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라틴어: Marcus Licinius Crassus Frugi | |
생몰년도 | 미상 ~ 47년 |
출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양고조부, 외고조부) 마르쿠스 푸피우스 프루기 칼푸르니아누스(친증조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양증조부, 외증조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양할아버지, 외종조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아버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친할아버지) |
아내 | 스크리보니아[1] |
자녀 | 리키니아 마그나(첫째, 장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둘째, 장남)[2]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셋째, 차남)[3]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스크리보니아누스(셋째, 차남)[4]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리키니아누스(넷째, 삼남)[5]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서기 2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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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집정관. 온화한 인품, 훌륭한 혈통,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세 황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에 대한 충성으로 보라색 망토를 쓸 수 있는 권한까지 받은 로마 귀족이다. 며느리로 맞이한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배우자가 차기 황제가 될 브리타니쿠스의 보호자라는 점을 주목한 발레리아 메살리나에게 누명을 쓰면서, 친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살해될 때, 아내 스크리보니아와 함께 자살 강요 형태로 죽임을 당했다.2. 생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는 1차 삼두정치를 이끈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후손이다. 그의 양할아버지는 혈연상 친할머니의 남자형제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이며, 아버지는 외가에 입양된 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문을 이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이다. 그의 혈통적 본가는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차남 칼푸스를 시조로 둔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문이다.명예로운 경력을 걷는 내내, 온화한 성품과 황실에 대한 충성으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황제 모두에게 신임을 받았다. 이탈리아 로마에 보존된 로마 고위 선출직 경력자 비문에 따르면, 도시(수도 로마)를 담당한 법무관을 지냈고, 서기 27년 혈연상 친척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동료 삼아 정규 집정관 중 상석을 차지했다. 서기 44년 마우레타니아 속주 총독을 지냈으며, 로마의 4대 사제 직책 중 하나인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에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던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지명받아 취임했다.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모두에게 큰 신임을 받은 까닭에, 두 황제가 갈리아에 간 두 번 동안 중책을 맡았으며,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브리타니아 전쟁 중 로마를 떠나 오늘날 런던으로 갔을 때, 황제 최측근 로마 귀족으로 동행해,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병사들에게 임페라토르라고 찬사받는 자리에서 황제 오른편에 자리를 잡는 호의를 선물로 받았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서기 43년 로마로 귀환하면서 개선식을 열 당시에도 황제의 최측근이자 복심으로 인정받아 개선식 퍼레이드 당시,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보라색 테두리가 있는 토가를 선물로 받고, 수놓은 튜닉을 선물받아 착용했다고 하며, 평상시에도 보라색 테두리 있는 토가를 입을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서기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적장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공주를 친아들이자 실질적인 장남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내로 맞이했다. 그러나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공주의 남편은 후일 브리타니쿠스의 보호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공주의 계모 발레리아 메살리나에게 견제를 받았고, 서기 47년 강제 이혼을 당했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 등 고대기록에 따르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동성애 성향으로 마그누스,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부부 관계는 최악이었고, 사이에 자녀가 없었다고 한다. 프루기의 아들 마그누스는 메살리나가 자신의 이부 동생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를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와 약혼시키고 결혼식을 올리기 전, 동성애인과 함께 살해됐다. 이때 그 친부모인 크라수스 프루기 부부 역시 자살 강요 형태로 처형됐다.
본래 부부 합장으로 묻혔는데, 아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가 네로 황제 당시 벌어진 피소 음모로 참수된 뒤 매장될 때, 보복을 우려한 유가족의 결정으로 아들 유골항아리도 함께 묻히게 됐다고 한다.
3. 자녀
폼페이우스의 후손인 아내 스크리보니아와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얻었다.장녀 리키니아 마그나는 혈연상 친척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결혼했는데, 아들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반역을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살해됐고, 사위 역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인 당시 근위대장 티투스에게 누명을 쓰고 추방됐다가 의문사했다.
둘째인 장남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가문을 이을 후손이 없어, 완전히 끊길 위기에 처한 폼페이우스의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가문에 영아때 입양됐다. 그러나 그는 서기 47년 발레리아 메살리나에게 강제 이혼당한 직후 동성애인과 함께 살해됐다.
섯째인 차남은 법적 장남이기도 한 같은 이름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이다. 그는 서기 64년 집정관을 지냈지만, 네로때 벌어진 피소 음모에 연루됐다는 누명을 쓰고 참수됐다. 술피키아 프라이텍타타와 결혼해, 리키니아 프라이텍타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보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카메리누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 4남매를 얻었다.
- 외동딸이자 첫째 리키니아 프라이텍타타는 베스타 여사제를 지냈다. 그녀는 30대 초반에 베스타 여사제를 명예롭게 은퇴 후, 결혼해 귀부인으로 살았다.
- 법적 장남의 큰아들 리보 프루기는 후일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의 조카와 결혼해,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장모이자 대 파우스티나의 어머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친할머니인 루필리아 파우스티나를 낳았다.
- 법적 장남의 둘째아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는 음모를 꾸미는데 매우 서툴고, 유순하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미움을 받지 않았고, 원로원 동료들은 그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하게 할 목적으로 보결 집정관에 취임할 수 있게 도왔다. 그러나 이 보결 집정관 경력은 도미티아누스 사후 즉위한 네르바 황제에게 누명을 쓴 이유가 됐다. 네르바 황제는 그를 죽이려고 여러 번에 걸쳐 재판에 세웠다. 그렇지만 유죄를 얻지 못했다. 이에 네르바는 플레브스의 날로 불리는 명절에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부부를 불러, 이들 부부에게 억지로 날카로운 칼을 선물로 주는 척 하면서 쥐라고 강요한 다음, 본인의 친구들과 함께 "황제를 암살하려고 한다"고 공개적으로 모함을 했다. 이렇게 그는 아내와 함께 어거지로 황제 암살 미수를 했다고 모함받았다. 네르바는 강제로 그에게 날카로운 칼을 잡으라고 하면서 쥐어준 뒤 이를 증거삼아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려고 했는데,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는 아내와 함께 날카로운 칼을 본 순간부터 겁에 질러 벌벌 떨어, 네르바의 행동은 민심 동요로 이어졌다. 이때 이를 두 눈으로 지켜본 경기장 안 시민들과 원로원 동료들이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부부 무죄를 증명했다. 따라서 네르바가 강력히 주장함에도 사형을 피했다. 하지만 네르바는 그를 기어이 유죄라고 주장해, 그를 티렌툼으로 추방했다. 이 사건은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 당시부터 황제 암살 배후로 의심받은 네르바가 심정적으로 도미티아누스 황제 암살을 알고도 방치하거나 간접적으로 용인한 배후로 확정적 용의자로 낙인찍힌 계기가 됐다. 결국 네르바는 이 사건 등으로 불만을 품은 프라이토리아니, 원로원 내 네르바 반대파들의 궁중 쿠데타로 유폐됐고, 이때 트라야누스가 네르바에게 평화로운 방법 형태로 양자 지명됨과 동시에 로마 제국의 실권을 쥔다. 이후 트라야누스와 원로원 내 트라야누스 지지자들은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가 네르바에게 쓴 누명을 벗겨 준다. 그는 네르바가 유폐된 직후, 친분이 두터운 트라야누스의 명으로 티렌툼에 있다가 복직했다. 그렇지만 소 플리니우스로 대표된 인사들에게 네르바에게 누명을 쓴 일이 꼬투리잡혀 계속 모함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전쟁을 측근으로 함께 했고, 시리아 총독이던 하드리아누스를 보필하고, 트라야누스가 서거할 때 폼페이아 플로티나 황후와 함께 했다. 또 트라야누스의 마지막을 함께 하면서, 그의 유지를 들었다. 위서로 평가받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이런 이유 등으로 하드리아누스에게 살해됐다고 하고 한때 정설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최근 연구 등에 따르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주장과 달리,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즉위한 뒤 하드리아누스가 간곡히 남아달라고 했음에도 새황제를 위해 은퇴했고 이후 자연사했다고 밝혀졌다. 이 사람의 손자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의 친척인 이유로, 일찍부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황제들의 추천을 받았고, 콤모두스때에는 콤모두스 황제가 직접 호의를 베풀며 추천해 집정관에 올랐다.
넷째인 삼남이자 법적 차남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스크리보니아누스는 네로 몰락 후 네 황제의 해 당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황제로 삼겠다고 제안했다가 거절한 로마귀족으로 유명하다. 그는 처세술이 뛰어났지만, 이때 일이 빌미가 되어 티투스가 근위대장이 된 뒤 의문사 형태로 살해됐다.
막내 아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리키니아누스는 혈연상 본가이자 사돈인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문으로 일찍이 입양됐다. 그는 친형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양아버지 혹은 양아버지의 형제인 피소가 피소 음모 주동자로 몰려 각각 처형, 자살할 때, 네로의 명령으로 가난해서 처형보다는 추방이 낫다는 이유 아래 연좌제로 추방됐다. 이후 네로가 몰락하고, 갈바가 서기 68년 즉위한 뒤, 갈바에게 입양형태로 후계자로 지명됐다가, 오토가 정변을 일으켜 갈바를 죽일 때 살해됐다. 다만, 그에게 악감정이 없던 오토의 명으로 시신은 아내 베라니아 게미나, 형수 리키니아 프라이텍타타, 조카 중 입양형태로 아들이 된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에게 수습돼 정식 장례 후 매장됐다고 한다. 이후 시동생과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복수하고자 한 형수의 호소로 신원복구됐고, 그를 살해한 이들이 처벌받았다.
[1]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후손이다.[2] 아내의 외가인 폼페이우스 가문에 영아때 입양됐다. 전체 이름은 명확하지 않지만, 이름 뒤에 리키니아누스가 붙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3] 서기 1세기부터 3세기까지 로마 귀족 사이에서 진짜 파트리키의 전형으로 평가받은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 가문을 완성한 인물이다. 네로 황제때 집정관까지 지냈으나, 이런 평가 때문에 혈연상 친척 피소가 연루된 피소 음모 당시 반역죄 누명을 쓰고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 사람의 증손녀가 대 파우스티나, 현손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다.[4] 법적으로는 장남이 된 바로 위의 형 크라수스 프루기와 함께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 가문을 만들었다. 이름 뒤에 붙은 스크리보니아누스는 서기 1세기 중반부터 어머니 이름에 '-anus'를 붙였던 귀족들 중 일부 사례와 같이 본인 가계를 강조하고자 붙여진 것이다.[5] 혈연상 본가인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문에 입양됐고, 네로 몰락 이후의 네 황제의 해 첫 황제 갈바에게 정치적 이유로 갈바의 양자로 선정됐다가, 오토에게 살해된 로마 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