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 라틴어: Titus Flavius Clemens | |
생몰년도 | 미상 ~ 95년 |
출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조부)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아버지)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형제) 플라비아 도미틸라(아내)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95년 |
전임 | 루키우스 실리우스 데키아누스 티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
동기 | 도미티아누스 |
후임 |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마르켈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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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 유대교 또는 기독교를 신봉했다는 이유로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처형되었다.2. 생애
플라비우스 왕조의 왕족으로, 조부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형으로 43년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 때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 복무했고 47년 보결 집정관을 맡았다. 62년부터 68년까지 로마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praefectus urbi: 도시 치안관)를 맡았다. 네로가 자살한 뒤 황위에 오른 갈바 치하에서 이 직책을 상실했다가 갈바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한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에 의해 다시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에 선임되었다.그 후 비텔리우스 황제와 동생 베스파시아누스간의 내전이 벌어졌을 때 동생을 지지했고, 연이은 패전과 측근들의 배신으로 궁지에 몰린 비텔리우스에게 퇴위를 권고했다. 그러나 비텔리우스를 황제에 올리는 데 공헌한 뒤 프라이토리아니에 뽑힌 라인 군단병들이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해 봉기를 일으키자 유피테르 신전에 피신했다가 병사들이 신전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살해당했다. 이때 그와 함께 있던 아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와 조카 도미티아누스는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 후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형제의 죽음에 부채의식을 느끼고 조카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를 잘 챙겼다. 사비누스는 72년에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뒤이어 오페룸 푸블리코룸(operum publicorum)을 맡아 로마 시내의 모든 공공 건물을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의 장남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는 82년 도미티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다. 그러나 그의 집정관직을 선포하는 전령관이 그를 집정관 대신 황제라고 부르는 바람에 도미티아누스에게 찍혀 곧 반역 혐의로 살해당했다. 차남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가 이 문서의 주인공이다.
그는 일찍이 베스파시아누스의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베스파시아누스가 네 황제의 해 최종 승자가 되는 데 일조했으며 바타비아 반란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와 베스파시아누스의 딸 소 도미틸라 사이에서 태어난 플라비아 도미틸라와 결혼했다. <라틴어 비문 모음(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에 기재된 비문에 따르면, 두 부부는 이름이 티투스 플라비우스로 동일한 2명의 아들을 포함한 7명의 자녀를 낳았다고 한다. 동시대에 활동한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도미티아누스가 클레멘스의 아주 어린 두 아들을 잠재적인 후계자로 지명하고 그들의 이름을 도미티아누스와 베스파시아누스로 변경했다고 밝혔다. 또한 퀸틸리아누스는 도미티아누스가 자신의 여동생의 두 손자의 후견인을 맡았다고 기술했다.
95년 1월, 클레멘스는 도미티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4월에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마르켈루스에개 직임을 넘겼다. 그러나 그 해 5월에 갑작스럽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유대인의 관습에 이끌려 무신론자( άθεότης)가 된" 혐의로 긴급 체포된 뒤 사형에 처해졌으며 아내 도미틸라는 판다테리아 섬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탈무드에 따르면, 클레멘스[1]는 랍비 아키바와 깊은 교류를 맺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지중해에서 이탈리아 해안으로 이동하는 선박에서 이뤄졌다. 강한 폭풍이 배를 위협하고 있을 때, 그는 아내를 갑판 아래로 데려가던 중 아키바가 간판 위에서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폭풍이 잠잠해지자, 그는 이에 깊은 충격을 받고 이때부터 아키바의 신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후 아키바의 전도를 받아 아내와 함께 유대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그의 아내 도미틸라는 순교자들을 위한 지하 묘지 '도미틸라 카타콤베(Catacombe di Domitilla)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기독교 측에서는 클레멘스와 도미틸라가 유대교가 아니라 기독교를 믿었다고 본다. 서기 1세기의 로마 사회에서는 기독교를 유대교의 분파로 볼 뿐 다른 종교로 취급하지 않았기에 실제로는 기독교인인데 '유대인의 관습을 받드는 자'로 취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교황이자 클레멘스서의 저자인 클레멘스 1세가 이 문서의 클레멘스와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문서의 클레멘스가 도미티아누스에게 처형된 데 비해, 클레멘스 1세는 교회 전승에서 트라야누스에게 처형되었다고 전하는 등 모순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한편 아내 도미틸라는 가톨릭과 정교회로부터 성인으로 시성되었지만, 그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성인이 되지 못했다.
[1] 탈무드에서는 켈로메노스(Kelomenos)로 명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