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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05:28:06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후보 단일화 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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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화 이후 러브샷을 나누는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
파일:IE001903113_PHT.jpg
제16대 대통령 선거 전날 밤 정몽준의 지지 철회 이후 정몽준 자택 앞에서 문전박대 당하는 노무현

1. 개요2. 원인3. 후보 단일화 협의회의 등장4. 진행5. 단일화 성사6. 단일화 이후7. 결과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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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를 다루는 문서.

대통령 선거 전날 밤 정몽준의 지지 철회 선언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면서 DJP연합 이후 두 번째로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성공한 단일화가 되었다. 다음으로 성공한 단일화는 윤석열-안철수 단일화다.[1]

2. 원인

2002년 3월 새천년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도입된 국민경선[2]으로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이인제를 지지하던 동교동계 주류와 상당수 현역 국회의원들은 이 상황을 상당히 떨떠름하게 지켜보았다.[3]

그런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이 개최되던 와중에 열린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은 국민의 정부 말기의 게이트[4]와 낮은 투표율[5]로 참패한 반면 이회창이 이끌던 한나라당은 대승했다.

새천년민주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자 노무현 후보는 당내에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특히 영남권 승리를 이끌겠다며 지방선거를 낙관하여 후보 재신임까지 거론하는 무리수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기사

그 결과 한때 40%를 넘었던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급전 직하하여 이회창 후보에게 역전당했고 급기야 큰 차이로 밀리기 시작했다. 거기다 월드컵 버프를 받아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었던 정몽준이 새로운 대선 후보로 떠오르면서 정몽준은 국민통합21이라는 정당을 창당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정몽준의 지지율이 올라가면서 새천년민주당 내부에서 정몽준과의 단일화 또는 후보 교체를 요구하며 노무현 후보의 사퇴를 요구하는 후보 단일화 협의회가 등장했다.

3. 후보 단일화 협의회의 등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후보 단일화 협의회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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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행

2002년 3월부터 열린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국민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당초 적어보였던 승리 가능성을 전국적인 노풍으로 뒤집어 승리하고 지지율이 압도적인 1위로 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이후 노무현은 스스로 '다가올 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단체장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면 재신임을 받겠다'면서 지방선거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표출하였다. 이때만 해도 후보 공천만 잘 한다면 노무현의 연고지라고 할 수 있는 부울경 세 곳 중 하나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분석이 있었지만 민주화 세력의 복원(정확히는 영남 민주세력 복원)이라는 명분을 내건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만남이 경제위기를 초래한 과거 세력과의 타협으로 비쳐지면서 논란에 휩싸이는 일명 YS시계 파동으로[6] 지지율이 주춤했고 노무현의 자신감과는 달리 한나라당의 (구)민주계와 재야 출신들이 움직이지 않으면서[7] 범보수 진영의 분열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영남권에서 거물급 인사 공천에 실패하면서 말 그대로 완패했다.

2002년 6.13 지방선거 결과가 이렇게 나오자 새천년민주당에서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라"면서 노무현 후보 사퇴론이 등장하였다. 갑론을박이 벌어졌으나 당은 6월 18일 최고위원·상임고문 연석회의, 19일 당무회의를 연달아 열어서 ‘만장일치로 노무현 후보 재신임’을 결정하고 8.8 재보선 준비에 돌입하였다.

이때만 해도 후보사퇴론을 끝까지 주장하는 의원들은 몇몇에 불과했고 지방선거 참패는 노무현 후보보다는 국민의 정부의 친인척 비리와[8] 측근비리 문제, 한일 월드컵으로 인한 저조한 투표율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경선에서 이인제를 지지했던 동교동계를 포함한 당 주류들도 "노무현이 마음에 드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국민경선을 통과한 후보인데 이렇게 떨구면 누구를 세우느냐?"식의 입장을 보였다. 한마디로 대안부재론에 가까웠다. 이인제는 국민경선 막바지에 "보이지 않는 손" 운운하면서 음모론을 들고 나오다가[9] 안 먹히니까 후보를 사퇴하고 칩거하던 상태라서 대안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민주당의 대권후보군 중에선 지금 당장은 지지율이 떨어져 있지만 영남표를 일부라도 가져올 수 있는 노무현이 최선이라는 판단이 나왔다.

한편 당초 16강만 가도 목표 달성이라고 했던 한일 월드컵이 아시아권 팀 사상 최초 4강 진출이라는 기적적인 성적을 올리면서 끝났다. 월드컵은 6월에 마무리됐지만 그 여파는 엄청나서 7월, 8월까지도 전국민과 모든 미디어가 월드컵 4강에 도취되었고 당연히 월드컵 유치 시절부터 성공 개최까지 모든 과정을 주도한 정몽준 전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인기가 대폭발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8.8 재보궐 선거는 6월 지선에 이어 또 한 번 한나라당의 압승, 새천년민주당의 참패였다. 재보선이 치러진 15군데 국회의원 선거구에서 한나라당은 비호남 13곳에서 승리했고 민주당은 본진인 호남 2군데에서 이기는 데 그쳤다.[10] 특히 서울과 부산에선 한나라당과 민주당 후보간의 득표율 차이가 20%가 넘는 곳들이 속출했다. 원래 재보선은 투표율이 낮고 하늘이 무너져도 투표하는 노년층 고정표가 많은 한나라당이 유리하다. 더구나 이때는 모든 국민들과 미디어가 월드컵에 취했던 때라 재보궐선거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날짜가 혹서기에 피서철이라서 더더욱 민주당이 불리한 선거였으며 선거 당일에는 폭우까지 쏟아졌다.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참패는 참패고 지방선거 직후부터 "재보선은 나를 중심으로 치르겠다"고 공언해 온 노무현 후보에 대한 불신이 쌓였다. 민주당이 노무현한테 가진 가장 큰 기대감, 그리고 노무현 본인이 내세운 장점은 영남표를 일부라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막상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에선 딱히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노무현 대신 정몽준을 후보로 세우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몽준국민의 정부 시기 민주당과 자민련, 민국당이 구성한 공동교섭단체에 참여하면서 민주당계 정당과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그를 대안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생각만은 아니었다.

월드컵의 열풍으로 아직 대선 출마를 선언하지도 않았는데 이회창-노무현-정몽준 3자 여론조사에선 정몽준이 이회창과 1위를 다투고 여당 대선후보였던 노무현은 아예 미디어의 관심에서 벗어나면서 3위로 추락했다. 이런 정몽준의 진로를 두고 무소속 출마, 신당 창당 후[11] 정계 개편, 민주당 입당과 후보 교체 등 여러가지 시나리오가 신문 정치면을 뒤덮기 시작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노무현 후보 사퇴론, 후보 교체론이 공공연히 터져나왔고 한화갑 대표를 위시로 한 당 주류도 수수방관하며 딱히 막지 않았다. 동교동계 입장에선 그동안은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속으로는 마음에 안 들어도 겉으로는 노무현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젠 정몽준이라는 대안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노무현은 후보 사퇴를 강력하게 거부하였으며 민주당 바깥에선 노사모유시민친노무현계 인사들, 한나라당 김원웅 전 의원이 주축이 되어 8월 28일 "개혁적 국민정당 추진위원회", 바로 개혁국민정당을 꾸렸다.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한 이들은 새천년민주당 바깥에서 노무현을 지원했는데 이때부터 노무현이 민주당에서 밀려날 경우에 대비해서 만든 피신처라는 주장이 많았다. 결국 이 정당은 노무현 당선 이후 새천년민주당이 쪼개지고 열린우리당이 창당하자 이에 흡수되었다.

노무현이 사퇴하지 않자 '중도개혁포럼(중개포)'을 중심으로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37명의 의원들은 10월 4일 "후보 단일화 협의회"를 결성하고 그 중 17명은 11월 4일 아예 탈당했다. 전국구 의원이었던 장태완, 박상희, 최명헌 등은 탈당하면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니 의원직을 유지하기 위해 당 지도부에 "나를 출당해 달라"고 요청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12] 이들은 당내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단일화를 위한 사퇴를 요구하는가 하면 아예 공공연히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노무현을 디스하고 타 당 후보인 정몽준을 찬양하기도 했다.

후단협 회장은 김영배 전 의원이었지만[13] 실질적으론 부회장을 맡은 김원길 전 의원이 핵심 인물이었다. 김원길 전 의원은 특히 기업인 출신으로 대선 후원금 등 각종 자금줄을 쥐고 있는 인사였기 때문에 김원길의 이탈은 노무현 진영에 큰 타격이었고 한화갑 전 대표를 비롯한 당 주류 및 최대주주였던 동교동계의 중진들은 이런 사태를 말리기는커녕 수수방관했으며 이것이 2003년 열린우리당-새천년민주당의 분당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후단협과는 별개로 2002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하면서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하던 김민석이 지방선거 패배 후 뜬금없이 정몽준 지지를 선언하며 민주당을 탈당한 것이 당 내외에 큰 충격을 던졌다. 이는 안그래도 새천년 NHK 사건으로 비판에 직면해 있었던 86세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주었으며 김민석은 이것 때문에 철새정치인으로 제대로 찍혀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데다 2008년에는 최고위원 2위로 부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자금법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수년간 정치활동이 불가능해졌으며 원외 민주당을 창당하면서 떠돌다가 2016년에야 겨우 돌아와 민주연구원장을 지냈고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18년[14] 만에 겨우 원내에 복귀했다.[15]

5. 단일화 성사


2002년 11월 이들의 단일화 요구에 노무현 후보가 결국 단일화를 받아들였고 한 차례의 후보단일화 토론을 거쳐 노무현-정몽준의 후보 단일화가 여론조사 방식으로 실시되어 노무현이 승리하여 단일화가 성공하자 대부분의 후단협 의원들은 이에 승복하여 복당했다.

6. 단일화 이후


정몽준은 단일화에 승복하여 대선에서 노무현 선거운동에 나섰으나 선거일 전날 밤 지지를 철회했다.# 지지 철회 이유로는 외교 정책상의 이견, 차기대권주자로서 인정받지 못한 소외감 등이 거론되었으며 특히 대선 전날 극단적으로 지지를 철회한 것은 감정 문제가 컸다.

김민석의 증언에 따르면 기존 단일화 합의는 모든 유세장에 단일후보 둘만 오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명동 유세에서 당 관계자의 실수로 노 후보 진영 인물 대다수가 단상에 오르게 되었다. 김민석은 사고를 직감했고 종로에서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본인이 커버를 칠 생각이었는데 어찌어찌하다 종로 유세에서 서갑원의 지시로 또 다시 모든 인물이 단상에 오르게 되었다. 게다가 직후 정몽준 진영에서 어떤 사람이 '차기는 정몽준!'이라고 적힌 피켓을 보이자 노무현 후보가 '너무 속도위반하지 말자. 정동영, 추미애 최고위원도 있다.'[16]고 한 것이 결정적으로 정몽준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었다. 이후 이동하게 된 냉면집에서 정몽준은 화가 나 소주만 마시고 있고 당직자들은 가만히 냉면만 먹는 분위기 속에서 정몽준의 측근인 김흥국이 열이 뻗쳐 막 떠드는 상황이 벌어졌다.[17] 그리고 직후 정몽준은 지지철회 오더를 내렸다. 발표를 맡은 인물이 바로 김행 대변인이었다.

그리고 이 날 밤 집에 찾아온 노무현에게[18] 문도 열어 주지 않은 채 밖에 세워 두다가 돌려보내면서 정몽준과 노무현은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되었다.

한편, 정몽준의 국민통합21내에서는 반발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철을 비롯한 단일화 찬성파는 즉각 탈당을 선언하기도 했다.
파일:이철의 탈당기자회견.jpg
이철의 탈당 기자 회견

7. 결과

비록 선거 전날 정몽준이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지만 결과적으로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오전에는 한나라당 지지층이 우세했으나 오후의 인터넷 및 핸드폰 문자 투표독려에 따라 젊은 층의 물량공세로 전세를 뒤집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선거관련자에게 전설로 회자되기도 한다. 영국의 언론 가디언은 이 점에 주목해 당선 소식의 제목을 "World's first internet president logs on"(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이 로그인했다.)으로 뽑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시 출구조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축하를 받은 직후 "확정되면 깨워주게"하고 한숨 푹 잤다는 패기를 보였다.

사실 대선 하루 전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가 어떤 영향을 불러왔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민주당 지지자들의 결집과 무당파층의 표를 불러와서 노 후보가 승리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의견이 있는데 왜냐하면 지지 철회 소식을 들은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의 집앞으로 찾아가 문전박대와도 같은 상황을 당하는 장면이 대선 전날 방송 전파를 탔기 때문이다. 당시 이 장면에 울컥해하거나 안쓰러워서 무당파층도 노무현 찍으러 투표장에 갔단 사람들도 있었다. 또 끝까지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던 진보 유권자층의 일부가 정몽준의 지지철회 이후 그 여파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당선될 것을 우려해서 자신의 신념을 접고 보수집권을 막기 위해서 노무현한테 투표했다는 분석도 있다.

다만 이 분석에 대해서 유시민은 "우리는 민주노동당한테 빚진거 없다"면서 일축했으며 이게 민주노동당 강성진보 지지자들의 심기를 건드려서 친노와 진보 그룹 사이에 감정의 골이 생기게 되었다. 훗날 유시민이 진보그룹과 손잡고 2012년 통합진보당을 만들 때 이 문제가 또다시 돌출하면서 죽어도 유시민하고는 같이 못한다면서 이탈하는 사람이 생겼다.

하여간 이 한 번의 판단 미스로 인해 정몽준은 배신자로 찍혀 버리고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는 와장창 박살났으며 '왜 배신했는가'에 대해서도 종로 유세에서 노무현 후보가 정동영 의원을 밀어주는 듯한 발언과 모양새에 불편함을 느끼고 삐쳐서라고 밝혀서 소인배 이미지까지 추가해 버렸다. 그리고 훗날의 버스비 70원 발언으로 서민의 아픔을 알 리 없는 상속재벌이라는 인식이 박혀 이미지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파일:지지율 추이.jpg
지지 철회가 노무현 후보 쪽에 악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판세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선거막판(공표금지기간)[19] 여론조사를 보면 이 기간 내내 노무현 후보가 이 후보를 적게는 5%, 많게는 10% 가까이 앞서고 있었는데[20] 실제 선거 결과는 2.3% 차이에 불과했다. 즉, 정몽준을 지지했던 중도 표가 지지 철회로 이회창으로 옮겨가 표차가 줄긴 했지만 그것이 대세를 바꿀 정도는 되지 못하였다는 것.[21] 유시민 역시 데이터 분석을 하면서 지지 철회가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주긴 했지만 지지층의 막판 결집으로 역전을 막았다고 평가했다.

8. 관련 문서


[1] 그러나 이 단일화의 효과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있다. 단일화를 거부하고 이재명에게 투표한 안철수 지지층도 많다는 분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 양 후보 간의 표차가 적었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효과는 더 컸다는 게 주류 평가이다.[2] 당원이 아니더라도 선거인단 신청을 통해 누구나 경선투표를 할 수 있게 한 제도였다. 이전까지는 대의원을 대상으로 한 당내경선이었는데 그 대의원은 바로 당총재와 지도부, 그리고 현역 지역구 의원들이 내리꽂은 인사들이 태반이었다. 즉 몇몇의 계파 좌장들이 공천권과 돈을 무기로 당을 주무르던 시대였다. 제왕적 총재니 보스정치니 하는 표현은 이런 현실에서 나온 것이다. 1980년대까지는 조폭을 동원해서 반대파 계열 대의원들을 협박하고 행사장에 못 들어오게 봉쇄하는 각목전당대회도 많았으며 이후에도 노골적으로 돈봉투를 뿌리는 동원경선이 횡행했다. 어쨌든 이런 국민경선제 때문에 당내 세력이 거의 없었던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떠오를 수 있었다. 단 오늘날 민주당계 정당에서 시행하는 국민경선처럼 신청만 하면 모두가 경선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민주당원과 일반 국민의 비율을 50:50으로 맞추기 위해 신청자 중 추첨을 통해 선거인단을 선발하였다.[3] 참고로 경선 시작 당시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했던 현역 국회의원은 천정배 달랑 한 명이었다. 그만큼 노무현은 당내에서 세력이 없었지만 경선 초반에 지지층이 겹치던 재야 출신 김근태가 처참한 득표율을 보이자 자진사퇴하였고 개혁 성향 의원들이 노무현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사실 경선 직전까지도 노무현+김근태 후보 단일화 논의가 있었으나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4] 2000년 총선 패배와 함께 아들 세 명(김홍일, 김홍업, 김홍걸)이 모두 연루된 소위 홍삼 게이트 비리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레임덕이 극심했기 때문에 사실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기대하기 힘들었다.[5] 투표율이 낮으면 보수정당에 유리하다는 것은 정설이고 이때는 심지어 월드컵이 진행 중이었다.[6] 노무현은 김영삼과 만난 자리에서 김영삼이 통일민주당 총재 시절 선물했던 시계를 내보이면서 "그 때 총재님께서 주셨던 시계를 아직도 차고 있습니다."라는 대사로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이 장면이 방송에 나가자 경제위기를 초래한 김영삼에게 반감을 가졌던 사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면서 역풍이 불었다. 이 자리에는 김영삼의 최측근이자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박종웅 전 의원이 배석했는데 노무현은 김영삼에게 "여기 박 의원을 저한테 주십시오. 제가 부산시장으로 만들어 보겠습니다"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노무현은 1987년 민주화 세력의 복원이란 명분으로 박종웅을 비롯한 한나라당의 구 상도동계 세력을 자기쪽으로 끌어와서 한나라당의 분열을 유도하고 부울경 지방선거에서 선전한 다음에 그 기세를 타고 대선도 이긴다는 큰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YS시계 파동으로 역풍이 불자 영남 상도동계가 아무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이 구상은 무산되었다. 결국 영남쪽 상도동계 세력들은 열린우리당 창당에도 거의 합류하지 않았다. 당시 노무현의 구상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훗날 노무현의 오랜 친구이자 부산에서 인권 변호사로 동업했던 문재인이 18대, 19대 대선 후보로 출마했을 때 상도동계 일부가 문재인 지지를 선언하였으며 문재인은 재수 끝에 대권을 잡게 되었다.[7] 당시 이회창의 당 장악력은 확고했다. 이회창에 앞서 민주자유당을 이끌던 김영삼 조차도 민정계의 몽니에 힘들어할 정도였고 결국 민주계와 민정계의 분열로 당이 깨진 바 있었다. 그러나 이회창은 당권을 잡은 후 한번도 분열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민주화 이후 보수정당 내부를 가장 확고히 장악했던 대표로 자리매김했다. 이 때문에 훗날 노무현 집권 후 민주당계 정당으로 당적을 옮긴 상도동계 막내 김영춘조차도 2002년 12월까지 이회창의 선거운동을 열심히 도왔다. 이들 중 일부는 이회창이 16대 대선 패배 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야 '독수리 오형제'(이부영,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우재)라는 이름으로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8] 김대중의 세 아들 김홍일, 김홍업, 김홍걸 형제가 수뢰 혐의로 사법처리를 받았던 시절이 이때다.[9] 여기서 보이지 않는 손이란 콕 집어 말은 안 했지만 DJ의 손을 의미한다. 요컨데 김대중의 의중이 이인제에게 없기 때문에 이미 노무현 당선 시나리오가 다 있다 이런 얘기.[10] 전북 군산 강봉균, 광주 북구 갑 김상현.[11] 실제로 정몽준은 가파른 지지율 상승세를 앞세워 국민통합21이라는 신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16대 대선 종료 후 당세가 급격하게 기울어지면서 결국 정몽준의 1인 정당 수준으로 전락했다.[12] 그리고 의원직 유지를 위한 출당요구는 바른미래당에서 구 국민의당계, 구 바른정당계 의원들의 갈등 요인이 되기도 한다.[13] 김영배는 "노무현으로부터 설렁탕 국물 한방울 얻어먹지 못했다"는 "국물론"을 설파하였다. 이 때문에 이후 친노 세력은 이들 후단협 및 동교동계를 "국(궁)물세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는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당시 후단협과 비슷한 행태를 보인 국민의당 분당세력을 "국(궁)물당"이라고 부르는 것의 시초가 되었다.[14] 서울시장 출마를 위한 2002년 사퇴.[15] 물론 훗날까지 김민석은 자신이 총대를 매고 단일화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다른 의원과 상의하지 않은 단독 행동이었고 '정치생명을 걸었다'는 자신의 말처럼 정말 정치 생명이 반 이상 날아가게 되었다. 민주당에서도 범동교동계를 이루던 호남계 세력이 안철수를 따라갔다가 몰락하고 친노-친문 세력이 주류가 되면서 그에 대한 비토가 상당했지만 2010년대 후반 들어 언론과 팟캐스트에 자주 등장해서 특유의 말빨을 내세워 여권 논객으로 활약하면서 어느 정도 희석된 듯. 근 18년 동안을 야인으로 지낸 까닭에 이제는 민주당원들도 그에 대한 감정이 많이 희석되었다.[16] 노무현 본인은 이후 이 발언에 대해 정몽준 지지자들과 김민석, 신낙균 등이 정동영을 단상에서 밀어내는 게 안타깝게 느껴져 한 발언이었다고 말했다.#[17] 이는 지지철회 선언을 발표한 김행 대변인과 (민주당 측) 허운나 전 의원의 증언이다.[18] 사실 노무현 본인은 내켜하지 않았으나 참모진의 성화 때문에 반강제로 온 것이라고 한다.[19] 당시에는 선거 24일 전부터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되었다.[20] 권영길의 지지율은 약 5% 내외였다.[21] 물론 권영길에서 노무현으로 옮겨온 표도 약간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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