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라틴어: Gaius Sallustius Passienus Crispus | |
생몰년도 | 미상 ~ 서기 47년 |
출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비셀리움 |
사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유니아 칼비나(첫 아내) 대(大) 도미티아 레피다(두번째 아내) 소 아그리피나(세번째 아내) 살루스티아 칼비나(딸) 네로(의붓아들, 처조카) |
직업 | 로마 제국 원로원 의원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서기 27년(보결), 서기 4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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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1세기 초의 저명하고 부유한 로마 귀족으로, 재치 넘친 성격으로 유명했다. 5대 황제 네로의 고모부이자 계부로, 서기 47년 죽었는데, 소 아그리피나의 평판이 최악인 까닭에 소 아그리피나, 네로 모자에게 독살됐다는 뜬소문이 생겼다.2. 생애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도시 비셀리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비셀리움은 현재 사라진 도시로 어느 곳에 위치했는지 모른다. 이 도시에서 그는 기원전 4년 집정관을 지낸 루키우스 파시에누스 루푸스의 손자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름이 똑같은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이다. 그는 서기 21년 사망한 역사가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의 외조카로, 자녀가 없던 어머니의 동생인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의 양자가 되어 막대한 재산을 받고, 외가 성씨까지 이어 받았다. 따라서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는 태어날 때부터 친가와 함께, 할머니 가문의 성씨까지 함께 사용했다.어릴 때부터 미남이었고, 총명하고, 재치 넘치고, 쾌활하고, 매우 겸손했다. 또 풍자시를 짓고도 대인관계에서 문제가 없어, 큰 소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이런 풍자시를 짓고도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모두에게 숙청되지 않았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나은 노예도, 그보다 더 나쁜 주인도 없을 것이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고, 엄청난 부자였고, 기품있고 잘 생겨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또래 다른 귀족들과 달리, 타고난 외모와 좋은 성품, 인기를 얻는 성격에도 엄청 겸손했고, 자신을 드러내며 잘난 척 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티베리우스 통치 당시 원로원에서 새내기 원로원 의원이 되어 첫 연설을 할 때, 예의범절을 매우 중시 여긴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큰 인상을 줬다. 따라서 그는 칭찬에 매우 인색한 티베리우스에게 공개적으로 수차례 칭찬을 받았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단순히 칭찬만 하지 않고,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가 명예로운 경력을 쌓는 일도 후원했다. 이런 후원은 일회성이 아니라 꾸준히 이어져, 그는 서기 27년 집정관에 추천받아, 7월에 보결 집정관에 올랐고, 티베리우스 황제의 도움으로 정규 집정관 수준의 지위를 인정받아 연말까지 재임했다.
티베리우스 시대 이후, 칼리굴라가 즉위한 뒤에도 그는 황제와 황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이유는 겸손하고 항상 진실했기 때문이다. 그는 황제권 강화에 진심이고, 본인과 가문의 우월성을 강조한 칼리굴라에게 찍히지 않았고, 큰 사랑을 받았다. 그는 황제와 함께 하거나, 여행하거나, 원로원에 출석할때 늘 걸어다녔고, 황제와 함께 여행할 때에도 황제가 탄 가마 옆에서 걸어다녀 황제와 황실을 존중한 뜻을 내보였다. 칼리굴라와 황숙 클라우디우스가 먼저 곁에서 함께 가마를 타고 갈 것을 권유할 때에도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춰 거절했다. 동시에 그는 권유한 황제와 황숙의 위엄을 살리고, 그들의 관대함을 돋보이게 행동해, 칼리굴라에게 진실된 사람으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칼리굴라의 두 여동생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리빌라 공주와 공모한 황제 암살 미수 계획 당시, 칼리굴라에게 의심을 받았다. 이유는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소 아그리피나와 친분이 두터웠고, 그가 소 아그리피나의 어린 아들을 아내 도미티아와 함께 친아들 이상으로 키운 모습이 델라토르들에게 불륜, 반역 모의 가담 등으로 의심받아 고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파시에누스는 첫 아내와 일찍 사별 후. 주변의 중매로 서기 20~25년 사이 대 안토니아의 딸인 방계황족 대(大) 도미티아 레피다와 재혼했다. 사이에 자녀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재혼 당시 도미티아가 첫 남편, 두번째 남편에게서 각각 1명씩 얻은 자녀를 친자녀처럼 키웠고, 도미티아의 아들 중 한명인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가 명예로운 경력을 쌓는데 큰 도움을 줬다. 그래서 부부 사이는 좋았는데, 이들 부부는 칼리굴라 암살 미수를 계획했다가 섬으로 서기 39년 추방된 소 아그리피나를 배려해, 부모 없이 홀로 지내야 할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후일의 네로 황제)를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파시에누스, 도미티아는 네로가 후일 감사함을 표할 정도로 다정했는데, 이런 모습은 여동생들에게 암살될 뻔한 칼리굴라 황제와 그 주변이 파시에누스를 의심한 이유가 됐다. 따라서 칼리굴라는 파시에누스를 불러, 본인의 여동생 중 한명과 성관계를 가졌던 적이 있는지 개인적으로 물었다고 한다. 이때 파시에누스는 예민해진 황제에게 의심을 피하고 확신을 주고자, 일부러 긍정, 부정 사이의 애매한 말로 "아직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대답은 황제의 의심도 피하고, 델라토르들의 고발도 모두 벗어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이후, 41년 칼리굴라 암살 사건이 벌어지고, 칼리굴라의 숙부로 대 드루수스, 소 안토니아의 막내아들인 클라우디우스 1세가 즉위했다. 이때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칼리굴라 장례를 치르고, 칼리굴라를 암살하려고 했다가 추방된 두 조카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리빌라를 사면했다. 그러면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파시에누스를 불러, 대 도미티아 레피다와 이혼하고, 자신의 조카인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이 제안은 거부할 경우, 반역으로 처벌받을 분위기라서 그는 소 아그리피나와 서기 41년 결혼했다.
서기 42년 6월부터 서기 43년 6월까지 아시아 속주 총독이 되었다. 그는 전직 집정관 자격의 원로원 의원 중 가장 높은 위엄을 지닌 자만 오른다는 아시아 속주 총독이 된 이후, 이 공로 아래 44년 두번째 집정관이 되어 6개월의 임기를 보장받고 명예롭게 집정관 직을 마쳤다. 그러다가 서기 47년 병으로 죽었다. 그는 2억 세스테르티우스의 엄청난 재산이 있었는데, 죽으면서 소 아그리피나와 의붓아들 네로에게 막대한 재산 중 상당수를 남겼다. 하지만 이 결정은 그가 죽고, 후일 소 아그리피나, 네로의 평판이 안 좋아진 이후, 후대 로마인 사이에서 파시에누스가 소 아그리피나, 네로에게 독살됐고, 유언과 유언장이 조작된 범죄로 이어졌다는 뜬소문의 배경이 됐다.
친자녀로는 성년식 직후 유니우스 가문 출신의 규수 유니아 칼비아와 결혼해 얻은 딸 살루스티아 칼비나가 있었다. 살루스티아 칼비나의 남편은 푸블리우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였는데, 이들 부부 역시 파시에누스에게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