않았다.

결국 2011년 1월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했다. 이적료 13억원이다.

수원으로 이적을 한 지 불과 1주일 만에 수원의 주장이 되었다. 윤성효 감독이 등번호로 몇 번을 원하는지 묻자, 최성국이 10번을 원한다며 '10번만 주면 주장이라도 하겠다' 해서 주장 완장을 건넸다고 한다.[9]

4월 15일 강원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하였다. 완전한 전성기 폼은 아니었고 수원은 ACL 8강엔 진출했지만 리그 7경기 무승 부진에 빠지며 최하위권으로 곤두박질친 상태였다.

3.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

파일:attachment/Two_Face_Choi.jpg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이 본격화되면서 최성국도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최성국 본인은 결백하다고 부인하면서 2011년 5월 31일 승부조작 방지 워크숍에 참석했을때에도 심지어 어이없다는듯 피식 웃음마저 보이며 절대 안 했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자진 신고 기한 마감일 하루 전인 6월 29일, 광주 상무 소속이던 지난해 2010년 6월 2일 컵대회 성남전과 6일 울산전 김동현의 권유를 받고 동료 6명과 함께 "승부조작 사전모의에 관여했다"고 시인하며 이를 자진 신고했다.

본인은 이후에도 "모의에 참여만 했을 뿐, 돈은 받지 않았다"라면서 관여 사실을 계속 부인했고, 수원 구단과 팬들도 최성국의 말을 믿고 그를 옹호해 줬지만,[10] 7월 8일, 검찰 측의 발표를 통해 김동현의 권유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김동현을 비롯한 주변의 많은 선수들을 직접 끌어들이고 승부조작을 직접 조장한 브로커 역할을 수행했음이 밝혀졌다.#

결국, 그동안 최성국을 옹호했던 소수의 팬들조차도 모두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연봉에 시달리다 돈 몇 백만원에 양심을 판 단순 조작가담 선수들조차도, 축구협회의 강력 대응 방침에 따라서 전원 영구제명을 면치 못하는 판국인데, 최성국처럼 고액의 연봉을 받던 선수가 브로커 노릇까지 했으니, 용서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수원으로써는 돈은 돈대로 날리고 피해만 입었다.

3.1. 처벌

8월 25일 한국프로축구연맹에 의해 영구 제명 처분을 받았으나,# 승부조작을 자진 신고한 점이 참작되어 5년의 보호관찰 기간과 500시간의 봉사활동을 거친 뒤 심사를 거쳐 복귀할 수 있는 길은 열어 놓았다. 10월 5일 축구협회에 의해 판결이 확정되어 제명 처분되었다.

제명 처분 후 "죄송하다는 말씀은 당연하고, 아껴주신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긴 것 깊이 반성하고 회개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죄를 주장하면서 국내 리그가 아니라면 해외 리그에 진출하겠다고 뜻을 밝히면서 논란이 되었다. 원칙적으로 프로 축구선수가 해외로 이적할 경우 소속팀이 속한 축구협회에서 국제 이적 동의서를 발급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유로 동의서 발급을 거부당했을 경우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피파(FIFA)에서는 1년짜리 임시 이적 동의서를 발급해준다. 최성국은 이런 제도상의 허점을 이용해서 해외 이적을 추진했기 때문에 축구팬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마케도니아 FK 라보트니츠키로 이적이 확정되었다. 리그 9위인 하위권 팀이다. 뭔가 초라한 해외진출이다.

하지만 타국가로의 이적도 FIFA에서 제동을 걸었다. FIFA는 징계위원회를 통해 국내에서의 제명이 해외에서도 유효하다는 결정을 내렸고 이는 한국프로축구연맹, 대한축구협회, 아시아 축구 연맹, 유럽축구연맹, 마케도니아 축구협회 등 모든 유관 기관에 통보되었다. 최성국에게 부과된 영구제명은 국내경기는 물론 국제경기와 친선경기 등 모든 공식 경기에 적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축구로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거의 막혔다는 것이다.[11][12]

또한, 이 경우는 승부조작에 의한 징계를 피해서 외국으로 튀는 선례에 FIFA가 직접 제동을 건 것. 이후 FIFA에서 최성국의 징계를 5년 자격 정지라고 발표했지만, 대한축구협회영구제명이니까 확인해달라고 문서를 보냈고, FIFA는 "5년은 실수였다."라고 의사를 보이면서 다시 영구제명으로 정정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2021601270_0.jpg

참고로 최태욱은 응원이나 한답시고 당시 트위터에다 이렇게 썼다가 분노한 축구 팬들의 항의로 재빨리 삭제했다. 어이가 없어하는 축구 팬들사이에서는 "너도 승부조작했냐?"라고 조사들어가야 한다고 까기도 했다. 결국, 최태욱 본인이 스스로 경솔했다고 인정하는 사과 트윗을 올렸는데 덤으로 양준아도 쉴드를 치다가 까였다.

3.2. 2023년 대한축구협회 승부조작 축구인 사면 및 번복 사건

2023년 3월 28일, 2023년 대한축구협회 승부조작 축구인 사면 사건으로 12년 만에 대한축구협회로부터 영구제명 징계를 사면 받았다.# 사면 일자 기준으로 만 40세로 나이가 있는지라 선수로 활동할 수는 없겠으나[13], 축구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는 길은 열렸을거라 봤다. 그러나 거센 논란에 직면하였고 2023년 3월 31일 대한축구협회에서 승부조작 사면에 대해 전격 철회를 공식 발표함으로서 사면은 없던 일이 되었다.

사면 관련해서 자기도 시큰둥한 인터뷰를 하며 대한축구협회는 조롱거리가 되며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는 걸 인증했다.

인터뷰마다 자기 주장이 다른데, 가장 최근의 영상에선 "사면 전·후 KFA로부터 연락받은 건 없다"면서 "뉴스로 사면 소식을 접했다"고 밝혔다. 이어 "처음엔 얼떨떨했지만 조금 기대했던 게 사실이다. 대중이 KFA의 사면 결정으로 분노하는 건 당연하다"며 “내 기억에서 축구를 완전히 삭제하고 살아야 하느냐. 난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개소리를 지껄였다. #

4. 제명 이후

2012년 6월, 분당구에 있는 한 병원 원무과에 취직하게 되었는데, 병원 간부와 잘 알던 사이라서 취직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사를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낱같은 현역 복귀를 꿈꾼다는 헛생각을 하고 있었는 듯하다.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아빠가 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현역 복귀를 꿈꾼다는 발언을 하였다. 불쌍하니 길을 열어주자는 극소수의 동정론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절대 다수는 "한 집안의 가장이니 일하는 것은 당연하고 열심히 하라고 응원해줄 수도 있지만 두 번 다시 축구를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축구 선수로 나서겠다고 열심히 비정기 연습경기에서 나섰다고 한다. 2013년 1월 14일 전 국가대표 선수이자 부천 SK 출신인 이임생이 감독이 이끄는 싱가포르 홈유나이티드와 이광종 감독이 이끄는 U-20 대표팀의 연습 경기(U-20 대표팀이 7-2 승)에서 뻔뻔스럽게도 홈 유나이티드 팀 게스트 선수로 나와 경기에 참여했다. 경기가 끝난 뒤 스포츠서울지 인터뷰에서 "축구선수로 나와 활약하는 게 사죄하는 길이다." 라는 뻔뻔한 발언을 했다. 이에 기자가 "당신은 지금 FIFA에서도 영구 제명 당해서 축구선수로 길은 어렵지 않느냐? 그리고, FIFA 영구제명은 축구선수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도 박탈이다."는 말에 "몰랐다"는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하고는, "기약은 없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겠다."는 태도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죄 모두 씻고 팬 앞에 설게요."라며 그라운드에 복귀하겠다는 망상을 하고 있는 듯한 기사가 또 나왔다. 그런데, 죄가 무슨 기름때도 아닌데 죄를 씻겠다는 말 자체가 희한한 거다. 범죄자라면 어떤 죄라도 평생동안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인데... 더구나 승부조작같은 더러운 짓을 하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전혀 반성을 안 하고 있다는 소리다.

2013년 4월 11일 한 기자감성팔이 식의 최성국의 인터뷰를 내놓아 네티즌들의 몰매를 맞았다.# 2013년 7월 11일 프로축구연맹은 보호관찰 기간에 봉사활동을 50% 이상 성실히 수행하고 뉘우치는 빛이 뚜렷한 선수들의 보호관찰 기간을 절반 이상 경감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최성국은 현역 복귀가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이에 축구팬들의 반응은, 도대체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 반응이고, "어라? 엿맹이 승부조작 브로커 짓을 하고 있네?" 라고 까기도 했다.

# 이에 이용수 해설위원은, 승부조작 선수들의 복귀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하는 바람에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서 축구팬들을 충공깽에 빠뜨렸다. 단 승부조작 가담자들은, 대한축구협회가 선수 자격 박탈을 내린 상태이기 때문에 이 조치가 해제되어야만 복귀가 가능하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K리그 경기에서 K리그의 모든 구단의 서포터들이 연합하여 한 목소리로 한국프로축구연맹을 비판하는 걸개를 곳곳에 매다는 식으로 비난하면서 프로축구연맹도 당황해 하고 있다.

이 상태로 복귀를 해봐야 온갖 비난과 야유가 나올 게 뻔할 뻔자이며, 골을 넣었어도 골키퍼한테 돈을 쳐먹였다는 비난도 당연히 나올 테니, 결국 대한축구협회에서 조기 사면은 없는 것으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최성국은 앞으로 최소 3년을 더 기다려야만 복귀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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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남양주시에 위치한 모 축구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많은 이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고 있다. 이 덕분에 한국프로축구연맹마재윤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 사건 당사자들을 철저히 지워낸 한국e스포츠협회비교당하면서 까이게 된다. 2014년 5월부터는 신림동에서 '최성국의 Mr.꼬조라는 간판을 내걸고 술집을 운영 중이었는데 망했다는 증언이 있다. 2015년 3월 영화 세계일주 VIP 시사회에 얼굴을 비추기도 했다.## 그리고 연예인야구연맹 챔피언스 투수로 뛰기도 한다. 2015년 5월, 불법 도박에 대한 종편 방송 뉴스에 나와 "사죄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그라운드에 와서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제일 크고요. 다시 한 번 제2의 인생을 살고 싶고." 라는 철면피 짓을 시전했다. 게다가 여기서는 후배가 부탁한 걸 마지못해 조작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직접 승부조작 브로커 짓을 한 것을 거론하지도 않고 억울하게 영구제명을 당했다고 자기변명이나 또 지껄였다. 이는 몇 달 후에 출연한 다른 뉴스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일단 여러 기행이나 사고에도 불구하고 5년의 보호관찰기간 자체는 유지되었기에 별 이변이 없다면 보호관찰기간이 끝나는 2016년 8월. 징계가 해제되었다. 물론 그 죄질을 감안할 때 받아줄 곳이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최성국 본인은 5년이라도 어떻게든 채워서 선수로 복귀하고 싶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으며, 승부조작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능할지 몰라도 위에 서술하듯이 피파 영구제명을 당한 터에 과연 그런 걸 각오하면서 받아줄지? 게다가 나이가 나이이다. 1983년 생인 최성국이 2016년 말에 운좋게 복귀한다 한들 앞으로 몇 년이나 더 뛸 수 있을지가 아니라 몇 개월이나 더 뛸 수 있을지 모른다. 미로슬라프 클로제는 거의 40살까지 뛰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클로제가 세계적인 선수이자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내에서는 최고의 레전드라서 가능한 거다. 아무리 대한민국이라고 해도 최성국은 박지성같은 선수가 아니다. 그냥 포기하고 자신의 잘못을 반면교사 삼는 게 더 낫다.

복귀해도 주전으로 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거니와 뛸 수 있다 하더라도 뛸 수 있는 기간이 그리 길지 않을 뿐더러 위 아 더 월드로 욕먹으면서 서포터들까지 분노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징계 기간이 끝나는 2016년 7월에 축구계에서는 여전히 복귀할 가능성이 없다고 밝혔다.[14]

2016년 3월에는 토토 분석 사이트에 출연하여 여전히 자기합리화와 변명을 곁들여 그라운드로 가고 싶다고 망상을 풀었다. 유튜브. 이후 조용히 잊혀지나 싶더니 스포플레이[15]에서 하필이면 세리에A 중계를 하게 되었다. 흑역사를 극복하고 다시 상승하고 있던 세리에의 팬들은 단체로 분노를 쏟아내는 중. 한 팬이 스포플레이에 승부조작범에게 해설을 시키냐며 항의했지만 가볍게 묵살당했다.

2016년 12월에는 강남역 인근에 고깃집을 열었다. 최성국은 평소 요식업에 관심이 많았고, 열심히 살기 위해 매장을 오픈하게 되었다고.[16] 그런데 한편으로는 여전히 축구계로 복귀를 꿈꾸고 있다는 사족을 붙였다. 물론 지금도 복귀는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영원히 복귀는 안 된다. 조작 C급들도 안현식이나 내셔널리그로 옮긴 조형익 정도를 제외하면 결국 축구계를 다 떠났는데, B급도 넘어 A급 조작인을 받아줄 팀도 없다.

2019년 4월에 서울 역삼동 모처에 축구교실을 열었다. 2019년 10월에는 유튜브에 최성국 TV를 열고, 승부조작에 관련된 당시 정황을 설명한답시고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마구 늘어놓았다. 욕먹고 해당영상도 삭제했는데 요약하자면 승부조작에 가담했지만 대가는 없었고, 조직폭력배의 협박을 받았으며[17], 아들이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싶어하지만 나 때문에 하지 못해 속상하고[18] 어떻게든 축구를 통해 사죄하고 싶다는 것이다.기사 이에 우충원 기자가 '받은 금액이 수십억이든 1원이든 승부조작은 조작일 뿐이다'라며 이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해당 기사. 승부조작 관련 때문에 거의 댓글이 죄다 악플 뿐이다. 2019년 12월에 올라온 영상을 끝으로 더 이상 올라오지 않고 있으며, 사실상 버려진 채널로 봐도 무방하다. 올라온 게시물도 대부분 축구 강습 관련인데 대부분 좋지 못한 반응 뿐이라 유튜브도 접은 걸로 보인다.[19] 2023년 3월 현재, 최성국TV로 알려져 있던 유튜브 채널은 이름이 바뀌었으며 동영상은 없지만 연결되어있는 아프리카 TV 채널이 최성국과 관련없는 내용이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페이지 주인이 바뀐듯 하다.

2023년 4월 5일에 올라온 기사와 영상에 의하면 파주고려FC U-18팀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는게 밝혀졌다. 심지어 본인은 영구제명으로 팀 감독을 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남의 명의를 빌려서 하고 있는 사실이 알려졌다. 기사 영상 그리고, 곧바로 KBS와 대면 인터뷰가 보도됐는데 자신은 친구가 운영하는 클럽에서 운전과 간단한 훈련 보조만 한다고 하며 급여는 따로 받지않고 용돈 정도만 받을 뿐이고 생계를 유지하려면 여기 있으면 안된다고 선을 그었다.# 사실 최성국의 주장이 사실이라도 문제인게 최성국은 이미 두차례의 음주운전 전과가 있다.

5. 두 차례 음주운전


2013년 12월 27일, 음주운전까지 한 사실이 알려졌다. # 여담이지만 최성국은 승부조작 이후 차도 국산차로 바꾸고 자숙중이라고 밝혔는데, 막상 음주운전 당시 몰고 있던 본인 소유의 자동차미니 쿠퍼였다.[20] # 게다가 이전에도 음주운전으로 벌금형 150만원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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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입학] [2] 트랜스퍼마크트에서 최성국이 국내에서 승부조작 징계를 받고 이적을 도모했던 북마케도니아의 라보트니츠키에서의 경력을 포함하고 있으며(2011년 9월 1일자 입단), 이듬해인 2012년 3월 16일자로 영구제명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정식 경기에선 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3] 이때 같이 뛰었던 선수로 조한선이 있다.[4] 그래도 23인 엔트리와 동행하면서 이들이 일궈낸 4강 신화를 함께했다. 마치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에서 예비명단으로 대표팀에 합류하여 동행한 오현규와 비슷한 상황이다.[5] 당시 울산은 자타가 공인하는 우승권 팀이었는데, 하필이면 성남이 2001년부터 2003년까지 K리그 3연패 전설을 남긴 시기다.[6] 다만 U-23, U-20 대표팀에 계속 소집되다 보니 리그 경기를 결장하는 일이 잦았고, 후반기에는 홍콩 U-23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쇄골이 부러지며 조기에 시즌 아웃되고 말았다. 반면 정조국은 최성국만큼은 대표팀에 소집되던 선수는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리그에서 유리하게 기록을 쌓을 수 있긴 했다.[7] 당시 멤버가 다름아닌 정조국, 박주영, 조원희, 이호, 오범석, 김영광 등이다. 그야말로 황금세대.[8] 약 4년 전 이동국이 모든 연령별과 A대표팀, 그리고 소속팀까지 계속 차출당하며 무릎이 갈리도록 뛰었던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9] 시즌 개막 전 출간된 팬북에도 실린 내용이다.[10] 일부 팬들은 이를 양심 선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 수사망이 좁혀져 오던 상황에서 자진 신고를 한 것인 만큼 이를 양심 선언이라고 보긴 어렵다.[11] 승부조작으로 퇴출된 선수들의 이후를 봐도 자신이 몸담았던 곳에서 계속 남아 있는 경우는 없다. 게다가 최성국은 외국으로의 이적 시도 탓에 승부조작에 관해서는 이미지가 더 떨어질래야 더 떨어질 수 없는 상황이다.[12] 축구 쪽 일을 하고 싶으면 조기축구회나 개인이 축구교실을 차리는 것 밖에 답이 없다는 이야기이다.[13] 같은 연령대에서 골키퍼로 활약 중인 김영광을 제외하면 필드 플레이어로 최성국과 동년배인 선수는 이미 다 은퇴를 했으며, 대부분 지도자로 제2의 삶을 살고있다.[14] 복귀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 완전 영구제명으로 조정되어 그런 건지 아니면 죄질이 나빠서 징계가 풀려도 어차피 복귀 못할 선수라서 가능성이 없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는데, A, B급들이 거진 대부분 복귀하는 데 실패했음을 감안하면 후자 쪽이 더 가망이 있어보인다.[15] 스포티비가 아니다. 혼동 주의 바람.[16] 프랜차이즈 고깃집이다. 그러나 2019년 기준으로 공식사이트에서 매장이 없어진게 확인되었다. 블로그에 방문후기가 몇 개 검색되긴 하는데 2018년 이후로 후기가 없다.[17] 설사 이 점이 사실이더라도 본인이 조직폭력배에게 속아넘어가 승부조작을 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18] 그런데, 아들이 다른 팀도 아니고 최성국이 승부조작을 해서 말아먹은 수원의 유스팀인 매탄고등학교에 다닌다.[19] 올라온 댓글의 대부분이 범죄자한테 축구를 배우고 싶지 않다는 반응이 대다수다.[20] 물론 차를 또 바꿨을 가능성도 있는데, 중고차라면 갑자기 결함이 생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고차가 아니더라도 기사가 난 시점에서 10개월 지났으니 충분히 차를 바꿀 시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