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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왕국 초대 국왕 사울 שָׁאוּל | |||
사울 왕. 어니스트 조셉슨. 1878년 작(作) | |||
<colbgcolor=#0038B8><colcolor=#fff> 이름 | 히브리어: שאול בן קיש (샤울 벤 키시)[1] 아랍어: طالوت (탈루트) 영어: Saul | ||
출생 | 기원전 1078년경 | ||
가나안 기브아 | |||
사망 | 기원전 1010년 (향년 68세) | ||
이스라엘 왕국 길보아산 | |||
묘소 | 이스라엘 왕국 기브아 | ||
재위 기간 | 이스라엘 국왕 | ||
기원전 1047년 ~ 기원전 1010년 (3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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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자 | 다윗, 이스보셋 | ||
부모 | 아버지: 기스 | ||
가족 관계 | 아내: 아히노암 아들: 요나단, 리스위, 말기수아, 이스보셋(에스바알) 딸: 메랍, 미갈 손자 므비보셋[2] 사촌: 아브넬[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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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에게 사울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그만큼 잘생긴 사람이 없을 만큼 깨끗하게 잘생긴 아들이었다. 누구든지 그의 옆에 서면 어깨 아래에 닿았다.
공동번역 성서, 사무엘기 상권 9장 2절
공동번역 성서, 사무엘기 상권 9장 2절
통합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 왕휘인 사울(שָׁאוּל / Sha'úl, 샤울)은 히브리어로 구함 · 요청함이라는 의미이다. 사도 바울의 히브리어식 이름이기도 하다.
벤야민 지파 출신으로 즉위 초기만 해도 신과 사무엘,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에게 사랑받던 괜찮은 왕이었으며 왕권 강화를 위해 애를 썼지만, 흔히 다윗을 질투하고 죽이려 했던 무능한 소인배 이미지로만 잘 알려져 있다. 다만 다윗을 죽이려 한 일의 경우, 소인배 여부와 상관없이 왕이라면 자신의 왕좌를 빼앗아가려 하는 자를 견제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4] 훗날 다윗의 아들이자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끈 솔로몬조차 장차 12지파 중 10지파를 이끌고 왕이 될 거라는 예언을 받은 여로보암 1세를 죽이려 한 바 있다.[5] 다만 다윗을 죽이려할 때 다윗에게 몇번이나 더이상 죽이지 않겠다고 하고 번복했던 점을 생각하면 비난받을만 하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사울은 키가 크고 잘생긴 그 시대의 인싸였다. 특히 사무엘기에선 "누구든지 그의 옆에 서면 어깨 아래에 닿았다."라고 그 키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2. 생애
2.1. 즉위 전 ~ 즉위 초기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없었던 시절 12지파 중 주인공 벤야민 지파에 세력과 재산이 있던 키스[6]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사무엘상 9장에서 처음 등장 시에만 해도 남다른 외모와 키, 게다가 겸손하고[7] 효심까지[8] 지닌 인생의 승리자였다.당시 이전까지 이스라엘은 신이 왕이고, 인간 최고 지도자는 판관 혹은 사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필리스티아 왕국[9]의 부강함을 보고 자기들에게도 인간 왕을 세워달라고 당시 이스라엘 판관인 사무엘에게 요구하였고, 사무엘은 "신을 왕좌에서 내리는 것이냐?"고 반대했으나 이 시대 백성들의 의견은 사무엘이 막을 수가 없을 정도로 퍼져 있었다. 이에 따라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초대 국왕에 대한 계시를 구하게 되었고, 결국 사울에 대한 신탁을 받게 된다.
한편 사울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러 나섰지만 결국엔 못 찾아서 포기하고 돌아가려는데 같이 따라나선 사환(= 심부름꾼)이 "예언자 사무엘에게 가면 혹 알 수 있지 않겠냐?"고 해서, 사무엘이 있다는 성으로 갔다가 느닷없이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될 거라는 얘기를 듣는다.[10][11]
그 후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을 미스바(미츠파, מצפה)[12]로 모으고 하나님이 세운 왕을 알려준다며 제비를 뽑게 하는데[13] 12지파 중에서는 벤야민 지파가, 벤야민 지파 중에서는 마드리(마트리)의 가족(씨족)이, 마드리의 가족 중에서는 키스의 아들 사울이 제비를 뽑게 되어 정식으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지만 따르는 사람만 따르고, 무시할 사람은 무시하는 수모를 겪었다.[14][15]
그러던 어느 날 암몬 민족의 왕 나하스가 이스라엘 지역인 길르앗의 야베스를 포위했는데, "너네들 오른쪽 눈 하나씩 다 빼면 봐주지~"라는 모욕을 받게 되었다. 이 소식은 어찌어찌해서 왕은 되었으나 밭에서 소를 몰고 다니며 목가적인 생활을 누리던 사울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하나님의 기운을 받은 사울이 소를 죽여서 토막내 각 지역에 보내고 "나하고 사무엘 안 따라 나서면 너희들의 소도 이렇게 해줄 테다!!"라고 전하게 했다. 그 포스에 제압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모였는데 사울은 모인 33만의 병력을 3개로 나눠서 이른 새벽에 암몬 족속이 진을 친 곳을 공략하였다.[16] 예언자 사무엘은 사울이 용감할 뿐 아니라 대인배스럽기까지 하자[17]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 길갈로 가서 사울이 왕임을 재확인하고 하나님께 짐승을 제물로 바쳤다. 그러나 사무엘은 "원래 이스라엘의 왕은 하느님 한 분 뿐이시지만 너희들이 다른 왕을 원했으므로 인간 왕을 세우게 해주셨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너희가 하느님을 배신한 것이다."라는 연설을 하고 기도하자 즉시 천둥번개와 폭우가 쏟아졌다. 이에 공포에 질린 백성들이 우리가 잘못했다고 울부짖자 사무엘은 '야훼께서는 너희를 선택하셨으니 너희가 하느님을 배신하지 않고 진심을 다해 섬기면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너희를 버리지 않으시겠지만 만약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우상과 왕을 섬겨 배신하면 너희와 너희가 세운 왕이 모두 파멸할 것이다'라 경고한다.
참고로 사울이 왕위에 오른 당시 나이는 30세.
2.2. 즉위 초기 ~ 블레셋과의 전쟁
왕이 될 당시만 해도 사무엘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불과 2년 후 블레셋(= 필리스티아)과 전쟁을 하던 중, 어마어마한 블레셋의 군대에 길갈에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겁에 질려 흩어지기 시작했다.[18] 이때 사무엘을 기다리다 못해 번제[19]를 직접 주관해서 혼란을 진정시켰다. 번제가 끝났을 때 도착한 사무엘이 왕이 번제를 주관한 것에 대해서 "왕이 하나님의 명을 지키지 않다니! 지켰더라면 이 나라를 왕의 나라로 길이 세우셨을 텐데, 어겼으니 머지않아 당신을 버리시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울 것"이라고 책망했다.[20][21] 직후 사무엘은 갈길을 떠나 벤야민 기브아로 올라갔고, 사울은 벤야민 게바로 내려가서 블레셋과 대치하던 중 왕세자 요나단이 전부 격퇴하고[22] 블레셋 편에 붙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울의 편으로 돌아서자 숨어있던 사람들마저 싸우러 나와서 비교적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다만 앞서 사울이 금식령을 내렸던 것 때문에 군인들이 허기에 지쳐 있어 블레셋 병사들을 제대로 추격하지는 못했다. 왕세자 요나단이 이를 나중에 듣고는 "병사들을 제대로 먹였으면 더 크게 이길 수 있었겠다"며 깠다. 결국 굶주림에 눈이 돌아간 병사들은 전리품으로 가져온 가축들을 피도 안 빼고 생으로 뜯어먹었다(...). 이는 율법 위반이었기에 사울은 특정 장소를 제단으로 지정하고 그곳에서 짐승을 잡고 피를 빼도록 했다.
이후 사울은 주변의 적국들과 싸워 그들을 제압했고, 특히 블레셋 민족과의 싸움이 잦아서 자신과 함께 싸울만한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2.3. 아말렉과의 전쟁
사무엘이 번제를 주관한 건으로 사울을 책망했지만, 사무엘과 사울의 관계가 끝장난 것은 아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집트를 탈출하던 중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혔던 아말렉 민족을 쳐서 모든 소유를 없애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했다. 이에 사울은 소집한 보병 20만 명으로 쉽게 승리를 거두고 아말렉의 왕인 아각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하느님의 명령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아말렉 사람들은 모두 죽였으나 그 왕은 포로로 삼았고 그들의 소유, 즉 양이나 소 중 좋은 것은 가지고, 가치 없는 것만 없애서 하나님의 분노를 샀다.[23]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승전비까지 세우고 길갈로 내려갔는데, 그의 뒤를 쫓아간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왕을 살려둔 것과 양과 소 중 좋은 것을 가진 것을 추궁했다.사울: "어서오십시오, 사무엘. 제가 하나님의 명령을 시행했습니다."
사무엘: "그런데 내 귀에는 왜 양과 소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오?"
사울: "저것들은 우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제일 좋은 녀석들만 데려온 것이죠. 나머지는 다 죽였으니 걱정 마십시오."
사무엘: "하나님께서 내게 내리신 명을 말하리다. 당신이 스스로를 제일 보잘것 없다고 여길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셨거늘, 어째서 그 분의 말씀을 어기고 제물의 눈이 멀어 그 분이 싫어하시는 짓만 골라하시오?"
사울: "저는 하나님을 말씀을 따랐을 뿐입니다. 가축들을 데려온 건 그저 백성들이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에요."
사무엘: "순종이 제사보다 낫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단 말이오! 이를 어기는 것은 사술[24]의 죄이며,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 숭배와 다를바 없는 죄악이오. 그러나 왕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니 하나님께서도 왕을 버리실 것이오."
사무엘: "그런데 내 귀에는 왜 양과 소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오?"
사울: "저것들은 우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제일 좋은 녀석들만 데려온 것이죠. 나머지는 다 죽였으니 걱정 마십시오."
사무엘: "하나님께서 내게 내리신 명을 말하리다. 당신이 스스로를 제일 보잘것 없다고 여길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셨거늘, 어째서 그 분의 말씀을 어기고 제물의 눈이 멀어 그 분이 싫어하시는 짓만 골라하시오?"
사울: "저는 하나님을 말씀을 따랐을 뿐입니다. 가축들을 데려온 건 그저 백성들이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에요."
사무엘: "순종이 제사보다 낫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단 말이오! 이를 어기는 것은 사술[24]의 죄이며,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 숭배와 다를바 없는 죄악이오. 그러나 왕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니 하나님께서도 왕을 버리실 것이오."
사울은 "나는 하나님의 명대로 행하고 왕만 잡아왔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좋은 것들만 남겨 가져온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제사보다는 순종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모르냐?!"고 오히려 더 크게 꾸짖음을 들었다. 이에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치를 봐서 그렇게 했다며 잘못을 털어놓는다. 사울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대리하는 사무엘에게 버림받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이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25] 그렇게 자신과 함께 가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애원하지만, 이미 하느님마저 사울을 버린 상황에서 사무엘이라고 그를 좋다고 용서할리 없었다.
그 자리에서 사울은 돌아가려는 사무엘의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매달리며 용서를 빌었는데, 이런 사울과 실랑이를 벌이던 사무엘의 옷자락은 결국 뜯어져나가고 말았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그 옷조각처럼 당신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라는 저주를 남긴다. 그럼에도 사울이 끝까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에게 축복을 내려주라고 애원하자 사무엘은 결국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을 주관하고 아말렉의 왕 아각을 끌어오게 해 살해한 후[26] 라마로 돌아갔고 죽을 때까지 사울과 만나지 않았다.
2.4. 재위 후기 ~ 죽음
전에 말 안 듣고 번제드린 것과 이 일을 계기로 사무엘과 정치적, 종교적으로 완전히 결별당한 후 사울은 하나님의 벌로 보여지는 정신병으로 심리적 불안 상태[27][28]에 빠진 데다가 다음 대 왕이 되기로 예정된[29] 다윗의 등장 및 활약[30]으로 점점 위축되기 시작했다. 결국 열등감과 질투심이 폭발한[31] 사울은 다윗을 여러번 죽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자세한 내용은 다윗 항목 참조.이렇게 다윗에게 열등감을 벌인 일중에는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두둔하자 창을 들어 요나단을 죽이려고 했던 일과 놉 땅의 제사장인 아히멜렉과 다른 제사장들의 몰살이 있었다.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은 놉 땅의 제사장인 아히멜렉에게 찾아가 "급한 왕명 때문에 아무것도 없이 왔으니 먹을 것과 무기를 달라"고 거짓말을 했고, 아히멜렉은 빵[32]과 골리앗이 쓰던 칼을 줬는데, 도엑의 밀고로 사울이 이 일을 알게 된다. 이때 분노한 사울이 신하들에게 아히멜렉과 다른 제사장들을 몰살하라 명령하지만 아무도 제사장을 죽이려 나서지 않아 밀고했던 도엑에게 명해 80명이 넘게 죽였다. 이때 살아남은 '아비아달'은 훗날 솔로몬의 즉위 과정에서 줄을 잘못 서서 처형당할뻔 하였으나 상기의 일 때문에 파직으로 끝난다. 사울과 제사장의 사이가 얼마나 틀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
블레셋과의 마지막 싸움에서는 블레셋의 군대를 보고 두려운 마음에 하나님께 의지하려 하지만 꿈으로도, 우림[33]으로도, 예언자를 통해서도 응답이 없어 자신이 배척하던 무당을 찾아가 의지할 정도였는데,[34] 무당이 보여준 환상은 죽은 사무엘이 스올에서 올라와 내일 너는 죽을 것이다하고 저주하는 내용. 간략하게 얘기하자면
사무엘: "이미 죽은 날 왜 또 불러서 이 난리냐?"
사울: "하나님이 대답을 안하시니 미치겠습니다. 좀 도와주세요."
사무엘: "하나님이 너의 적이 되신지가 언젠데 이제와서 난리란 말이냐? 네가 그 꼴이 된건 다 네 잘못이다. 넌 이번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다. 내일 너랑 너의 아들들이 전부 나랑 같이 있을 것이다."
기독교학계의 관점에서 본 이 일화는 대개 사울이 하나님이 금지한 영매, 무당 행위를 사울이 자청해서 한 것으로 또 하느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이라는 의견이 중론이다.사울: "하나님이 대답을 안하시니 미치겠습니다. 좀 도와주세요."
사무엘: "하나님이 너의 적이 되신지가 언젠데 이제와서 난리란 말이냐? 네가 그 꼴이 된건 다 네 잘못이다. 넌 이번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다. 내일 너랑 너의 아들들이 전부 나랑 같이 있을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기독교의 사상 상 하나님이 부정하게 여기는 영매가 어떻게 사무엘이라는 대선지자를 불러냈는지 의견이 오가는데 대체적으로 세가지 설로 요약된다.
- 하나님이 진짜로 사무엘을 보내셨다.[35][36]
- 여인에게 들린 귀신이 사무엘 행세를 했다.[37]
- 당대의 심령과학이나 심리학적 방법으로 여인이 사울의 심리를 간파하고 사무엘인 척 연극을 했다.
이로 인해 사울은 가뜩이나 금식으로 인해 쇠약해진 상태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희망마저 사라져 완전히 정신이 망가지고 만다. 오죽하면 처벌을 두려워한 무당도 이 광경에 '측은지심'이 들어 사울에게 빵과 송아지 요리를 대접한다. 이후 사울은 결국 그 싸움에서 패해 길보아산으로 도망치다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사울의 죽음에 대한 묘사에서 사무엘상에서는 사울이 고통에 허덕이며 친위대에게 "블레셋(=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우니 네가 나를 찔러죽여라."라고 하지만, 병사가 머뭇거리자 스스로 칼을 가져다가 그 위에 엎드러져 자신의 몸을 찔러 승하했다. 친위대 역시 주군의 고통을 방관했다는 충격에 그 자리에서 자살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를 지켜 본 지나가던 아말렉 군인이 자신이 본 것을 다윗에게 설명하면서 "가망없는 사울 왕의 모습을 보고 나서 자신을 죽여달라는 사울 왕의 부탁을 듣고 가차없이 제가 다윗 님을 대신해 죽여서 원수를 갚았습니다."라며 보상을 바라는 거짓말을 하지만, 다윗은 이를 듣자 도리어 "네놈이 감히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을 시해했다고?! 이놈의 목을 쳐라!!"라며 분노하고 처형한다.[38] 이 이야기는 진짜 아말렉 병사가 부탁을 받고 죽인 것인지, 아니면 사울이 자결한 것인지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 이후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들의 물건을 수거하러 왔다가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신을 발견한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의 죽음을 공표하기 위해 머리를 베었고, 갑옷은 아스다롯 신당에 두었으며 남은 사울과 아들들의 시체는 벳 산 성벽에 못 박았다. 길르앗의 야베스[39]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가 성벽에서 시체들을 수습해 와 화장하고 뼈를 가져다 묻었다.
나중에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추모하는 노래를 짓고는 이후 이들의 유골을 가져와서 벤야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무덤 옆에 나란히 합장시켜준다.
3. 후손들
그에게는 자식들이 많았지만 대부분 최후가 좋지 않았다. 아들 요나단, 리스위, 말기수아는 블레셋과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아버지와 함께 전사했다.그 뒤 남은 사울의 후손들도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사울의 작은 딸인 미갈은 다윗이 왕이 된 후 소박데기를 맞는다. 사실 두 사람의 결혼 초반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다윗은 미갈과 혼인하기 위해 수많은 외적들과 싸워 이겨서 공을 세웠었다. 물론 냉소적으로 보면 군공을 세워서 포상으로 하사받은 물건이나 다름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아무튼 미갈은 아버지가 다윗을 해치려 할 때 남편을 감싸 줄 정도로 한때는 다윗과 금슬 좋게 살았다. 그러나 후일 다윗이 도피 생활을 하던 때 사울은 미갈을 발디엘이라는 사람에게 재가시켰고, 이후 왕위에 오른 다윗은 사울 왕가의 실권자였던 아브넬이 자신에게 전향하려고 하자 미갈을 다시 데려오는 조건으로 받아 주겠다고 했다. 아브넬이 미갈을 찾아가 데려올 때 새 남편 발디엘이 울면서 따라왔으나 아브넬이 불호령을 내려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다윗은 미갈을 생각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하느님의 언약궤가 수도인 예루살렘에 귀환하는 것을 본 다윗이 기쁨에 겨워 춤을 췄는데, 하도 격렬하게 추는 바람에 옷이 다 흘러내려 국부가 드러날 지경이었다. 미갈이 그걸 보고는 "명색이 이스라엘 왕이신 분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체통도 없이 춤을 그렇게 추시느냐"고 따졌더니, 다윗은 "아 그럼, 하느님이 당신 아버지한테서 왕의 자리를 뺏어다 내게 주셨는데. 내가 춤 춘건 사람들 보라고 한게 아니고 하나님 보시라고 한거요. 비록 내가 주변에서 손가락질 받아도 상관 없소.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이런 일이 다시 생길 경우 난 이거보다 더 경망스럽게 할거요."라고 맞받아쳤다. 결국 미갈은 다윗을 업신여긴 죄로 정실부인이었음에도 자식 없이 죽었다. 다산이 곧 풍요를 상징하는 고대 사회에서 자식이 없다는 것은 곧 버림받은 자임을 뜻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대가를 치른 셈.[40]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인 에스바알(또는 이스보셋)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지만 나이도 어렸던데다 실질적인 사울 왕실의 실권은 사울 왕 당시 군 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이 갖고 쥐락펴락하던 터라 이스보셋은 현대말로 바지사장이나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아브넬이 자기 아버지의 첩이었던 리스바와 통간한 것을 이스보셋이 알고 아브넬에게 따지자 당신이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있는게 누 구덕인데 이렇게 날 대하냐며 적반하장으로 나온뒤 다윗에게로 전향해버린다.[41] 브에롯 사람 바아나와 레캅[42]의 배신으로 암살당했다. 이렇게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머리까지 참수해서 다윗에게 돌아가 포상을 받기를 기대한 이 둘에게 다윗은 이렇게 대답했다
다윗: "예전에 나한테 사울이 죽었다고 무슨 희소식인냥 전해온 자도 내가 시글락에서 처형했는데 하물며 자기 집에서 편히 자고있는 무죄한 사람을 죽인 너희 악당들을 내가 어떻게 가만히 내버려 두겠느냐?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니 네놈들을 처형해 이스보셋의 복수를 하리라!"
그리고 두 투항자이자 배신자들은 수족이 베이는 극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또 기근이 들자 다윗은 사울이 과거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의 보복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 사울의 후궁인 리츠파가 낳아준 사울의 두 아들인 아르모니와 므립바알(또는 므피보셋)과 사울의 큰 딸 메랍이 므홀라 사람 바르질라이의 아들 아드리엘에게 낳아준 아들 다섯을 붙잡아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주어 그들을 모두 나무에 매달아 죽였다.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다윗의 친우였던 요나단의 아들 므피보셋이다.[43][44]
그나마 그가 속한 베냐민 지파에서 에스텔서로 유명한 에스더와 모르드개, 사도 바오로가 나온다.[45]
4. 평가
비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사실 인간적인 업적만을 따지면 성경에서도 마냥 무능한 왕으로만 묘사되진 않았다. 약소 지파의 별볼일 없는 출신으로 태어난 청년에서 수십년간 왕으로 지내면서 그동안 확실한 구심점이 없던[46]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여러 지파들을 하나로 규합하며 외적들을 정벌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업적을 세웠다. 그의 최후 역시 타락하여 큰 폭정을 저지르거나 추하게 도망친 것도 아니었으니 그가 죽은 이후로도 그의 영향력이 남아 다윗과 대립했으며 심지어 다윗 재위 중에도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었다.성경이 아닌 일반 역사를 중점으로 둔다면 비록 실책을 저질렀을지언정 아무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부족들을 하나로 모은 업적을 이룬 초대 왕으로, 적에게 맞써 싸우다 죽었으니 최후도 어느 정도 동정표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처음부터 자질이 없는 자였으면 하느님도 사무엘도 그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의 권위가 절대적인 시기에 종교적 실책을 저지른 것은 당시로서 큰 실수였다. 그가 제사장 출신이 아닌 것을 감안해도 신앙심이 성숙하지 못한 행동을 여럿 보였는데, 첫번째는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 하더라도 엄연히 왕과 제사장의 권한이 엄격히 분리되어 있다는 시대에 사무엘이 오기 전에 멋대로 제사를 올려 사무엘에게 엄청난 질책을 받고,[47] 사무엘상 14장에서는 전쟁 직전 군대에 자기 독단으로 금식 명령을 내려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킨 것도 모자라서 고기를 피째 먹는 종교적 금기를 저지르게 해 여러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다.[48] 결정적으로 아말렉 건은 그렇게 데이고도 나아지기는 커녕 그 유명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는 말과 함께 하나님과 사무엘에게 완전히 버림받는 최악의 결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후 사울은 포텐셜과 초심을 잃고 불안에 떨며 다윗을 의심해 죽이려 들고, 자신이 쫓아냈던 무당을 의지하다 사무엘에게 저주를 받는 등 정신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사실 인간 윤리적으로 볼 때 사울에 비해 자신의 충직한 수하를 죽게 하고, 그의 아내까지 빼앗은 다윗은[49] 더욱 악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용서를 받은 모습 등을 미루어 볼 때 사울도 다윗처럼 죄를 지은 뒤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으면 달랐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다윗은 회개를 함으로 본인은 용서를 받았지만, 그와 별개로 죗값으로 인한 저주로 간통으로 생긴 아이가 죽는 걸 시작으로 장남이 이복여동생을 강간하고, 삼남 압살롬은 그 장남을 죽인 것도 모자라 왕이 되고자 쿠데타를 벌여 다윗의 후궁들을 대낮에 겁탈하고 이후 다윗과의 전투에서 대패한 뒤 나무에 달려[50] 매달려 있다가 살해 당한다. 사남 아도니야는 솔로몬이 왕위를 잇게 되자 다윗의 침대를 덥히던 여인 아비삭을 제 처로 삼겠다고 하다가 다윗의 왕위를 이은 아들 솔로몬에게 처형 당하는 등, 가족 간의 칼부림이 끊일 날이 없었다. 사울보다 바른 행실로 하나님에게 큰 축복을 받은 다윗도 이런 죄악을 저지름으로서 성경에서는 어떤 의인도 야훼가 보기에는 죄에서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사울과 다윗의 평가가 천지차이인 이유는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심판마저 달게 받는 모습을 보인 반면, 사울은 여러 번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를 바로 인정하기보다는 움츠러들기만 하고 회피하는 모습만 보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자신은 물론 그의 후손들도 축복을 받고 다윗의 혈통으로 알려진 예수는 인류 역사에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알려지는 영광을 얻은 반면, 사울은 본인은 물론 후손들까지 몰락하고 말았다. 청년시절 왕으로 간택 받던 때와 마찬가지로 사울이 백성들의 눈치를 많이 보며, 정작 겸손해야 할 때는 자기가 앞장서서 종교적 율법을 곡해하는 등 그간 사무엘을 통해 그를 지도했음에도[51] 그의 신앙심이 전혀 성숙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아마 그가 속한 베냐민 지파가 워낙 힘이 없던 것에 있을 수 있다. 베냐민 지파는 12지파중 가장 약소 지파였고 때문에 사울이 왕이 되고도 따를 사람은 따르고 안 따를 사람은 안 따르고 사울은 또 그걸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즉 출신 자체가 워낙 미약하다보니 지나치게 남 눈치를 보면서도 정작 또 종교적 권위가 필요할 때는 율법을 곡해하는 무리수까지 두면서도 얻으려는 모습을 보였을 수 있다. 어차피 아무런 기반이 없이 그저 사무엘(을 내세운 야훼)의 선택으로 왕이 된 사울로서는 그것 외에는 자신의 왕좌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핑계에 불과한데, 애초에 가장 힘이 약한 베냐민 지파에서 사울을 왕으로 선정한 것은 야훼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것과 같이 "인간적 관점에서 봤을 때 가장 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인물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 사람의 내면의 믿음과 올바름을 토대로 존귀한 인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성경에서 자주 묘사된다. 사울 이전에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모세와 여호수아, 사사들[52]도 그랬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조차 사모할 것이 전혀 없어 보일맏큼 연약하다고 이사야서에서 말하고 있다. 곧, 그렇기에 인간적인이고 눈에 보이는 것에 의지하지말고 전적으로 야훼만을 의지하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사울을 결국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힘이라 볼 수 있는 민심에 의존했고, 이는 그의 신앙인으로서의 실패, 인생의 실패로 결말지어졌다.
초기에 보여줬던 포텐셜과 개념 넘치는 인성과 새로운 영을 받는 모습, 후반에 보여준 끝없는 질투와 반성 없는 연이은 실책으로 인해 구원받은 참 그리스도인이었는지에 대한 견해가 갈리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성경엔 확실히 구원받은 사람, 확실히 못 받은 사람, 직접 묘사된 서술만으로는 애매한 사람으로 나뉘는 편인데 사울이 3번째 케이스에 속한다.
5. 대중매체
헌데 대중매체에서의 묘사에서는 기독교 교리 상 악역이기 때문에 좋지 못하다. 하지만 리처드 기어가 다윗으로 출연한 1985년작 영화《킹 다윗》에서는 노장 배우 에드워드 우드워드가 사울 역으로 출연하여 그냥 찌질이가 아닌, 신에게 버림받은 비극적인 영웅의 이미지를 잘 묘사했다.《킹 다윗》에서 사울의 자결 장면.
[1] '벤 ~'은 '~의 아들'이라는 뜻이다.[2] 유일한 친손자이다.[3] 숙부 넬의 아들로, 군사령관을 지낸 적이 있었다.[4] 물론 성경의 입장이 아닌 지극히 인본주의적, 인간적 입장에서 당연하다는 것이다.[5] 이에 여로보암은 이집트로 도망쳤는데, 그보다 전에는 솔로몬의 아빠인 다윗도 사울을 피해 블레셋으로 도망친 바 있다.[6] 개역개정에서는 기스.[7] 사울이 사무엘을 찾아갔을 때 스스로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벤야민 사람"이라고 한 것은 겸손한 표현이 아닌 사실이며[53], "나의 가족은 벤야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다."라고 한 것이 겸손의 표현이다. 근데 사실 사울의 집안은 그렇게 미약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게 보면 단지 겸손한 게 아니라 열등감의 표출이라고도 할 수 있다.[8] 아버지인 키스가 암나귀를 잃어버려서 찾아오라는 말을 듣고 아무런 단서도 없이 이곳저곳 멀리까지 찾아다녔다.[9] 개신교에서는 블레셋이라고 불린다.[10] 사무엘은 사울이 안 믿을까봐 3가지를 예언한다. 첫 번째는 돌아가다가 두 사람을 만나서 "아버지가 암나귀를 찾았고 이제는 아들 걱정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 2번째는 베델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서 떡 2덩이를 받는 것, 3번째는 하나님의 산에 이르렀을 때 예언하며 내려오는 예언자 무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때 사울도 예언을 하는 것이었다. 모두 적중.[11] 그의 행방을 걱정한 그의 숙부와 만나서도 예언자에게서 잃어버린 나귀들을 찾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을 뿐, 그가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신탁은 얘기하지 않았다.[12] 일찍이 판관 시대 때 벤야민 지파를 치기로 총회를 연 곳이다. 이외에도 미스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성경 지명이 한, 둘은 아니지만 여기서 설명하는 미스바는 이 의미. 보통명사로 쓰일 때에는 파수대, 망대라는 뜻도 있다.[13] 다소 황당해 보이지만, 당시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운명에 맡긴다'는 의미로 제비를 뽑곤 했다. 성경에서는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 범인을 찾을 때, 레위 지파의 직분을 배치할 때 등에서 등장하는데 잠언의 "사람이 제비를 뽑아도 그 일은 하나님께서 결정한 것이다."라는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비뽑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신약 시대까지도 이어져 가룟 유다의 배신과 12제자 축출 이후 12번째 사도를 뽑을 때도 제비뽑기로 뽑았다는 구절이 나온다.[14] 벤야민 지파의 위상 때문이었는데, 민수기 후반부에서 하나님의 명으로 각 지파의 인구 조사를 할 당시만 해도 꽤 세력이 있었으나 판관기 후반부에서 나머지 11지파와 한 판 붙었다가 싸우러 나간 26,000명 중 600명만 살아돌아오는 일을 겪고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판관기 참조.[15]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울이 벤야민 지파였기 때문에 왕으로 즉위라도 할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가장 작은 규모의 지파였기 때문에 왕으로 옹립하는 데 여타 11지파가 큰 반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16] 성경 구절에 따르면 박살난 암몬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주했는데, 도망친 사람들 중 2명 이상 짝을 지은 자가 없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즉, 패잔병들이 무리를 지을 새도 없이 단신으로 도망쳤을 정도로 깨졌다는 뜻.[17] 간만에 제대로 승리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내친 김에 사울이 왕으로 즉위할 때 무시했던 사람들(같은 민족)까지 손 좀 봐주자고 하지만, 사울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 이런 날에 이스라엘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18] 사무엘상에 따르면 숫자가 3,000명에서 600명으로 줄었다고 한다.[19] 제물로 삼을 짐승을 각을 떠서 제단에 올리고 불을 붙이는 제사.[20] 번제 집전은 오직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즉, 사울이 번제를 지낸 것은 정교분리의 위반으로, 현대적 관점으로 비유하면 "대통령이 외환을 빌미로 헌법과 법률에서 주어지지 않은 권한을 무단으로 행사한 것"에 해당한다. 고대 및 중세 중국에서도 하늘에 대한 제사는 천자/황제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반 제후들이하면 말그대로 역모였다.[21] 참고로 후에 비슷한 시도를 한 왕이 있었는데 문둥병에 걸려 비참하게 죽었다.[22] 약 600평 정도(Half acre)되는 지역에서 첫번째 격돌로 20명을 베어내고 혼란을 유도해냈다.[23] 하느님은 이미 사무엘에게 "내가 사울을 세워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걸 후회한다. 그는 내 명령을 어겼다."라고 한 뒤였고, 이에 사무엘이 밤새도록 하느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기도했다. 물론 서사적인 표현이다. 야훼에게는 후회도 실수도 없다.[24] 점성술.[25] 사울이 왕이 된 과정을 보면 그가 야훼와 사무엘에게 버림받음을 두려워하는건 당연한 일이다.[26] 이때의 장면이 참 재미있는데, 사무엘이 사람들을 시켜 아각을 자기 앞으로 데려오게 했는데 아각은 "난 이제 살았다!"하고 사무엘 앞으로 왔으나 사무엘이 그를 처단하면서 한 말이 걸작. "네놈이 그동안 칼로 수많은 여인들의 자녀를 잃게 했으니 이젠 네 어미가 자녀를 잃을 차례다!!"라고 꾸짖으며 아각을 일도양단했다.[27] 성경 사무엘상 16:14에 보면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떠나시고 악령이 사울을 번뇌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8] 일례로 블레셋(= 필리스티아) 민족과의 전투에서 거인 장수 골리앗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을 모욕하자 크게 두려워했다. 즉위 초기 사람들의 지지가 부족할 때 보였던 행동들과 대조적인 모습.[29] 사울과 결별한 직후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으로 베들레헴 지역에 거주하던 유다 지파 이새(이사이)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아들들 중 막내인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당시 기름 부음은 곧 왕 또는 예언자나 판관이 될 것임을 상징.[30] 골리앗을 죽인 후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지혜롭게 행해서 사울이 군대의 대장으로 삼았을 정도.[31] 블레셋과 싸우고 돌아오는 사울과 다윗에게 사람들이 "사울이 죽인 사람은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사람은 만만이로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네!!!)"라는 노래를 부른 게 결정타.[32] 그냥 빵도 아니고 제단에 올린, 봉헌된 빵이었다.[33] 제비의 도구로, 사용된 돌로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사용했다. 세트로 '둠밈'이 있는데, 이 두 돌은 출애굽기 때 아론이 정식으로 착용하던 제사장복의 열두 보석이 박힌 흉패 속에 보관되어 사용되었다.[34] 무당은 변장한 사울이 사무엘의 혼령을 불러낼 것을 요청하자 사울 왕이 자신과 같은 무당들을 전부 쫓아냈다며 만약 그리했다간 자신도 쫓겨나고 말 거라며 처음엔 거부하다가 결국 사무엘의 혼을 불러낸다. 이후 사무엘의 혼이 나타나자 무당은 자신에게 찾아온 사람이 사울임을 깨닫고 두려워한다.[35] 최근에는 이쪽이 가장 지지를 많이 받는다. 이해하기가 가장 편하기 때문.[36] 또한 제2경전에 속하는 집회서 46장 20절에서는 "사무엘은 잠든 다음에도 예언을 하였는데 임금에게 닥쳐올 죽음을 미리 알려 주었고 예언으로 백성의 무도함을 없애려고 땅속에서조차 목소리를 높였다."라고 말하며, 사울 앞에 나타난 영혼이 사무엘 본인이라고 증언한다.[37] 보수 복음주의 개신교 계열에서는 이쪽을 지지한다.[38] 참고로 이렇게 자신의 경쟁자라 하더라도 전대 임금이나 영웅을 대뜸 죽이고 본인에게 굽신거리는 놈은 제거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윗 본인만 해도 나중에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의 목을 가지고 항복해왔을 때 "이때의 아말렉인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냐?!"며 죽여버렸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암살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지지 세력을 어떻게 했는 지를 상기하자.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일단 전대 왕이나 영웅의 지지 세력을 달랠 필요도 있고, 무엇보다 한 번 배신한 놈이 두 번 배신 못 할 이유는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 또한 사무엘상의 기록에 의하면 다윗은 사울 왕을 2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가 잠든 사이 옷자락만 베어서 가져가는 등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것을 천명했으니 왕을 시해한 이를 좋게 대접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39] 과거 암몬족 왕 나하스의 침입에서 사울의 구원을 받은 곳이다.[40] 그런데 그 동안 다윗도 이미 다른 아내들을 여럿 두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재혼해서 잘 살다가 갑자기 전 남편에게 반강제로 불려와 보니 그나마 정실부인 자리도 위태롭게 생긴 미갈도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다윗은 미갈을 데려와 놓고도 이후로 동침은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후계 구도에 사울 왕가의 혈통이 들어오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볼 수 있다.[41] 하지만 아브넬 역시 요압에게 살해당하는데, 아브넬이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42] 이 둘은 모두 동족인 벤야민 지파였다.[43] 아기였을 적 피난 중에 유모가 그를 잘못 다뤄 신체 장애를 당해 두 다리를 다 절게 되었다. 시종으로 시바가 있었는데,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난 갈 당시에 시바가 므피보셋을 모함했지만 훗날 반란이 평정되어 다시 귀환할 때 씻지 않은 모습 그대로 나와 다윗을 맞이하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이후 시바에게 준 므피보셋의 재산권을 다시 회복시켜주자 다윗 왕의 무사 귀환이 더 기쁜 일이라며 사양한다.[44] 위의 인물인 사울의 므립바알(므피보셋)과 다른 인물이므로 혼동에 주의. 둘은 숙질 관계다.[45] 참고로 사도 바오로의 개명 전 이름도 사울이었다.[46] 신앙으로는 하나님이 있었으며 중재자로 모세, 후대의 사사(판관)들도 있었으나 이들은 권력자와는 거리가 멀었고 출애굽 시절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을 불신하며 제멋대로 굴었다.[47] 훗날 남유다 왕국의 웃시야 왕은 성숙한 신앙심과 힘을 갖춘 명군이었으나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제사 절차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드리려다 나병의 저주를 받아 폐위당했다. 그만큼 제사 의식은 엄격한 주제였던 것이다.[48] 정작 사울은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고 굳게 믿었는지 하느님의 대답을 듣기 위해 번제를 올렸지만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사울이 점점 하느님의 신뢰를 잃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49] 최소 십계명 중 둘을 어김.[50] 이스라엘에서 나무에 달린다는 것은 저주를 의미한다. 압살롬도 결국 악행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51] 사울이 처음으로 지적 당했을 때와 두번째 일로 손절 당하기까진 수십 년의 세월이 있었다고 한다.[52] 모세는 처음에 자신은 말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한 번 거절했으며, 여호수아 역시 모세에게 후계자로 임명받았을때 자신의 미숙함을 이유로 거절했었다. 사사의 경우 양치기, 농부, 건달 등의 미천한 출신이 대부분이었지만 모두 사울과 달리 자신의 의무와 신앙을 지켰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