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자성어
고사성어 | ||||||
門 | 前 | 薄 | 待 | |||
문 문 | 앞 전 | 엷을 박 | 기다릴 대 |
각종 입사 및 입학 시험에서는 서류심사로 전형에 참가할 자격을 묻는데 여기서 탈락하면 바로 문전박대가 된다.
1.1. 역사 속 문전박대
1907년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2차 만국평화회의에 헤이그 특사를 보냈지만 일제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을 할 수 없었다.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호소하고자 파리장서와 독립요구서를 들고 찾아갔지만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라는 이유로 서구 열강들은 한국인들의 간곡한 호소에 귀를 완전히 닫아버렸다. 미 국무부도 독립요구서를 거절했고 그 어느 한 나라도 한민족의 간절한 염원을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1.2. 정치권의 문전박대
정치인들이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습도 종종 언론에서 볼 수 있는데, 보통 선거 때나 당 분당 같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상대 후보와의 단일화 및 정치적 협력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면 문전박대 당했다고 언론에서 적는다. 문전박대는 유권자들의 동정여론을 자극해 문전박대 당한 정치인의 지지도가 올라가거나 향후 선거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거꾸로 오히려 문전박대 당한 후보가 불이익을 받는 경우도 있다.1.2.1. 제16대 대통령 선거(2002년)
한국 정치권에서 가장 유명한 문전박대는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 전 대통령(당시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가 정몽준 전 의원의 집 앞에 찾아갔다가 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사건이다. 두 사람은 대선 한달 전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을 이기기 위해 후보 단일화를 시도하였고, 여론조사 결과 노무현이 단일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렇게 새천년민주당과 국민통합21은 노무현을 대통령 후보로 밀고, 노무현이 당선될 경우 공동정부를 구상하는 등의 단일화 합의를 한 뒤 선거운동 기간동안 합동유세를 하였다. 그러나 대선 하루 전, 노무현이 유세에서 "다음 대통령은 정몽준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속도위반 하지 마세요. 정동영, 추미애 의원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발언해 정몽준이 이에 큰 불쾌감을 느꼈고, 공동유세를 마친 뒤 정몽준이 측근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측근들의 불만이 쏟아져나왔다.[2]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정몽준은 지지철회 오더를 내렸고, 몇 시간 뒤 국민통합21 대변인을 통해 지지철회 성명을 발표한다.이에 노무현 캠프는 완전 뒤집혔고, 노무현이 정몽준과 대화를 나누고 지지 철회 의사를 거두도록 설득하기 위해 그의 자택을 찾아갔다.[3] 그러나 정몽준은 자택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서 대화를 거부했고, 노무현은 1시간 동안 서 있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가면서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이에 한나라당과 조선일보는 원래 안될 단일화였다며 신나게 조롱을 했고 특히 조선일보는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 라는 호외까지 기습적으로 새벽에 뿌리며 이들의 단일화 파기를 적극환영했다.
그러나 선거 당일, 개표 결과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노무현이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습이 TV로 생중계되면서 동정론이 일었고, 특히 투표에 무관심하다고 여겨지던 20~30대 젊은 유권자들이 정몽준의 지지철회 및 노무현의 문전박대에 마음이 움직여 대거 투표하면서 노무현에게 표가 더 많이 가게 되었다. 또한 노사모 회원들이 조선일보에서 뿌린 호외를 일일히 전부 주우러 다녔고, 선거 당일 유선전화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투표 독려 전화를 걸면서 유권자들이 노무현에게 투표하게 만들었다.[4] 결국 지지철회 및 노무현의 문전박대는 잠깐의 위기를 장기적인 기회로 만든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반면 정몽준은 기습적인 지지철회 및 단일화 파기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었고, 유력 정치인으로서의 생명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노무현이 당선된 뒤 참여정부에서 국무총리 같은 요직을 지내며 체급을 키웠다며, 차기 대선에서 충분히 경쟁력 있는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이 기회를 잠깐의 오판으로 단숨에 날려버린 셈이 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명성을 상당히 잃게 된 정몽준은 두 번 다시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일은 없게 되었고, 본인이 대선을 앞두고 창당한 국민통합21도 2년 뒤 해체가 되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에 입당해 이명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였으며, 그 후 2010년대 초중반까지 평범한 정치활동을 하다가 2014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하며 정계를 사실상 은퇴하였다.
1.2.2. 제17대 대통령 선거(2007)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도 이회창이 박근혜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했다. 2007년 대선은 여당이었던 대통합민주신당의 지지율 하락 및 참여정부의 레임덕으로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상승세였고, 한나라당의 정권교체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그래서 사실상 본선보단 한나라당 경선에서 누가 후보가 될 것인지가 더 큰 관심사였다. 경선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는 이명박과 박근혜였는데, 오차범위 내 치열한 접전 속에 이명박이 간발의 차이로 승리하며 대선 후보가 되었다. 이에 박근혜 캠프를 비롯한 박근혜의 지지자들은 크게 반발하며 선거 막판까지 이명박에 대한 적대감을 들어냈고, 박근혜도 선거운동 시작 전까지 사실상 칩거하며 이명박과 거리를 두었다.그러던 2007년 11월, 16대 대선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이회창이 5년만에 정계에 복귀하여 무소속으로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이회창은 보수 유권자들의 지지도를 빼앗아오기 위해서는 경선 때 이명박과 대립관계였던 박근혜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선거운동 기간 동안 꾸준히 박근혜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박근혜가 이에 응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 12월이 되자 이회창은 몇 차례나 박근혜의 집을 찾아가 면담을 요청했지만, 박근혜는 끝내 자택 문을 열어주지 않고 이회창과의 면담 요구를 거부했다. 이회창의 경우 여러차례 찾아갔다가 전부 문전박대를 당하고 온 셈이다. 박사모 회원들이 박근혜의 집 앞에서 촛불을 들고 이회창과의 만남에 응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회창이 자택 앞에 나타났을 땐 환영행사도 해줬지만 끝내 박근혜는 이회창과의 연대를 거절했다.
이회창을 문전박대시킨 박근혜는 12월 초부터 이명박의 선거 유세에 나와 지지를 호소하면서 소극적으로나마 이명박을 밀어주었고, 그 결과 이명박은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박근혜 입장에서는 이회창과 손 잡지 않은 것이 괜찮은 선택이었던 셈인데, 본인이 이회창과 연대를 하여 보수층을 분열시켜 혹여나 안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보수 지지자들로부터 과거 이인제 정도의 취급을 당하며 정치적 평판이 떨어질 것이 뻔했기에 당선 가능성이 극도로 농후했던 이명박과 손을 잡는 것이 가장 최선의 결정이었다.
이회창은 3번째 대권도전이 좌절된 뒤, 자유선진당을 창당해 이듬 해 치뤄진 18대 총선에서 당선되었고 2012년 18대 대선 때 박근혜 캠프에서 일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1.2.3. 제18대 대통령 선거(2012)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문재인 전 대통령과 무소속으로 갓 출마했던 안철수 의원의 단일화 협의 과정에서, 문재인이 안철수의 자택을 찾아가 단일화 합의에 대한 세밀한 논의를 하려고 했으나 안철수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 그냥 돌아와야했다. 일각에서는 2002년의 단일화 과정이 재현되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으나, 예비후보 등록 4일 전 안철수가 후보직을 사퇴하고 문재인에 대한 지지의사를 표명하면서 본선에 가기 전 단일화가 되었다.이 후 안철수는 문재인의 선거유세에 모두 참여하였고, 대선 당일 투표를 마친 뒤 미국으로 출국했다.
1.2.4. 새정치민주연합 분당(2015년)
2015년 말, 안철수계와 동교동계가 당시 대표였던 문재인을 위시로 한 친노와 갈등을 심하게 빚으면서 신당 창당 및 당 분당 가능성을 내비쳤다. 안철수가 탈당 의사를 밝히고 기자회견 계획을 기자들에게 뿌리자 문재인은 전날 밤 안철수의 자택을 찾아갔으나, 3년 전과 마찬가지로 안철수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 결국 문전박대 당하고 돌아와야했다. 문재인은 같은 사람에게 2번이나 문전박대를 당한, 나름 기록 아닌 기록을 가지게 된 것. 다음 날 안철수는 계획대로 기자회견을 통해 새정치민주연합 탈당을 선언하고, 함께 탈당한 안철수계+동교동계 인사들과 함께 국민의당을 창당하며 제3지대로 들어가게 된다.2. 유희왕의 함정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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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게다가 의미도 묘하게 겹친다(문=입구).[2] 당시 문화특보를 맡았던 가수 김흥국이 적극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며 지지철회를 권했다고 한다.[3] 원래 노무현은 정몽준을 만나고 싶지 않아했지만, 측근들이 간곡히 설득해 떠밀리듯 가게 된거라고 한다.[4] 16대 대선 당일 유선통화량은 KT 창립 이래 최대통화량을 찍었다고 한다. 이해찬이 대선 몇년 뒤 총리가 되고 KT 사장과 오찬을 하다가 사장이 말해줘서 알게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