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식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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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
대한민국의 축구 감독 | ||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e5e5e5> 이름 | 최문식 崔文植 | Choi Moon-Sik | |
출생 | 1971년 1월 6일 ([age(1971-01-06)]세) | |
서울특별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포항제철-포항 아톰즈/포항 스틸러스 (1989~1998) → 상무 축구단 (1996~1997 / 군 복무) 전남 드래곤즈 (1999~2000) 오이타 트리니타 (2001)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1) 부천 SK (2002) |
감독 | 포항제철중학교 (2007~2008 / 코치) 포항 스틸러스 (2009~2010 / 2군 코치) 전남 드래곤즈 (2011 / 수석 코치) 대한민국 U-17 대표팀 (2012) 대한민국 U-20 대표팀 (2012~2013 / 수석 코치) 대한민국 U-23 대표팀 (2013~2015 / 수석 코치) 대한민국 U-23 대표팀 (2015 / 감독 대행) 대전 시티즌 (2015~2016) 연변 FC (2017 / 수석 코치) 클란탄 FC (2023) | |
기타 | 한국프로축구연맹 (2023~ / TSG 위원) | |
국가대표 | 37경기 9골 (대한민국 / 1992~1999)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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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선수 시절 한국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명성을 날렸고, 선수 인생을 은퇴한 후 코치와 유소년 지도자 경력을 착실히 쌓았고, 2015년 대전 시티즌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프로 감독으로 데뷔하게 되었는데 자신의 선수 시절 장점을 앞세운 대전식 '티키타카'인 '대전셀로나'를 구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신인 감독으로서의 경험과 역량 부족 등의 한계를 넘지 못하며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속설을 몸소 보여주었다.
2. 선수 경력
대한민국 최고의 테크니션 최문식
2.1. 포항 스틸러스
최문식은 1986년 동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30회)에 입학하여 3년간 축구부에서 활동했고 특히 1988년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대통령금배 대회에서 7골로 동대부고의 우승에 기여하며 대회 MVP와 득점왕을 휩쓸며 고교 최고의 선수로 발돋움했고, 효창의 마라도나로 불렸다.
그리고 1989년 드래프트 3라운드에서 포항제철 아톰즈에 지명을 받으며 K리그 1호 고졸 프로 직행 축구선수가 됐다. 심지어 최문식은 빠른 71년생이었기 때문에 더욱 주목을 받았다.
입단 첫해부터 준수한 활약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개막전에서 바로 데뷔골을 터트렸고 뒤이어 일화 천마 축구단(지금의 성남 FC의 전신)과의 경기에서 경기 종료 10초전 극적인 바이시클 킥을 작렬해 동점골을 기록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후 그는 첫 시즌인 1989년에 17경기 6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핵심 선수로 거듭났고, 팬들로부터 믿을맨으로 불렸다.
이후 최문식은 리그와 컵대회의 대부분의 경기를 꾸준히 소화했고 1992년까지 3년간 한 시즌에 5~6득점을 기록하는 준수한 득점력을 보여줬고 1994년에는 6득점 6어시스트를 기록해 리그 최상위급의 공미로 거듭났다. 그의 이러한 활약 덕분에, 포항은 1992년 K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96년에도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1995년엔 부상이 잦아 6경기 출전에 그쳤고 1996년과 1997년엔 군대에 입대해 상무 축구단에서 활동하며 1996년 9월 23일 추계실업축구연맹전 결승전에서 전반 2분에 선제골을 넣으며 상주가 한국전력을 2:1로 격파하는데 기여해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1998년 포항에 복귀한 최문식은 36경기 6골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리그 정상급 공격형 미드필더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그후 최문식은 포항을 떠나 전남 드래곤즈로 전격 이적했다. 그는 포항 스틸러스에서 1989년부터 1998년까지 9년간 활동하며 160경기 33골 1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2. 전남 드래곤즈
최문식은 전남에서도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선보였다. 김도근, 노상래, 김종현, 임관식 등과 함께 활약한 그는 전남에서의 첫번째 홈경기에서 데뷔골을 터트렸고 2000시즌까지 2년 동안 65경기에 출전해 11골 8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다만 전남의 전력이 약한 편이라서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고 2000 시즌 대한화재컵에서 결승에 진출했으나 부천에게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2000 시즌 리그 7위라는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을 찍은 전남에서의 생활에 회의를 느낀 최문식은 2001년 일본의 축구 클럽 오이타 트리니타로 이적했다.
2.3. 오이타 트리니타
2001년, 최문식은 당시 J2리그에 속해 있던 오이타 트리니타와 협상 끝에 연봉 4000만엔을 받는 조건에 합의하고 일본 축구 리그로 전격 이적했다. 그후 그는 9경기에서 2골을 넣었지만 그를 영입했던 감독이 시즌 도중 교체되고 새로 부임한 감독은 그와 맞지 않는 전술을 썼기에 그를 벤치에 앉혀놓고 기용하지 않았다. 그는 더 많은 출전 시간을 원해 오이타 구단과 갈등을 빛다가 결국 7개월 만에 방출되었다.
2.4. 말년
오이타에서 방출된 최문식은 2001년 6월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그를 적극적으로 기용했던 김호 감독의 부름을 받고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했다. 그러나 그는 12경기에 출전해 0골 1어시스트라는 실망스런 성적을 기록했다.결국 2002년 쫓겨나듯 팀을 떠난 최문식은 부천 SK와 FA 계약을 체결하고 27경기 3골 1어시스트를 기록한 후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2.5. 국가대표 경력
포항 스틸러스에서 데뷔하자마자 화려한 활약을 선보였던 그는 자연히 국가대표로 차출되어 1994년 미국 월드컵과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하지만 주로 서브 자원으로 활용되었으며, 월드컵에서는 단 한 차례도 기용되지 못했는데, 그 까닭은 후배 윤정환과 동일했다. 볼 다루는 기술은 당시 한국에서 최상급이었지만, 체격이 왜소하고 스태미너가 떨어지며 압박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유럽에 비하면 걸음마도 못 땐 수준이었던 90년대 한국 축구의 압박으로도 굉장히 힘들게 만들수 있었다. 그래서 1999년까지 37경기에 출전에 그쳤다.
2.6. 플레이 스타일
그는 고종수, 윤정환 등과 함께 9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테크니션 중 한 명으로서 레전드급 활약을 선보였으며, 90년대 한국 선수가 2010년대 유럽선수들에 뒤지지 않는 기술적 완성도와 볼 다루는 감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남미나 유럽 최고의 테크니션들이나 보여줄 법한 테크닉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엄청난 탈압박 능력도 갖춘 당시로서는 드문 선수였다.특히 한국에서 사포(힐 리프트)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체격이 왜소하고 피지컬이 약해 압박에 취약한 약점이 뚜렷해 국가대표로는 별로 중용받지 못했는데, 기술은 발군이나, 압박을 견뎌낼 피지컬을 갖지 못해 중용받지 못한 테크니션 계보는 최문식에서 시작해 윤정환과 이관우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들도 상기한 문제 때문에 별로 기용받지 못하고 활동량과 피지컬 문제를 어느정도 상쇄시킬 오프더볼까지 장착한 황인범까지 가서야 테크니션이 대표팀에 중용된다.
3. 지도자 경력
자세한 내용은 최문식/지도자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4. 지도 스타일
최문식은 유능한 유소년 지도자, 코치가 유능한 프로팀 감독이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지도자로서의 성과나 결과 등을 놓고 봤을 때 과거 대전 시티즌 시절 황인범, 박대훈 등 어린 선수들을 프로에서의 주접급 선수로 잘 키워내서 활용했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유소년 지도자 위치에서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팀을 운영해 실력과 잠재력 있는 유소년 선수를 발굴하는데 있어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지만 프로팀 감독으로서 지금 당장의 성과를 거두는 것에는 적합하지 않은 유형의 지도자로 보인다.
감독으로서 최문식은 과거 자신이 기술력이 있는 선수였던만큼 지도자로서도 기술력을 중요시하며 FC 바르셀로나식의 짧은 패스 위주의 티키타카를 선호한다.
하지만 선수단의 플레이나 능력, 팀의 상황 등을 너무 노력하지 않고 선수 장점을 극대화 시킬 수 있거나 팀의 현재 상황에 맞게 축구를 하기 보다는 팀의 상황과 현실을 외면하고 패스 위주의 축구라는 본인의 추구하는 전술에 지나치게 선수를 끼워 맞추는 경향이 강한 편이다.
티키타카는 선수들의 조직력을 크게 요구하는 축구인데, 오랜 시간 선수들이 호흡을 맞추었던 바르셀로나와 달리 대전 시티즌 감독직에 부임과 동시에 선수단의 대대적인 리빌딩에 나서면서 손발 한번 제대로 맞추어 본적도 없는 선수들을 데리고 티키타카를 구연했으니 잘됐을리가 없다.
또한 좌우 측면에 위치한 선수들이 서로 스위칭 플레이를 하고 공격수들이 수비진영으로 깊숙히 내려와 수비에 가담하고 반대로 수비수가 공격 진영에 깊숙히 가담하는 등 포지션 교차를 주로 시도하는데, 이러한 화려한 포지션 변동은 실속이 없다는 혹평을 받아야만 했고, 공격 전개시에는 선수들이 티키타카를 추구해야 한다는 감독의 뜻에 따라 짧은 패스를 주고 받았지만 정작 위협적인 패스를 하지 못하고 공격 진영에서 슈팅 한번 지대로 못때리고 무의미하게 공을 돌리기만 하다 제풀에 지치기 일쑤였다. 또한 대전의 수비진이 좋지 않은 것을 계속 지적해도 "점유율을 늘린다면 수비할 시간도 자연스럽게 줄어든다"며 수비에대한 개선을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서 그 결과 최문식의 대전은 선제골을 넣어도 이내 동점골을 먹히고 역전골까지 내주는 상황을 상당히 잦았다.
그리고 전술적인 부분과는 별개로 리더로서의 매니지먼트 능력이 심각할 정도로 부족한데, 그로 인해 감독 재직 시절 선수단이나 팬들하고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해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인터뷰 스킬도 상당히 부족한데, 인터뷰나 기자회견 등에서 책임을 선수단에게 전가하는 등의 무책임한 모습은 자연스럽게 선수단, 팬들로부터의 지지기반과 신뢰를 잃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대전 감독 재직 시절 팬들로부터 상당한 사퇴 압박과 야유를 받아야만 했다.
5. 여담
- 평소 짧은 머리를 고집하는 것에 비해 2000년대 초반에는 긴 머리를 유지하기도 했었다.
- 축구 감독으로서 최상위 자격증인 P급 라이선스를 취득한 사람이다.
자격증이 중요한 게 아니다.[1]
- 피파98시절, 대한민국 대표팀 유니폼 색깔조차 틀리게 나오던 게임인데 최문식이 공 잡으면 "문-쉭" 하면서 이름을 불러줬다. 당시 주전급이던 홍명보 황선홍 서정원 고정운도 이름을 불러주진 않았는데 의외로 파격적인 대우. 근데 정작 98 월드컵 명단엔 최문식이 없었다.
6. 관련 문서
[1] 급이 비슷하다고 다 같은 자격증이 아니다. 축구선진국과 한국의 교육수준이 차이가 많이 나서 여건 되면 유럽가서 공부하는게 낫다. 최문식의 후임 감독이었던 이영익 역시 P급 라이선스를 취득한 사람인 것을 보면, 정말 자격증 취득 여부가 다가 아님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