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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22:32:36

접대의 관습

1. 개요2. 원인
2.1. 각자의 안전 보장2.2. 은혜를 베푼 것에 대한 명예2.3. 정보 교환 및 반가움
3. 손님을 정말 접대하고 싶지 않다면?4. 손님의 입장이라면?
4.1. 선물
5. 의의6. 문화권별 양상
6.1. 고대 그리스6.2. 동유럽6.3. 북유럽6.4. 서유럽6.5. 무슬림 문화권6.6. 우즈베키스탄6.7. 유대교6.8. 몽골6.9. 한국6.10. 중국6.11. 일본6.12. 미국
7. 사례
7.1. 유명 사례7.2. 어긴 예
7.2.1. 주인의 손님 공격 사례7.2.2. 손님의 주인 공격 사례
8. 대중매체9. 관련 문서10. 외부 링크

1. 개요

접대의 관습(Hospitality customs)은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접대에 관한 전통이다. 주인은 찾아온 손님을 예우하며, 손님은 주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규칙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고도의 사교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문명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제각기 환경과 문화에 따라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다.

현대에는 개인주의 때문에 이런 관습이 상당히 약화되었으나, 가정에서의 손님 환대, 국제사회에서의 망명자 보호 관습 등의 형태로 여전히 남아있다.

2. 원인

2.1. 각자의 안전 보장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는 현대에 비해 여행이라는 것이 매우 위험해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1] 이런 와중에 다른 마을에 이르러도 안심하고 묵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접대의 관습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류 공통의 문화이다. 외부인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이들을 항상 적대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전략이다. 원수에게는 복수하는 관습 때문에 다른 집단의 인사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쌍방 간에 피를 보게 되고, 손해가 막심해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놓고 싸우기 꺼려지는 상대는 손님으로 받고 후하게 대접해서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접대의 관습으로 정착되었다.

이는 매-비둘기 게임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데, 매는 강경한 태도, 비둘기는 유화적인 태도를 의미한다. 만약 자신이 매의 태도를 취한다면 상대방이 비둘기일 때 상대를 지배하기는 쉽지만 가만히 있던 상대를 먼저 공격했다는 점 때문에 주변의 다른 이들의 적개심을 삼으로서 협조를 얻어내지 못하거나 심하면 빈틈을 보이는 순간 공격당할 수도 있으니 장기적으로는 생존에 불리한 행위가 되는데다가, 상대방도 매로 나올 경우에는 싸움이 벌어지기 때문에 상대를 제압하더라도 손해를 볼 수 있다. 반면 자신이 비둘기의 태도를 취한다면 상대방이 매로 나올 경우가 좀 위험하긴 하지만 적어도 먼저 공격한 건 내가 아니므로 주변 사람들이 내 편을 들어줄 가능성이 좀 더 높고, 상대방도 비둘기로 나온다면 양쪽 다 별 피해 없이 교류할 수 있다. 그러니 자신과 상대방 양측이 '나는 너를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 그러나 네가 나를 먼저 공격하면 나도 가만히 당하지는 않을 것이니, 너도 섣불리 굴지 않는 게 피차 좋을 것이다'라는 암묵적 합의로서 이런 관습이 생겨난 것.

결국 접대의 관습이 성립되기 시작한 고대 부족 사회는 현대와 같이 엄밀한 법 질서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는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그 나름대로 고도화된 관습에 기반한 질서로 유지되는 사회였으며, 접대의 관습 역시 그러한 사회에서 각 구성원 간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중요한 장치 중 하나였던 것이다.

몽골인들은 음주를 자주 하는데, 이는 우연히 마주친 처음 만난 목동들끼리 술을 진탕 마시고 편하게 자던 관습이 이어져서 그런 것이다. 혹시 상대방이 밤에 몰래 일어나 자기 가축을 훔쳐 도망갈까봐 걱정하느라 잠을 설치는 걸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손님에게 왕창 밥을 먹여 배를 불리고 술까지 먹여 취하게 만들면 몸이 무거워져 내부에서 적대행위를 벌이지 못할 것이니 주인도 안심하고 잘 수 있다. 게다가 고대나 현대나 타인과 술자리를 가진다는 건 그 사람을 신뢰하고 호의를 베푼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낮선 사람과 선뜻 술자리를 함께 할 정도로 외지인에게 대접을 많이 하고 무사히 돌려보낸 관대함을 어필할 수 있다.

하술된 타타르족이 칭기즈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를 암살한 것에 대해 다른 부족들의 큰 분노를 산 이유가 손님으로 받아놓고 독을 탄 술을 줘서 죽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손님이 기꺼이 술을 받아마신다는 건 그 술을 제공한 주인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한 믿음을 저버린 행위로 그보다 더 비겁한 행각이 있을 수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때문에 칭기즈 칸이 후에 앙갚음으로 타타르족을 대량학살했지만 다른 부족으로부터 크게 비난받지 않았다.

2.2. 은혜를 베푼 것에 대한 명예

사회의 평판이라는 개념이 생기면 명예 때문에라도 접대의 관습은 지켜야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낯선 사람을 손님으로 들였다가 피해를 입을 위험을 감수하느니 아예 손님을 받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지만, 이는 자신의 평판을 크게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손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배짱이 없는 자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자신의 구실을 하지 못하는 자로 여겨져 마치 '친지의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는 쫄보'와 마찬가지의 취급을 받았다.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건 요즘 세상에서나 통하는 말이고, 과거 수많은 문화권에서 명예는 목숨만큼,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었다.[2] 물론 목숨은 중요하지만 도시화 이전의 공동체 사회에서는 자기 목숨만 생각하고 명예를 내던졌다간 공동체 내에서 배척당해 그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손 대대로 살아가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3] 법 질서와 같은 사회적 규범이 상대적으로 미비하던 전근대 사회에서, 명예란 단순한 추상적 가치가 아니라 상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써 나, 또는 내가 속한 집단(가문 등)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나 위상과 직결된 것이었다. 즉, '명예롭다'는 평판을 받는 이는 다른 사회 구성원과의 관계에서 신뢰받고 좋은 대우를 받는 반면, '명예를 잃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는 불신의 대상으로써 박대당하는 게 당연했던 것이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신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신용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자라면 '돈 빌린 뒤에 안 갚고 버티거나 도망치면 이득인데 왜 갚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렇게 했다간 신용불량자가 되면서 그 짧은 이득 이상의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신용이란 신뢰의 일종이다. 신뢰를 저버린다면 당장에는 이득이 된다. 하지만 그로 인해 다음 약속, 거래가 이루어지기 쉽지 않거나 이뤄지더라도 불리한 조건에서 이뤄지게 된다.[4]거짓말을 안 좋게 여기는지 생각해보면 쉽다. 즉, 명예 역시 마찬가지로 한 번 명예를 저버리는 행동을 하면 그 순간에는 이득을 볼 수 있겠지만 이후부터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더욱이 그 시절은 보편적인 인권 개념도 없고 법, 공권력과 같은 상위의 질서체계도 미비한 시대였기에 직접적인 폭력에 의한 보복을 당하거나 심하면 목숨까지 위협당하는 등 오늘날 신용을 잃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접대의 관습'이 주요한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잡은 이상 손님을 극진하게 대하는 것, 하다못해 찾아온 손님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숙식을 제공해 은혜를 베푸는 것은 다름 아닌 주인의 명예와 직결된 일이었던 것. 마을에 터 잡고 사는 주인 입장에서 무조건 빈객이나 여행객을 배척하면 자신과 자신이 속한 가문에게 불명예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구두쇠라도 일단 기본적인 식사와 잠자리는 베풀었다. 오늘날에도 문명국끼리 외교관에게 면책 특권보장하는 것도 각 국가의 명예를 지켜주는 행동으로 볼 수 있다.

2.3. 정보 교환 및 반가움

여행자에게서 얻을 수 있는 소식들은 전근대 시기에는 매우 값진 것이었다. 옛날엔 인터넷은커녕 신문도 없었기에 정보들을 접할 수단이 매우 빈약했다.[5] 때문에 이방인에게서 얻을 수 있는 지역 정세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정보들이었다. 특히 귀족이나 상인, 그리고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부농층은 정보를 통하여 혹시 모를 위기에 대처하거나 혹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기도 하였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상인들은 만약 그 지역에서 장사를 하게 될 경우에는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가 있다. 반대로 손님인 여행자의 입장에서도 현지인으로부터 여행에 도움이 되는 현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설사 이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해도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한 경험은 자극이 부족해 즐길 거리가 많지 않았을 옛 사람들에게 걸어서 세계속으로 같은 여행 프로를 보는 듯한 만족감을 선사하였다. 설령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해도 여행자의 색다른 행색이나 옷차림만으로도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에 사람이 잘 안 다니는 오지라면 일단 여행자도 묵을 곳을 찾았으니 다행이겠지만, 주인 입장에서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다. 외로움 속에서 지내다가 말동무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값진 일이기 때문.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집주인이 여행객에게 '식사도 드리고 잠자리도 내드릴 테니 오신 김에 하룻밤 쉬어 가시라'며 붙잡기도 한다. 여행객 입장에서도 그 정도의 오지라면 하루쯤 쉬고 가지 않으면 탈진해 조난까지 당할 수도 있는 일이라 고맙게 받아들이는 일이 많았다.

3. 손님을 정말 접대하고 싶지 않다면?

애초에 받지 않고 그 자리에서 돌려보내면 된다. 거주지는 주인의 소유물이기에 손님을 거부하는 것은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6] 전근대 사회에서도 주인이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한 행동으로 여겨졌다. 물론 자주 거절한다면 야박하고 인색하다는 평판을 받게 될 것이고, 특히 합당한 이유 없이 손님을 거절하는 것은 주인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키는 행위로 여겨지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일단 손님으로 받아준 뒤에 그를 해치는 것이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최악의 범죄행위로 여겨진 것에 비하면 비교적 사소한 흉거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조선 시대의 암행어사 일기라든지 여러 여행 기록들을 보면, 그 지방에 흉작이 들었을 경우 당연히 손님 접대를 하지 않고 문전박대하는 경우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을 먹을 것도 부족한 상황에 손님 접대를 하는 게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이것이 문제되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툴툴대고 대접이 시원찮지 않아서 손님이 불만을 표하기는 하나 어쨌든 일단 방이라도 내주는 경우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7].

대표적인 접대의 관습 위반 사례인 타타르족의 예수게이 독살을 살펴보자. 일단 이유가 뭐든 간에 예수게이는 타타르족과 이미 10여년간이나 싸워온 명백한 적이었다. 이런 인물이 손님으로 찾아온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이고 너그러워 보이는 선택지는 <평소에는 적이지만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지금은 손님이라 인정하고 대접한 뒤 안전하게 돌려보내는 것>으로, 이는 타타르족을 관대하고 명예로운 씨족으로 널리 알려 그 평판과 명예를 크게 높일만한 행동이 된다.

하지만 숙적을 두고 그렇게까지 사람 좋게 굴 수는 없다면, 예수게이를 <손님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 자리에서 쫓아내는 방법>이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손님을 문전박대하는 이들은 구두쇠라며 경멸받았지만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손님을 거절하는 것은 주인의 권리이다. 또한 찾아온 이가 오랜 시간 동안 싸워온 적이라면 손님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할 명분은 충분히 차고 넘친다. 이 경우 '쫓겨날 것이 뻔한 자리에 뭣하러 찾아가서 비웃음을 자초하느냐' 내지는 '신분을 숨기고 온 수상한 사람이 대접받는 걸 기대하냐' 같은 식으로 오히려 예수게이가 비웃음을 당할 수도 있고, 그렇진 않더라도 최소한 타타르족을 야박하다고 비난할 만한 문제는 아닌 것이다.

만약 타타르족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게이를 처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더라면 그를 손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바로 전사들이 모여 싸움을 거는 방법이 있었다. 이 역시 당시 초원의 부족사회에서 별다른 은원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을 다짜고짜 해치는 이들은 크게 경멸받았지만, 이미 적대관계인 이상 적대 부족의 영역에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예수게이 자신의 책임이며, 타타르족으로서는 무슨 이유로든 자기네 앞마당에 스스로 들어온 적을 가만히 놔둘 이유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예수게이 역시 타타르족을 완전히 믿지는 못했는지 가짜 이름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겼는데, 이는 '주인을 속이는 행위'이기에 접대의 관습에서 손님의 책임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즉 타타르족 입장에서 예수게이는 본래부터 적이었고 신분까지 속이고 들어왔으니 손님으로 맞아들일 이유가 없다.

게다가 "자기 이름과 정체를 숨기고 우리 부족에 들어오려고 했으니 염탐하러 왔거나 밤중에 몰래 죽이려는 게 아니냐?"라며 자신들이 정당하게 예수게이를 죽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 예수게이의 씨족, 예를 들어 자식인 테무진에게는 예수게이의 죽음에 대해 복수할 권리가 생기고, 또한 타타르 족의 평판에 있어서도 명예를 실추시킬 만한 행태라 할 수는 없지만 "타타르족은 그 행태가 가차없고 자비심이 없다"라는 부정적 인식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이전부터 전쟁을 거듭하며 계속 원한을 쌓아가던 관계에서 또 한번의 원한이 더 쌓인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고, 평판 문제 역시 공적 및 객관적 기준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여 불명예스러운 이들이라고 낙인찍히는 것이 아니라면 단순히 좋고 나쁜 평판이란 단지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문제일 수 있는 것이다. 즉 제3자인 다른 부족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적이라지만 손님으로 받아달라고 요청하는데 그 자리에서 쳐죽이는 것은 지나친 일이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신분까지 속이고 숨어든 적에게는 가차없이 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라고 여겨 평가가 갈릴 수 있는 문제인 것. 물론 이런 평가가 나쁜 쪽으로 크게 쏠리게 되면 그것 역시 타타르족의 평판을 떨어트리고 입장을 나쁘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일단 받아들인 손님을 해친다는 최악의 행위를 저지르는 것에 비하면 여전히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즉 만약 예수게이가 이렇게 살해당했다면, 제3자인 다른 부족의 입장에서 보기에 그것은 단지 타타르 부족과 키야트 씨족 사이의 문제일 뿐 공적 윤리로 잘잘못을 가릴 문제가 아니게 되어 굳이 한 쪽 편을 단죄하고 비난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런 양 부족 사이의 문제에서 갈등이 격화될 경우 평판이 더 좋은 부족이 동맹세력을 확보하기 쉽다는 등의 장점은 있다. 하지만 이는 또 달리 보면 적에게는 가차없이 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오히려 그렇게 행동하는 쪽이 동맹으로는 더 든든하다고 여기고 타타르족의 편에 서는 쪽을 선호할수도 있으니 평판은 상대적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타타르족이 저지른 행동의 문제는 바로 그를 모르는 척하고 손님으로 받아들인 후 대접한 음식으로 독살했다는 것이었다. 예수게이 역시 자신의 정체를 속이는 잘못을 먼저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손님으로 받아들인 후에 해쳤다는 타타르족의 잘못이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크기에 예수게이의 잘못은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예수게이의 아들 테무진의 복수는 단순히 '혈족의 죽음에 대한 사적인 복수'가 아니라 '공적 윤리를 저버린 자들에 대한 응징'이라는 강력한 명분을 얻었고, 이 때문에 타타르족이 키가 수레바퀴보다 큰 성인은 처형당하고 아이들은 노예로 끌려갈 정도로 처참한 보복을 당했음에도 칭기즈 칸의 적들마저 그들을 동정할 명분을 찾을 수 없었다.

4. 손님의 입장이라면?

당연히 손님도 자신에게 숙식을 제공한 주인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하면 안 된다.

보통 자기 본거지를 떠나 여행 중인 손님보다는 본거지에 머무르고 있는 주인이 더 강자인 경우가 훨씬 많기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긴 하지만, 대부분의 접대 관습에서 '자신을 받아준 주인을 해치지 않을 의무'는 '자신에게 찾아온 손님을 해치지 않을 의무'와 동등한 것이었다. 즉, 손님으로 들어와 주인을 해치는 것은 손님으로 위장하고 남의 집에 들어온 비열한 범죄로 간주되었으로 그 자리에서 때려죽여도 정당하다 여겼다.

조조여백사 살해가 정사에 기록될 정도로 큰 사건으로 여겨졌던 것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위나라에 편향되게 작성했다는 혐의가 있는 왕침의 위략에서는 '여백사의 집에서 조조를 밀고하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죽인 것'이라는 변명적 서술이 있는 이유도 접대의 관습 때문인데 이렇게 변명해야 조씨 집안의 친우인 여백사가 손님으로 찾아온 조조를 배신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조가 자신을 맞아준 집주인을 죽였다는 식으로 합리화되기 때문이다. 왕침의 위략에 기술되어 있는 변명조의 서술 또한 접대의 관습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8]

유교의 시초인 공자의 일대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공자가 제자들과 방랑하는 중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한 노부부가 사는 움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 집이 너무 가난해서 음식은 이가 빠진 국그릇에 약간의 좁쌀죽이 전부고 잠자리는 짚으로 된 돗자리가 전부였다. 며칠 전 제후의 성에서 진수성찬과 좋은 잠자리를 제공받은 기억이 있는 제자들이 불평을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너희는 없는 형편에 자신의 식량을 대주고 잠자리를 제공한 노부부의 고마움을 모르고 이가 빠진 그릇과 좁쌀죽만 보았구나, 무릇 상대방을 정중히 대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정중히 대접한 주인에게 고마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제자들을 가르치니 제자들이 모두 얼굴이 빨개져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파리스가 자신을 환대한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를 배신하고 헬레네와 불륜을 저지르는 바람에 트로이가 망했으며, 오이디푸스의 친부 라이오스도 자신에게 안전장소를 마련해주고 환대한 이웃 왕 펠롭스의 아들 크리시포스를 겁탈하여 죽게 만든 일 때문에 신들에게 저주를 받아 친아들에게 죽는 최후를 맞이했다는 전승이 있다.[9] 또한 가난한 나그네로 변장한 제우스헤르메스를 잘 대접한 필레몬과 바우키스 부부는 제우스 신전의 사제가 되고, 부부가 한날 한시에 죽는 은혜를 입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마을의 다른 사람들은 수장됐다.

신과 관련된 전설 뿐만 아니라 괴물과 관련된 전설에서도 접대의 관습의 흔적이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흡혈귀의 전설이다. 흡혈귀는 집주인이 초대하지 않으면 함부로 집에 들어갈 수 없으며 들어간 후에도 초대한 집주인을 함부로 해치지 못한다고 한다.

만약 손님이 고의성이 전혀 없는 실수로 인해 주인에게 피해를 줬다면 그 즉시 주인에게 깊이 사죄하고 주인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 책임을 져서 보상을 해 주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다.

4.1. 선물

손님은 주인에게 받을 대접에 대비하여 미리 성심성의껏 선물 등을 준비해서 가져가는 것이 관례다. 이는 전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절로 한국에서도 '타인의 집을 방문할 경우 빈손으로 가면 안 된다'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잡혀 있으며, 이는 현대에도 유효해서 '집들이 선물'로 정착했다. 주로 주는 선물은 주스나 아님 휴지 등과 같은 생활용품이 가장 보편적이다. 몽골에서도 방문할 경우 선물을 들고 간다. 일본에서도 타인의 집을 방문할 경우 선물을 들고 간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는 미국, 유럽 등 서구권 국가에서도 보편적으로 자리잡은 예절이라서 남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을 경우 같이 곁들일 수 있는 와인 등을 선물로 가져가는 게 예의다.

한가지 신기한 점은 한 문화권에선 선물로 적합한 것이 다른 문화권에선 적합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음식은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10] 만국 공통 호의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접대의 관습에 호응하여 부족 사회 시대부터 내려온 중요한 관습 중 하나가 '선물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선물은 상대에 대한 호의의 표현이자 서로를 친구로 대하자는 제안을 전달하는 매개이므로, 이를 거절한다는 것은 곧 "나는 너를 친구로 보지 않는다'로 너와 나는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는 관계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즉, 손님이 들고 간 선물을 주인이 거절한다면 이는 손님 입장에서도 상대가 자신을 우호적인 손님으로 보지 않고 적으로 볼 가능성이 높음을 알 수 있으므로, 좀 아양을 떨어봐야 하는지 아니면 그대로 내빼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인 것. 예의란 언제나 상호적이므로, 러시아 등 동유럽에서 주인이 내온 빵과 소금을 손님이 거절하는 것은 곧 손님으로써 주인을 존중하지 않고 상대를 해칠 뜻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5. 의의

사학, 인류학계에서는 이러한 접객과 상호신뢰의 관습을 인류가 타 동물들과 차별화될 수 있었던 결정적 차이점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동물은 거처를 옮겨다니는 철새가 아닌 이상 무리생활의 여부를 막론하고 자신의 구역을 침범한 타 개체를 적대시하며 내쫓으려 한다. 하지만 인간만은 자신의 구역에 들어온 다른 개체를 무작정 공격하지 않고 상호간 기본적 신뢰를 바탕으로 숙식을 제공하여 환송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들은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고 더 나은 문물과 문화를 공유하며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접대의 관습은 에티켓 등의 관습은 물론이고 여관, 식당, 역참 같은 서비스업의 모태가 되었으며[12] 국가적인 규모에서는 외교관례라는 개념을 발생시켰다. 현대에 타국 정상이 방문하면 의장대를 불러 환영하고 만찬을 베푸는 것도 그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다.

6. 문화권별 양상

6.1. 고대 그리스

주인과 손님이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가짐을 '크세니아(ξενία, xenia)'라고 불렀다. 이를 관장하던 신은 신들의 왕이자 주재자인 제우스.[13] 따라서 주인과 손님이 서로를 박대하거나 무시하는 행위는 곧 제우스를 모욕하는 것과 같은 지대한 신성 모독으로 간주되었다.

관련된 신화가 바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바우키스와 필레몬 부부의 이야기. 온 마을에서 거지 부자를 내쫓았지만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이 노부부만이 거지를 받아들여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극진히 대접하였는데, 그 거지 부자가 제우스와 헤르메스였고, 그 대가로 제우스는 친히 부부의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을 금은으로 장식된 크고 아름다운 신전으로 바꿔준 뒤 나머지 집들은 홍수로 쓸어버려 그 신전을 장식할 거대 호수로 만들어버렸다.[14]

이 외에도 영웅 신화에서는 영웅이 정체를 숨기고 적진으로 들어갔는데, 적국의 왕이 이미 손님으로 대접한 영웅을 직접 해칠 수 없게 되어 대신 괴물과 싸움을 붙여서 차도살인을 시도하는 패턴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영웅은 주인공 보정을 받아 괴물을 무찌르지만. 이아손벨레로폰이 그 예.

호메로스일리아스에서 메넬라오스파리스를 경멸하며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할 때 한 말이 나는 파리스가 내 집에서 머물 때 나와 같은 식탁에서 같은 음식을 대접하며 손님 대접을 해줬는데 저 놈은 내 부인이랑 도망친 배은망덕한 놈이 아니냐였다. 위에서 접대의 관습이 주인이 손님을 해쳐서도 안 되는 것이지만 손님 또한 주인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고 한 점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손님이 관습을 깬 케이스. 또한 오디세이아에서는 오디세우스는 이 접대의 관습 덕분에 항해 중 겪은 고난을 해결하게 되거나, 간신히 이타카에 도착한 이후 제대로 손님 대접을 받으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아레스의 손자 익시온은 증조부인 제우스에게 장인 살인죄를 정화받고, 신들의 만찬에도 초대를 받았는데 증조모인 헤라에게 흑심을 품었다. 당연히 분노한 제우스는 익시온을 시험하기 위해 구름을 헤라로 위장시켰고, 익시온은 구름과의 사이에서 켄타우로스를 낳은 후 타르타로스에서 벌을 받았다.

오이디푸스의 친아버지 라이오스도 정적 암피온, 제토스로부터 숙청을 피해 도피하다가 자신을 보호해준 펠롭스[15] 왕의 사생아 크리시포스를 겁탈하는 죄를 저질렀다. 이로 인하여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게 될 것라는 저주를 받게 되어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만들게 된다.

펠롭스의 아들 아트레우스도 동생 티에스테스를 초대하면서 자신이 죽인 티에스테스의 아들들의 시체를 동생에게 먹였다.[16] 그리고 티에스테스가 먹은 음식의 정체를 밝히고 그를 추방시켰다. 결국 신들의 저주를 받아 미케네에는 가뭄이 들었고,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가 티에스테스를 잡아 가둬서야 가뭄이 끝났다.

스파르타는 전쟁 비용이 부족하면 타 폴리스의 부자를 납치하거나 왕의 이름으로 초대한 다음 협박하여 몸값을 받아내는 형식으로 전쟁 비용을 충당하였는데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 인하여 스파르타와 교역하려는 상인들이 적었고 이는 훗날 스파르타가 메세니아 독립 후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계기가 된다.

6.2. 동유럽

파일:Wilhelm_Amandus_Beer_Bread_and_salt_1874.jpg
독일화가이자 대학교수 빌헬름 아만두스 베어(Wilhelm Amandus Beer, 1837~1907)가 그린 빵과 소금, 1874
동유럽에는 '빵과 소금'(영어: Bread and Salt / 러시아어: Хлеб и Соль)이라는 관습이 있는데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 집안의 안주인, 혹은 젊은 여성이 빵과 소금을 접대하는 관습이다.

오늘날 현대인의 입장에선 빵과 소금이 뭐 그렇게 대단할 게 있는가 싶겠지만 여기서 빵은 흰밀가루로 만든 빵이고 소금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흰 소금을 말한다. 흑해 연안을 제외한 동구권은 추운 날씨와 척박한 땅 그리고 낮은 교역량으로 인해 주로 귀리죽과 호밀빵과 암염을 주로 먹었고 쓰고 비린 맛이 없는 흰밀가루나 순수한 소금은 구하기 어렵고 비싼 것이었다.

즉 흰 빵과 흰 소금이란 열량과 염분이라는 생물학적 필요를 충족시키면서도 맛도 좋고 비싼 것을 대접함으로서 최소한으로나마 자신은 길손의 안녕을 보장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는 의미가 담겨있다. '빵과 소금'은 집주인에게는 손님에게 하는 최고의 접대 중 하나였고 길손에게도 최고의 영광이었다. 때문에 길손이 빵과 소금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해도 배은망덕이 아님"과 같은 의미로 취급되었으며 그 즉시 스스로 떠나거나 주인에게 추방당했다. 빵과 소금을 받은 후에 주인에게 해를 끼칠 경우 천벌이 내려진다는 믿음이 있었다.
빵과 소금을 대접받고 있는 시진핑
요즘도 러시아불가리아에서는 국가적인 귀빈이나 유명 국내외 인사가 자국이나 특정 고장을 방문하면 전통의상을 입은 젊은 여성이 빵과 소금을 들고 바로 대접하는 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유럽 국가로 비행하는 항공기에서 빵과 소금을 기내에 있는 승객들에게 나누어준 일도 있다. 심지어 기존의 전통 문화 대부분을 봉건질서라며 학을 뗐던 소련 시절에서조차도 러시아 전승절의 공산당 퍼레이드 앞쪽에는 빵과 소금을 든 젊은 여인들이 열맞춰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러시아의 민담에서 여정을 떠나는 주인공들이 영적 존재(바바 야가 등)의 오두막에 초대받고서 여정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먼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목욕을 시킨 다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주시는 것이 도리가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얼핏 손님이 무례하게 행패를 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쌩판 모르는 사람의 개인정보를 캐려거든 신변보장부터 해주는 게 먼저 아닙니까?라는 뜻이다. 동시에 인간보다 초월적이고 위험한 영적 존재들에게도 겁먹거나 기죽지 않는 주인공의 담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고로 주인공이 하는 말을 풀어보자면 "당신은 초자연적인 존재이지만 나는 당신이 무섭지 않으니 나를 손님으로 받아들여 해치지 않기를 당당하게 요구한다. 나를 손님으로 받아들인다면 나도 손님으로서 예를 다하겠다."라는 뜻이 된다. 또한 초자연적인 존재는 국가를 불문하고 인간보다 관습에 더 제약되는 경향이 있는 만큼 관습을 상기시켜 초자연적인 존재(바바 야가)로부터 스스로를 지킨다는 주술적인 의미도 있다.

러시아의 유목민들은 대해주는게 조금 다른데 유르트의 가장 좋은 상석에 앉혀준 뒤 빵과 소금이 아닌 기르는 동물을 잡아 대접한다. 이것도 유목 생활 중에는 빵과 소금이 없는 경우가 많아 대신 최대한 좋은 대접을 하는 것이고, 만약 빵과 소금이 있으면 그걸 대접한다.

다만 이렇게 대접해준다는 것이 변질되어 오히려 악습이 된 경우도 있다. 17세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에 있었던 스노하체스트보로, 손님이 오면 며느리가 시아버지에 의해 손님을 성접대해야 했던 것. 1950년대까지 러시아 제국, 소련 시절까지 남아 있었다.

6.3. 북유럽

북유럽 신화에서도 손님 접대를 중요시하는 내용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오딘이 여러 가르침을 준다는 내용의 시가인 '하바말'에는 먼길을 온 여행객을 난로불 곁에서 융숭히 대접하라는 구절이 나오며, '그림니르의 비가'에서는 고트족의 왕 게이로드가 접대의 관습을 지키지 않고 손님으로 찾아온 오딘을 고문했다가 결국 죽게 된다.

게르만족 역시 손님들에게는 매우 우호적이었고, 타키투스게르마니아에서는 일부 게르만 부족들은 손님을 문전박대하는 것을 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 여겨 손님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전통은 중세 이후 유럽 문화권과 섞이며 자연스럽게 접대의 관습이 지켜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주인이 방문한 손님에게도 식사 등을 대접할 예의상의 의무가 없으며, 거꾸로 손님이 한 가정의 식사 시간을 그들만의 사생활로 존중하고 손님이 함께 식사하는 것을 가정에 대한 간섭으로 여기는 엄격한 개인주의 문화가 정착했다. 덴마크[17],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지에서는 손님을 식사에 초대한다고 사전에 고지하지 않는 한 손님은 식사 시간을 피하는 것이 예의이며, 피치 못하게 손님이 식사 시간까지 남아 있을 경우에도 주인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 실례이다. 만일 주인이 손님에게 사소하게나마 무언가를 제공했다면 손님은 대접받은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먼저 주인에게 식사를 요구하는 건 매우 무례한 동시에 사생활을 침해하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여진다.

2022년에 들어 레딧에서 '어릴 때 스웨덴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식사 시간이 되자 친구 어머니가 친구에게 식사하라고 부른 뒤 나는 방에서 기다리게 하고 자기 식구들끼리만 식사를 했다'는 글이 트위터인스타그램 등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면서 알려졌다. 스웨덴 네티즌들은 '미리 말하지 않고 왔으면 못 먹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 '손님을 대접할 음식이 부족해서 그런 거지 문화적인 게 아니다' 등의 반박을 했고[18] 특히 "옛날에 스웨덴이 가난할 때의 관습이 지금까지 지속되는 것이다"(실제로 스웨덴은 땅이 척박해서 농사가 잘 되는 곳은 아니다)라는 반박에는 당시 내전중이던 아프가니스탄 네티즌이 등장해 "우린 전쟁통에도 손님 오면 대접은 한다!"라며 크게 호통을 치기도 했다. 이에 접대의 관습을 아주 중요시 하는 남유럽[19], 라틴아메리카[20], 아시아[21], 중동[22], 아프리카[23] 네티즌을 포함해, 개인주의적 사회상일지언정 집에 찾아온 이웃이나 친구를 저렇게 대놓고 굶기진 않는 북미권 네티즌들까지[24] 경악하여 엄청난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북유럽 문화권을 비판하는 소잿거리가 되었다. 발단의 원인을 제공한 국가가 스웨덴이었기 때문에, 일명 "스웨덴게이트(#Swedengate)"라는 밈적 해시태그까지 붙었을 정도. 이케아, ABBA, 복지 정책 등의 나라로 인식되던 스웨덴의 산뜻한 이미지가 한 순간에 손님을 굶기는 나라로 추락해버렸다는 스웨덴 네티즌들의 자조적인 트윗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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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스웨덴의 피카(fika)처럼 타인과 다과나 디저트를 나누는 문화는 남아 있다. 그럼에도 주인과 손님과의 관계는 다른 문화권과 비교해 매우 사무적인 관계에 가깝기에 만약 노르딕 문화권의 국가에서 다른 곳마냥 손님으로서 접대를 받았다면 그 손님과 집주인은 굉장히 우호적인 관계라고 보면 된다.

6.4. 서유럽

네덜란드도 '더치 페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유럽 내에서는 구두쇠들이 많고 접대가 인색한 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 있다. 한 벨기에인네덜란드인 직장 동료에게 차를 태워줄 일이 있어 집에 들렀더니 커피 한 잔을 대접하고 (기름값과 운전 수고비는 생각 안 하고) 커피값을 청구한 일이 있다는 경험담을 남기기도 했다.[25]

독일의 천주교 성인인 파르잠의 콘라도(Konrad von Parzham)는 시성 심사 중 이 접대 문제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콘라도는 카푸친 수도원의 문지기 수사로 활동하면서 방문객들에게 맥주와 간단한 음식을 대접하는 관례를 충실히 따랐다. 시성 심사 때 '악마의 대변인'[26]은 이를 지적하며 "젊은 여자에게도 음주와 혼취를 조장한 사람을 어떻게 성인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까?"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심사에 참석한 뮌헨 주교의 반박이 일품. "독일 여자가 겨우 맥주 2잔 가지고 취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악마의 대변인도 수긍했다고.

6.5. 무슬림 문화권

이슬람에서는 손님이 방문했을 때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대접하는 것을 무슬림의 의무라고 생각한다.[27] 이것은 아랍 유목민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으로, 유목민들의 손님에 대한 환대는 숭고한 덕목으로 간주되며 극진한 환대를 베푸는 것이 자신의 품격과 위신과 명예를 높인다고 생각한다. 환대의 관습은 사막이라는 절박한 환경에서 누구나 길을 잃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될 때를 대비해 길 잃은 자에게 환대를 베풀어 미래에 닥칠지 모르는 재앙을 피해 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

환대의 규율에 따라 도망자라 할지라도 손님이 되면 주인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를 지켜 주어야 한다. 주인은 객을 맞이하여 그의 체력 회복을 돕고 보호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아랍인들의 집이나 가게 앞에는 물이 가득 든 항아리와 컵을 놓아두어 목마른 자들로 하여금 마시게 하는데, 이는 이러한 손님 접대문화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환대의 관습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전통으로 유지돼 친지나 친구 간의 상호방문이 매우 빈번하고 정해진 약속 없이도 비교적 자유로이 이루어진다. 찾아온 손님에게 주인은 최선을 다해 환대하며 자신이 급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손님에게 불쾌한 기분을 주지 않기 위해 손님과의 시간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이러한 손님 환대에 대한 관습은 집의 구조에서도 잘 나타난다. 무슬림 가정의 대부분은 커다란 홀을 가지고 있다. 이 홀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것으로써 가족들의 방보다 우선하여 비중을 두고 있다.
요르단 대한민국 대사관 문화정보 중
이슬람권에 속한 중앙아시아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빵과 소금'의 관습이 존재하며, 또한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 집에는 천사도 찾아오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손님이 방문했을 때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대접하는 것을 무슬림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특히 사막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민족들이 많았던 만큼 자신들도 누군가의 손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라비안 나이트 중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서 도적 두목이 상인으로 변장하고 복수하고자 알리바바의 초대에 응했을 때 음식을 주문할 때 소금을 빼달라고 한다. 알리바바는 이를 몰랐는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마르자나는 그의 정체가 손님이 아닌 복수자임을 의미한다고 언급한다.[28] 소금을 알리바바에게서 받아버리면 알리바바의 손님이 되므로 알리바바를 해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29] 달리 보면 한낱 도적조차도 접대의 관습을 대놓고 어기지 않으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영역본을 쓴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은 이에 대해 유럽의 접대의 관습과 성격이 같다고 주석으로 언급하였다.[30] 결국 도적 두목은 칼춤을 추며 접근한 마르자나에게 죽는데, 두목이 손님으로서 접대의 관습을 지키지 않으려 했으니 마르자나가 그를 죽인 것 역시 알리바바가 주인으로서 접대의 관습을 어긴 것이 아니게 된다.

요르단 왕국에서 반유목 생활을 하는 베두인은 모르는 손님이 찾아오더라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3일 동안은 융숭하게 먹여주고 재워주는 전통이 있다. 반드시 촌장이 대접해야 하며 식사는 손님이 먹은 다음에야 먹으며 손님에게 차 혹은 술을 3번 따라주고 노래를 틀고 데헤이에[31]라는 전통춤을 추며 노는데 첫 잔은 손님에게, 두 번째 잔은 손님의 명예로운 칼[32]에게, 세 번째 잔은 손님을 기분 좋게 해주는 잔이며 몽골의 유목민과 마찬가지로 허튼 수작부리지 말고 취해서 같이 노래 부르고 춤추며 놀다 가라는 뜻이 있어보이지만 치안이 옛날보단 괜찮아진 요즘은 그런 뜻은 사문화가 된 듯 아주 작은 술잔이나 취하지 않게 차를 대접해준다. 밤에 신나게 춤추는 건 그대로다.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복무한 적이 있었던 한스 폰 루크는 그의 저서 '롬멜과 함께 전선에서'에서 그와 부하들이 베두인에게 후한 접대를 받은 바 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식사를 하던 도중 한 부하가 과일을 담은 은쟁반을 보고 정말 아름답다고 칭찬하자, 촌장이 그 자리에서 그 은쟁반을 선물했다고 한다. 손님이 집안의 어떤 물건을 보고 칭찬하면 그게 뭐가 되었든 선물해야 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그걸 거절했다간 독일군과 베두인 사이의 관계가 틀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일단 감사히 받은 후, 며칠 뒤 독일군 진지에 베두인을 초대해 성대하게 접대하는 것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이런 관습은 현대에도 꽤 남아있는지, 여러 사례들이 계속 기록되고 있다. 1980년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어느 소련군 정찰대가 작전 수행 도중 여자들만 있던 민가에 들어갔다. 원래 폐쇄적인 아프간 전통상 여성들은 남편 없이 외간 남자를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집에 찾아 온 손님을 제대로 대접해야 하는 또 다른 전통도 있어서 이 여성들은 소련군들에게 먹을 것을 대접했다.[33]

이라크 전쟁 이후, 도시에 숨어든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하러 미군 저격수를 민간인 가정에 매복시켰는데, 이라크 국민들이 미군을 사실상 적으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저격수들에게 성대한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34]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레드 윙스 작전의 생존자 마커스 러트렐(Marcus Luttrell)이 근처 마을로 내려가서 주민 모하마드 굴랍 칸(Mohammad Gulab Khan)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모하마드는 접대의 관습에 따라 미군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러트렐을 치료해주고 보호해주었다. 심지어 러트렐은 잡으러 온 탈레반들조차도 모하마드가 '이슬람 율법에 나온대로 저 사람을 보호하겠다'라고 말하자 그를 존중하며 군말없이 물러갔다.

현재도 이슬람의 성지로 유명한 메카를 방문하면 이슬람교 신도가 아니더라도 자원봉사자들이 제공하는 간단한 식사나 물을 공짜로 얻어먹을 수가 있다고 한다. 이는 멀리서 메카를 방문하는 이슬람교 신도에 대한 오래된 관습이라고 한다.

2012년에 방송된 EBS 다큐멘터리 '역사의 땅 이스라엘'에서도 네게브 사막에서 노숙을 할 뻔했던 취재진이 베두인을 만나 하룻밤 식사와 숙박을 제공받는 장면이 나왔다. #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인구 조사를 하러 온 조사원에게 식사를 '대접하지 말자'는 공익 캠페인도 있다. 인구 조사원을 손님으로 인식하는 건 좋은데 손님이라고 성대하게 음료와 식사를 대접하고 있으면 업무에 지장이 생길 테니까 나오는 말이다. 조사원을 들이는 집에서야 조사원 한 명에게만 대접을 하면 되는 일이지만, 조사원 입장에서는 가는 집마다 뭘 계속 받아먹자니 위장이 못 버틴다. 예의상 거절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 목사들도 교회 신도들의 집을 방문하다 보면 똑같은 이유로 난처할 때가 있다고 한다. 해당 캠페인과 접대 문화는 2022년 전세계 인터넷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스웨덴게이트에서 반대 사례로 재조명받기도 했다.

6.6. 우즈베키스탄

우즈베키스탄에는 동쪽의 페르가나풍, 서쪽의 호라즘풍, 그리고 중간의 카슈카다리야풍, 이렇게 세 가지 기풍이 있다고 한다. 호라즘풍은 식사를 권할 때 손님이 사양하면 더 권하지 않고 정말로 식사를 주지 않는다. 손님이 마음껏 마시고 먹을 수 있게 주인은 자리를 뜨고, "이젠 됐어요"라고 하면 절대 권하지 않는 것이 호라즘풍이다. 그 정반대가 페르가나풍으로, 많이 먹은 손님이 사양해도 최대한 더 먹고 마시게 하는 것이 손님대접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카시카다리아풍은 그 중간으로, 손님 옆에 주인이 있으면서 적당히 권하고, 자리를 뜨거나 배부른 손님에게 억지로 권하는 법이 없다고.[35]

6.7. 유대교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13:2
고대 유대인들에게도 이와 같은 풍습이 있는데, 성경에서도 손님에 대한 접대 묘사가 많은 편이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나 이 나그네로 변장한 천사들을 극진히 접대하고 나그네의 안전을 자기 가족을 희생해서라도 보장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인간의 모습으로 온 하느님과 천사들에게 송아지 요리와 치즈를 대접했으며,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 확인차 천사들이 의 집에 찾아오자, 소돔의 폭도들이 천사들을 겁탈하기 위해 롯의 집에 몰려들어 손님들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자 롯은 손님들 대신 이미 약혼한 상태였던 자신의 딸들을 내주려고 했다.

이걸 단순히 '롯이 딸들을 팔아넘겼다'라고 해석하는 건 곤란하고,[36] 가족들을 지켜야 하는 가장의 의무와 손님들을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접대의 관습 중 양자택일로 후자를 고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롯 역시 소돔에 정착하면서 기반이 생겼기 때문이 도시가 멸망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딸이라도 내보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던 것이다.

또한 주민들에게 보내는 경고로 볼 수도 있다. 롯의 집안은 상당히 부유하고 소돔 내에서는 상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딸들의 약혼자들 또한 상당한 지위를 지닌 집안의 아들들이라는 결론을 유추할 수 있다. 즉 롯의 발언은 겉보기에는 비정하게 들릴 수 있어도 실제로는 "손님을 내줄 수는 없으니 차라리 내 딸들을 내주마. 그런데 내 딸들 건드리면 우리 집안은 물론이요 약혼자 집안하고도 척을 질 각오 정도는 해야 할 텐데, 그냥 허튼 생각 말고 조용히 돌아가지?"라는 의미를 내포함을 알 수 있다.

사실 소돔고모라는 바로 멸망할 운명이었지만 롯의 숙부 아브라함의 구명으로 한 차례 구원받을 기회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이전에 소돔 지역이 전쟁에 휘말려 롯을 포함한 주민들이 포로로 끌려가자 사병들을 동원해 이들을 구해준 적이 있었는데, 소돔 왕은 감사의 표현 없이 "우리 사람들 이리 데려오고 전리품은 알아서 가져가쇼"라는 식으로 푸대접을 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소돔을 방문했을 테니 이들의 싹수가 노란 것을 어느 정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도 아브라함이 "하느님, 잠깐 고정하시고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그 큰 성에 의인들은 있을 텐데 악인들이 많다고 그 의인들까지 죽이시는 건 과하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하느님에게 애원하여 10명의 의인이라도 있으면[37] 구원받을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손님을 범하려는 폭도들의 행태에 이 도시는 그 10명의 의인조차 없다는 걸 확인한 천사들은 본모습을 드러내 몰려온 폭도들을 일시적으로 장님으로 만든 뒤 롯과 그의 식솔만 빼내고 두 도시는 떨어지는 불길에 싹 지워졌다.

이후, 판관기에서도 롯 때와 마찬가지로 첩과 길을 가던 레위인이 밤이 깊어 한 집에 머무르게 되는데 동네 불량배들이 그를 겁탈하기 위해 요구하자 집주인이 그를 내보내는 대신 자신의 딸을 넘겨주겠다고 제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만 이후 그 레위인은 자신 대신 자신의 첩을 불량배들에게 넘겨주고 밤새 강간당한 첩은 시체로 발견되어 이스라엘 전역으로 토막쳐서 보내지게 된다. 이 집이 베냐민 지파 세력권에 있었기 때문에 진상요구를 거부하는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지파와의 갈등이 타져 내전이 일어나고 만다.

다윗도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던 때, 나발이라는 한 지주의 잔치에 손님으로 찾아갔다 문전박대를 당한 바 있다. 다윗은 이전에 나발의 양치기들을 아무 대가 없이 지켜준 적도 있었으나, 나발은 친사울파였기에 관습을 무시한 채 그를 쫓아낸다. 사실 친사울파가 아니었다고 해도 당시 다윗의 처지를 보면 비호하는 건 당시 큰 위험이었다. 이전에 다윗에게 우호적인 친아들 요나단을 죽이려 들거나 다윗을 도와줬던 야훼의 제사장들이 사울에게 학살당한 전례도 있었고, 다윗도 어느 정도 관용이 있었기 때문에 나발도 적당히 거절했더라도 이해해줄 터였다.

그런데 나발이 대놓고 다윗을 모욕하는 바람에 분노한 다윗이 무리를 이끌고 나발의 영지를 공격하려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러나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먼저 다윗을 만나 달래면서 보복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중에 아비가일이 이 사실을 알리자 충격을 받은 나발은 쓰러지고, 하느님의 천벌을 받아 얼마 후 병으로 사망하며, 이후 나발의 아내는 다윗에게 재가한다.

사무엘상에서 사울 역시 무녀를 찾아가 손님으로서 송아지 요리를 대접받았다. 사울은 예전에 무당처럼 귀신을 영접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을 내쫓았지만 사울은 당시 하느님에게 버림받아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아무 예언을 들을 수 없었기에 정체를 숨기고는 무녀를 찾아간 것. 이 때문에 무녀는 사울에게 처벌받을끼ㅣ 두려워했으나, 영매를 통해 나온 사무엘의 저주에 정신이 붕괴된 사울을 보자 마음이 바뀌어 빵과 송아지를 잡아 대접하게 된다.

6.8. 몽골

몽골인들에게도 비슷하게 '손님은 누가 됐건 해하지 않고 후하게 대접한다'는 풍습이 있었다. 손님으로 대우하기 싫으면 내쫓도록 되어 있었으나 일단 받아주면 밖으로 나갈 때까지는 안전은 보장해줄 의무가 있었다. 심지어 손님에게 해를 끼치거나 대접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목이 날아가기도 했다. 위에 언급한 타타르족의 예수게이 살해에 테무친(칭기즈 칸)이 그토록 큰 원한을 가진 것도 이를 대놓고 어겼기 때문이다. 결국 타타르족은 얼마 지나서 그 대가를 아주 처절하게 치른다. 그런데 타타르족은 이 관습을 어기는 일이 많았는지 칭기즈 칸의 증조부인 암바가이 칸 역시도 선대인 카불 칸 시절부터 대립해온 타타르족과 화해하기 위해 결혼 동맹을 추진하려고 했는데 타타르 쪽이 직접 딸을 데리고 온 암바가이 칸을 금나라에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다.

이는 단순히 개인 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 단위로도 적용되었다. 호라즘 왕국은 몽골이 친선으로 보낸 사신과 상인들을 대접하기는커녕 이들의 재물을 강탈하고자 첩자로 몰아 모두 죽였기에 몽골로부터 잔혹한 보복을 당하고,[38] 고려 또한 미제 사건이라 진범은 알 도리가 없지만[39] 몽골에서는 저고여 피살 사건을 고려가 일으킨 것이라 생각했기에 여몽전쟁의 신호탄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칭기즈 칸은 몽골 제국 법에 손님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먹고 음료수를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어 환영한 손님은 독살하지 못하게 했다.

지금도 몽골 유목민 게르에 불쑥 찾아가도 애초에 관광객용 천막이라면 돈을 받고 재워줄 것이고, 일반 유목민 천막이면 십중팔구는 공짜로 먹이고 재워준다. 인터넷상에도 경험담은 널리고 널린 편이지만,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 무작정 믿는 것은 위험하니 웬만하면 관광객용 천막을 이용하자.

앞서 원인의 1번 문단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몽골에서는 술과 음식을 배불리 먹이는 경향이 있었다. 손님 또한 주인이 주는 음식과 술을 사양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지라, 몽골 음식과 술이 입에 맞지 않는 외국인들이 몽골인의 집에 손님으로 갔다가 대판 고생하기도 한다. 열하일기를 쓴 선비 박지원이 사행길 중에 잘못 들어간 조폭 소굴에서 독주를 사발로 원샷하고 몽골인 장사들에게 존경받은 일화에서처럼 옛날 동북아 유목세계에서 주량과 식사량이 '사내다움'의 척도였던 이유다. 지금도 몽골인의 손님 접대에는 대량의 술이 빠지지 않으며, 특히 주인이 손님이 마음에 들어 내놓는 이별주(라지만 실은 가지 말고 쓰러져서라도 며칠 더 있다 가라는 뜻)은 다 마시고 가든지, 최소한 뻗을 때까진 마시는 게 예의.

흥미로운 부분으로 한끼줍쇼에 한국인과 결혼한 몽골인 주부가 나온 적이 있는데 손님은 그냥 돌려보내면 안 된다고 식사를 권해서 이경규와 임수향이 미션을 해결한 일이 있다.

6.9.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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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옥에서 취미를 즐기거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존재한 공간인 사랑방(舍廊房)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 전통이 있다. 처음 보는 낯선 나그네라고 할지라도 식사와 잠자리를 부탁하면 여건이 되는 한 반드시 손님을 받아들였고, 봉제사 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라고 해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한옥 역시 손님이 숙박할 수 있도록 사랑방이 안채와 별도로 존재할 정도로 접대에 친화적이었다. 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종갓집의 경우, 현대까지 전승되는 집안의 전통 요리를 크게 제사 음식과 접대 음식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접대는 종가집 살림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했다.

잔치를 벌일 때면, 동네 거지에게도 잔치음식을 베푸는 관습까지 존재했다. 동냥하러 오면 찬밥 한 덩이 정도는 내어 주고, 중이 시주하러 와도 음식을 조금씩 내어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옛 고사에 나그네가 '밤이 깊었는데 하룻밤 재워줄 수 있겠소?' 라고 묻는 장면이나, 나그네를 받아준 집주인이 침구와 함께 자신도 자주 먹지 못하는 귀한 흰쌀밥을 내오는 일화는 당연할 정도로 자주 등장하며, 차림새가 볼품없는 손님이라도 이를 함부로 내치는 것은 작중 인물의 악덕(惡德)과 불운을 암시하는 장치로 쓰였다.

당장 전래동화의 프롤로그 부분을 봐도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 어느 집에 묵고 갈 것을 청해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았는데, 주인이 흔쾌히 수락하고 인심좋게 한 상 차려줘서 배불리 먹었다. 그런데 주인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슬픔에 젖어있어 이를 의아하게 여긴 나그네가 물어보니 주인이 한숨을 푹 쉬면서...'라는 형식으로 시작 하는게 전래동화의 90%를 차지할 지경이다.

대표적으로 접대의 관습을 무시하고 인색하게 굴었다가 큰 코다치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바로 옹고집전이다. 그 외에도 하룻밤 묵어가는 나그네, 스님, 점쟁이, 무인 등이 묵게 해준 집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식의 이야기는 어사 박문수 등 매우 많이 있다. 또한 여행객들을 무조건 거부하거나 위협하면 그 집주인과 가문은 전국적으로 인색한 집안으로 소문이 나서 본인과 본인 속한 가문 전체가 과거 같은 출세길이 대대손손 막힐 가능성도 있었다.

한 전설에 따르면 종가집에 시집 온 며느리가 수십 년 넘게 집에 찾아오는 손님과 여행객들을 대접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40] 하도 손님들이 오는 것을 귀찮아한 나머지 고명한 스님을 찾아가 손님들 발길을 끊어주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이 스님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찾아온 종가집 며느리가 하도 조르자, 종가집 앞에 있는 바위가 사람을 끌어오는 신령함이 있으니 그 바위를 쪼개면 더 이상 손님들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준다. 그 스님이 알려준 대로 바위를 쪼개자 더 이상 종가집으로 손님이나 방문객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 방문이 끊기면서 며느리가 살았던 종가집의 가세도 급격히 기울어 몇 년 안 되어 종가집은 몰락하고 종가집 식구들은 걸인으로 평생 떠돌며 살았다고 한다. 알고 보니 며느리가 속한 종가집은 여러 가문과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서 번영을 유지하던 것인데 여러 가문들 특히 높으신 분들이 있는 세도가 사람들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몰락한 것이다.[41]

김삿갓 전설 역시 하루 묵어 가겠다는 김삿갓에게 야박하게 구는 부자, 훈장, 주지승 등을 김삿갓이 시를 지어 조롱하는 레퍼토리가 많은데, 현대인 입장에서는 '생판 처음 보는 나그네가 거지꼴을 하고 와선 밥 달라 재워달라고 하는데 당연히 거절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 조선 사회의 정서상 손님을 그것도 온갖 들짐승들이 위협해댈 밤에 찾아온 손님을 문전박대한 이들은 명백한 악(惡)이었고 그렇기에 김삿갓의 반격이 유쾌할 수 있었던 것이다.[42]
제사와 빈객(賓客)은 비록 사사로운 일에 속하지만 마땅히 항식(恒式)이 있어야 한다. 잔소한 고을은 법식보다 줄여야 한다 …(중략)… 공적인 손님에게는 공적인 법식이 있다. 사적인 손님에게 드리는 음식은, 모름지기 두 등급으로 나누어야 한다. 나이가 많은 웃어른에게는 네 접시를 드리고, 나이가 어린 아랫사람에게는 두 접시이다. 음식의 후박은 고을의 형편에 따라서 할 일이다 …(중략)… 사마온공이 말하기를, "선친께서는 여러 고을 판관을 역임하였는데 손님이 오면 술을 대접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후략)
정약용목민심서》, 창작과비평, 다산연구회 현대어역주
멀게는 후한서 동이열전에 "부여인은 손님이 오는 것을 매우 좋아하여 잘 대접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한 고구려에서는 고국천왕 사후 왕후 우씨가 고국천왕의 바로 아랫동생인 고발기와 그 다음의 동생인 고연우를 연달아 찾아갔는데 고발기는 우씨를 꾸짖고 쫓아낸 반면 고연우는 우씨에게 대접하려고 직접 고기를 썰었다는 기록이 있다. 상대가 왕후이기는 하나 고연우 역시도 왕자[43]인 만큼 손수 대접했다는 것은 고구려 역시도 손님을 접대하는 관습이 강하게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에 감명받은 왕후 우씨는 고발기를 제치고 고연우가 왕으로 즉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다만 왕후 우씨의 모습은 어느 정도 계획된 정치적 행동이었다는 말이 있다. 왕후 우씨 문서 참고.

역사에는 실질곡국과 음즙벌국이라는 나라가 영토 분쟁을 벌이다가 결국 신라에 중재를 부탁했는데 당시 신리의 임금인 파사 이사금금관가야수로왕이 현명하다며 그를 초청하여 일을 맡겼고 수로왕이 음즙벌국의 손을 들어주며 분쟁이 해결되었다. 그런데 신라의 6부에서 수로왕을 접대하는 과정에서 나머지 5부는 아찬이라는 고위직 인사가 대접했는데 한지부에서 수로왕을 낮은 사람에게 대접을 시켜서 수로왕이 자객을 시켜 한지부의 우두머리를 암살한 일이 있다. 이웃나라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또다른 이웃나라의 왕을 불러다 일을 맡기고 각 지방에서 접대하게 했는데 한 곳에서 시원찮게 접대를 하고 또 왕은 분개하여 그 지방의 수장을 죽여버린 막장 사건이 벌어진 셈이지만 파사 이사금은 자객을 숨겨준 음즙벌국을 정벌하는 선에서 그쳤다. 애초에 잘못은 신라가 했으니 수로왕이 아니라 자객과 자객을 숨겨준 음즙벌국에게 화풀이하고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시 여행이 가능한 사람은 양반이거나 양반의 심부름꾼이 많았을 것이고, 양반이라면 거의 대부분 서로 족보를 대면 간접적으로는 서로 아는 사이였기에[44] 친지를 대우하는 것과 같이 손님 접대를 한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필연적으로 여행을 하는 사람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과거 제도 때문에 시험 보러 지방에서 중앙으로 오고 가는 사람은 늘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옛날 이야기에서 선비가 과거 보려고 서울로 갔던 것이 아니다. 여행 이외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길을 떠나야 하는 경우는 일반 상민이나 천민들도 신분에 따른 대우가 달랐을 뿐 똑같이 손님으로 대접받았다. 향촌공동체가 기본인 조선 사회에서 여행이란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꼭 필요해서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러니 주인 집안에서도 얼마든지 여행하는 사람(과거 보러 가는 아들, 심부름 다니는 하인 등)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선 시대의 기록에도 많이 나오지만 개항 이후 외국인들의 기록에도 많이 보인다. 당시 외국인들의 기록에는 조선인들은 여행객뿐만 아니라 접대하는 주인조차 이런 접대의 관습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숙박업이 발전할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45]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며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너그럽게 대해주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도(道)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너그럽게 대하여 이름도 알 수 없고, 도리(道里)도 알 수 없는 나라 사람들이 매번 우리나라 경내에 표류해 오면, 수토지신(守土之臣)에게 명하여 영접하고 사정을 물어보면서 마치 오랜 우호관계를 수행하듯이 하였다. 굶주렸다고 하면 먹을 것을 주고, 춥다고 하면 옷을 주었고, 병들었다고 말하면 약을 지어서 치료해 주기도 하였으며, 돌아가겠다고 하면 식량까지 싸서 보내주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대대로 지켜오는 법으로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온 천하가 우리를 일컬어 ‘예의지국(禮儀之國)’이라고 부르고 있다.
병인년(1866년) 10월 19일, 순무영(巡撫營) 순무사 이경하가 프랑스군의 로즈 제독에 보낸 서한 중에서.
또한 이 풍습이 해양에도 확대되어 전근대 한중일 상호간에 바다에서 표류하는 이가 생기면 구해주고 자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상호 원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타국에 표류된 각국인들은 접대를 받고 돌아오면서 체험한 각국의 풍습이나 상황을 기행문으로 남기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조선의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기를 다룬 표해시말을 들 수 있을 것이다.[46] 이런 풍습은 조선에서 이후 서양의 이양선에게도 적용되어 어지간하면 "유원지의(柔遠之義)"라고 멀리서 온 손님들을 잘 대접한다는 뜻으로 음식과 물 등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고 돌려보냈다.[47] 물론 해적선들에겐 얄짤 없었고 헨드릭 하멜과 같은 예외도 있긴 했다.[48]

그리고 이런 관습은 해방 이후 6.25 전쟁 이전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현대에도 시골에선 큰 잔치가 벌어지면 지나가는 길손님에게도 음식을 대접하는 풍습이 약간 남아 있다. 심지어 도시에서도 친구나 지인의 집에 찾아가서 놀다 갈 때면 집주인이 '밥 먹고 가라'고 말하거나 집에서 밥을 먹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근처 식당에서라도 밥 한 끼 사주고 보내기도 한다. 밥 때가 아니라면 간식거리라도 주는 것이 기본이고. 특히 연령대가 높은 노인들은 밥 때가 되어서 손님이 돌아가려고 하면 손님이 거듭 사양을 하더라도 밥을 먹고 가라며 강요 아닌 강요를 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도 접대의 관습과 연관이 많다.

그리고, 1960-80년대를 경험한 세대에게는 '뭘 이런 걸 다 차리십니까?'라는 손님과 '뭐. 이건 차린 밥상에다 수저 하나만 더 올리는 건데요.'라는 집주인의 응대를 직간접적으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1960년대나 지금이나 "밥 먹었어?"나 "식사는 하셨습니까?" 같은 표현이 의례적인 인사나 안부를 묻는 표현으로 쓰일 정도로 한국에서는 접대의 관습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49] 이처럼 안부 인사로 식사를 했는지 묻는 관습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접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신분제도가 있던 왕정국가 시절에도 양반 집안뿐만 아니라 가난한 서민 집안에서도 접대의 관습을 당연하게 여겼다.

물론, 식사 약속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면 굳이 붙잡지는 않았다. 지금도 이런 관습이 어느 정도 남아있어서, 가스검침원이나 출장 등으로 집안에 들어온 직원들에게 물이나 음료수라도 한 잔 먹이고 보내는 경우가 많고, 회사에서조차 업무상 내방한 외부인에게 커피나 간단한 다과류를 제공하는 일이 드물지가 않다.

80-90년대까지만 해도 가장의 친구나 친척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몇날 며칠 숙식을 하고 가기도 했고[50] 손님에겐 적어도 수제비 한 그릇 정도는 대접한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했다.

6.10. 중국

중국의 식문화에는 이 관습의 잔재가 남아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손님이 음식을 어느 정도 남기는 것이다.

중국에선 주인은 음식을 먹을 수도 없을 정도로 왕창 내오고 손님은 음식을 먹고 최소 모든 음식을 한 번씩 맛은 보지만 어느 정도는 남기는 것이 예의다. 왜냐면 주인은 주인 입장으로 손님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여야 하고, 손님은 음식을 다 먹을 경우 '당신이 준 음식을 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배가 안 부르다', 즉 음식을 남기지 않는 건 당신의 손님 접대가 형편없다는 의미가 된다.[51] 이런 문화는 아직까지도 남아 있어서 중국에선 일단 손님이 오면 음식을 배달을 시키건 식당을 가건 집에서 만들건 아무튼 엄청나게 많이 주는 게 기본이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음식물 쓰레기 배출량이 매년 급속히 늘어나서 골머리를 앓고 있고 이 때문에 계도성 캠페인으로 음식을 남기는 것은 낭비라고 홍보를 하면서, 과거처럼 일부러 남기는 걸 오히려 칠칠치 못하게 보는 경우도 많아졌다. 한국도 과거에 밥을 일부러 남기는 문화가 있었던 걸 생각하면 중국도 이와 비슷하게 의식이 변화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 속에서 중국은 이 관습과 관련 있는 하나의 계층까지 있었다. 전국시대의 식객, 유협(遊俠) 등이 그러한데 이들은 맨몸으로 아무 사람 집에 살면서 거기서 의식주를 제공받는 이들로 그 대가로 자신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일단 생판 모르는 사람을 자기 집에 들여 먹고살게 해주는 건 접대의 관습에 부합한다.

다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전국시대 말기쯤 되면 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식객들이 많이 있는 것이 중요해지게 된다.

집에서 머무르며 의탁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릴 부가 있다는 것임과 동시에 또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정도로 인망과 영향력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냉병기를 사용하는 시기에 무기를 쥘 수 있는 성인 남성이 많이 머무른다는 건 사실상 사병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전국시대 말기를 풍미한 전국사군자는 휘하에 많은 식객을 두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삼국지에서 나오는 떠도는 객장(客將)을 지방 유력자나 군벌이 식객으로 받아준 이유도 이러한 접대의 관습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한 지 30여 년이 넘어가는 현대에 들어서도 일부 지방에는 접대 관습이 남아있으며, 심지어 식당에서의 식사 정도라면 도시에서도 더치페이를 하지 않고 주인이 손님을 대접하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한국에서도 40대 이상 연령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관습인데 중국은 10~20대 젊은이들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행동하는 것이 특징이다.[52] 쓰촨 지역의 청두 외곽 촌마을이나 하얼빈 위쪽 깡촌 지역 같은 곳으로 가면 몽골 못지않은 접대 관습이 여전히 남아있다.

6.11.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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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욕조에서 목욕을 할때 욕조의 물을 사람 바뀔때마다 매번 바꾸면 수도요금이 엄청나므로 한번 몸을 담근 물을 그물망 같은 것으로 위에 뜬 불순물을 걸러낸 다음 다른 가족이 쓰는데 아무래도 남이 쓴 물에 대한 거부감의 문제등이 있다보니 보통은 가장이 제일 먼저 담그게 된다. 하지만 손님이 온다면 가장보다 손님이 먼저 이 첫 욕조물을 쓰게 한다.

6.12. 미국

미국 남부에는 남부의 환대(Southern hospitality)라는 개념이 있다. 주로 메뉴는 옥수수빵과 문샤인으로 대표되며, 팀 포트리스 2엔지니어의 근접무기 '남부의 환영방식(Southern Hospitality)도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

7. 사례

7.1. 유명 사례

7.2. 어긴 예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똑같을 순 없는 것처럼 접대의 관습은 전세계를 막론하고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졌지만 동시에 역사적으로 대놓고 어기거나, 철저하게 지켜진 건 아니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관습을 어긴 자는 도덕적 규탄이나 비난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으며 보복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한 상대가 이런 식으로 유인하여 제거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사악하거나 위험분자인 경우도 있어서 어긴 것을 두고 반드시 나쁘다고 하기 뭣한 경우도 의외로 꽤 있었다.

7.2.1. 주인의 손님 공격 사례

7.2.2. 손님의 주인 공격 사례

아래의 사례는 위의 사례들과는 다르게 손님이 해당 지역의 주인에게 대접을 받았음에도 주인을 공격한 사례다.

8. 대중매체

접대의 관습을 확실하게 언급하거나, 적어도 그걸 지키지 않아 벌어지는 일이 존재하는 경우에 한해 등재.

8.1.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 편에서 캐스피언 왕자가 의식을 잃은 후 예전 나니아인들의 집에서 깨어났을 때 어떻게 할지를 논할 때, 검은 난쟁이 니카브릭이 "지금 당장 죽여버리자"고 하자, 붉은 난쟁이 트럼프킨은 "죽이려면 그 자리에서 죽였어야 했어. 아니면 거기에 내버려두거나. 지금 죽이면 손님을 해치는 것이야."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8.2. 늑대와 향신료

중세 유럽 고증으로 유명한 일본의 라이트 노벨 늑대와 향신료에서도 짤막하게 언급된다. 늑대와 향신료 14권에서 "이 마을의 관습상 여행객은 촌장이 혼자 대접하는 것이 예의인지."라는 대목이 등장.

8.3. 더 위쳐 3: 와일드 헌트

본편에서는 언급이 없지만, 확장팩인 블러드 앤 와인에서 이 관습을 지키지 않았다가 저주를 받아 망령(Wight)으로 변해버린 인물이 등장한다.

본래 이름은 마를렌 드 트라스타마라로 백여 년 전의 사람이다. 장원을 물려받을 부자였는데, 어느 날 친구들을 불러서 연회를 열었다. 이 때 어떤 거지가 숟가락과 그릇 하나를 가지고 구걸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 구걸을 하러 온 거지도 엄연한 손님이므로 접대의 관습에 따라 당연히 대접을 해줘야 했다. 하지만 마를렌은 옛 풍습 따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던 사람이었고 남은 음식을 거지한테 주느니 차라리 개들에게 주겠다며 문전박대를 해버렸다. 그러자 그 거지는 분노하여 숟가락을 부러뜨리면서 이런 내용의 저주를 걸었다. "연회를 하고 있었으니 '그 누구도 당신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을 것'이며, 외모가 아름다웠으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게 될 것'이며, 빵부스러기조차도 주지 않았으니 '어떤 숟가락도 굶주림을 채워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반점망령으로 변해버린 마를렌은 저주를 풀기 위해 약 100년 간 많은 숟가락을 훔쳤고 사람들을 납치해 강제로 자신과 식사하도록 했지만 저주를 풀지 못했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나중에 밝혀지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의지로 함께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쓰지 않고 식사를 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거울이 아닌 물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게임에서 리비아의 게롤트의 선택에 따라 저주를 풀 수 있다. 인간으로 돌아온 마를렌은 저주 그 자체보다 지인들이 수명을 다해 죽어가는 걸 보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고 한다. 이후엔 게롤트의 저택에서 요리사로 취직한다.[72]

정황상 이 거지는 하츠 오브 스톤에 등장하는 군터 오딤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저주 내용을 설명할 때 흘러나오는 하츠 오브 스톤 메인 테마곡으로 반쯤 확인사살했다.

8.4. 로미오와 줄리엣

로미오가 적대 가문인 줄리엣의 집 무도회에 가면을 쓰고 몰래 숨어들어갔다가 줄리엣을 처음 만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때 로미오를 알아챈 줄리엣의 친척 오빠 티볼트는 저 몬타규 가문 놈이 우리 잔치에 오다니 가만 둬선 안 된다며 펄펄 뛰지만, 줄리엣의 아버지 캐퓰럿 가주는 오히려 티볼트를 꾸짖으며 로미오를 못 알아본 척 그냥 두었다.

물론 작중 초반부에 베로나의 영주가 캐퓰럿과 몬타규 가문에게 한 번만 더 분쟁을 일으키면 엄벌하겠다는 명을 내린 것도 있지만, 이 장면에서 캐퓰럿 가주는 "영주님 명령 잊었느냐, 분쟁을 일으키지 마라"라고 한 게 아니라 "진정 좀 해라. 비록 몬타규지만 저 녀석은 사리분별 잘 하고 예의를 아는 청년이라 들었다. 내 집에서 망신을 시키다니 안 될 말이다"라고 한다. 젊은 티볼트보다 사회생활 오래 해봤을 캐퓰럿 가주가 법 대신 '저 녀석도 명예를 안다면 조용히 놀다 갈 테니, 저놈이 먼저 허튼 짓만 않으면 우리도 곱게 두는 게 명예로운 일이다'라는 접대의 관습을 내세운 것. 현실 역사에서 예수게이가 타타르족 마을에 방문했을 때와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다만 또 여기에는 가주가 개인적으론 로미오를 좋게 본 것도 한몫했다.

결국 티볼트도 그 자리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있었지만, 무도회가 끝나고 얼마 후 거리에서 제 성미를 못 이기고 달려들어서 시비를 걸고 로미오가 "싸울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지 마세요."라고 점잖게 말리는데도 "거짓말 마라, 지난번에 염탐하러 온 거지? 싸우자."라고 악을 쓰는 일로 영주의 조카이자 로미오의 절친 머큐시오가 화가 나서 "이것 봐! 내 친구는 싸울 마음이 없는데, 계속 달려든다 이거지? 오냐, 그 고약한 성질머리를 고쳐주어야겠군."이라고 나서서 대결하고 이로 인해 머큐시오가 티볼트의 손에 살해당하자 친구를 잃은 로미오는 티볼트를 죽여버린다. 물론 이것도 충분히 문제가 될 일이고 결국 로미오가 추방되는 결과를 낳지만 무도회가 아닌 거리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접대의 관습을 어기진 않았다는 게 포인트.

8.5. 맥베스

위의 캐퓰럿 가주와는 반대로 주인으로서 접대의 관습을 깬 사례. 맥베스는 자신이 왕이 되리라는 마녀들의 예언을 듣고는 자기 집에 온 스코틀랜드 왕 던컨을 암살한 뒤 왕위를 찬탈한다. 하지만 암살을 실행할 때까지도 꺼림칙해하는데 이때 이유로 든 것이 '왕은 친척이자 신하인 나를 믿고 있고, 집주인이 제 집에 든 손님에게 칼을 겨누는 법은 없다'이다. 결국 암살을 실행하고 나서도 자신은 죄책감 때문에 밤잠을 이룰 수 없으리라고 괴로워하는데, 이때 말하는 대사가 그 유명한 "다시는 잠들지 못한다, 맥베스는 잠을 죽였다!"이다.

8.6. 몽테크리스토 백작

이 작품에도 이를 간접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있다. 에드몽 당테스가 백작의 신분을 가지고 파리 사교계에 나타난 뒤, 원수인 페르낭 드 모르세르의 집에서 연 무도회에 참석한다. 이때 메르세데스는 아들인 알베르를 시켜서 백작에게 음료나 음식을 꾸준히 권했다.

이는 단순히 집주인으로서 손님에게 대접하려 한 게 아니다. 메르세데스는 이미 백작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백작의 복수를 걱정하고 있었다. 만약 백작이 음식을 받아들인다면 메르세데스로선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손님으로서 음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주인, 즉 페르낭과 메르세데스에게 적대심이 없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중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끝까지 음식을 거부했다. 메르세데스가 온실에서 함께 산책하겠다는 백작과 단 둘이 있을 때 메르세데스가 직접 온실의 과일을 권유했지만 이 역시 거절하고 오히려 모르세르 가에 대한 적대를 에둘러 표현한다. 메르세데스가 백작의 과거에 대해 묻자, 백작은 '나는 몰타 출신으로 고향에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지만, 전쟁에 참전하러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오니 그녀는 이미 결혼을 했더라'라고 자신의 과거를 각색해 말해준다. 이 말에 메르세데스가 "그렇다면 그 사람이 백작님을 괴롭게 한 것에 대해 용서하셨나요?"라고 물으니 백작의 대답은 "그녀는 용서했습니다." 즉 메르세데스는 용서했지만[73] 페르낭을 포함한 자신의 원수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 메르세데스도 총명한 사람이라 이 뜻을 한번에 알아들었다. 결국 메르세데스는 백작의 복수심을 확인하고 절망한다.[74] 마침 이 부분이 나오는 챕터의 제목이 '빵과 소금'이다. 작중에서도 동양[75]의 빵과 소금 풍습을 언급한다.

이 장면 이전에 백작이 자기 집에서 파티를 열었을 때도 백작은 (자신의 원수들인 빌포르와 당글라르를 포함한) 손님들에게만 음식을 먹게 하고 자신은 먹지 않았는데, 접대의 관습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원수들과는 물 한 모금도 같이 마시고 싶지 않았던 듯.[76] 나중에 모종의 사유로 백작에게 의심을 품게 된 빌포르와 당글라르 부인[77]의 대화에서, 빌포르가 "백작은 정말이지 음식을 한입도 하지 않았소. 누가 보면 그가 우리를 전부 독살하려고 했다고 오해했을 거요."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물론 백작의 복수 계획은 독살로 목숨을 빼앗아 끝내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치밀했지만.

다만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접대의 관습과 같이 전근대로부터 이어져온 규범이 가지는 의미가 많이 퇴색된 근대 이후의 작품이기 때문에, 본작에서 묘사되는 '접대의 관습'은 주인공의 이국적이고 신기한 면모를 보여주기 위한 소재에 더 가깝다. 작중 언급처럼 '동양의 신기한 관습'과 '그런 관습을 따르는 신비한 인물인 백작'을 보여주기 위한 소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접대의 관습에 대한 작중 묘사는, 정말 해당 관습이 유의미한 사회(예를 들어 부족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엉터리로 느껴질 만한 부분도 많다. 예를 들어 일단 상대방을 초대하거나 상대방에게 초대받았으면 이미 손님-주인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따라서 '초대는 했지만 밥은 같이 안 먹었다' 같은 핑계로 자신이 접대의 관습을 어기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알리바바 이야기의 비열한 악역이 '주는 음식은 먹었지만 소금을 뺀 음식이었으니 빵과 소금을 받은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핑계를 대는 것과 비슷한 유치한 속임수다. 접대의 관습을 진정으로 지키고자 했다면 아예 초대를 거절하거나, '지난번에 함께 식사했을 때는 손님과 주인으로 만난 것이니, 나도 너희를 해치지 않았다. 하지만 너희는 본래 내 적이니, 그 자리가 끝나고 내가 너희를 공격하는 것은 정당하다'라고 주장하는 쪽이 더 그럴싸할 것이다. 왜냐하면 접대의 관습이란 그 자리에서 주인과 손님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는 약속이지 양자간의 항구적인 평화를 보장하는 약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데 부족사회의 동맹관계도 유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으니 한때의 동맹이 이후에는 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한때 손님으로 방문했던 부족과 이후 적이 되어 맞서 싸운다고 해서 그것이 접대의 관습을 어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접대의 관습에서 가장 멋있고 명예로운 행동으로 여겨질 법한 태도 중 하나가 (예수게이의 일화에서도 소개된 것처럼) "너는 본래 우리의 적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손님으로 왔으니 손님으로 대우하겠다", 즉 어제까지 싸워왔고 내일도 싸울 상대라도 손님으로 찾이온 지금 이 순간만은 그 안전을 보장하고 후하게 대접하는 것인 만큼 주인과 손님으로 만난 그 자리에서 그 관계를 이용해 상대를 직접 해친 것이 아니라면 이는 접대의 관습에 어긋나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게다가 백작의 복수 방법 자체가 어차피 친구로 위장하여 상대를 속이고 함정에 빠트리는 것인데, 고작 밥 한 끼 먹는 자리에서 같이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는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다.

더군다나 몽테크리스토 백작 입장에서는 당글라르나 페르낭 등이 이것을 문제 삼더라도 충분히 반박할 근거가 있다. 에드몽 당테스가 체포되어 이프성 감옥으로 끌려간 것은 바로 메르세데스와의 약혼식 피로연 자리에서였고, 그를 음해하여 함정에 빠트린 장본인이던 당글라르와 페르낭은 이 자리에 하객으로 참석해 있었던 것이다.[78] 즉 상대를 해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숨기고 주인과 손님으로 한 자리에 있는 것 역시 넓게 보아 접대의 관습 위반이라 한다면, 이를 먼저 범한 쪽은 당글라르와 페르낭이다. 그리고 접대의 관습과 같은 상호적 규범이 대부분의 경우 먼저 범한 자의 책임이 훨씬 무겁고, 그에 대한 보복을 가한 자의 책임은 훨씬 가볍다. 결국 작중에서 접대의 관습이 다소 괴상한 형태로 등장한 것은, 작품 외적으로는 전통적인 접대의 관습을 생경하게 느끼게 된 당대(근세 말~근대 초) 유럽의 독자들에게 백작의 이국적이고 신비한 풍모를 연출하려는 목적, 작품 내적으로는 백작이 적을 대하면서 보이는 각오와 의지를 표현하는 장치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8.7. 미녀와 야수

유럽의 유명한 동화인 미녀와 야수도 접대의 관습에 관한 이야기다. 원판과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디즈니판의 내용이 좀 다른데, 원판에서는 한 상인(여주인공의 아버지)이 집에 돌아가던 중 어떤 성에 들렀는데 성 안에 아무도 없었지만 잘 차려진 저녁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야수가 손님 접대는 해야겠는데 자기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저녁만 준비한 것. 상인이 식사하고 잠을 청한 뒤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나려는데 정원에 예쁜 장미[79]가 있어 막내딸에게 주기 위해 이를 꺾었다. 그러자 화가 난 야수가 나타나서 장미를 가져가는 대신 딸을 데려오라고 한다. 즉, 원판에서는 야수가 접대를 잘했는데 손님 쪽이 룰을 깨고 주인의 장미를 훔친 것. 실제로 여러 판본 중에는 야수가 "나는 너를 잘 대접해 주었는데, 네놈은 도둑질로 갚았구나!"라고 화를 내는 버전도 있다.

현대에는 원작보다 디즈니 버전이 더 유명한데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에서는 한 노파가 성에 찾아와서 하룻밤 묵게 해 줄 것을 청했지만 왕자가 노파를 비웃으며 이를 거절했다. 사실 마법사(Enchantress)였던 노파는 이에 변장을 풀고 본모습을 드러낸 후 마법을 걸어 왕자를 야수로 바꾸고, 성 전체에도 저주를 걸어 성 안 사람들도 가구로 바꾸어 버린다. 여기서는 왕자가 손님 접대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문제. 손님 접대 안 한 대가치고는 너무 심한 것 같지만(이 때문에 너무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있기는 하다[80]) 작중 신하들을 포함한 등장인물들도 왕자의 자업자득으로 본다는 것에서 미국에서도 손님 접대가 엉망이면 문제 있는 행동으로 보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녀와 야수 실사영화판에서는 두 가지 내용이 모두 나온다. 왕자가 저주를 받은 이유는 원작 애니 내용대로 노파로 변장하고 찾아온 요정을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 그리고 여주인공의 아버지가 야수의 분노를 산 이유는 야수의 성에서 대접받고 나가는 길에 장미를 꺾었기 때문.

8.8. 뱀파이어 헌터 D(Bloodlust)

2000년작 뱀파이어 헌터 D의 OVA에서는 접대의 관습이 어겨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귀족(뱀파이어)인 마이어가 연인인 샬롯과 함께 자신의 후원자이자 체이트 성의 주인인 뱀파이어 여왕 카밀라의 성에 손님으로서 방문했지만 부활을 위해 인간 처녀의 피가 필요했던 카밀라는 손님으로 찾아온 마이어와 샬롯을 환영으로 속여 마이어는 기절시키고, 샬롯의 피를 흡혈해 부활하게 된다.

그러나 손님을 접대하지 않고 배신한 주인의 대가를 치룬 건지 결국 찾아온 주인공인 D와 회복한 마이어의 협공에 결국 사망한다.

그 외에도 주인공 D가 기계말을 사기 위해 인간 마을에 손님으로 방문했지만 귀족(뱀파이어)과 그 혼혈인 담피르를 두려워한 인간들에 의해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한다.

8.9. 아메리칸 스나이퍼

이라크에 파병된 크리스 카일SEAL 동료들이 '도살자'가 은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관측에 용이한 지점을 확보하기 위해 어느 민가를 급습하게 되는데, 그 집주인은 순순히 미군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오늘은 이슬람의 큰 명절이라며 미군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한다. 다들 별다른 의심 없이 식사를 하는데 크리스는 집주인의 팔꿈치에 굳은살이 박혀있는 걸 보고[81]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안방을 수색, 바닥에 은닉된 대량의 무기를 발견한다. 집주인은 반군의 일원이었으며 식사 대접은 흉계였던 것.

빡친 크리스는 집주인을 추궁해 그가 '도살자'의 부하라는 것을 알고 그를 이용해 '도살자'의 은신처를 급습하고 '도살자'를 폭사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그 과정에서 접대의 관습을 어긴 집주인은 미군에게 총을 쏘다가 죽는다.

8.10. 아일랜드 신화

신화 대계에서는 브레스 왕이 손님으로 찾아온 음유시인 카르브러를 박대했다가 마법이 걸린 풍자시를 읽고 부스럼이 돋았으며, 이것이 결격사유가 되어 왕위를 잃게 된다.

얼스터 대계에서는 코나흐트인 브레프너의 벨후가 중상을 입은 적국 울라의 영웅 코널 케르너흐를 구조하여 치료하다가 딴마음을 먹고 죽이려고 한다. 이를 엿들은 코널은 벨후를 자기 침대에 눕게 하여 그를 죽이라는 명을 받은 벨후의 아들들이 벨후를 죽이게 한다.

8.11. 언어의 주인이란

작중 접대의 관습이 마술사들 간의 싸움에 대한 억제력으로 작동할 정도로 중요하게 다뤄진다. 같은 수준의 마술사라도 자신의 성 안에 있는 마술사는 본래 수준보다 한 수준 높은 힘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며, 접대의 관습으로 인해 손님으로 인정된 마술사도 본래의 수준보다 한 수준 높은 힘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관습이 깨진 유일한 사례는 주인공 활동 시점보다 머나먼 과거, 일종의 네크로맨서들의 세력인 엠버밍 학계가 서로를 향해 접대의 관습을 무시한 채 내전을 벌인 것 뿐이고, 결국 엠버밍 학계는 몰락하여 그 이름이 역사에 기록되지도 못하게 되었다.

8.12. 얼음과 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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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 원피스

알라바스타 편 위스키피크 에피소드에서 해적을 환영한다는 구실로 밀짚모자 일당에게 온갖 연회를 베풀어 주지만, 실은 이들 전원 바로크 워크스 소속 현상금 사냥꾼들이었다. 이들은 일행이 자는 틈을 노려 일당 전원을 살해하려 했으나, 낌새를 눈치챈 조로 한 명에게 전원이 당한다.

주목할 것은 그들이 적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로 깨어난 루피가 그들을 쓰러뜨린 조로에게 격노했다는 점. 즉, 원피스 세계관에도 접대의 관습 문화가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루피가 개인적으로 먹는 것과 관련해서 진심인 것도 있겠지만 조로더러 은혜도 모른다며 씩씩대고, 적이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겠냐고 반박하는 모습을 보면 개인적인 성격을 떠나서 보편적 관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보면 바로크 워크스는 밀짚모자 일당을 손님이라고 접대해주고 해치려고 했으니 관습을 어긴 게 되는데, 애초에 이들이 에피소드의 악역임을 감안하면 적절하다.

8.14. 제9중대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될 소련군 병사들을 교육하는 장면에서 일종의 정훈교육을 진행하던 장교가 유사한 사례를 언급한다. 마을에 들어온 소련군을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이 받아들여주고 차도 대접했지만, 소련군이 마을을 떠나자 무자헤딘으로 돌변해 등 뒤에서 총을 쏘아댔다고. 소련군이 마을에 머무는동안 암살한다는 쉬운 선택지는 피한것을 보아 접대의 관습은 이 와중에도 지켰음을 알 수 있다.

8.15. 춘향전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걸인으로 변장하고 변학도의 생일 잔치에 나타나 "좋은 잔치인 듯한데 술 한 잔만 얻어먹자"고 억지를 쓰는 것으로 작중 클라이막스가 시작된다. 이에 변 사또와 그에게 아첨하는 손님들은 잔치 자리에 어찌 저런 걸인을 들이느냐며 내쫓으려 하지만 그나마 성격 좋은 손님인 운봉 영장이 그래도 한 상 주어 보내자고 하며 앉힌다. 여기서 진행된 시 짓기 내기 중에 이몽룡은 그 유명한 '금준미주천인혈, 옥반가효만성고'를 쓰고, 유일하게 이 뜻을 알아본 운봉 영장은 슬그머니 자리를 떠 화를 면하지만 변 사또는 그 직후 이몽룡의 어사출두에 결국 패가망신한다. '변학도가 접대의 관습을 어겼기 때문에 패가망신했다'는 전개는 아니지만, '탐관오리 변학도는 접대의 관습조차 지키지 않는 인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라 할 수 있다.

8.16.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순학자들의 호위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일부 몽골인들이 아파치 부족에게 손님으로 접대받다 독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져 이에 분노한 몽골인들이 대거 이주한다. 사실 단순히 복수 때문만은 아니고, 기후변화로 몽골에 추위가 찾아오자 좀 더 좋은 땅을 찾아나서겠다는 속셈도 어느 정도 있다. 이렇게 건너간 몽골인들은 미국 사회에 적응하면서 아파치 부족에 대한 복수를 위해 준비를 하였고, 때가 되자 카우보이와 바토르를 이끌고 예수게이를 독살한 타타르족이 당했던 것처럼 수레바퀴를 굴리며 아파치란 아파치는 모조리 싹쓸이해버렸다. 이 모습에 나름 학살에 일가견이 있는 미국인들조차도 경악했을 정도.

9. 관련 문서

10. 외부 링크



[1] 우선 기본적으로 돈이 없거나 부족하면 걸어야 했고, 개중 여건이 좋아 말이라도 타고 다닌다 해도 말을 먹이는 비용이 든다. 가는 길에는 도처에 도적이나 맹수가 많았다. 심하면 황무지에서 길 잃고 헤매다가 아사하거나 동사할 위험도 있었다.[2] 유명한 예시로 목숨을 구하기 위해 궁형을 택한 사마천이 있다. 당시 관념상 죽을지언정 궁형을 당하지는 않는게 명예로웠음에도 사마천은 아버지 때부터 이루고자 한 역사서 편찬이라는 소명 때문에 궁형을 당하는 치욕을 감내해야 했고 때문에 목숨을 부지했음에도 다행으로 여긴게 아니라 매우 부끄러워했다.[3] 스위스 용병이 목숨을 걸고 임무를 다한 것도 이 때문이다. 벤데타, 카눈 등으로 대표되는 복수의 관습도 가문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4] 이러한 좋은 예시가 바로 북한. 북한의 국채에서 보듯 북한은 신용불량자에 거짓말쟁이 국가다. 당연히 이 나라에 대한 국제적 신뢰도는 전혀 없다시피하며 이에 따라 국가의 운신에 있어 불이익을 많이 받지만 다 자업자득이다.[5] 때문에 신문의 도입은 사회를 크게 변혁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써 근대화의 척도가 되곤 한다. 신문이 없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이방인이나 지인 교류, 한정적인 정부의 공문 등을 통해서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반면 신문을 활용하면 불특정 대중 역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6] 대표적인 것으로 '상대편과 적대관계'거나 '집안에 우환이 있다' 등을 꼽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본 문단 뒷부분에 잘 설명되어 있고, 후자의 경우 단순히 '손님을 대접할 여유가 없다'는 것은 명분으로 약간 부족한 면이 있다. 가난하거나 바빠서 제대로 된 대접을 할 여유가 없다면 초라한 대접이라도 해주면 되고, 대접의 초라함을 불평하는 것은 오히려 손님의 큰 흉거리가 되기 때문. (물론 손님 역시 상대의 사정을 짐작하여 손님을 대접할만한 여유가 없을만한 집에는 방문을 자제하는 것이 중요한 예의이다. 전통사회의 예의란 무조건 메뉴얼대로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대의 사정을 짐작하면서 그에 맞춰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보다 이미 찾아온 손님을 거절할 명분으로 적절한 것은 집안의 걱정거리나 흉사로 손님에게까지 피해를 끼칠까 두렵다는 것. 이것은 '손님을 위한 거절'이 되는 것이니 충분히 정당한 명분이 된다. 특히 한국의 전래 민담을 보면 의외로 손님을 거절하는 이야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들이 대부분 이 유형에 해당한다. 지나가던 길손이 하룻밤 유숙할 것을 청하는데 "집안에 큰 우환이 있어 되려 손님께서도 변을 당하실까 두려우니 죄송하지만 다른 집에 머물러주시라"라며 정중히 사과하며 거절하는 것이다. 그런데 손님이 되려 "이 근처에 집이라고는 당신네 집 뿐인데 어디로 가라는 거냐?"고 따지고들면서 오지랖 넓게 끼어들어 자기가 그 우환이라는 것을 해결해버리고, 결국 잠자리와 끼니를 기어코 받아내고야 말 뿐 아니라 다음 목적지까지 갈 길양식이나 노자따위도 두둑히 받아낸다, 심지어 그 집안의 사위가 되어 나그네 생활을 청산하기도 한다는 결말로 끝나는 이야기들도 있다. 즉 "손님을 잘 모시면 집안이 복을 받는다. 그러니 손님은 좋은 것이다"라는 교훈을 한 바뀌 꼬아서 전달하는 우화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 정말로 손님을 박대하는 인물은 옹고집전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 쨜 없이 천하의 개쌍놈으로 취급된다.[7] 앞 내용에서도 지적된 것처럼, 접대의 관습이 이상적이고 매끄럽게만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특히 식량등 물자가 넉넉하지 않았던 전근대 사회에서 손님은 형편이 어려운 집에는 들리지 않는 것이 예의임을 알지만 다른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아 할 수 없이 들리고, 주인은 자기 사정도 힘든 판에 손님까지 접대하려니 부담스러워 죽을 맛이지만 차마 대놓고 문전박대는 할 수 없어 받아들인 상황이면 서로 표정이 좋을 리 없고, 평소라면 무례하다고 여길법한 태도를 서로 보이게 되는 일도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다. 하지만 이는 또 역으로 보면 그런 상황에서조차 손님을 대놓고 거절하지는 못할 정도로 접대의 관습이 가지는 영향력이 강해서 어려울 때는 어려우나마 되는데까지라도 지키려고 했음을 보여준다는 것.[8] 비슷하게 장수가 조조를 습격한 것도 손님으로 대접해줬더니 자기 형수하고 붙어먹었던 것이 손님의 예에 어긋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는 장수의 체면을 크게 깎아먹는 짓이기도 하고.[9] 다만 라이오스의 경우는 이쪽 전승이 유명한 편이긴 하지만, 크리시포스 살해는 펠롭스의 집안에서 따로 벌어진 사건이었고 라이오스는 다른 이유로 저주를 받았다거나 애초에 팔자가 그랬다는 전승도 있기는 하다.[10] 이슬람 문화권에서 돼지고기라던지…[11] 해명태자가 사신이 준 활을 힘으로 부러뜨린 이야기도 비슷한 맥락이다. 활이 부러진 건 본인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사신이 선물한 활이 약해서라며 어그로를 끌었는데, 이는 사신의 모국이 고구려보다 약하다고 돌려 조롱한 것이다.[12] 이후 현대에서는 호텔 등과 같이 상당히 고급스럽고 큰 서비스업이 생기게 되었다.[13] 그래서 제우스의 별칭 중 하나가 Ζεὺς ξένιος(Zeus xenios. 환대하는 제우스)였다.[14] 판본에 따라서는 제우스가 금은으로 장식된 거대한 저택을 선물하자 노부부가 이를 제우스에게 헌정했다고도 한다. 후에 이들 부부는 죽을 때가 되자 제우스에게 하나가 먼저 죽고 남은 하나가 그의 장례를 치르는 비탄을 겪고 싶지 않으니 동시에 죽게 해달라고 청했고 제우스는 이 기도를 받아들여 이들을 동시에 나무로 변하게 하였다. 이것도 판본에 따라서 접대를 받은 제우스가 정체를 드러내면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필레몬이 제우스 신을 모시는 신관이 되어 평생 제우스님을 섬기게 해달라고 하고, 아내 바우키스가 자신은 남편과 한날 한시에 죽고 싶다고 말해 제우스가 이 두 가지 소원을 모두 들어줬다는 이야기로 전해지기도 한다.[15] 탄탈로스의 아들이다. 탄탈로스는 신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신들에게 자신의 아들 펠롭스를 요리해 내놓는 신성모독 겸 접대의 관습을 깨는 짓을 저질렀고 그 결과로 무간지옥 타르타로스에 떨어져 영원히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게 된다. 신들은 펠롭스를 되살려주었으나, 당시 데메테르가 요리의 정체를 못 알아채고 몇 점 먹어버려서 어깨 한 쪽이 움푹 파였고, 상아로 그 부분을 채워줬다고 한다.[16] 티에스테스가 형수 아에로페와 불륜 관계였고, 아에로페와 같이 아트레우스가 숨겨놓은 황금 양을 훔쳐서 미케네 왕좌를 차지하려 했기 때문이다.[17] 그나마 여긴 어느 정도 접대의 관습을 따르긴 한다.[18] 물론 다른 나라 네티즌들은 '그렇다면 손님을 붙잡지 말고 식사시간이 되기 전에 돌려보내거나 차라리 나가서 사먹고 오게 해야 할 것 아니냐', '거의 모든 가난한 지역들에서도 접대의 관습이 지켜지는데 잘 살기로 유명한 북유럽에서 손님 먹일 음식이 없는 게 말이 되냐'는 재반박을 하기도 했다.[19] 프랑스, 스페인은 물론이고, 이 분야의 본좌인 이탈리아는 특히 "손님이 주인을 대접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음식이나 접대에 관해선 따라올 국가가 없다. 그리스, 포르투갈, 발칸반도 다 마찬가지다. 특히 발칸반도는 알바니아의 카눈 같은 특유의 부족주의적 명예관념도 걸려 있어서 손님이 함부로 밥 안 먹겠다고 하면 험악한 분위기나 심지어 몸싸움으로 불거질 만큼의 모욕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애초에 지중해권에서 접대의 관습, 가부장적 명예관념, 마을 광장 중심 공공성 같은 외향적 문화적 성향은 종교, 언어를 넘어 보편적으로 보인다.[20] 멕시코, 아르헨티나, 페루, 쿠바 등등 라틴아메리카 문화권에선 이웃 또한 가족이라고 여기는 문화적 색채가 강하다. 중남미가 워낙 넒고 원주민 문화도 다양하긴 했지만 적어도 스페인 정복 이전 메이저 문화권이었던 아즈텍, 마야, 잉카 등의 메이저 원주민들은 발달된 도시 문화를 중요시했고, 적어도 이 점만은 옛날부터 사람 사는 마을은 무조건 중앙 광장, 시청, 중앙 성당, 시장이 붙어있는 '도시'꼴을 갖추어야 생각했던 스페인 문화와 일치해서 중남미는 북미에 비교해서도 훨씬 스페인 정복자들과 원주민들 간의 혼성적인 문화가 비교적 일찍 발달할 수 있었다.[21] 한중일 3국은 물론이고 몽골, 인도네시아, 인도, 네팔, 베트남 등등 어디를 가더라도 찾아온 손님을 없는 살림에도 대접할지언정 일부러 굶기는 문화는 없다.[22] 아랍 문화권에서는 종교적, 윤리적 관습에 따라 손님 대접을 미덕으로 여긴다. 비단 아랍인들뿐만 아니라 당장 아라비아 반도 유목민족이던 시절을 너무도 당연하게 반영하듯이 접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하디스만 엄청나게 많아서 이슬람 문화권 전반에서 손님에게 베푸는 건 공식 교리라 봐도 과장이 아니라 할 만큼 전반적으로 접대의 관습을 강하게 표방하는 편이다. 페르시아, 튀르크, 베르베르 모두 아랍인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유목 문화의 영향력이 강하며 전통 설화와 가르침, 현대까지 이어지는 관습을 통해 상다리 부러지는 접객문화를 강조한다.[23] 전통적으로 부족 사회 문화가 주류였던 아프리카에서 또한 접대의 관습은 지켜진다. 아프리카 식문화 중 세계적으로 알려진 편인 에티오피아 · 에리트레아 요리는 대개 인제라라 불리는 빵에 소스, 채소, 고기를 싸먹는 것이 기본인데, 손님이 오면 큰 쟁반에 깔아서 다 함께 나눠먹는 것이 에티오피아의 문화며 대접받은 손님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다. 식후의 경우 동아시아의 다례처럼 손님에게 커피를 내는 복잡한 커피례(禮) 의식 또한 있다. 서아프리카, 남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소말리아, 말라위, 부룬디 등지에도 접대의 관습은 있다. 부룬디는 2022년 IMF 통계 기준 세계에서 1인당 GDP가 가장 낮은 나라인데도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친밀함을 중시한다는 관념에서 우갈리나 염소 고기 등으로 접대를 하며, 이런 관습은 동아프리카 전체적으로 행해진다고 한다. 역사적인 경우로는 이븐 바투타의 기록에 따르면 서아프리카 말리 제국에서는 여행객이 오면 빵덩어리 세 조각과 구운 소고기, 그리고 발효된 크림을 대접하는 것이 풍습이었다고 한다.[24] 사실, 생일이나 독립기념일, 졸업식, 성년일 등 중요한 날에 각종 음식과 음악, 즐길 거리까지 사비를 들여 준비하고 사람들을 미어터지게 불러 잔치를 벌이는 "파티" 문화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당장 아무 하이틴 배경 미드만 봐도 집에 놀러 온 주인공의 친구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하다못해 코코아 같은 음료나 과자를 내놓는 장면은 흔하다. 다른 면에선 개인주의적인 미국 문화를 비추어 삐딱하게 보더라도 북미 쪽은 옛날부터 교외의 으리으리하게 큰 집에 애들 친구들을 떼로 불러서 게임기, 수영장도 보여주고, 바베큐도 해주고, 애 친구 부모들에겐 술병 캐비닛 열어주며 은근히 멕이는 게 성공의 상징처럼 발달하기도 해서 유럽 대륙 게르만어권은 물론이고 영국에 비해서도 과시적 베풀기성 소비가 잦은 편이다. 애초에 거시적 문화적 배경도 WASP들이 다 해처먹던 시절도 아니고 현대에 와선 유럽 사람들과 동일선상에서 '게르만' 운운하기엔 미국은 백인들도 일상 문화는 이탈리아, 멕시코, 동아시아 등등 다른 이민자 문화권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졌다.[25] 다만 네덜란드인들은 그 사람이 워낙에 유별난 케이스라고 말을 했다.[26] 심사 과정 중 혹시나 시성 심사자들이 시성을 잘못 할 것을 대비해 시성 대상자의 죄과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을 맡는 사람이다.[27] 무슬림들에게 무슬림의 의무란 저버렸을 때 따로 속죄해야 할 죄악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상당히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28] 알리바바는 가난한 인물이라 손님을 대접할 일이 없었는지 소금을 빼달라는 말을 듣자 별 희한한 사람 다 보겠다는 반응만 보이고 말았지만, 부자인 카심의 노예였던(판본에 따라 원래 알리바바의 하녀로 나오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카심의 하녀였다가 카심 사후 주인의 동생 알리바바 집에서 일했다는 버전이 메이저다) 마르자나는 잔치에서 손님 대접할 일이 상대적으로 많았을 테니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29] 접대의 관습이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대에 "주인이 주는 음식은 먹었지만 소금은 빼달라고 했으니 대접받은 것이 아니다"와 같은 꼼수를 실제로 쓰는 자가 있었다면 과연 소금 안 치고 요리하는 게 가능한 것인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주변 사회로부터 "우와~ 흉악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치사하기까지 하네?"라고 인정받았을 것이다. 빵과 소금은 '상징'일 뿐이고, 아무리 전근대인이라도 상징을 가지고 말장난이나 치면서 본질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속아넘어갈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기 때문. 사실 해당 에피소드는 도적 두목이 가지는 악역으로써의 속성, 즉 정당하게 신의를 지키지 않고 얕은 속임수로 속이려 드는 비열한 성격을 보여주는 장치로 보는 쪽이 더 적절할 것이다.[30] 단 이 이야기는 복수를 하려는 자가 그 복수를 완성할 때까지 강한 의지로 쉬지도 멈추지도 않음을 상징하는 '복수자는 복수를 완성할 때까지 소금을 먹지 않는다'는 일화를 모태로 했다는 의견도 있다. 물론 이는 상징이자 비유적 표현이지 진짜 안 먹은 것은 아니겠지만(사람은 소금을 안 먹으면 금방 죽는다). 여기서는 그냥 소금을 먹지 않는다기보다는 적의 집에서 소금을 대접받지 않겠다는 말이 더 정확할 듯하다.[31] 결혼식같은 기쁜 일이 있을 때 추는 손뼉춤.[32] 칼을 차고 있지 않아도 준다. 태생부터가 전투민족인 베두인과는 다르게 요즘 세상에 칼을 차고 있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 가지고 다니는 칼은 사무라이 같은 장검이 아닌 실생활에 용도가 많은 화려하게 장식된 단검으로 잡아먹을 짐승의 숨통을 고통없이 단숨에 끊을 때 사용한다. 그러니까 현대적 의미로는 손님이 기자라면 카메라, 평범한 일반인이라면 스마트폰처럼 '평소에 자주 쓰는 요긴한 도구'를 위한 건배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33] 여기까지만 들으면 꽤 훈훈한 이야기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직후 소련군이 방문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마을 남자들이 몰려와 소련군과 얼굴을 마주했던 여성들을 죽여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소련군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는 한편, 만약에 그 여성들이 자신들을 푸대접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죄를 물어 죽였을 거라고 탄식했다.[34] 문제는 이라크 음식이 너무 기름졌는지(의도적으로 그랬다는 설도 있다. 명백한 적이니까), 배탈이 나서 임무에 지장이 생기는 사태가 생기자 앞으로는 식사 대접받기를 정중하게 사양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도 마시라고 대접했다고 한다.[35] 출처 - NHK, 실크로드[36] 아무리 고대 근동에서 여성 인권이 낮았다고 한들, 창세기 43장처럼 가장이 집안 여성을 지키는 것은 중대한 의무였고, 모욕을 당한 여성을 위해 가족이 사적으로 복수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변호되었다. 즉 본문이 동시대 독자에게 말하고자 하는 1차적인 문학적 의미로 보자면, 롯은 딸을 지켜야 한다는 고대이기에 오히려 강력한 가장의 의무와 접대의 관습 사이에서 양자택일로 후자를 선택한 것으로 봐야 한다.[37] 처음에는 50명이었다. 45…40…30…20…하다가 10명까지 줄어든 것. 여기서 아브라함이 자신을 급격히 낮춰가면서 간절히 애원하는 묘사를 볼 수 있다.[38] 사실 호라즘 왕국 쪽에서 이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처벌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면 적당한 선에서 끝날 수도 있었는데 하필 그 사람이 당시 호라즘 왕국 태후의 친척이라 처벌도 받지 않았고, 한술 더 떠서 배상은커녕 몽골 사신들의 수염을 밀어버리는 도발까지 감행하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수염이 남성성의 상징이던 시절에 수염을 밀어버린다는 건 보통 모욕이 아니었다. 사실 호라즘도 나름 당대에 명성을 떨치던 강국이었기에 고자세로 나온 것이었겠지만 알다시피 몽골은 아시아를 평정하고 머지않아 유럽 연합군까지 밟아버릴 정도의 대제국이었다.[39] 고려 측은 이를 여진족의 소행으로 보았으나 아직까지는 누가 저질렀는지 밝혀진 것은 없다.[40] 사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종가집쯤 되면 실질적으로 음식 해서 상 내가는 일은 노비들이 맡기야 하지만, 어쨌든 부엌의 총괄자는 집안의 안주인 내지 차기 안주인(일반적으로 맏며느리)이고 식사 어떠셨는지 묻는 것도 그들의 몫이다. 고급 레스토랑의 총주방장이나 매니저의 역할과 비슷한 것. 그러니 손님이 너무 많이 오면 이것도 본인 입장에서 힘들 수야 있긴 하다지만, 이 이야기의 결말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고 며느리가 손님이 발길을 끊기를 바라는 것은 총주방장이나 매니저가 자기 바쁘다고 가게에 손님 안 들기를 바라는 것과 비슷한 일로 봤다는 것.[41] 한편으로 상징적인 구절로 볼 수도 있다. 며느리가 바위를 쪼개는 행위 그 자체가 며느리가 손님과 여행객을 귀찮아하는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보면 며느리가 손님과 여행객을 귀찮아 함이 남들에게 알려지면서 남들에게 저 집 며느리는 야박하다고 소문나고 야박하다는 것에 사람들의 인망이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원래 발 없는 소문이 빠르니까.[42] 흔히 김삿갓의 일화라고 알려진 유명한 설화로, 김병연 문서에 소개된 "月月山山" 드립(손님이 떠나거든 그때 밥을 올려라)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훗날의 스웨덴게이트를 연상시킨다. 스웨덴게이트와 다른 점이라면 야박한 집주인이 손님을 두고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정 손님 밥을 주기 싫으면 적어도 주인도 손님 갈 때까지 밥을 안 먹는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했다는 것 정도.[43] 왕제가 아니냐 싶겠는데 당시에는 왕자라고 기록되어 있다.[44] 특히 조선시대에는 현재보다도 친척의 범위가 넓었다. 현대에는 이촌향도와 핵가족화의 현상으로 사촌이라도 교류가 적은 경우가 많았지만, 1970년대 이전에는 집성촌에서 인구 대다수가 살았기 때문에 사촌 정도면 형제자매나 친구마냥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존재였고, 이웃사촌도 8촌 이내 친족인 경우가 다수였다. 직접적으로 얽힌 친척이 아니더라도 결혼하면 그쪽 처가랑 얽히고 며느리 들이면 또 그 처가와 얽히는 식으로 거미줄처럼 얽히기 십상이다. 설령 혈연과 완전히 무관하더라도 학연과 지연도 있다.[45] 다만 전문적으로 숙박을 할 수가 있는 시설이 조선 시대에 있었는데 바로 객주라고 하는 곳이다. 거기는 숙박은 물론, 금융업과 상업 등도 동시에 하는 복합시설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교통의 요지나 상업도시에 자리잡고 있지 아무 곳에나 있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여관 비슷한 역할을 하던 곳은 사실 주막으로 보통은 술과 국밥을 팔지만 필요하면 묵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문 숙박 시설인 객주나 주막은 조선 후기~말기 이후에나 등장한 것이다. 조선의 경우 화폐/시장경제의 발전이 상당히 늦은 편이었기에 전문 외식업 및 숙박업의 발전도 그만큼 늦었던 것. 그 이전까지는 여행객들이 주막에 묵어간다고 해도, 들어가 잘 수 있는 방이나 내주는 것이지 그 외에는 제공되는 것이 없었고, 심지어 길양식조차도 스스로 식량을 가지고 다니다가 주막에서는 화덕이나 빌려 직접 조리해 먹어야 했다. 물론 방을 내준다는 것도 손님들에게 각각 빌려줄 수 있는 독실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무시고 가실 거면 저 방 가서 주무시오'라는 식으로 여러 길손들이 큰 방 하나에서 혼숙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주로 보부상과 같은 가난하고 신분 낮은 이들이나 이용했고 양반 길손이 이용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 숙박비는 거저나 다름없을 정도로 저렴했지만, 심지어 행상인들조차 마을 부잣집의 행랑채에서라도 얻어자거나 평소 자주 오가던 마을에서 친해진 사람의 집에서 묵어가는 쪽을 더 선호했다고 할 정도.[46] 특히 문순득의 경우는 아예 류큐-루손(필리핀)-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갔다! 즉 한중일뿐 아니라 류큐와 필리핀에도 이러한 접대의 관습이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루손에서는 대접이 좀 박했다고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류큐에서 받은 대접에 비해서다.[47] 따라서 통상 수교를 요구하러 온 서구 사절들에게 적당히 그 뜻을 거절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48] 하멜 같은 경우는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배가 완전히 부서져 자력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그렇다고 청나라를 통해 보내려고 하니 병자호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하멜 일행이 혹시나 조선 사정을 청나라에 유출할 우려가 있어 보낼 수 없었고, 일본 역시 당시 임진왜란의 상흔이 남아 있는데다 시마바라의 난이 끝난지 얼마 안되는 시점이라 공식적으로는 하멜 일행이 일본에 가면 죽을 우려가 있어서라고 했다. 물론 하멜 일행은 성상파괴운동을 겪은 개신교도인지라 일본에서 딱히 문제 삼지 않았지만 그 이전 벨테브레의 송환을 거부한 적이 있고 해서 조선에선 상세한 상황을 몰랐기도 했다.[49] 물론, 의례적으로 하는 인사말일 수도 있으나, 한국 사회에서는 서로 친한 사이가 되면 식사를 같이 하거나 뭔가를 대접하는 것을 매우 당연하다고 여길 것이다. 당장에 친한 친구 집으로 놀러가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일단 간단하게 간식부터 먹고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50] 옛날 학습만화를 보면 소풍이나 여행을 준비했는데 아버지의 친구가 갑자기 오는 바람에 모두 취소되고 애들만 발을 동동 구르는 에피소드들을 볼 수 있다.[51] 그런데 정반대로 서구권 등에선 대접받은 음식을 남기는 것은 실례라 여기기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이 중국인의 집에 초대받았다가 음식을 어떻게든 다 먹으려는 손님과 남을 정도로 많이 차려내려는 주인 사이에서 눈치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52] 물론 이는 소위 '꽌시'(연줄)가 있는 경우에 한한다.[53] 전근대 당시에 빙수는 굉장히 귀한 음식이었다. 다른 지역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사막 지역이라 물 구하기가 힘든 중동에서는 더더욱. 물을 뿌리면 그대로 증발하는 사막 한복판에서 물 한 모금을 넘어 녹지 않은 상태가 유지된 빙수를 건네주었다는 건 살라딘 입장에서는 비록 종교도 다르고 한바탕 싸웠던 적군의 수장이더라도 나름 극진하게 대우해준 것이라고 봐야 한다.[54] 부관이 검을 건넸으나 받지 않고 단검을 썼는데, 아랍권에서 단검은 동물을 잡을 때 쓰는 도구로 간주하므로 이것은 르노를 인간이 아니라 금수로 취급했다는 의미이다.[55] 당시 조선인들은 서양인을 귀신에 빗대어 양귀자라 했다.[56] 무언가를 요청한다는 것은 주인이 손님을 제대로 접대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되어 주인의 명예가 손상되었다.[57] 창작물의 사례이긴 하지만, 아래 소개된 얼불노의 크레스터 사례를 보자. 손님으로 온 나이트워치들이 자신을 모욕하자 크레스터가 보인 반응은 "나를 모욕하는 놈들은 내 손님이 아니다. 꺼져라"라고 쫓아내는 것이었다. 손님이 주인을 모욕하는 것은 그 손님을 거절할 정당한 명분으로는 충분하지만 계속 손님으로 받아주는 척 속여서 해치는 것을 정당화할 근거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58] 아니면 시대관을 감안하는 것도 있는데 당시 시대는 뭐만 하면 칼침이 들어오기 쉬운 시대였다. 당장에 사울의 재위기간을 감안하면 판관기는 기원전 1400 ~ 기원전 1000년 정도로 볼 수 있는데 이보다 겨우 300년 정도 전에 동해보복의 원칙인 함무라비 법전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함무라비 법전은 가혹하지만 당시로서는 오히려 지나친 복수를 동해보복으로 제한하는 취지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니 이 시대는 지금보다도 뭐만 했다 하면 칼부림으로 이어지기 쉬운 시대라는 의미고 결국 그런 시대이니 접대의 관습에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칼이 날아오기 쉬웠다고 설명하면 그럭저럭 가능할 수는 있다. 이것도 정말 그 시대가 그 정도로 칼부림 날아올 시대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59] 조조는 아들 조앙을 죽게 했다는 일로(비록 조앙이 시앗의 소생이긴 했어도 친자가 없었던 정부인은 일찍이 친모를 잃은 조앙을 친자처럼 여겼다고 한다.) 본처인 정부인과 일방적인 이혼을 당한다. 정확히는 조조가 정부인을 친가로 돌려보냈다. 이후에 조조가 정부인에게 찾아가 싹싹 빌면서 매달리는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계속 베만 짰다. 결국 조조는 끝내 정부인에게 용서받지 못한 채, 부인이 재혼해서 잘 살길 바란다는 말만 친정 사람들 편에 전해 놓고 돌아가야 했다.[60] 당대인 춘추전국시대에 공자가 유교를 창시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인데, 이 시절이 워낙 무법이 판치던 세상이라 이를 교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었고, 이를 위해 과거 이상적인 왕국을 건설했다던 요왕과 순왕, 그리고 실제 교화에 성공한 적이 있던 주공 단을 성인으로 여기고 이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61] 종5위 벼슬로 당시 벼슬은 거의 철저히 가문의 격으로 정해졌다. 그런데 요시토모는 무려 천황의 자손인 겐지 가였고 그런 사람도 종 5위인데 하물며 별볼것 없는 집안 출신 배신자 따위가 종5위를 할 순 없는 바였다.[62] 여기는 당시 일본 꿀땅이었다. 역시 이런 배신자에게 어울리는 땅은 아니었다.[63] 이에 타다무네는 열 받아서 겐페이 전쟁에서 자기가 죽인 요시토모의 아들 요리토모에게 붙었는데 요리토모는 언어유희로 열심히 싸운다면 미노, 오와리를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전쟁 후 그를 잔혹하게 처형함으로서 진짜로 미노, 오와리를 주었다.(미노, 오와리는 일본어로 일신의 끝장과 같은 음이다.)[64] 애당초 아바스 왕조의 중심과는 북아프리카를 빙 둘러 가야했기에, 멀어도 너무 멀었다.[65] 유목민들은 정주민들보다 훨씬 더 접대의 관습에 엄중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66] 당연히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가 아니다.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는 스코틀랜드 기준으로는 제임스 7세라고 할 수 있다.[67] 칼마르 연합 와해 이후 평소 상공업 진흥 정책을 펼쳐 덴마크인 귀족들과 사이가 나빴던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 독립을 빌미로 덴마크 귀족들에게 폐위되었고 노르웨이 왕위에서도 연달아 폐위당해 처가가 있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로 망명했다.[68] 문신들이 무신들의 녹봉인 영업전을 강탈하여 들고 일어난 사건.[69] 정사에서는 생포되어 조조에게 인계되었다고 전한다. 어차피 그게 그거지만...[70] 원소의 장남이자, 후계자 자리를 놓고 원상과 싸웠던 원담은 이미 조조에게 패사한 뒤였다.[71] 정사에서는 단순히 조조의 예상이라고만 언급되나, 연의에서는 관도대전 중 병사한 곽가가 생전에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고 유서를 통해 조조에게 계책을 남긴 것으로 설정된다.[72]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서 게롤트의 저택에 머무는 며칠 동안 계속 먹는 모습만 보여준다. 저주로 100년 간 굶주린 상태였으니 그럴만도 하다.[73] 이 당시 메르세데스는 안 그래도 살림살이가 풍족하지 못한 형편에, 약혼자는 악명 높은 감옥에 끌려가 소식도 끊긴 데다 서로 의지하던 예비 시아버지(즉 에드몽의 아버지 루이 당테스)는 병이 들자 스스로 곡기를 끊어 죽었고, 그렇게 가족도 친구도 없이 절망에 찬 18개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차에 에드몽이 감옥에 가도록 신고한 장본인인 페르낭이 시치미 뚝 떼고 손을 내밀자 그의 악행을 꿈에도 모르고 결국 그와 결혼한 것. 탈옥 후 이 사연을 옛 이웃 가스파르 카드루스에게서 들은 에드몽은 매우 씁쓸해하면서도 이해는 했다. (다만 부친의 죽음만은 절대 용서를 못했다. 변장 와중에 분노했을 정도.)[74] 사실 메르세데스도 자기 남편이 한 짓에 대해서는 복수를 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복수 대상에 바로 그녀의 아들인 알베르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 아무리 그래도 알베르는 백작과 직접적인 관계도 없는데 페르낭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복수의 대상에 포함되었으니 메르세데스로서도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었던 것. 운명이 꼬이지만 않았어도 알베르는 에드몽 당테스의 아들이었을 수도 있었다.[75] 작중에서는 '동양'이라고 부르지만, 여기서 나오는 동양은 동아시아보다는 중동 지역에 가깝다.[76] 어떤 면에서는 이 역시 접대의 관습에 부합하는 행동이다. 상대에게만 음식을 먹이고 자신은 음식을 먹지 않았으니 '너희가 내 집에서 밥을 먹은 거지 내가 너희와 함께 식사하며 너희를 대접한 것은 아니다'라는 핑계를 댈 수 있는 것. 이 점은 칭기즈 칸 역시 몽골 통일 후 '주인이 손님을 대접할 때는 손님 앞에서 자신이 내놓은 음료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법령을 반포했을 정도이니 접대의 관습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77] 당글라르 부인이 당글라르와 결혼하기 전, 그녀는 빌포르와 불륜 관계로 사생아까지 있었다. 원수들에게 복수할 정보를 수집하던 백작이 이것을 알게 되었고 이 파티에서 그에 관한 말을 슬쩍 흘려 둘을 겁에 질리게 한 것이다.[78] 사실 두 사람 모두 에드몽과 껄끄러운 면이 있는 상대였지만 아직 젊고 순진하던 에드몽은 그들의 적의를 눈치채지 못하고 친구로 믿었기에 자신의 가장 기쁜 날에 친구로 잔치에 초대한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속마음을 숨기고 이 초대에 응했으니 둘은 분명 에드몽의 손님이다.[79] 판본에 따라 장미가 아닌 다른 꽃이나 종달새 등으로 나올 때도 있다. 어쨌거나 '야수의 소유인 물건'에 손을 댔다는 전개는 동일하다.[80] 그런데 사실 다른 신화나 전래동화에 나오는것보다는 관대한 편이다. 접대의 관습 어겼다고 대대손손 저주를 받거나, 아예 집안이 망하고 모두 길거리로 내몰리거나 가족이 전멸하는 극단적인 내용들도 있다.[81] 손이나 발에 보통 박힐 굳은살이 팔꿈치에 있다는 점에서(포복 훈련 시 주로 긁히는 부위는 무릎과 특히 팔꿈치다.) 그가 단순한 민간인이 아니라 군사 훈련을 받은 사람임을 눈치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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