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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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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치 입문 전
2.1. 출생 및 유년기 : 1946~19522.2. 학창 시절: 1953~19642.3. 청년기: 1965~19772.4. 법조인 시절: 1977~1988
3. 정치 입문 후
3.1. 국회의원 및 야인 시절: 1988~20003.2. 해양수산부장관 시절: 2000~20013.3. 기적적인 대통령 당선: 2002
3.3.1. 관련 문서
3.4. 대통령 재임기: 2003~2008
4. 퇴임 후

1. 개요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의 일생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정치 입문 전

2.1. 출생 및 유년기 : 1946~1952

노무현미군정한반도 남반부를 통치하던 1946년 9월 1일(음력 8월 6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과일 농사를 짓는 아버지 노판석(盧判石, 1900~1976)과 어머니 성산 이씨 이순례(李順禮, 1914~1998)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노무현이 태어날 당시 어머니가 난산을 겪어 읍내의 남산병원장까지 불러와야 했다. 태몽은 '백말이 말뚝에 매어있는데, 할아버지가 고삐를 주면서 타고 가라 했다. 엄청나게 큰 말이 발굽을 내딛는 소리가 우렁찼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본관광주(光州)로, 광주 노씨 광주파(光州派)의 32대 손이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부터 '노무현은 전라남도 강진군 출생이다.', '노무현의 아버지가 전라도 사람이다, 할아버지가 전라도 사람이다.'는 루머가 퍼졌었고 지금도 일베저장소 등지에서 활동하는 극우 네티즌들은 그렇게 날조하기도 하나, 노무현 가문은 9대조가 경남에 정착해 8대조부터 김해에서 대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근거가 없는 악의적인 주장이다.

아버지 노판석은 같은 본산리 출신인 이순례의 아버지에게 한학(漢學)을 배우다 그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됐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일본의 타이어 재생 공장과 중국 상하이를 넘나들며 돈을 벌었으나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재산을 다 잃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의 편지를 대신 읽고 써주는 등 자상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유능하지 못한 데다 그다지 의욕적인 사람도 아니라서 아내 이순례에게 구박을 자주 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본인부터 한문에 밝아서 그랬는지 자녀 교육에는 관심이 많아서, 노무현의 초등학교 학적부에는 '소농(小農)으로 생활은 하류(下流)이나 교육열 많음'이라 적혀 있다.

반면 어머니 이순례는 강단 있고 생활력이 강한 여성이었다. 노무현은 어머니에 대해 '환갑이 넘도록 가난과 싸우며 고구마순과 딸기를 이고 30~40리 길 마산까지 내다 팔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들 노무현과 비슷하게 입담이 좋았고 지기 싫어하는 자존심 강한 성격이었다. 노무현에게 거는 기대가 각별해서, 작은 누나 노영옥(盧英玉)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는 늘 '무현이는 봉화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낳을 때 굉장한 꿈을 꿨다. 하지만 부정 타니까 얘기는 하지 않겠다. 너희들은 그게 이뤄지는 걸 볼 거다.'고 말하며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들의 성공을 기원했다고 한다.

어린 노무현은 '머리가 좋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6세 때 아버지로부터 배운 천자문을 다 외워 주변으로부터 '노천재'라는 별명이 붙었다. 집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막내 노무현은 가난한 시절의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남이 먹던 밥은 안 먹고, 숟가락도 자기 것만 쓰는' 응석도 부렸다.

2.2. 학창 시절: 1953~1964

파일:노무현 초졸 사진.jpg
파일:노무현 중졸 사진.jpg
파일:노무현 고졸 사진.jpg
<rowcolor=#000> 초등학생 시절 중학생 시절 고등학생 시절

1953년 입학한 진영대창국민학교에서도 공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학년에는 반 67명 가운데 2등, 2학년에는 62명 중 1등, 절대 평가로 바뀐 3학년 이후에도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고, 졸업식 날엔 교육감상을 탔다. 매년 학적부 종합 평가는 항상 '두뇌 예민하고...' 시작했으며, 담임들이 덧붙인 평가는 '특히 발표력이 있음'(1학년), '활발하나 잘 운다'(2학년), '침착하고 남에게 동정심 많음'(3학년), '농담을 잘한다'(4학년), '자율성이 풍부하나 좀 게으르다'(5학년), '자존심이 강하고 성인다운 행동을 한다'(6학년) 등이었다. 6학년에는 담임의 권유로 전교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 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출마 소견 발표 때 "내가 이래 고추가 작아도 맵습니다."라고 좌중을 웃기며 연설을 하고는 502표 중 302표를 얻어 당선됐다.

하지만 노무현은 생활수준이 고만고만한 시골 봉하마을에서만 지내다가 10리 떨어진 읍내에 위치한 진영대창국민학교에 입학한 이후 가난을 콤플렉스로 여기기 시작했다. 시골 출신 아이들과 읍내 출신 아이들 간의 빈부 차이가 존재했는데, 이는 옷차림과 학용품에서 표가 났으며 교사들도 읍내 아이들을 편애했기 때문이었다. 사친회비를 제때 못 냈다는 이유로 벌을 서고 창피도 당하는 일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고학년에 접어들면서 시골 아이들과 읍내 아이들로 패가 갈리자, 시골 아이들의 대장 노릇을 하면서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했다.

공부를 잘하는 것에서 오는 우월감과 가난한 가정 형편에서 오는 열등감이 뒤섞인 시절이었다. 4학년 때 누나에게 물려받은 찌그러진 필통이 부끄러워 어수룩한 아이를 꼬드겨 새 필통으로 맞바꿨으나 '어떻게 급장이 그런 짓을 하느냐'는 친구들의 비난에 직면하자 되돌려준 일, 5학년 때 부잣집 아이의 고급 책가방을 몰래 면도칼로 쭉 찢어버리고 자수하지 않은 일 등이 본인이 밝힌 철없던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들이다. 5학년 때의 첫사랑(읍내 양복점집 딸)과 성공하지 못한 것도 '나의 초라한 행색 때문'이라 생각해서 중학교 내내 열등감에 시달렸다. 자존심도 매우 강했다. 6학년 때는 교내 서예 대회가 있었는데, 노무현은 시험지를 바꿔주지 않는다는 말에 자신의 글씨가 미흡했음에도 그대로 제출한 반면 옆 반 교사는 자신의 아들이 글씨를 잘못 썼다며 시험지를 바꿔갔고 결국 노무현이 그 교사의 아들에게 밀려 2등을 한 일이 있었다. 노무현은 분을 참을 수 없어 2등상을 반납했고, 서예 선생에게 불려가 '건방진 놈'이라고 크게 혼이 나고 뺨까지 얻어 맞았다고 한다.

노무현은 자전 에세이에서 이 시절에 대해 '나만 가난했던 것도 아닌데 어린 시절의 나는 유독 가난을 심각히 여기며 자랐다. 그리고 그 상처는 나의 잠재 의식 속에 어떻게 해서라도 나만은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열망과 함께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동시에 심어졌던 것 같다.'고 요약했다.

1959년 노무현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됐다. 이 당시 중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었기 때문에 입학금을 요구했다. 노무현의 어머니는 진영중학교 교감에게 '책값만 먼저 내고 여름에 복숭아 농사를 지어 입학금을 내겠다.'고 사정했으나, 교감은 "당신 큰아들은 대학 나와도 저렇게 백수건달 아니냐. 공부 시킬 필요 없다. 농사나 시켜라."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설움에 북받친 어머니가 교감 앞에서 펑펑 울자 화가 난 노무현은 입학원서를 찢더니 "어머니, 집에 갑시다. 나 이 학교 안 다녀도 좋소."라며 뛰쳐나왔다. 그런 노무현에게 교감은 "저 봐라, 저런 놈 공부 시켜봐야 깡패밖에 안 된다."라며 혀를 찼고, 결국 노무현의 중학교 입학 문제는 큰형 노영현이 다음날 학교를 찾아가 교감의 멱살을 잡고 '비교육적 언사(言辭)를 문제 삼겠다.'고 항의함으로써 해결된다.

노무현의 중학교 시절은 상당히 불안정했다. 2학년 진급을 앞둔 1960년 2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3월 26일)을 앞두고 '우리 이승만 대통령'을 주제로 작문 대회가 열렸는데, 노무현은 친구들에게 '아무 것도 쓰지 말자'며 '백지 동맹'을 주동했다. 3.15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4선에 도전하는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는 글쓰기를 시키는 것은 부정한 일로 봤다는 것이다. 그는 작문지에 '택도 없다'(어림도 없다)는 의미의 '이승만 통령'이라는 제목과 자신의 이름만 써서 제출했다가 괘씸죄로 교무실에서 벌을 섰고, 반성문을 요구 받았지만 자초지종만 적을 뿐 잘못했다는 말은 적지 않아 1주일 간 정학을 당했다. 2학년을 마치고는 공납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학교에는 위경련을 이유로 대고 1년 동안 휴학을 한다. 당시 가세가 더욱 기울어 조그만 복숭아 과수원까지 처분한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은 김지태 부산일보 사장이 운영하던 부일(釜日)장학회 시험에 합격해 중학교 복학의 길을 스스로 뚫어냈다.

그러나 노무현은 중학교에 복학했음에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5급 공무원(지금의 9급 공무원) 시험을 거쳐 독학으로 고등고시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생각으로 큰형 노영현이 보던 법률 책을 뒤적거렸다. 이에 큰형은 화를 내며 그에게 부산상업고등학교 진학을 강하게 권했고, 결국 1963년 김해를 떠나 부산 유학을 떠나게 된다. 부산상고에 입학하면서 3년 장학금을 받아 학비는 해결됐지만, 문제는 부산에서 방을 얻어 자취하거나 하숙할 형편은 못 됐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범일동에 있던 소화기 판매회사 사무실에서 야간 경비를 봐주고 라면으로 숙식을 해결하거나, 때로는 부산에 시집가 있던 누나 집이나 친구 집을 전전하며 생활했다. 이도 저도 안되면 학교로 가 교실 마룻바닥에서 잠을 청했는데, 겨울에 그렇게 했다가 이틀 밤 동안 몸을 떨면서 이를 악물었더니 다음날 이가 아파 아침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 일도 있었다.

노무현의 고등학교 시절 회고다.
1학년을 그럭저럭 보낸 후 2학년이 되면서 난 '농땡이'를 치기 시작했다. 머리를 안 깎이려 시험시간에 도망치기도 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과 담배를 배웠다. 성적은 중간도 안되는 수준까지 떨어져 갔다. 한마디로 고등학교 시절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자전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 中

실제로 노무현의 성적은 1학년 502명 중 48등에서 2학년 481명 중 213등으로 곤두박질쳤다. 당시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가난한 시골 학생들은 취업반에 들어가면서 내적 갈등을 겪고 자퇴하는 이들도 수두룩했다고 한다. 노무현도 비슷한 이유로 방황을 겪은 것이다. 3학년이 되자 노무현은 가난하고 노쇠한 부모를 생각해 취직 공부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고, 이 시기 주산, 부기, 타자 등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성적도 462명 중 59등으로 어느 정도 회복됐다. 장래희망은 3년 내내 은행원으로 기재되어있으나, 동창의 증언에 의하면 이 시절부터 진짜 꿈은 변호사였다.

2.3. 청년기: 1965~1977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노무현은 농협 입사 시험을 봤으나 떨여졌다. 합격을 자신했는지 졸업앨범비로 고향 친구들에게 '농협 김해지점 합격턱'을 미리 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자기보다 성적이 나쁜 학생이 합격하고 자신은 낙방하자 상당히 자존심 상해 했고, 어머니도 평소 '막내아들이 상고 졸업하면 번듯한 은행에 들어갈 것'이라 동네에 자랑하고 다녔어서 크게 상심했다.

1966년 취업에 실패한 노무현이 학교의 소개로 찾아간 곳은 '삼해공업'이라는 작은 어망회사였다. 하지만 한 달 반 만에 그만둔다. 월급(2천 7백 원)이 한 달 하숙비도 안되는 수준으로 너무 적었고 근무 시간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만 두겠다.'고 말하자 사장이 '월급을 4천 원으로 올려 주겠다.'고 했지만, 끝내 '고시를 해보겠다.'는 마음을 먹고 나오게 된다. 한 달 반치 월급 6천 원으로 옷을 살까 구두를 살까 망설이다 기타 한 대와 고시 공부를 위한 헌 책 몇 권을 사고, 나머지는 술 마시고 영화 보는 데 다 써 버린다.

그러고는 고향 봉하마을로 돌아와 작은형 노건평과 함께 마을 산기슭에 황토로 벽을 바른 토담집을 직접 지었다. 이름은 한문에 능한 아버지가 '옥을 갈고 닦는 집'이라는 뜻의 마옥당(磨玉堂)으로 붙여줬다. 여기서 사법시험 공부에 매달리게 된다.

노무현이 사법시험에 관심을 가진 배경에는 사실 큰형 노영현의 영향이 컸다. 그는 부산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살림에 가세가 더 기운 탓에 노무현이 초등학교 5학년일 때 응시조차 못해보고 그만뒀다. 어린 노무현은 큰형을 따라 마을 뒤 봉화사라는 에 가서 그곳에서 고시 공부를 하는 큰형 친구들의 법 이론이나 시국에 대한 토론을 자주 듣곤 했으며, 큰형이 자신의 좌절에서 오는 울적한 심정을 상기된 어조로 자주 털어놓기도 했다. 물론 그때는 어려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그 형들의 엄숙한 표정과 격한 어조의 토론은 만만한 젊음의 패기와 이상을, 그리고 격렬한 논쟁의 뒤에 주고받는 소탈한 웃음은 사나이들의 인간미와 호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느꼈고, 이것들이 고시 학도들의 속성이요 또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으로까지 생각했다. 결국 이런 분위기는 노무현에게 고시를 해보겠다는 막연한 꿈을 갖게 해줬다고 한다.

노무현은 우선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을 준비한다. 당시에는 사법시험을 보는 데 학력 제한이 있어 고졸은 예비시험을 통과해야 했다.[1] 또한 책 살 돈을 벌기 위해 울산한국비료 공장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러 갔다. 그러다 큰 못에 발을 찔린 탓에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밥값이 2천 원이나 밀리자 고향으로 야반도주를 했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작은형 노건평과 함께 돈 벌 궁리를 하다가 과수원을 만든답시고 김해 농업시험장에 들어가 감나무 묘목 1백 포기 정도를 훔쳐 오기도 했다.

예비시험을 치자마자 다시 울산의 겨울 공사판으로 달려갔다. 야간 작업까지 하면 일당은 280원으로, 4천 원쯤 모았을 때 작업 도중 목재에 얼굴을 맞아 이 3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때문에 1966년 11월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친구가 사온 신문에서 예비시험 합격자 명단에 실린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눈이 붓도록 펑펑 울었다고 한다.

1968년 3월 7일, 노무현은 한국 나이 23살에 육군에 입대한다. 군번은 '51053545'. 처음에는 강원도 원주시 제1야전군사령부 부관부 병역계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했으나 1969년 전방 차출에 자원했고, 이후 인제군 북면 원통리 소재 제12보병사단(을지부대) 제52보병연대(쌍용부대) 제2대대 소총소대 정보과에 배속되어 정보상황병으로 복무하며 공비 관련 정보 수집 및 분석 업무를 맡았다. 1971년 1월 23일, 34개월(2년 10개월) 간의 현역병 생활을 마치고 상병으로 만기전역했다. 최종 계급은 상등병으로, 병장을 달지 못한 이유는 베트남 전쟁에서 귀환한 병장이 많았기 때문인 데다가 노무현은 분대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이전에는 병장은 분대장에게만 주는 계급이었는데, 파병 문제로 인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 특별 케이스로 취급해 병장 계급을 달아줬다. 지금은 이 시기 상병 만기 전역자들을 병장으로 병적 기록 변경이 가능한 제도가 생겨서 노무현도 유가족이 신청하면 병장 제대로 변경이 가능하다.
파일:노무현 군대.jpg
군 복무

1971년 전역한 노무현은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사법시험 준비에 매달린다. 1967, 1968년 큰형과 작은형이 모두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집안 형편도 상당히 호전된 상황이었다. 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권양숙에게 반해 8개월 간 구애를 해 끝내 연애에 성공한다. 1973년 1월에는 양가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권양숙과 결혼했다. 노무현 집안은 '장인좌익 활동 경력 때문에 무현이가 판사를 못할 수도 있다.'며 반대했고, 권양숙 집안은 그쪽대로 '고시가 될지, 뭐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딸을 줄 수 없다.'며 맞섰다. 하지만 권양숙은 이미 임신한 상태였기에 결국 양가 모두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1973년 5월 결혼 4개월 만에 아들 노건호가 태어난다.
파일:권양숙 결혼.jpg
권양숙과의 결혼식

그러나 아들이 태어난 지 단 8일 만에, 그동안 노무현 인생에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던 큰형 노영현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갑작스러운 형과의 작별과 가장(家長)이 됐다는 부담감, 그리고 고시에 도전한 지 7년이 넘은 탓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가중된 것인지 이 시기 노무현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15회 사법시험) 응시조차 포기하고 싶은 것을 부모님의 시선이 두려워 마지 못해 상경하였으나, 시험 첫 날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목구멍에 무엇이 치밀어 올라 우유와 계란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그래도 기를 쓰고 책을 볼라 치면 몸에서 식은 땀이 배어 나왔다.
노무현이 <고시계>에 쓴 사법시험 합격수기 中

이 '증세'는 쉽게 낫지 않아 1974년의 16회 시험도 별 준비 없이 응시해 당연히 낙방했다. 고시를 그만 둘 생각도 들었지만 상고를 졸업한 지 너무 오래 되어 새로운 진로를 찾기는 어려웠기에 그만두지는 못했다. 대신 '수석 합격'이라는 목표, '고시 아니면 파멸'이라는 배수의 진을 거둬버리고, 직장인이 출퇴근을 하듯이 낮에는 마옥당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와 마음 놓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방식으로 마음가짐을 다잡았다.

덕분에 17회 시험 준비는 꽤 순조로웠다고 한다. 시험을 보러 가는 날 아침, 아내에게 '신문 기자들이 수석 합격자 인터뷰하러 올 테니 당신도 피력할 소감 한 마디 준비해 두지 그래.'라고 농담을 하며 집을 나섰고, 집에 돌아와서도 가족들에게 호언장담을 했다. 합격자 발표가 있는 1975년 3월 27일에는 아침밥을 먹고 불안감을 떨칠 수 없어 일찌감치 낮잠에 들었는데, 오전 10시쯤 신문을 본 친구 이재우가 "무현아! 무현아!"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는 것에 눈을 떴다. 아침부터 한바탕 싸우고 토라져 있던 권양숙도 노무현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이때 노무현은 세상을 떠난 형님을 떠올렸다. 고시가 형님의 꿈이었고, 자신에게 고시의 꿈을 심어준 사람도 형님이었기 때문이었다.
"형님! 지하에서도 신문을 보십니까? 아버지 어머니도 형님 생각에 자꾸만 우십니다."
파일:노무현 사법시험2.jpg

한국 나이로 30살, 만 나이로 29세가 되던 해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노무현은 당시 합격자 중 안대희 전 대법관과 더불어 단 둘뿐인 고졸 출신이었다. 다만 엄밀히 따지면 안대희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3학년 중퇴라 말이 고졸이지 대학에서 이미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었고, 대학 문턱조차 밟지 못한 순수 고졸 합격자는 노무현이 유일했다. 위 신문(매일경제 1975년 3월 27일자 7면)에서도 노무현만 고졸로 분류되어있으며, 이는 다른 신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파일:152B620B4A1ACCC301.jpg
사법연수생 시절

이후 7기 연수생으로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60명 중 47등으로 수료했다. 이 시기는 노무현으로서는 '엘리트들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변호사를 희망했지만, 형과 어머니의 권유로 판사 임용을 신청해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된다.

2.4. 법조인 시절: 1977~1988

대전지방법원에서 7개월간의 판사 생활을 하다가 경제적인 문제로 사임했다. 이는 1992년명예훼손과 관련되어 서울민사지방법원 판결을 통해 사실임이 인정되었다. "원고가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관되었으나, 7개월만에 판사직을 사임한 주된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

1978년 5월, 부산광역시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조세 전문 변호사로, 소위 잘 나가는 변호사였다. 한 마디로 승률이 높아 돈을 잘 벌었다는 이야기다.[2] 다른 변호사들과는 달리 상고(현 개성고등학교의 전신인 부산상업고등학교) 출신이라 세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세법은 회계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기에, 일반 변호사들이 파고들기에는 수월하지 않은 분야이다.[3]
파일:변호사노무현.jpg
변호사 시절의 모습
개업 초기에는 형사사건을 조금 맡다가 이후 민사사건을 주로 맡았으며, 그 와중에 등기업무도 취급하여 부산지역 사법서사들의 반발을 샀다고 한다. 부산에 개업한 변호사가 거의 없던, 심지어 노무현까지 불과 3명에 불과했다는 설까지 있던 시절에 법무사들의 밥줄인 등기업무를 했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미웠을 것이다.[4] 변호사가 법무사의 상위호환이라 변호사도 등기업무가 가능하므로 법무사들 입장에서는 밥줄 뺏기는 꼴이었다.[5]

그러던 와중 1981년, 우연히 김광일 변호사의 부탁으로 변론을 맡게 된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김광일 변호사는 경상도를 대표하는 인권 변호사로 유명했는데, 이 사건을 위해 그는 무료 변호인단을 구성한다. 하지만 담당 검사 최병국이 변호에 참가하면 공범으로 함께 기소해 변호사 자격을 정지시키겠다고 협박하자 변호인단에서 빠졌고, 자신을 대신해 노무현에게 변호인단 참여를 부탁한다. 당시 변호인단 명단은 이흥록, 장두경, 박재봉, 정차두, 노무현까지 총 5명이었다. 이는 노무현이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다. 참고로 동지 문재인은 사법 연수원을 1982년 8월 수료했으므로 부림사건 변호에는 참여한 적이 없다.

이때 선배 변호사 김광일의 권유로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려 두기는 했으나, 재판에 들어가기 전까진 치기 어린 젊은이들이 사고를 친 것 쯤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해자 중 한 명을 면회하는 과정에서 고문 흔적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이 사건에 미친듯이 매달렸다고 한다.

재판에서도 변호인단 중 가장 서열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부림 사건 피해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거의 본인도 피고인인마냥 열성으로 나서서 변호를 했고, 고문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피고인들과 그 가족들도 재판 초반에는 변호사가 저렇게 흥분해서 변론을 해도 되나 걱정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와 고마움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영상. 그리고 일부 피고인들이 완전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재야의 스타가 된다.[6]

이후 해고 노동자들을 위해 법률 상담을 해 주거나 무료 법률 상담소를 개설하여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무료 혹은 담배 몇 갑에 소송을 대리해주기도 한다. 각종 민주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의 집은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당시 유명했던 표현 중 아스팔트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노무현이 당시 만든 말이라 한다. 그는 연설을 하다가 전경의 최루탄을 맞고 기절하는 일까지 겪었지만 마이크를 놓지 않고 시종일관 꾸짖는 연설을 하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와 관련된 이미지는 지금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다.

검찰은 그를 구속하였고, 안기부(안기부는 국정원의 전신)는 변협에 압력을 넣어서 그의 변호사 면허를 강제 정지시키고 직업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등 불법으로 수시로 감시를 했지만, 직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변호사 시절 부산 서구에 노동 법률 사무소를 열어 운영할 때 만나서 의기투합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문재인이다. 노무현의 고시공부 동지이자 연수원 동기 박정규가 문재인을 노무현에게 소개시켜준 것이 인연이다. 이 둘이 훗날 모두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말 그대로 기연 중 상기연.[7]

3. 정치 입문 후

3.1. 국회의원 및 야인 시절: 1988~2000

인권 변호사 활동을 주목한 김영삼의 제의로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직할시 동구에 출마해 당시 실세였던 민주정의당 허삼수 후보를 꺾고 당선된다.[8] 일설에는 이 때 노무현이 김영삼에게 쎈놈과 붙게 해 달라 해서 허삼수와 붙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이 팩트라면 진짜로 노무현은 간이 큰 셈이며, 어찌 보면 가장 노무현다운 선택인 셈.

이후 대한민국 제5공화국 비리 조사 특별 위원회(5공청문회) 위원으로 선정되었고, 5공 청문회 때 발의자로 등장해 증인으로 참석한 정주영을 상대로 질의에 앞서 한 말이 매우 유명해졌다. 정주영은 대한민국 최대 재벌인 현대그룹의 수장이라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자타공인 대한민국 대표 기업가였다.[9] 게다가 특유의 뚝심있는 성격으로 유명했기에 정치권에서도 결코 함부로 대하기도 힘든 인물이었는데, 그런 정 회장이 일개 초선의원, 그것도 겨우 40대 초반의 정치 신인 앞에서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뚝심 어디 안 가서 여타 증인들과는 달리 곧 지지 않고 잘 맞받아쳐서 노무현의 "의회는 바지저고리에 불과하고요?" 라고 물으니 "뭐 그런 것도 있죠." 식으로 대담하게 답했다.
"그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군부에는 5년 동안에 34억 5,000만원이라는 돈을 널름널름 갖다 주면서 내 공장에서 내 돈 벌어 주려고 일하다가 죽었던 이 노동자에 대해서 4,000만원을 주느냐, 8,000만원을 주느냐를 가지고 그렇게 싸워야 합니까? 그것이 인도적입니까? 그것이 기업이 할 일입니까? 답변하십시오!"
- 노무현 당시 초선의원 시절 제5공화국 비리 청문회 中에서.[10]

전두환과의 청문회 이후 "그럼 국민의 비난은 누가 책임질 겁니까? 본 의원은 풀리지 않은 의혹이 엄청나게 남아있습니다." 라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 명패를 내던진 것도 유명하다. 자세한 것은 노무현 명패 사건을 참조하면 된다.

이 청문회에서 5공 시절 억눌려 지내던 국민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통쾌한 추궁으로 유명해지면서 일약 "청문회 스타"로 거듭나게 되었고[11], 이때의 활동은 시간이 흘러서 대통령 선거까지 도전할 수 있도록 평가를 받게 되는 큰 자산이 되었다. 이러한 활약상으로 이 무렵에 김영삼은 노무현을 상도동 자택으로 수시로 불러서 면담도 하고 용돈도 넉넉히 지원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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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회의입니까? 이것이 어찌 회의입니까? 이의가 있으면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가 어디 있습니까?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도 있습니까?"

- 3당 합당에 반대하던 당시 노무현 초선의원.[13]
그리고 당시 무명의 초선의원이었던 노무현은 5공 비리 청문회를 비롯해 3당 합당을 야합이라 비판하며 거부하고 정치 인생의 길을 열어주었던 김영삼의 곁을 떠나면서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꼬마민주당으로 입당하면서 대변인과 부총재를 지냈다. 이 시점을 통해 동교동계 쪽으로 붙었다.

제13대 국회의원 임기 종료 후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동구에 재출마했으나 4선년에 본인이 꺾었던 허삼수와 리턴매치에서 재선에 실패하면서 낙선하였고,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출마했지만, 3당 합당하기 이전에 같은 야당이었던 민주자유당 문정수에게 밀리며 이 역시 낙선했다. 김정길 의원에 따르면, 당시 노무현 의원이 부산시장으로 출마하는 것에 탐탁치않게 생각했던 이기택 측에서 노무현을 경선으로 견제하여 이기택쪽 후보를 세우려고 했다고 한다. 당연히 부산은 이기택 대표의 영향력이 막강해서 경선에서 탈락할 위기에 처했으나 김정길 의원이 당시 남구 지구당위원장이었던 손태인 의원을 만나 노무현 의원을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손태인 후보가 이를 수락해서 노무현의 동구, 김정길의 영도구, 손태인의 남구 지구당이 힘을 합쳐서 불과 몇표 차이로 겨우 경선을 이겼다고 한다.

또한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했지만, 현역 전국구 의원 이었던 신한국당이명박, 당시 이 지역 현역 4선 중진인 새정치국민회의이종찬[14] 등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15] 이 후 김원기, 김정길, 이부영, 이철, 유인태, 박계동, 김부겸 등의 민주당 내 반 이기택 성향 지구당위원장들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일명 '통추')를 결성했으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통추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지지 여부를 놓고 분열되자 한나라당행을 선택한 이부영, 김부겸 등과 달리 쿠데타와 3당 합당의 원죄가 있는 당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며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맡으며, 김대중 총재의 대통령 당선에 공을 세운다. 1997년 대선 당시 노무현의 TV 찬조연설

이후 1998년 2월, 이명박 의원이 선거법 위반 시비에 휘말려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바람에[16] 종로구 지역구는 무주공산이 되었고, 노무현은 그해 7월에 열린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여기에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원래는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대신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한 상태였지만[17], 김대중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의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고건 전 총리를[18] 직접 영입함에 따라 출마를 포기하고 대신 종로구 재보궐선거에 공천된 것이다. 이 때 역시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했으나 고건 전 총리 공천으로 인해 엎어지면서 크게 반발한 동교동계 한광옥과 달리[19] 노무현은 시장 후보 자리를 쿨하게 포기하자, DJ는 "정치는 노무현이처럼 해야 한다"면서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했지만, 2년 뒤인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는 종로구 재출마 대신 다시 부산으로 지역구를 옮겨 출마한다. 보좌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내와 자녀들까지 전부 반대했다. 총선 이후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노무현을 취재했는데, 권양숙 여사와 딸 노정연씨가 "종로에서 한 번만 더 해서 인지도를 높이고 부산에 내려가자고 얘기했다."는 언급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고집은 확고했다. 한편 노무현이 출마하지 않아 공석이 된 종로구에는 국정원장직에서 물러난 이종찬 전 의원이 다시 공천되어 5선을 시도했지만 그도 한나라당 정인봉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면서 정계를 떠났다.[20]

당시 노무현이 부산에서 출마한 선거구는 북구·강서구 을이었는데, 선거운동 초반에는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를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결국 막판 한나라당 표심이 결집하며 허태열[21]에게 밀려 35.69%의 득표율로 낙선한다. 하지만 지역주의를 깨기 위한 도전을 계속 이어갔던 이력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되면서 오히려 주목을 받는 낙선자가 되었고, 바로 이때부터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낙선 후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와 신문에 낙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22]
<colkeepall>
16대 총선 다음 날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긴 낙선 소감
[ 펼치기ㆍ접기 ]

노무현입니다. 할 말이 많은데...
노무현 인사드립니다.
..... 참 할말이 많은데,
무슨 말씀부터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과분한 애정과 격려와 지지를 보내주신
많은 분들에게 실망을 안겨드려 죄송합니다.

..... 이 아픔 잊는 데는
시간이 약이겠지요.
또 털고 일어나야지요.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겠지요.

.....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저는 이 나라와 부산을 사랑합니다.
우리 또 함께 힘을 모아 나갑시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 노 무 현 올림 -

2000.04.14 14:33

3.2. 해양수산부장관 시절: 2000~2001

"많은 일을 하고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여러분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해양수산부는 현재보다 미래가 있는 부처입니다. 우리 어깨 위에 한국경제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감히 다시 한 번 저와 함께 노력해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쏟아지는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 일하십시오. 자신 있게 일하십시오. 일을 추진하다 생긴 실수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모든 책임은 여러분이 져야 할 것입니다. 진실을 이야기하십시오. 반대의견이 있으면 직을 걸고 반대하십시오. 현장에 가서 보고 판단하십시오. 이제부터 여러분과 저는 한 팀입니다."
- 2000년 8월 7일, 노무현의 해양수산부장관 취임사.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낙선 이후 국민의 정부에서 2000년 8월부터 해양수산부장관을 8개월 동안 역임했다.

해양수산부장관으로 재직하던 당시, 직원들과 같이 이메일로 대화를 하고 수평적 토론 문화를 새로이 정립했고, 다면평가를 비롯한 인사평가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공직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공무원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23] 그리고, 장관직 재임 시절에는 체험 삶의 현장에 출연하기도 했다.

또한, 탈권위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특유의 성격답게 장관에게 주어지는 특별 대접 같은 의전도 모두 없앴다고 한다. 장관 출근시간에 맞춰서 현관에 수위장과 비서진이 대기하고 있다가 관용차가 도착하면 수위장이 거수경례를 하고 차문을 열어주던 관행도 중단시켰다고 한다. 또한, 지방 출장에서 지역공관장이 좋은 차를 빌려서 마중을 나오던 관행도 못 하게 했다고 한다. #1, #2

노무현 스스로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를 저술해서 장관으로서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겼다. 대통령 당선 후 노무현 대통령이 회고하길, 이때 장관을 한 경험이 대통령 업무를 보는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해양수산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재직하며 MBC 100분 토론 등 여러 정치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활동했다.

3.3. 기적적인 대통령 당선: 2002

파일:노무현대선.jpg
<bgcolor=#ffcb08> 대선 후보 시절 유세하는 모습. 뒤에 있는 큰 ‘노짱’ 팻말이 눈에 띈다.
2001년 12월, 16대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경선 레이스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때 노무현은 행정 능력이 검증된 정치인은 아니었고, 당 내의 다른 대권주자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아 지지율은 미미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민주당 내 '영남후보론'과,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이인제의 당적 정체성을 공격하면서 이른바 노풍을 불러일으키면서 역전승에 성공, 경선을 통과하면서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24] 새천년민주당의 경선 과정에 대해서는 제16대 대통령 선거 문서에서 다룬다.

이때 처음으로 유시민을 비롯해 훗날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 비서관 및 실장으로 근무하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당 대선후보가 되었을 당시 노무현은 지역주의가 타파되고 새 시대가 찾아올 것 같기는 한데, 그 때가 되면 자신은 없을 것 같다 말했다고 한다. 그걸 들은 유시민은 새 시대의 첫 파도에 올라탄 거라서 자신이 거기까지 못 갈 수도 있지만 그 시대는 분명 온다 말했고, 노무현은 "새 시대가 오기만 한다면 내가 없어도 어때"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노무현 본인도 자신이 어떻게 인생을 마무리하게 될지는 전혀 몰랐겠지만, 시대가 지나고 난 뒤에 보면 굉장히 섬뜩하게 들릴 지경.

본선에서는 한나라당이회창 후보와 맞붙게 되었다. 노무현 측은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이회창 측은 부패 정권 심판, 정권교체 등의 공약을 내세워 치열한 접전 양상을 보였다. 이회창은 DJP연합, 이인제의 독자 출마, 아들의 병풍 사건 등 각종 악재를 안고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1.5% 차이로 석패했고, 이 후 5년동안 야당 생활을 하며 쌓은 정치적 자산을 바탕으로 사실상 16대 대통령 당선이 매우 유력시되는 상황이었던지라 노무현의 상황은 그다지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는 지난 대선에서도 제기되었던 아들 정연 씨의 병역비리 의혹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재차 인터넷에 퍼져나가자, 그에 대한 여론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회창은 이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후에 이정연 씨의 병역비리 의혹은 의혹에 불과했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결국은 정치 공세에 불과했던 셈.[25]

초반 기선은 노무현이 앞서는 듯했지만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을 앞두고 나서 선거 악재가 터진데다가 그 월드컵에 관심이 왕창 쏠리면서 투표율이 낮게 나왔고, 결국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며 노무현은 큰 타격을 입은 반면 이회창은 앞서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이회창의 지지율이 높아졌다고 해도 당시 제3후보로 떠오르던 정몽준노무현을 완전히 압도할 기세는 아니었고, 이미 1987년 대선의 선례도 있었기 때문에 노무현 후보는 당시 2002 한일 월드컵으로 인기가 올라간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하기로 했고,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단일 후보로 추대되었다. 단일화 진행 후에는 이회창 후보를 여유있게 앞섰지만 대선 전날 갑자기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노무현은 그날 밤 정몽준의 자택을 직접 찾아갔으나, 정몽준은 자택의 문을 열어주지 않고 문전박대했고 이를 계기로 정몽준과 노무현은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TV로 생중계되면서, 유권자들을 자극하여 적극적으로 지지층을 투표장으로 불러모으는 효과를 낳았다는 분석도 있다.
결국 선거 결과 70.8%의 투표율로 노무현 후보가 48.91%[26]를 얻으면서 46.58%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2.33%(57만여 표) 차이로 근소한 차이로 꺾고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27] 이회창은 대선 낙선 후 정계를 은퇴했다.

이로써 대한민국민주당계 정당에서 최초의 영남 출신, 즉 지역주의를 타파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특히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이 거쳐왔던 과정은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정치 레이스로 회자되고 있으며, 노무현 이후 많은 대권주자들이 2002년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을 자신의 모티브로 삼는 듯한 발언을 여러차례 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3.3.1. 관련 문서

3.4. 대통령 재임기: 2003~2008

파일:노대통령취임식.jpg
참여정부라는 이름으로 정부를 출범한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당 분당이란 초유의 사태 속에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소추를 당하기도 하였지만, 뒤이은 17대 총선 결과 헌정 사상 최초로 진보 진영이 의회권력을 장악한 상황이 연출되며 기대를 모았다.[28]

한미 FTA를 강행 추진하였으며, 2007년 10월 2일 ~ 4일까지 북한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2차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하였다. 2007년 12월 11일에는 태안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해서 서둘러 대처를 했으며, 대일독트린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독도는 방문하지 못했다.

재임 기간 내(2003년 ~ 2008년)에 있던 업적과 실책 그리고 사건사고를 자세히 알아보려면 대한민국 대통령 문단 및 이하 문단참여정부를 참조하길 바란다.

정부의 명칭은 참여정부이다. 정부 출범시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들로는 아래와 같다.
재임 기간 중 일어난 사건사고는 사회에 영향을 끼쳤거나 매우 큰 사건들만 서술한다.

4. 퇴임 후

파일:노무현 자전거.jpg파일:밀짚모자_노무현_대통령.jpg
<keepall> 2008년 9월 11일, 손녀 노서은과 자전거를 타고 봉하들판을 산책하는 노무현.
이는 귀향 후 노무현의 서민적인 모습을 상징하는 사진이 되었으며, 이후 노무현재단 로고에도 이 모습이 들어갔다.
내 인생의 실패는 노무현의 것일 뿐...
진보의 실패는 더더욱 아니다.
내 인생의 좌절도 노무현의 것이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좌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와 진보를 추구하는 분들은 노무현을 버려야 한다.[30]
나의 실패가 모두의 실패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발췌
2008년 2월 25일, 노무현은 청와대에서 직원들과 작별 인사를 한 뒤 10시 30분에 청와대를 떠났다.[31] 별도의 퇴임 연설이나 퇴임식은 가지지 않았고, 후임자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뒤 서울역으로 이동해 KTX를 타고 퇴임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서울특별시가 아닌 고향 경상남도 김해시 봉하마을로 귀향했다. 퇴임 대통령이 서울이 아닌 고향으로 귀향한 것은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봉하마을에 정착한 그는 농사일을 주로 하는 완전한 농부로 전직하여 여생을 보내고자 했다.

청와대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김경수, 양정철, 김정호 등은 노무현과 함께 귀농해서 그가 죽기 직전까지 함께 있었다. 또한 문재인이나[32] 유시민[33], 전해철, 안희정[34] 등의 참여정부 시절 참모들도 자주 봉하마을을 찾아 노무현을 접견하고 그의 농사일을 같이 돕기도 했다. 노무현은 주변 사람들을 버리지 못하는 좋은 성격과 따뜻함 덕분에 비서 및 측근들의 충성심이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이후 사람사는세상 사이트와 민주주의 2.0 사이트[35]를 운영하며 봉하마을 명예촌장으로 재임하는 등 민중들과 교류를 추구하였다.

노무현은 공장 폐수로 오염된 화포천을 살리기 위해 봉하마을 주민 및 지지자들과 함께 직접 하천에 나가 쓰레기를 주우며 정화를 위해 노력했고, 화포천에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거나 불법 낚시를 하는 사람이 없도록 '화포천 지킴이'를 신설하여 철저히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죽은 하천이라 불리던 화포천은 2009년 2월 국토해양부로부터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선정될 정도로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관광지로 완전히 탈바꿈하였으며, 멸종 위기의 동·식물을 포함하여 600여 종의 생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생태학습의 장이 되었다. 훗날 노무현이 세상을 떠나고 수 년 뒤 이 화포천에 국내에선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황새일본 도요요카시에서 건너와 정착하여 큰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참조.

친환경 농법인 '오리 농법'을 도입하고자 외국에서 전문가를 초청하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직접 비법을 전수받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초기엔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오리 농법이 성공을 거두자 현재는 거의 모든 봉하 마을의 가구들이 친환경 농법을 이용한 농사에 참여하고 있다.

장군차를 재배하여 마을의 특산물로 만들었고, 늘어나는 마을 방문객들을 위해 작은 도서관 및 동물원의 건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또한 마을에 볼거리가 부족하다는 방문객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마을 앞에 생태 공원을 조성하여 연꽃 등 각종 수생 식물을 심기도 하였다.

전국에서 오는 관광객들과 소통하고자 일주일에 6일씩 만남의 시간을 정하여 관광객들과 격의 없는 대화의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당시의 관광객들과의 대화를 보면 아들뻘인 30대 초반의 한 남성이 60대 나이의 부친뻘인 전직 대통령에게 "나이도 저보다 훨씬 많으시니 형님 합시다"라고 제안하자 "형님 하려면 내 말 잘 들어야 하는데…"라며 유머로 응수하거나, "여기 좀 봐주세요"라며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에게 "(그 카메라는) 줌이 안 되네요. 그럼 그쪽으로 가서 서비스 할게요."라고 응답하는 등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 또한 관광객들과의 만남에서 이런저런 근황을 전하거나 즉석에서 노래를 열창하여 큰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영상 1, 영상 2, 영상 3, 노래 영상

사실 전직 대통령들은 퇴임한 이후에는 대외적인 활동을 자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노무현처럼 자신의 측근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과 주기적으로 나와 인사를 하거나, 같이 농사를 짓고 어울리는 건 역대 다른 전직 대통령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김대중이나 김영삼처럼 자신들의 재단을 만들어 강연 활동을 하거나 전두환처럼 종종 골프를 치거나 만찬 등에 나오며 얼굴을 비추는 경우는 종종 있긴 했었지만, 이는 철저히 제한적인 참석 범위에서 이루어졌기에 일반 시민들이 전직 대통령과 직접적인 소통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36]

노무현 쪽에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방문할 거라고 생각 못했기 때문에 "대통령 시절에는 욕하던 사람들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실제로 노무현을 찾아온 사람들은 대통령 시절에는 참여정부를 욕했지만 노무현을 만나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덕분에 퇴임한 이후 더 인기를 얻은 전직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았고[37], 이러한 말년의 모습은 친서민적인 노무현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시기로 평가받고 있다.

전직 대통령이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거나 환경 운동을 하며 주민, 관광객들과 소통하는 모습은 외신에도 신선하게 비쳤는지 뉴욕 타임스에서는 노무현이 봉하마을로 낙향한 이후 인기를 끌며 새로운 전직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장문의 기사를 내보내기도 하였다. #

중국의 관영 신화통신 및 주요 매체들도 노무현이 하천에 나가 직접 쓰레기를 청소하는 사진을 게재하며 "버젓한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의 네티즌들도 "중국에서는 퇴직 후 몇 채의 호화 주택과 몇 백만 위안의 주식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라면서 "한국의 대통령과 우리(중국)의 관리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라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하였다. #

귀향한 노무현을 보러 온 관광객들 덕분에 김해시는 300억 원 가량의 이익을 보았다. 봉하마을 인근의 주유소, 식당 등의 매출이 급증했고, 김수로 왕릉, 김해미술관, 김해박물관 등의 관광지들을 찾은 관광객들의 숫자도 덩달아 22% 이상 증가하였다. # 이같은 관광객 증가 현상은 전국에서 노무현의 사저와 생가를 보러 온 관광객이 봉하마을을 둘러본 뒤 다른 관광지도 둘러보는 이른바 ‘전 대통령 특수’ 때문인 것으로 김해시는 분석하였다. 그를 찾으러 김해시를 찾는 관광객은 평일에는 하루 3천 명, 주말에는 1만 명에 이르렀고,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노무현은 평일엔 6번 정도, 주말엔 10번 정도 집에서 나왔다고 한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별의별 사람들이 봉하마을을 찾아왔는데, 무턱대고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찾아온 여성부터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했다며 노무현이 해결해 주지 않으면 극단적인 방법도 불사하겠다며 협박하는 남성들까지 찾아오는 등 봉하마을이 '국민 하소연' 장소가 되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다. # 물론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노무현의 인간적이고 신선한 모습에 호감을 느껴 찾아온 것이다. # 노무현의 홈페이지엔 2008년 4월 15일까지 3만 6천건이나 되는 네티즌들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으며, 대부분이 응원과 격려의 글이었다.

노무현의 귀향으로 인한 여파는 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쳐 민주당이 참패했던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무현의 귀향지가 있는 김해을 선거구에서 민주당 최철국 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특히 노무현의 귀향지인 봉하마을이 있는 진영읍 제4투표소에서 최철국은 무려 61%의 득표율을 기록하기도 했는데, 언론에서는 노무현 효과가 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친 거라 분석하였다.#, #2

사람사는세상 홈페이지에서 당시 노무현이 홈페이지에 올린 글들을 아카이브에 보존하고 있다. # 또한 이 사이트에서 노무현이 퇴임 후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홈페이지에 올린 글들과 당시 네티즌들이 단 댓글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를 하나하나씩 보다 보면 당시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송철호울산광역시장에 당선된 후 방송 출연 중의 언급에 의하면 노무현은 아직 지역주의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면서,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본인이 다시 총선에 나갈 생각이 있다는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퇴임 대통령들은 정치인으로서 최종 목적인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므로 정치에서 은퇴하는 게 보통이지만, 대통령만 다시 못할 뿐 그 외의 선거들에 출마하지 못한다는 규정은 따로 없다.[38] 또한 당시 나이도 60대 초반으로써 정치인으로서는 고령이 아니었고, 이 주장에 따르면 퇴임 후 서울 사저가 아닌 봉하마을로 귀향한 것도 부울경, 그 중에서도 낙동강 벨트 지역구 다지기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아무튼 정말로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 생각을 노무현 본인이 당시에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후술할 수사와 일련의 사건으로 그가 자살하면서 그의 계획은 영구히 이뤄지지 못했다.

이렇게 노무현은 방문객들이나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함께 농사일을 하며 활발한 대외 활동을 했지만, 연말 들어 박연차 게이트로 인한 검찰의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조금씩 스케줄을 줄여나가기 시작해 2008년 12월 이후에는 모든 공개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방문객들과의 인사는 2008년 12월 5일이 마지막이었는데, 평소 본인이 먼저 대화의 운을 띄우며 활기차게 대화를 이어가던 그였지만 이날만큼은 어두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모든 질문에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등 우울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예정된 시간보다 더 많이 진행하던 이전과 달리 이날은 5~6분 정도 짧게 마무리한 뒤 사저로 돌아갔으며, 이것이 노무현이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행사가 되었다.

4.1.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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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후 1973년 사법시험의 학력 제한이 철폐됨에 따라 예비시험 제도도 폐지된다.#[2] 다만 당시엔 승률과 관계없이 변호사들은 다들 부자였다. 1년에 사시로 고작 100명을 선발했기 때문. 그나마 그마저도 대부분 커리어를 국가 공무원(판/검사)으로 시작했기에 민간에는 변호사가 희귀할 수밖에 없었다. 베리타스 법학원의 헌법 강사 금동흠에 따르면 당시 부산에서 영업했던 변호사 숫자는 한 자리였다고 한다.[3] 그런 면에서 영화 변호인고증은 잘 된 편이다. 변호사는 그 당시 단 한 가지 전문 분야만 잘 해도 돈을 아주 잘 벌던 시기였다.[4] 노무현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변호인에서도 법무사들이 노무현을 모델로 한 주인공 송우석의 사무실로 찾아와 자신들의 밥줄을 빼앗는다고 시위를 하면서 항의를 하자 부당하면 고소를 하라면서 대응하는 모습이 나온다.[5] 당시에는 변호사 수가 극히 적은 편이라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사법서사보다 변호사에게 일처리를 맡기는게 더 듬직하고 믿음이 갔던 것은 당연지사였다.[6] 당시 주심판사는 서석구. 서 판사 본인도 이 판결로 인해 좌천성 인사를 당했고, 이듬해 법복을 벗어야만 했다.[7] 물론 노무현은 본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게다가 노무현의 서거로 인해 문재인이 정치를 시작한 만큼, 만일 노무현이 지금까지도 살아 있었다면 문재인이 대통령이 될 확률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8] 원래는 당시 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던 부산 남천동 삼익비치아파트가 있는 남구 갑(현 수영구 선거구) 선거구에 공천받을 예정이었으나, 5공 유력인사이자 옆 지역구에서 허삼수가 동구 지역에 출마하자 본인이 허삼수와 붙고 싶다고 해서 동구 지역에 공천받았다.[9] 지금이야 왕자의 난으로 쪼개졌지만, 현대는 한때 현재의 삼성의 아우라를 초월하는 급의 압도적 재계 1위 그룹이었다.[10] 노무현의 발언을 듣고 있는 기업인은 금속/방산특화 기업집단인 풍산그룹의 창업주 류찬우이다.[11] 여담으로 이 시절 노무현이 활약한 5공 청문회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초선의원이라는 연극이 있다.[12] 사진에서 주먹을 움켜쥔 가운데 인물이 노무현 前 대통령 (당시에는 초선의원) 이고, 그의 오른쪽에서 눈을 부릅뜨고 외치는 사람이 김상현(김영호서대문구 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부친) 前 의원이다. 참고로 그 앞쪽에 앉아서 웃고 있는 사람은 김우석 前 의원으로 문민정부 출범 이후 건설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한테 뇌물을 받은 것이 폭로되면서 구속되었다.[13] 그의 격렬한 항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직후 "신당 창당을 위한 만세 삼창을 하겠습니다."가 나오고 사람들은 자화자찬을 하면서 만세를 부른다. 이때 YTN 돌발영상이 없었다는 게 그저 아쉬울 따름.[14] 이종찬은 원래 보수정당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 타이틀로 내리 4선에 성공하였으며 민자당 14대 대선 경선과정에서 상대후보였던 김영삼 대표와 갈등이 벌여서 경선도중에 탈당하였고 독자정당인 새한국당-민주당을 거쳐서 마침 김대중 당시 아태재단 이사장이 귀국해 정계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합류하였다.[15] 여담으로 본인 다음으로 4위를 기록한 후보가 중견탤런트였던 자유민주연합김을동이었다.[16] 사실은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특별시장 선거 출마를 명분으로 당선 무효형이 선고되기 전에 미리 의원직을 자진사퇴한 것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당선 무효형확정되면서 당해 서울특별시장 선거 출마는 물거품이 되었다. 이명박이 서울특별시장이 된 것은 사면 및 복권을 통해 피선거권이 회복된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의 일이다.(피선거권 자체는 2000년 사면을 통해 회복됐다)[17] 여담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하기 전인 1998년 2월 24일자 MBC 뉴스데스크 보도를 보면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을 앞두고 내각 구성을 할 때 국민의 정부 초대 노동부장관 후보로 거론된 바 있다.#[18] 과거 관선 서울특별시장 출신에 문민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고, 이후 민선 서울특별시장 임기를 마친 뒤 참여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하게 된다.[19] 대신 한광옥은 이듬해인 1999년 3월 재보궐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구로구 을에 공천되어 당선, 원내 복귀에 성공한다. 그러나 국회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청와대에 의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되면서 다시 의원직을 사퇴한다.[20] 여담이지만 이 정인봉 후보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인해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아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는데, 이후 열린 재보궐선거를 통해 종로에 입성한 사람이 다름아닌 윤석열 정부의 초대 외교부장관 박진이다.[21] 훗날 박근혜대통령비서실장을 맡았다.[22] '소감을 말하자면...'으로 시작하는 낙선 소감이 홈페이지에 게시된 것으로 알려저 있는데, 해당 소감은 홈페이지가 아닌 <시사저널>에 "부산 시민들을 욕하지 마십시오"라는 이름으로 4월 27일 기고된 소감문이다. 출처[23] 타부서인 기획재정부의 직원과도 소통을 할 정도.[24] 당시 노무현은 "이인제의 대선 출마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선에 나섰다" 라고 밝힌 바 있다. 이인제에 대해서 "재주는 있어 보이는데 성실해 보이지도 않고 철학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88년부터 89년까지 이인제 씨와 함께 국회 노동위를 같이 했다. 그때 이인제 씨는 불성실의 극치였다." 등의 말로 비난을 하기도 했다.[25] 이 사건에 대해 검찰은 2002년 8월부터 동년 10월까지 2개월 동안 수사에 착수하였지만, 무혐의 처분을 내리고 기소하지 않은 채 종결하였다. 그러나 결국 한나라당의 청구로 재판이 성사되어, 2005년 5월, 대법원은 정연씨의 병역비리 의혹이 사실무근이라 판결하였다. 2002가합40574 참조.[26] 이는 헌정 사상 민주진보진영 후보가 대선에서 얻은 최고 득표율이다. 민주진보진영이 대선에서 과반을 득표한 적은 존재하지 않는다.[27] 개표 초반에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앞섰지만, 이후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역전해 당선되었다. 이는 제20대 대통령 선거와는 정반대의 상황이다.(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개표 초반에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앞섰지만, 이후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역전해 당선되었다.)[28] 엄밀히는 출범 직후엔 진보 진영이 근소하게나마 소수파였으며, 열린우리당 창당 후에는 여당 초유의 의석 제3당이었다. 17대 총선 이후 민주화 이후 첫 여대야소로 모든 것이 뒤집혔지만.[29] 이명박 재임 중 일어난 사건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2008년 2월 10일 발발한 사건으로, 노무현 대통령 임기 종료 날짜인 2월 25일 이전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절묘하게 낀 시기였다. 본인도 사고현장에 등장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서울특별시장 시절에 숭례문 개방을 진행했기 때문에 이명박도 관련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사후 처리도 대부분 이명박 재임 중에 진행되었고, 복원은 박근혜 정부 시절에 완료되었다.[30] 과거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2002년 당시 말했다고 전해지는 "여러분들은 저를 지켜주셔야 합니다."와 대척점에 있는 말이다. 차이점이라면 당선 당시 했던 발언은 이제 대통령이 된 자신이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의미였으며, 퇴임 이후 했던 발언은 이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자신에게 얽매여서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지 말고 새 시대를 걸어가라는 의미였다. 그의 또 다른 어록인 "새 시대를 여는 맏형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구시대의 막내가 될 수밖에 없다."를 생각해보면 된다.[31]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노무현은 제6공화국 출범 이후 퇴임 당일 청와대를 떠난 유일한 대통령으로 남아있다. 노무현과 탄핵을 당한 박근혜를 제외한 나머지 대통령들은 전부 퇴임 전날 청와대를 떠났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이 기록은 깨질 수 없게 되었다.[32] 문재인도 참여정부가 끝난 뒤 양산 덕계리에 있는 야산에 집을 구해 귀농 생활을 하였다. 정치판에 환멸을 크게 느껴서 6~7개월 동안 사람도 안 만나고 칩거 생활을 했다고 한다.[33]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야인 신세였는데, 봉하마을을 자주 방문해 노무현의 농사일을 도왔다.[34] 이 시기 안희정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박탈당했던 피선거권이 복권되어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당선, 다시 정치에 재기해 보려는 시점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노무현은 안희정이 봉하마을을 방문하면 유독 기뻐하고 그를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안희정이 팬클럽 회원들과 함께 왔을 때는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다.[35] 민주주의 2.0에서 노무현은 '노공이산'이란 닉을 썼지만, 그가 죽기 며칠 전에 홈페이지가 폐쇄돼서 당시 홈페이지는 현재는 접속이 불가능하다. 이후 2017년에 2기 사이트가 열렸으나, 활동이 거의 없는 유령 사이트다.[36] 그나마 김대중은 자신의 재단인 평화센터를 열고 주기적으로 포럼회를 개최했기 때문에 시민들과 만나는 경우가 잦았다.[37] 지미 카터와 유사한 이미지를 가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당장 미국에서도 카터는 훌륭한 전직 대통령이라는 호칭으로 통하니...[38] 2023년 기준으로는 윤보선이 대통령 퇴임 후 다시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대한민국 국회의원당선된 유일한 사례다.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는 퇴임 대통령이 국회의원에 당선될 시 임기 기간 동안에는 전직 대통령 연금이 지급되지 않는 규정도 있다. 단 윤보선이 대통령을 맡았던 때와 노무현의 재직 시의 대통령 관련 법은 완전 달랐고, 지위도 차이가 많이 났음을 감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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