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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9년 김창숙을 중심으로 한 유림들이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 독립을 위한 독립청원서를 보낸 사건. 유림 독립선언,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칭하기도 한다.2. 상세
1919년 3.1 운동이 전개되던 와중에 유림들은 기미독립선언서에 참여하지 못한 사실을 아쉽게 여기고 있었다. 유림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열리던 것을 파악해 유림들의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기로 하여 이 독립청원서를 파리로 전달할 계획을 세웠다.독립청원서 서명에 참여한 유림들은 김창숙, 곽종석, 김복한 등 충청도와 경상도의 유림 137명이었다. 다만, 유림들이 직접 독립청원서를 파리로 전달할 수 없어서 유림들의 대표로 김창숙이 상하이로 건너가 그곳에서 한문과 영문으로 독립청원서를 번역했으며,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되었던 신한청년당의 김규식에게 '영문본 독립청원서'를 송달하였다.
파리 장서 사건은 같은 해 4월, 성주군의 3.1운동에 연루되었던 송회근이 일제 경찰에 붙잡히면서 탄로가 났으며, 이에 관련된 유림들이 일제에 체포, 옥고를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