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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01:42:51

윤성효

윤성효의 역임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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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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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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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효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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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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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효의 기타 정보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수원 삼성 블루윙즈 영구 결번
No.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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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인
파일:윤성효.jpg
윤성효
尹星孝 | Yoon Sunghyo
출생 1962년 5월 18일 ([age(1962-05-18)]세)
경상남도 김해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3cm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1]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한일은행 축구단 (1985~1986)
포항제철 아톰즈 (1987~1993)
대우 로얄즈 (1994~1995)
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6~1998)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0)[2]
감독 수원 삼성 블루윙즈 2군 (1999 / 코치)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0~2003 / 코치)
숭실대학교 (2004~2010)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0~2012)
부산 아이파크 (2013~2015)
김해시청 축구단 (2017~2023)
국가대표 없음
{{{#!wiki style="margin: 0 -10px -5px"
{{{#373a3c,#dddddd {{{#!folding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0f0f0><colcolor=#000000> 학력 부산교육대학교부설초등학교
동래중학교
동래고등학교
연세대학교
등번호 수원 삼성 블루윙즈 - 38 영구 결번
}}}}}}}}}}}} ||

1. 개요2. 선수 경력3. 감독 경력
3.1. 수원 삼성 블루윙즈 코치3.2. 숭실대학교 감독3.3.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
3.3.1. 2010 시즌3.3.2. 2011 시즌3.3.3. 2012 시즌
3.4. 부산 아이파크 감독
3.4.1. 2013 시즌 : K리그의 스토리 메이커3.4.2. 2014 시즌 : 감독으로서의 성장3.4.3. 2015 시즌 : 부산에서의 마지막 시즌
3.5. 공백기3.6. 김해시청 감독
4. 논란
4.1. 갑질 논란
5. 평가6. 수원 시절 어록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2. 선수 경력

축구부가 없는 김해대감초에서 두각을 드러내 부산교대부속초로 전학갔고 이후 축구 명문 동래중-동래고-연세대를 거쳤다. 연대 3학년 감독이 교체된 이후 중용을 받지 못하며 2년 간 경기에 거의 나서지 못했지만 실업팀 신분으로 축구대제전에 참가하던 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했다.

1986시즌 리그 20경기 5득점 1도움을 기록해 리그 베스트 11 MF 부문에 선정되며 두각을 보였다.

한일은행에서의 활약으로 당시 호화멤버들이 포진한 포항제철 아톰즈에 이적했다.

입단 첫해인 1987시즌 이회택 감독의 중용을 받으며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리그 20경기 2득점 1도움을 기록하며 리그 준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1988시즌 단 7경기만을 뛰고 무릎연골수술을 받으며 시즌 아웃됐고 선수 생활의 기로에 선다. 그러나 이회택 감독과 조윤옥 감독 대행의 배려로 성공적인 재활을 끝냈고, 1년 만에 돌아와 매년 20경기 이상을 소화하는 등 주전으로 활약했다.

특히 1992 시즌 리그와 리그컵 포함 33경기 3도움을 기록하며 4년 만에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당시 포철은 최상국, 조긍연 등이 떠나고 홍명보, 박태하, 최문식, 박창현, 이영상 등 젊은 피로 세대교체를 단행했는데 30세의 윤성효는 이흥실, 박경훈 등과 함께 노장으로서 팀의 중심을 잡아주며 팀의 부활을 이끌었다.

이듬해인 1993년을 앞두고 부임한 허정무 감독 아래서도 아디다스컵 우승에 기여하며 프로 데뷔 후 최다인 시즌 34경기에 출장했다.

1994 시즌을 앞두고 초등학교부터 거주한 부산을 연고로 하는 대우 로얄즈로 이적했다. 두 시즌 동안 대우에서 총 47경기를 뛰며 제 몫을 해줬지만, 팀은 세대교체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당연히 성적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아킬레스건 수술도 하는 등 부침을 겪었다.

본래 사실상의 고향팀인 대우에서 은퇴하려던 윤성효는 대표팀 시절 은사인 김호 감독의 부름을 받고 1996 시즌을 앞두고 창단한 신생팀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창단 멤버로 입단한다. 등번호 38번을 받았다.

1996 시즌 중원 파트너 바데아와 함께 중원에서 맹활약하며 팀을 준우승에 올렸다. 리그와 리그컵에서 총 34경기를 뛰며 34세의 나이에 또 다시 개인 최다 출전 타이 기록을 세웠다.

1998 시즌에는 수원의 창단 첫 리그 우승에 기여하며 개인 세 번째 K-리그 우승을 거머쥐게 됐다. 10년 만에 리그 20경기 미만의 출전수를 기록했는데, 그럼에도 19경기나 소화했다.

이후 신예 김진우이병근 등 신예들의 등장으로 인해 1999 시즌을 앞두고 은퇴를 발표했다. 2000 시즌 김진우와 이병근의 부상으로 잠시 현역에 복귀해 3경기를 치르긴 했지만 이후 완전히 은퇴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수원에서 그의 38번을 암묵적인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그런데 그는 수원에서 겨우 4년밖에 뛰지 않았다. 이 영구 결번에 대한 비화도 있는데 영구 결번 항목 참조.

K리그에서의 활약에 비해 국가대표로 뽑힌 일은 거의 없다.[3][4]

그럼에도 프로 통산 311경기나 소화했다. 늦은 나이에 데뷔해 프로 13년 동안 두 번을 제외하면 매년 20경기 이상 소화하던 하드 워커였고, 한국 나이로 37세까지 현역 생활을 한, 당시엔 보기 드물게 롱런한 선수이다.

3. 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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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미로 남은 부산 아이파크 시절 K리그 감독계의 아이콘, 그리고 서울 잡는 귀신(!)#[5][6]

축구/응원가 들어보기
자매품으로 세제믿달이 있다.

3.1. 수원 삼성 블루윙즈 코치

은퇴 후 1999년부터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코치로 선임되었다. 상술한 대로 코치 2년차이던 2000년,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공백이 생긴 팀 사정상 잠시 현역 선수로 복귀해 3경기를 뛰는 등 플레잉코치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후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2001년부터 다시 코치로 복귀해 2003년까지 수원의 코치로 있었다. 2003년을 끝으로 김호 감독이 물러나고 차범근 감독이 새로 부임하는 과정에서 수원을 떠났다.

3.2. 숭실대학교 감독

2004년을 앞두고 숭실대학교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도합 8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리면서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울산대학교가 강세를 보이던 대학 축구 리그를 정복했다.

6년 반 동안 숭실대를 지휘하며 상당히 많은 수준급 선수들을 양성했다.

그의 손을 거친 대표적인 선수들을 나열하자면, 김영후, 양상민, 김병석, 김원일, 박주호, 박종진, 김명운, 박기동, 김대호, 하강진, 고무열, 배천석, 이정협 등 셀 수 없이 많은 선수들을 양성하고 K리그에 배출했다.

2010년 가을부터는 생활체육학과 겸임교수로도 활동했다.#

3.3.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

2010년 6월 경질된 차범근 감독을 대신해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새 감독이 되었다. 차범근 감독과 비슷한 지명도의 국내지도자 혹은 외국인 감독을 영입할 것이라는 예상을 깬 결과. 수원과 K리그 올드팬이야 알지만 K리그를 잘 안 보는 사람들이나 2000년대 이후로 신규유입된 K리그팬들에게는 역시나 듣보잡 취급했다.

구단 최초의 구단 선수 출신 감독이 됐다.

3.3.1. 2010 시즌

감독 교체 버프를 한껏 받은 수원은 한때 꼴찌까지 쳐져있던 순위를 7위로 마무리 했고 FA컵 우승을 하면서 2011 AFC 챔피언스 리그 티켓을 거머쥐었다.

선수와 코치 시절 보좌하던 김호 감독의 영향이 커서인지 나름 대학 감독 시절 선수 육성에 어느정도 일가견이 있었던지라 수원의 팀 체질을 바꿀 감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3.3.2. 2011 시즌

그리고 2011년 수원의 폭풍영입이 시작되었다. 이운재조원희를 보내고 그 대신 정성룡, 최성국, 오장은, 이용래, 마토, 게인리히, 오범석 그리고 대망의 2011시즌을 맞이했다.

그는 황보관 감독과 함께 디시인사이드 국내축구 갤러리의 무한 까임권을 받았다.
2011년 4월 15일 수원 vs 강원의 승리를 마지막으로

무려 K-리그 전반기 15경기중 7경기에 승점 1점 추가라는 OME 급의 성적을 보여줬다! 그리고 팀은 14위로 추락. 그 중 성남과의 무승부도 게인리히가 후반 43분에 얻은 득점이다. 수원은 하마터면 7연패를 할 뻔했다.

최근K리그에서 5위의 성적을 거두고 FA컵에서 울산 현대를 연장접전 끝에 3:2로 이기고 결승에 진출해 팬들에게는 지지를 받았으나 타팀 팬들에게는 한국의 베니테스, 축구계 양승호, 운장으로 불리고 있다.

정말로 양승호의 기운을 받았는지 전반기의 막장행보에서 후반기에는 리그 4위까지 복귀했다. 사실 수원의 선수단 구성을 봤을 때는 당연히 올라가야 할 성적이다.

10월 3일 FC 서울과 벌인 시합에서 서울 팬들은 윤성효 보고 "그놈의 잘난 운빨, 고추장에 쌈이나 싸드시지!"라며 윤성효를 디스했다. 이날 44,537명이 입장해 수원 월드컵 경기장 최초이자 K리그에서 월드컵 경기장 최초 만원 관중을 기록했는데, 경기 시작 전부터 그랑블루 서울 서포터즈간 날카로운 신경전이 오고간 가운데 양팀 치열한 공방전 끝에 후반33분 스테보의 결승골로 1:0승리와 동시에 3위로 뛰어 올랐다.

파일:attachment/윤성효/a오프사이드수원vs서울.jpg

그런데 그 스테보의 골 장면이 나왔던 프리킥은 오프사이드였다. 하늘은 정말로 윤성효를 돕고 있었다. 10월 8일에 있을 수원 vs 전북의 경기에 이동국, 서정진, 황보원이 국가대표 차출로 결장하면서, 윤성효의 운은 절정을 찍고 있다. 수원도 정성룡, 이용래, 게인리히, 스테보를 차출당해서 도찐개찐이다. 허나 수원은 원래 뽑히던 선수들이고 전북은 조광래가 별로 쓸 생각도 없으면서 혹은 뽑히리라 기대도 안 하던 선수들을 뽑은 것이다.

정성룡, 이용래, 게인리히, 스테보 등 차포뗀 상태로 홈경기에서 전북을 맞아 2:2로 비겨 3위 유지에는 성공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이야기이나, 이날 윤성효가 크게 성질을 냈는데 전북경기에서 후반 31분 조용태를 교체투입했는데 2:1 상황으로 앞서다가 조용태가 수비벽에 슛을 때린 것이 김동찬한테 가고 에닝요에게 패스해 동점골을 만들어 2:2 상황이 됐다. 이 장면을 본 윤성효는 노발대발해서 라인 앞까지 나와 조용태에게 욕을 퍼붓고 그것으로는 부족했는지 허공에 발길질까지 했다. 이걸 본 관중들과 그랑블루는 당황했으며 대기심과 코치들까지 나와서 겨우겨우 윤성효를 진정시켰으나 조용태는 기가 죽어 제 플레이를 펼치치 못하고 결국 교체당했다.

그리고 시즌 트레블을 위한 첫 단추인 2011 하나은행 FA컵 결승에서는 10월 3일 리그 경기의 천운이 독이 되어 돌아왔는지, 멀쩡한 박현범의 골이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는 바람에 골을 날리고, 후반 내내 파상공세를 펼쳤음에도 성남의 코너킥과 조동건의 헤딩 한 방에 0:1 패배했다. 내년도 AFC 챔피언스 리그 티켓을 놓고 FC 서울과 다시 한 번 치열한 경쟁을 노려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타팀팬 특히 FC 서울팬들은 경기를 보고 "저번 오프사이드의 인과응보"라며 깠다.[7]

6강 플레이오프 부산 아이파크전에서 전반 막판 하태균의 결승골을 잘지켜 뻥축구 개판의 경기력에도 6, 7백을 시전해 부산을 이기고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하지만 경기 내내 침대축구와 심판의 석연치 않은 수원 편파 판정이 나와 원정 온 부산 팬들에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오죽하면 수원의 서포터즈인 그랑블루가 "공격해라 수원!"이라고 외쳤을 정도다. 준플레이오프 상대는 울산 현대로 확정된 상태에서 K리그 정규리그 순위가 울산보다 위여서 2경기 연속 홈에서 경기를 치르는 장점을 얻었다. 그러나 홈에서 0:1로 질질 끌려다니다가 후반 38분에 마토의 PK로 겨우 동점을 만들어 승부차기까지 가는 추태를 보였다. 그리고 두번째 키커부터 삼연뻥을 작렬시키면서 울산에게 아챔 티켓과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모두 내주고 말았다.
3.3.2.1. AFC 챔피언스 리그
의외로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초반부터 좋은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5월 25일 아챔 16강전에서 만난 나고야 그램퍼스를 2:0으로 바르고 8강에 진출했다.

리그에서는 성적이 떨어지다 못해 천연 암반수를 뚫었지만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1패도 하지 않고 4승 3무라는 성적을 거두며 아시아 깡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차범근 시절엔 죽어도 안터지던 하태균의 포텐을 터트렸다.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보자. 2011년 9월 29일 모두가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던 AFC 챔피언스 리그 4강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역시 경기 내용적인 측면으로 포풍같이 까였다. 8강 레벨의 축구가 아니라 병림픽을 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전적을 보면 놀랍다.

종합전적 5승 4무로 단 1패도 허용하지 않고 무패로 4강 진출을 달성했다. 4강 진출팀을 보면 전북 현대 모터스는 세레소 오사카에게 2패를 당했고, 알 이티하드와 알 사드 조차도 4강에 올라오면서 패를 기록했는데 유일하게 무패로 4강에 올랐다.
홈에서 조브아한에게 1:1로 비겨서 축구팬들은 수원탈락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분위기고 세레소 오사카에게 3:4 패하고도 홈경기를 가진 전북을 더 좋은 상황으로 보았다.

조브 아한홈은 1,300m 고지대에 있고 이란 프로리그 내 악명높은 응원과 여러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2:1승리를 거둬 모두의 예상을 깨고 4강 진출에 성공했다.

게다가 옆동네 이란 프로리그 우승팀 세파한이 1차전에서 알 사드를 1:0으로 이겼지만 경고누적 선수를 출전하는 촌극을 일으켜 3:0 몰수패를 당해 2차전 카타르 원정에 엄청난 부담을 안게 되었다. 2차전에서 전반에만 2:0으로 앞서가면서 만화하나 싶지만 후반 알 사드가 만회골을 넣어 4:2로 알 사드가 4강에 진출해 또 한번 행운이 따라주었다. 알 사드 이정수는 친정팀을 AFC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만나게 되었다. 알사드와 4강전에서 전반을 0:0으로 마친채 필승 각오로 후반전에 임했다.

하지만 잠시후 거대한 해일이 들이 닥칠줄 누가 알았겠으랴?

수원은 홈에서 상당히 답답한 경기를 펼치다가 결국 후반 24분 알사드의 니앙에게 선제골을 내 주고 만다. 경기장 분위기는 수원의 안풀리고 답답한 경기에 여기 저기서 그랑블루 국축갤은 수원탓 윤성효 탓으로 돌렸고 경기는 약간 지루한 침대축구 정국으로 가던 도중 실점 후 공격 상황에서 최성환이 알 사드의 수비수의 축구화에 정통으로 얼굴을 밟히고 두 선수가 고통으로 경기장에 쓰러진 상황에서 염기훈은 공을 경기장 밖으로 걷어냈다.

그런데 알 사드가 드로인한 공을 수원 선수에게 넘기지 않고 바로 파워스루패스 공격을 전개해 수원이 유야무야하는 상태에서 골을 넣어 버렸다. 이 문제로 흥분한 수원의 관중이 난입해 알 사드의 골키퍼와 언쟁을 벌였고 결국 골키퍼는 관중에게 주먹질 폭력을 행사했다.



양팀 선수는 물론이고 코칭 스태프까지 뒤엉켜 싸우는 초유의 폭력사태가 벌여졌고, 이 과정에서 알 사드의 몇몇 선수들은 피를 흘리기도 했다. 스테보와 게인리히는 사전뜻 그대로 용병의 모습을 보여줬다.[8]

이 과정에서 이정수 선수가 페어 플레이가 아닌 점을 들어 한 골을 내주자고 동료들에게 이야기 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동료들과 언쟁이 벌어졌고 결국 이정수는 자신의 발로 경기장을 떠났다. 양팀 선수 각각 한 명씩 퇴장당하고 경기가 진행되었지만 알 사드 선수들의 신경질적인 플레이로 인해 한차례 퇴장과 경고가 더 나왔고 10분 추가시간동안 수원은 만회골을 터뜨리는데 실패, 창단 후 15년만에 아시아팀을 홈에서 맞아 패배하고 말았다.[9] FC 서울, 성남 일화 천마 팬들은 라이벌 관계를 떠나 수원을 옹호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나머지 팬들도 이날 만큼은 수원을 옹호해 주었다.

3.3.3. 2012 시즌

이번 시즌은 AFC 챔피언스 리그도 없다. 다른데 눈 돌릴 틈 없이 리그에 올인 모드로 시작. 주요 영입으로는 이미 2011시즌 중반 영입한 스테보와 겨울 이적시장에서 라돈치치, 조동건, 수비에 호주출신의 에디 보스나를 데려오는 등 폭풍영입을 진행하였다. 주요 영입만큼 팀을 떠나는 선수도 많았다. 마토를 내보내고 게인리히도 팀을 떠났으며 염기훈이 경찰청 군입대, 이상호의 중동 임대, 황재원의 이적 등 떠나는 선수도 많았다.

시즌 초반부터 리그 선두를 질주한다. 강력한 우승 경쟁 상대로 예상되었던 울산과 서울, 전북은 예상밖에 고비를 겪으면서 뒤를 쫓는 양상이 펼쳐졌으며, 제주가 깜짝 돌풍을 일으키며 2위까지 바짝 추격했다. 그러나 6월 들어서면서 리그 순위에 한바탕 변동이 생긴다. 닥공 시즌2라는 찬사를 들을만큼 전북이 무서운 기세로 승점을 챙기면서 1위를 탈환하고, 서울과 울산 역시 수원을 턱밑까지 바짝 추격해온다.

그리고 7월 들어 K리그 팬들과 프렌테 트리콜로는 충격과 공포를 목도하게 된다.
놀랍게도 무득점 11실점 3연패라는 성적표를 받는다. 최근 들어서 실망스러운 경기력에 불만을 품던 서포터즈들은 급기야 7월14일 전북전에서 윤성효 퇴진을 외치며 야유를 퍼부었다.

이후에도 2무를 기록한 끝에 인천을 만나 가까스로 1승을 거두며 7월 최종성적은 3위로 끝났다. 그러나 이는 월말 정산의 마술일 뿐, 사실 7월 내내 4위였다가 막판 울산이 부산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승점 2점 차로 역전한 것이라 팬들로서는 불안이 가시지 않은 상태다. 그나마 봄에 잔뜩 벌어놓은 승점 덕분에 상위권에 머물고 있기는 한데, 우승권 경쟁 팀들이 여름을 나는 페이스에 비한다면 현재 수원은 글자 그대로 방전 상태라 전망이 어두워 보인다. 그렇다고 8월 들어서 반등할 호재가 딱히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28라운드 서울 원정에서 다시 한번 서울을 잡아내면서 반등의 기회를 잡았다. 심지어 이 경기까지 서울전 전적이 6승 1패에 5경기 연속 무실점이기 때문에 '딴건 몰라도 서울 잡는건 성효가 최강'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하지만 29라운드 대전과의 홈경기에서 무재배를 하면서 또 다시 대차게 까였다.[10]

30라운드까지 일정을 마치고, 3위로 상위 스플릿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1위 서울과 승점 11점차로 벌어졌고, 4위 울산은 승점과 득실까지 같고 다득점에서 앞섰을 뿐이라 사실상 털끝만한 차이라 팬들은 우승 레이스에 대한 희망은커녕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권 획득여부를 걱정할 판이었다. 참고로 5위 포항과는 승점 3점차다.

10월을 마친 시점에서 리그 성적은 3위. 이미 1위 서울과 승점은 14점차로 벌어졌고, 2위 전북과도 7점 차이라 사실상 우승 경쟁에서 탈락한 모양새다. 한편 스플릿 시스템이 가동된 이후 줄곳 3위 자리를 놓고 다툰 울산은 아챔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상대적으로 리그에 집중하지 못하면서 5위로 쳐졌고, 반면 포항이 꾸준히 수원의 뒤를 쫓는 형국이 되었다.

11월을 마친 시점에서 리그 성적은 4위. 포항과 줄곳 피말리는 3위 다툼을 벌이다 결국 막판 승점 1점차로 3위 자리를 내줬다. 공교롭게도 12월 2일 리그 최종전 상대가 포항이라 이날 승자가 3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2월 2일 포항에게 0:3으로 완패하며 최종 순위는 4위. 더구나 이날 황선홍 감독은 후반 38분 황진성을 빼고 문창진을 투입하는 한수를 선보이기까지 했다.[11] 다행히 포항이 FA컵 우승으로 아챔 진출권을 획득한 상태이기 때문에, 리그 3위까지 주어지는 진출권은 대신 수원이 받게 되었다.

2012 시즌이 끝나고 리그 역사상 첫 강등팀까지 나오면서, 리그엔 감독 교체 바람이 몰아쳤다. 축구팬들의 관심사는 단연코 대표팀 최강희 감독의 팀 복귀가 맞물린 전북 이흥실 감독과 올 시즌 잔뜩 체면을 구긴 수원 윤성효 감독의 재계약 여부였다. 그러나 수원 프런트는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 프런트가 점찍어둔 감독이 있는데 수원행을 사양한다는 카더라가 돌고,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유임하지 않겠냐는 예측도 힘을 받았다.

12월 12일, 수원 구단은 윤성효 감독의 해임을 결정하였다. 후임 감독은 서정원 수석코치.

3.4. 부산 아이파크 감독

2012년 12월 17일, 안익수 감독이 성남으로 이적하면서 부산 아이파크는 윤성효 감독을 새 감독으로 임명했다. 계약 기간은 2년. 이로써 백수 생활은 불과 닷새만에 끝나고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었다. 일단 표면상 윤성효 감독을 뽑은 이유는 부산 지역 연고가 있는 감독이고 승강제가 실시되는만큼 최소한 승점 관리가 가능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사 그리고 축구팬들은 폭소조소를 날렸다. 김인완 수석코치를 대전 감독으로, 안익수 감독을 성남 감독으로 내주며 사실상 코칭 스텝진이 붕괴한 부산으로선 뜬금없는 인사의 연속이기도 했거니와, 하필 많고 많은 감독 가운데 세제믿윤-안익수 거르고 윤성효라는 인사는 농담이라면 또 모를까 보통 사람은 생각하기 어려운 결과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수도 아닌 감독에게 지역연고 찾는 꼴도 우습거니와, 전술한 바와 같이 윤성효 감독은 포항이나 수원 프렌차이즈 감독이라면 또 몰라도 부산과는 연고가 희미한 사람이다. 이건 누가 봐도 부산이 2013년에도 안익수 체제로 가려다가 구단주의 빅딜로 성남에 빼앗기면서 부랴부랴 영입한 정황히 뚜렷했다. 수석코치가 먼저 짐 싸버려서 다른 팀들처럼 내부승격도 안되고, 그렇다고 검증안된 초짜 감독을 데려오자니 내년 승강제가 무섭고, 결국 만만한 게 세제믿윤이란 식이니 조소가 흘러나올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수원팬들은 속은 후련한데 왠지 부산팬들에게 미안함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3.4.1. 2013 시즌 : K리그의 스토리 메이커

오프 시즌 컵대회 2개를 우승하면서 '시즌 시작하기도 전에 더블을 하는 명장 윤성효', '역시 세제믿윤'이라는 까는 건지 찬양하는 건지 구분이 안되는 반응들이 나왔다. 그러면서 일부 팬들은 2012년 프리시즌에 똑같은 행보를 보이고 시즌은 시망해버린 성남 일화의 케이스를 들며 똑같은 코스를 밟을거라든지 12시즌 성남보다도 못한만큼 더 시망일거라든지 여러가지 암울한 미래를 예견했다.

그리고 시즌 개막. 첫 경기서 홈에서 열린 강원전에서 2:0으로 앞서가고 게다가 강원이 퇴장까지 당해 10명이 되면서 낙승하는거 싶더만 내리 골을 먹히며 2:2 무재배를 거둬 역시나라는 반응들이 나왔다. 그 다음 경기서 졸전 끝에 경남 원정에서 패배를 기록하며 네티즌들의 예상은 맞아들어가나 했다. 그러나..

그 다음 경기는 디펜딩 챔피언 서울이었다. 윤성효와 서울의 리턴 매치로써 큰 관심을 끌었던 이 경기는 설마했던 윤성효가 1:0으로 서울을 또다시 패퇴시키고 최용수 서울 감독에게서 '감독 전적 6승 1무'란 압도적인 우위를 지켜내며 부산의 시즌 첫 승을 이뤄냈다. 다음 제주 원정 경기서 다시 패배하며 윤성효는 진짜로 서울밖에 못 잡는건가 했으나 성남을 홈에서 2:0으로 격파. 그 다음 울산 원정서는 무실점 무재배로 승점을 캤고 그 다음 경기는 무려 수원 삼성 블루윙즈 경기였다. 윤성효와 수원의 만남인만큼 서울전만큼이나 큰 주목을 받았는데, 수원은 하필 그 전 경기서 슈퍼매치를 치르며 체력이 바닥난데다가 정대세는 퇴장징계까지 먹은 만신창이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 4분에 김대경한테 골을 헌납, 수원과의 악연이 계속되는가 했으나 윤성효의 남자 임상협이 동점골을 득점하고 수원의 오장은이 퇴장당한뒤 방전된 수원을 상대로 반코트 게임이 되어버렸고 무려 수비수 장학영이 부산 데뷔골을 성공시키며 수원을 잡아버렸다. 아쉽게도 이 경기서 윤성효의 모습은 카메라에 많이 비치지 못했는데 이는 윤성효가 그 전 경기서 퇴장을 당해서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일어난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모습을 보여주며 무패행진을 유지, 11라운드까지 4승 5무 2패로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충격적인 성적을 내는중이다.

다음 경기 인천전에서 이천수를 필두로 한 기세 오른 인천에게 홈에서 3:0으로 참패를 당하며 기세가 꺾인다. 그러나 다음 경기인 6월 1일의 전북 현대 원정에서 4:1 대승을 거두며 다시 한 번 사고를 치며 전반기를 화려하게 끝마쳤다. 5승 5무 3패로 정확하게 승점 20점을 마크. 특히나 최근 몇 년간 K리그 상위권을 지배하던 전북, 울산, 포항, 수원, 서울등 강팀을 상대로 3승 2무를 거두며 윤성효 명장설을 대두시키고 있다.

이러한 예상외의 모습을 보이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객관적인 전력만 보았을 때는 수원이 부산보다 우위겠지만, 사실 수원은 전임 차범근 감독의 쌍팔년도 분데스리가 스타일 때문에 팀이 많이 정체된 상태였다. 때문에 윤성효 감독은 리빌딩과 성적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했고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결과로 끝났다. 반면 부산은 시민구단급으로 짠 팀 재정 때문에 황선홍 안익수 두 감독이 근 5년 세월동안 어린 선수들을 조련하고 꾸준히 기용해왔고, 비로서 팀이 물이 한창 오르는 중이었다. 또한 윤성효 감독이 부임하면서 강하게 군기를 잡는 스타일인 안익수 감독 시절보다 팀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졌고, 축구 전문가들은 그것이 의외의 호성적을 내는 원인으로 꼽는다.

특히나 시즌 시작전부터 윤성효 감독과 이전 인연으로 인하여 기사화되던 임상협이 윤성효 감독의 빠돌이가 되었다. 팀의 긍정적인 변화에 대한 인터뷰를 수도 없이 많이 하는가 하더니 급기야 11라운드에서는 득점 세레머니를 이 항목 맨위의 성효부적을 꺼내들어 머리에 붙이는 퍼포먼스를 하였다. 임상협 외에도 여러 선수들이 트위터에서 윤성효를 신격화하는 등 전체적으로 꽤나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이전 수원 블루윙즈 시절에는 선수단 장악에 완벽하게 실패했던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러한 윤성효에 대하여 임상협이 "윤성효 감독님은 잔디다. 잔디와 꽃의 관계처럼 감독님(잔디)은 묵묵히 우리 선수들(꽃)을 항상 빛나게 해주신다고 글을 남겼다.

2013년 8월 7일 FA컵 8강 전에서 부산과 서울이 맞붙는 일정이 잡히면서 축구팬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서울은 시즌초 설명이 불가능한 부진이 계속되며 상위 스플릿에도 끼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왔으나, 여름 들어서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오며 우승권 경쟁에 뛰어들었다. 심지어 지긋지긋한 수원전 무승 징크스까지 깨버린만큼 일부 찌라시트레블까지 언급할 정도였는데, 그 중요한 길목을 막아선 것이 세제믿윤 윤성효. 과연 서울극장이 새롭게 개봉할 것인지 아니면 서울 잡는 귀신이 또 한번 신통력을 발휘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부산이 2:1로 승리, 이 결과에 축구팬들은 각종 게시판에서 '세제믿윤ㅋㅋㅋㅋㅋ'로 도배해버렸다.

그리고 9월 1일 스플릿 라운드를 앞둔 마지막 정규시즌 라운드를 앞두고 있었다. 상위 스플릿 티켓을 딱 한장 남겨둔 7위를 두고 부산, 성남, 제주가 동시간대 경기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서로 경기를 이긴다고 하더라도 상대간의 경기 결과까지 지켜봐야 하는 복잡한 경우의 수를 따질 상황이 닥쳤다.[12] 성남이 경기 시작하자마자 골을 넣으면서 성남이 7위로 올라갔고, 부산이 전반 40분쯤에 첫골을 넣어서 1:0이 되고 다시 7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후반 40분에 포항이 동점골을 넣어 1:1이 되어 다시 성남이 7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대로 끝나겠다 싶었던 그때 경기 끝나기 직전 부산이 버저비터 결승골을 넣어 부산이 다시 7위가 되었고 성남도 더이상 골을 추가하지 못하고 경기는 이대로 끝이 나면서 승점동률, 골득실 1점 차이로 부산이 7위를 기록하면서 상위 스플릿에 진출하게 되었다. 글자 그대로 각본 없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스플릿에 돌입한 이후 승점이 처지기 시작하자 선수단을 이원화해서 원정은 신인 선수들 위주로, 홈 경기는 1군 위주로 돌리면서 2014 시즌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상위 스플릿 진출이란 목적도 달성했기 때문에 결국 계약기간이 1년이나 남은 상태에서 2년 계약을 재계약함으로써 2015 시즌까지 부산의 지휘봉을 잡게 됐다. 원래는 2년+연장 옵션이었는데 정몽규 구단주가 팀 상태에 매우 만족해했기 때문에 이뤄진 재계약이라고 한다. 기사

그리고 11월 27일 39라운드 또 한번 부산은 경우의 수를 따질 상황에 놓인다. 이날 부산은 홈에서 울산과 맞붙게 되었는데, 이 경기는 K리그 클래식 우승팀을 가리는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는 시나리오로 흘러갔다. 38라운드까지 리그 1위인 울산과 2위인 포항은 승점 5점 차이가 났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울산이 우승 9부 능선을 넘었다고 공공연히 설레발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39라운드 일정이 포항 대 서울이 낮 2시, 울산 대 부산이 저녁 7시 30분 경기로 잡혔다. 즉 포항은 무조건 이기고 울산이 비기거나 지기만을 바라는 희망고문 중이었고, 반면 울산은 포항이 패하면 우승 확정 혹은 부산을 꺾어도 자력 우승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점한 상태였다. 그런데 결국 포항은 3:1로 서울을 대파하며 우승을 향한 실날같은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7시 30분 킥 오프 부산은 전반 21분 하피냐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결국 울산의 자력 우승 시나리오로 흘러가는데 내가 선제골을 내준건 염통 쫄깃한 희망고문을 하기 위함이었다! 후반 23분 동점골[13], 그리고 후반 44분 극적인 역전골을 작렬하면서 울산에 고춧가루를 제대로 뿌렸다.[14] 결국 K리그 클래식 우승 팀은 최종 라운드인 1위 울산과 2위 포항의 맞대결에서 결정나게 됐다. 포항과 울산의 동해안 더비경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동해안 더비를 언급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하는 경기가 되었다.[15]

경기 종료 후 기자회견 자리에서 윤성효 감독은 “우리는 K리그의 흥행거리가 되면서 올 시즌이 끝났으니 마지막 남은 울산과 포항의 경기를 즐겁게 TV로 관전하겠다”라고 말해 마지막까지 기자와 팬에게 빅재미를 선사했다. 여담으로 이날 경기에서 울산의 김신욱(19골), 하피냐(11골) 두 선수가 경고를 받아 경고 누적으로 최종전 결장크리. 철퇴왕의 쌍철퇴를 빼앗아 무장 해제시켜 버리고 매의 눈으로 우승을 노리는 황선대원군 앞에 던져놓는 업적까지 달성했다.

그리고 12월 1일 대망의 시즌 최종전. 윤성효 감독의 숭실대학교 시절 제자이자 포항에서 해병대로 복무하고 복무지 팀에 입단한 포항의 김원일이 95분 극적인 버저비터 골을 넣으면서 포항이 기적같은 역전 우승에 성공했다. 심지어 경기 다음 날 황선홍 감독이 건 전화를 받자마자 '내 할 일은 다했데이'라고 쿨하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5년, 슈틸리케호의 최대 히트작인 이정협을 최초 발굴(2013년 영입)하고 군대보낸 인물이 효멘으로 밝혀져 K리그를 넘어 국대까지 설계하는 설계자의 위엄을 보여줬다.

3.4.2. 2014 시즌 : 감독으로서의 성장

시즌 중후반이 넘는 시기에마저 최하위에 머무르는등 팀이 최악의 부진을 겪었다. 박종우가 나가고 들어온 대체 선수인 닐손 주니어의 스타일은 박종우와 달랐고, 기대가 컸던 양동현은 부상과 스타일 문제로 결국 울산 현대로 이적, 그외의 공격수 자원인 코마젝과 김신영은 자취를 감춰서 공격수들이 전멸하였다. 거기에 최근 부산을 지탱하던 수비진들마저 노쇠화로 크게 흔들리는등 총체적 난국. 2013 시즌에 크게 재미봤던 유망주 육성 또한 팀의 기반이 불안하니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결국 부산은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슬럼프에 빠진다.

하지만 최하위까지 떨어지자 그간 아껴왔던 선수들을 내치고 그간 기회가 주어지지 않던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며 변화를 모색하였고,[16] 덕분에 주세종, 유지노, 전성찬 등 최근 몇 년간 거의 뛰지도 못했던 선수들을 재발견해냈다. 거기에 우월한 수비력과 빈곤한 공격력을 가진 닐손 주니어를 아예 수비수로 내리는 전술적 변화를 주었고, 이것이 대박을 쳐내어 이전 팀 수원 삼성서 여름에 임대해온 연제민과 함께 수비를 눈에 띄게 안정시켰다. 이렇게 기반이 안정되어가자 그간 무리하게 의존되어 활약이 힘들었던 파그너임상협마저 살아났고, 이에 정규리그 막판 무패행진으로 강등권을 순식간에 탈출했다.

잔류 확정은 아직 되지 않았으나(11월 22일 경남과의 경기에서 승리하면서 잔류를 확정지었고, 팀은 10경기 무패행진을 하고 있다), 윤성효에게 많은 시련과 경험을 주고 있는 2014년이다.

여담으로 브라질 월드컵 알제리전을 이틀 남겨놓고 부산일보대예언기고한 글이 있는데, 알제리가 공격적으로 나올 것이라는 것과 제공권이 약할 것이라는 예측이 맞아떨어졌다.

3.4.3. 2015 시즌 : 부산에서의 마지막 시즌

시즌 초반부터 급격한 부진을 겪으며, 팀은 결국 강등권인 11위까지 떨어지게 되었으며, 결국 7월 12일 수원과의 홈 경기에서 1:1로 무승부를 거둔 다음날 7월 13일 부산 감독직에서 경질되고 말았다. 물론 투자를 안 해주는 모기업 탓도 있긴 하겠다만, 몇 년 사이 구단에 널리 퍼진 숭실 커넥션과 몇 년 전 수원 시절에도 별 재미 못 봤던 베르손을 또 데려오는 등의 온갖 삽질을 보면 윤성효 개인의 잘못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안익수의 유산으로 좀 버티다가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밑천이 드러났다는게 보편적인 평가.

3.5. 공백기

경남 김해 출신이라서 그런지, 2015 시즌 후 경남 FC의 감독 공모 후보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거의 답정너에 가까운 과정을 거쳐 김종부가 후임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이후 2016년 4월 26일 라디오볼에서 근황이 얼떨결에 공개되었다. 서호정 기자가 밝히기를, 부산 아이파크를 떠난 후 축구계는 쳐다보기도 싫다며 야인으로 돌아가 김해시 산 속에서 꾸지뽕 농사를 짓고 있고, 의외로 수입이 짭짤해서 돈 좀 많이 만졌다고 한다.[17]

3.6. 김해시청 감독

2016년 12월, 계약이 만료된 김귀화의 후임으로 한국 내셔널리그 축구 팀이자 자신의 고향 팀인 김해시청의 새 감독에 선임되어, 비록 다른 리그지만 현장에 복귀하게 됐다. # 숭실대와 수원 시절 함께했으나 지금은 밑바닥까지 추락한 골키퍼 하강진을 데려왔으며, 청소년 대표 출신의 지언학 등을 영입하였다.

개막 이전 김해시청을 우승 후보로 꼽는 의견이 많았고, 이에 걸맞게 윤성효는 기존의 중위권이였던 김해시청을 강력한 우승후보로까지 끌어올렸으며, 13라운드까지 6승 7무로 13경기 무패를 달성하며 1위를 달리는 저력을 보여줬다.

특히 과거 지루한 롱볼 축구만 한다는 비판받았던 것과 달리 김해에서는 숭실대 시절 보여준 빠르고 간결한 패스 플레이를 선보였으며, 내셔널리그 통합 준우승을 거두었다.

2020년 팀이 새로이 개편된 K3리그에 참가했는데, 정규리그 1위를 기록하고 K3리그 챔피언십에서도 경주 한수원을 누르고 최종 우승을 차지하면서 리그 초대 우승을 거두어냈다. 이를 통해 해당 시즌 K3-K4리그 시상식에서 K3리그 최우수지도자상을 수상했다.

2023 시즌에는 베테랑 선수들이 타 구단으로 이적하며 전력이 크게 약해졌지만, K3리그 종합순위 3위로 시즌을 마감하는 지도력을 보였다.

2023 시즌을 마지막으로 김해시청 축구단과의 계약이 만료되었고, 손현준에게 감독직을 넘기며 7년 간의 동행을 마무리했다.

4. 논란

4.1. 갑질 논란

2018년 3월 9일 “우리는 윤성효 감독에게 장난감 취급 당했다”라는 기사가 올라오며 논란이 일었다. 선수의 계약해지과정에서 잔여연봉을 주지않기 위하여 사직서를 강요했는데 윤성효 감독의 넓은 인맥을 두려워 한 선수들은 감히 항의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숭실대 감독 시절에도 이와 같은 갑질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논란이 일고 있다.#

5. 평가

5.1. 수원 삼성 블루윙즈 시절

리그에서는 2010년 꼴찌 팀을 7위까지 끌어올리고, 2011년 1무6패 14위 위기 상황에서 저력을 발휘해 4위까지 치고 올라갔고, FA컵에서도 2년 연속 결승에 올랐다. 수치상으로 본다면 초보 감독 치고는 대단한 성적이지만 사실 수원의 현질과 스쿼드를 보면 이 정도 성적은 누구나 당연히 기대하는 바라 감독의 역량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결국 2011 시즌 윤성효 감독은 능력이 썩 좋지는 않지만 천운 하나는 타고 난 B급 감독으로 이미지가 굳어졌다.

그나마 2011 시즌 하반기 들어서는 쌓아둔 운을 다 썼는지 FA컵이고 아챔이고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18] 처음에는 육성형 감독의 행보를 보이는 듯 했으나, 결국 현실은 시궁창임을 깨달았는지 2011 시즌 정규리그 30라운드 이후 구단에 대놓고 현질 해달라고 징징거렸다.# 본인 말로는 2012시즌 리그와 아챔을 병행하기 위해선 더블 스쿼드가 필요하다는데 이 발언을 한 시점에서 수원은 아직 2012시즌 아챔 출전권을 못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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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희 감독 미투데이 인터뷰 "K리그와 ACL, 둘 다 잡을 확률 100%" 잔디타령을 많이 해서 윤잔디라는 별명을 얻었다.

자신이 양성한 숭실대 출신의 축구선수들을 굉장히 선호해서 임경현, 박종진, 곽광선 등을 영입했다. 특히 강원의 수비수였던 곽광선 영입이 압권인데, 올림픽 대표팀 주장인 오재석에 9억을 더해서 곽광선을 트레이드 영입했다.[19] 심지어는 2011년 12월 9일 숭실대학교 잔디구장 개장 경기로 숭실대 vs 수원의 경기가 잡히면서 수원팬들은 학연으로 축구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덕택에 숭실숭실하게 해줄게, 숭실블루윙즈 등 다양한 별명을 얻기도 했다.

5.2. 부산 아이파크 시절

수원 시절에 현역시절 빨로 감독하는 무능한 감독의 이미지였다면 부산에서의 첫 시즌은 찬양받는 감독이었다. 물론 안익수 감독 시절에도 부산은 상위 스플릿에 진출하긴 했지만 그때는 상위 스플릿팀의 승점 자판기였다. 하지만 윤성효 감독 부임 이후에는 상위 스플릿 6팀 상대로 전반기에만 승점 20점을 따내는 괴물같은 성적을 보여줬다. 게다가 승점을 열심히 벌어놔서 승점차가 별로 나지 않기 때문에 여차하면 우승 경쟁에도 뛰어들 수 있는 상황까지 만들었다는 점에서 2013 시즌은 윤성효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스플릿에서는 썩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수원시절과 다르게 부산에서 확고한 지지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그와 반대로 수원 블루윙즈와의 관계는 상당히 껄끄러워진듯. 대놓고 퇴진을 외쳤던 수원팬들에 대해 언론 인터뷰를 통해 공개적으로 섭섭함을 표하기도 했고,[20] 수원 프런트진과도 다소 쌓인 감정이 많은 듯 하다. 수원 감독 시절보다 부산 감독으로 있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발언으로 쐐기를 박았다. 현역 시절 수원 선수로 좋은 활약을 펼치기도 했고[21], 지도자의 길을 밟기 시작한 구단도 수원임을 볼 때 수원 입장에서나 윤성효 본인 입장에서나 서로 애증의 관계가 된듯 하다.

하지만 부산 성적은 날로 갈수록 좋지 않았고, 결국 부임 2년 7개월만에 성적부진으로 경질되면서 수원에 이어 부산에서도 감독생활을 찝찝하게 마무리하게 되었다.

6. 수원 시절 어록



[1] 수비형 미드필더, 윙백[2] 선수들의 대거 부상으로 잠시 현역에 복귀하여 3경기를 뛰었다.[3] 1989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 한국B팀으로 출전한 경력이 있다. 당시 페널티킥을 실축하기도 했다.[4] 김호 감독이 1994년 미국 월드컵 때 최종 엔트리에 윤성효를 넣을지 고민하긴 했었다고 한다. 관련링크#[5] 풋볼리스트 한준 기자가 약을 한박스 빨고 합성한 서울잡는 부적이다.[6] 윤성효 감독 시절의 수원이 시즌 전체적으로 보면 만족스러운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서울은 기가 막히게 잘 잡았다면, 후임 감독은 리그 준우승이나 FA컵 우승 등 성적은 잘 내놓고 서울전은 기가 막히게 지는 극단적인 대비를 보여줬다.[7] 하지만 저것 외에도 사샤의 핸드볼 파울이 PK가 선언되지 않는 등 오심이 두 차례나 있었다.[8] 이후 게인리히는 거친 플레이로 알사드 선수들 신경을 제대로 긁어 줬다.[9] 변명을 해보자면 FA컵 우승실패, 3~4일뒤 바로 경기가 있어 선수들 체력상태가 말이 아니었다.[10] 최용수 서울 감독은 이후 윤성효가 경질당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수원을 상대로 승리하지 못했다. 윤성효 시절의 수원을 상대로 한 최종성적은 1무 5패다.[11] U-19팀의 깜짝스타 문창진은 포항 유스 출신이다. 황진성 역시 포항 유스가 길러낸 2012시즌 포항의 중핵이다. 더구나 황진성은 상무로 간 김재성의 뒤를 이어 포항의 중원을 지휘하고 있다. 축구팬으로선 소름이 돋을만한 장면이다.[12] 경기 전 부산의 승점 37점, 성남의 승점 37점, 제주의 승점 36점이었는데 특히 부산과 성남은 승점이 같으면서 골득실이 단 하나가 앞선 상황에 부산이 7위였다.[13] 골을 넣은 이정호 또한 포항스틸러스 출신이다.[14] 이 골을 도운 선수가 또 하필 양동현이다.[15] 경기 결과가 끼친 나비효과도 나비효과지만, 일단 윤성효부터 포항레전드이며, 동점골을 넣은 이정호 또한 포항스틸러스 출신에, 역전골을 도운 양동현 마저 몇년 후 포항의 18번이 되었다.[16] 심지어 국가대표팀 데뷔전까지 치르던 이범영이창근에게 밀리기까지 하였다.[17] 이미 감독 생활을 할 때부터 소일거리로 꾸지뽕 농사를 짓고 있었고, 축구계에서도 꾸지뽕 전도사로 유명했다.[18] 단 FA컵은 오심이 인정되었고(수원의 득점 무효가 차후 오심으로 인정되었다)아챔은 상대의 비매너 득점이다.[19] 오재석은 딱 1년 더 있었지만 구단에 10억을 안기고 감바로 팔려가서 그렇다. 런던 올림픽에 갔다 와서 군면제를 받은데다 리그에서도 발전한 모습을 보였기에 10억도 너무 헐값이라고 성화가 컸다. 반면 곽광선은 잘했다고 할만한 시즌을 한 번도 못 만들고선 계약 만료로 팀을 떠났다.[20] 당연히 기사를 본 수원팬들은 '이게 뭔 헛소리냐'라고 반응이다.[21] 실제로 수원 블루윙즈의 영구 결번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