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라틴어: Sextus Pompei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섹스투스 폼페이우스(할아버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아버지)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14년 |
전임 | 아울루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
동기 |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
후임 |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아우구스투스~칼리굴라 시절까지 살았던 로마 귀족으로, 폼페이우스의 사촌동생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손자다.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친구, 측근이자 클라우디우스 1세의 측근, 보호자로 재치 있고 매우 지적이고 예의바른 신사로 유명했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를 후원한 사람으로, 오비디우스는 망명 생활을 할 때, 자신을 후원해주고 믿어준 그를 위해 4편의 시를 썼다. 이 시들은 <흑해로부터의 편지(Epistulae ex Ponto)>의 4번째 책에 남아 있다.
2. 생애
이름만 보면, 아우구스투스가 젊을 적 경쟁한 해군제독, 총독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후손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해군제독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당숙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손자로, 6촌까지를 한 집안 사람으로 본 로마인 관습상 같은 성씨를 가진 아들뻘 먼 관계였다.그의 증조할아버지는 폼페이우스의 큰아버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비르독투스다. 증조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비르독투스는 동생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조카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달리 군인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쿠르수스 호노룸 역시 법무관은커녕 조영관도 밞지 못한 평범한 원로원 의원이었다. 하지만 증조부 비르독투스는 학식 있는 사람으로, 지적 욕구가 강하고 자존심 강한 키케로조차 그의 글을 읽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가진 기하학, 스토아 철학, 법학, 수사학적 재능과 지식에 감탄했다. 비르독투스의 아들 섹스투스는 14년 집정관 섹스투스의 할아버지다. 그는 아버지 비르독투스처럼 평범한 원로원 의원이었고, 아버지처럼 지식인, 신사로 명성을 날린 원로원 의원이었다. 그는 사촌 폼페이우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않고, 중립적인 노빌레스였다. 이 사람의 아들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인데, 그는 14년 집정관 섹스투스의 아버지다. 그는 기원전 35년에 루키우스 코르니피키우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다가 그 해 중반에 사임했다. 어머니는 학자들마다 주장이 다른데, 로버트 사임은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어머니가 황실과 관련 있다."는 것을 토대로 몇몇 방계 황족들을 추정했다. 이는 다른 학자들도 비슷한데, 대체로 연구자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풀레이우스 가문 출신으로 기원전 29년 집정관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의 딸 또는 기원전 20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풀레이우스의 딸이라고 확신 중이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소년 시절부터 문학을 좋아했고, 재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의 바르고, 온화하고, 매우 지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문학, 예술의 후원자로 일평생 이름을 날렸고, 당대 로마의 작가, 시인 등에게 존경을 받았는데, 그 중에는 시인 오비디우스도 있었다. 오비디우스는 기원후 8년, 대 율리아 스캔들 당시의 일로 인해, 그가 쓴 <사랑의 기술>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아우구스투스가 내린 칙령으로 흑해 서안의 토미스로 추방됐다가 죽었다. 이때 오비디우스는 자신을 추방 전부터 묵묵히 후원해주고, 추방 이후에도 믿음을 보여준 후원자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위해 4편의 시를 썼다. 이 시들은 <흑해로부터의 편지(Epistulae ex Ponto)>의 4번째 책에 남아 있다.
어머니가 황실 쪽과 관련 깊었던 배경으로,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 치세 마지막 해 당시의 1월 1일 외가 친척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와 나란히 집정관에 추천받아 함께 정규 집정관에 올랐다. 두 사람은 아우구스투스가 죽었을 때와 장례식 날에도 집정관 직위를 유지했고, 프라이토리아니에게 가장 먼저 아우구스투스 서거 소식과 함께 티베리우스가 부자세습으로 뒤를 이을 때 충성을 원로원에게 맹세받도록 명령받았다. 즉,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동료 집정관이자 친척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후계자인 새로운 황제 티베리우스 모두에게 신임이 대단했고, 티베리우스에게 가장 먼저 충성을 맹세하고 원로원에게 부자세습을 승인받는 중책을 맡았던 사람들이었다.
이런 모습처럼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종손이자 양손자,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외손자인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1세 형제의 보호자, 측근으로 '친구' 또는 친구 집단으로 불린 아미쿠스를 이끈 중진이었다. 이때 그는 어릴 때부터 인격자로 상냥하고 예의바른 소년으로, 문학을 사랑한 게르마니쿠스와는 여러 부분에서 잘 맞았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최측근, 클라우디우스의 보호자였다고 하며, 그는 티베리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아우구스투스 장례식에서 죽은 황제를 축원하고 기원하는 일을 맡았고, 아우구스투스 유언에도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했다.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대 드루수스, 소 안토니아 부부의 장남 게르마니쿠스, 차남 클라우디우스를 위해 원로원 안에서 모범을 보였고, 게르마니쿠스가 시리아 속주의 안티오키아에서 갑자기 죽기 전부터 갈등을 빚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고발하고, 재판과 처벌을 담당한 원로원 의원으로 그 분노를 표출했다. 이때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친아들로 게르마니쿠스의 사촌동생, 매제인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피소 재판과 처벌 내내 게르마니쿠스와 황실을 대표한 일곱 증인 중 한명이 됐고, 이후 제국 전역에 뿌려진 황동판에 적힐 원로원 포고문 대표 7인이 되어, 20년 12월 10일 이를 공표했다. 이후 그는 24~26년까지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냈다.
언제 사망했는지는 모르나, 칼리굴라 황제 초기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죽음에 대해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은 세네카의 기록이다. 세네카는 부자였던 폼페이우스의 부를 언급하면서, 칼리굴라 황제가 부자인 그를 궁전으로 데리고 가서 굶겨 죽였고, 공개 장례식을 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세네카의 기록은 연구자들에게 거짓말로 확정적으로 평가한다. 다른 기록에는 이런 이야기도 없고, 세네카의 의도가 명확하고, 교차 검증으로 사실이 아닌 것이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세네카가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그가 칼리굴라를 유독 싫어했고, 칼리굴라 암살 미수 음모를 꾸민 젊은 시절의 명분쌓기였기 때문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동명이인의 아들이 있었고, 그가 세네카 주장에 따른 "살해당한 섹스투스"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라고 평가받고 있다. 참고로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공주의 첫 남편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도 어떤 관계가 아니다. 이 폼페이우스는 크라수스 프루기의 장남으로 폼페이우스의 딸 폼페이아의 후손인 외가의 요청으로 폼페이우스의 후손으로 입양됐는데, 동성애인과 함께 메살리나에게 살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