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국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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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 비정통 왕''' | ||
성 | 자(子) | |
휘 | 지(之)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314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316년 ~ 기원전 3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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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의 재상이자 연나라의 비정통 왕. 연나라의 왕에 오르기도 했지만 정식적인 계승이 아니라 군주를 속여서 올랐기 때문인지 계보로는 인정되지 않는다.2. 생애
본래 전국칠웅 중에 하나였던 연나라의 재상이었으나, 혼란기에 연왕 쾌[1]에게 대부 녹모수를 시켜서 "요 임금, 순 임금처럼 자지에게 선양하는 모양세를 보이시면 성군처럼 보일 거에요. 물론 자지는 승락 안 할 거에요. 굿?"해서 왕이 선양했더니, 진짜로 선양을 받아서 왕이 되어 버렸다. 쾌는 일개 신하가 되어 별궁으로 물러났는데 이에 화가 난 태자 평과 장군 시피가 자지를 몰아내고 연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으나 자지에게 역공당해 불리하게 되자 오히려 장군 시피가 태자 평을 공격하는 막장이 펼쳐졌다.자지가 승리해 시피의 군대는 전멸했고 시피는 전사했으며, 이에 쾌의 아들 태자 평은 외부로 달아났다.[2]
그런데 이때 옆의 제나라에서 맹자가 살고 있는데 맹자가 제나라 선왕(宣王)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제나라는 장군 광장(匡章)에게 10만 명의 병력을 줘서 연나라로 쳐들어가게 했다. 전투는 벌어졌지만 자지에 대한 연나라 백성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서 아예 성문을 활짝 열어놓고 오히려 환영했으며 음식을 공급하기도 했다. 더구나 연나라 병사들도 모조리 도망쳤고 그의 오른팔이었던 녹모수도 튀었다.
결국 혼자 남은 자지는 거열형에 처해졌고 젓갈로 담겼다. 열국지에서는 이 과정에서 자지가 단신으로 제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치명상을 입고도 100여 명을 쳐죽인 끝에 사로잡히는 진 삼국무쌍을 선보인다. 선대 연왕이었던 연왕 쾌는 자지에게 선양한 후 궁궐 구석에 짱박혀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다가 자지가 거열형 당하고 나라가 혼란해지자 자살했다. 이에 연나라 신하들과 백성들은 한나라로 도망쳐 있던 연왕 쾌의 또다른 아들 공자 직을 데려와 왕으로 세우니 그가 연나라 소왕이다.
맹자의 발언을 정리한 맹자에 나오기 때문에 서당에 다녔거나 대학에서 관련 강의 등을 들은 적이 있다면 훈장님이나 교수님이 뜬금없이 민망한 단어를 내뱉는 광경을 봤을 수도.[3]
이 사건의 후일담으로, 새로 왕위에 오른 소왕은 제나라에 복수를 하기 위해 그 유명한 악의 등 유능한 인재를 뽑아 30년 가까이 내실에 치중하며 힘을 길렀다. 이후 제나라의 민왕(湣王)이 나라를 막장으로 운영하며 열국의 신임을 잃고 두려움과 분노를 사게 되자 악의를 대장으로 삼고 진나라,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의 연합군과 제나라를 치러 갔다. 그리고 6개월 만에 2개성을 제외한 제나라를 거의 다 삼켰다가 소왕이 죽고 그의 아들 혜왕이 즉위하자 제나라 왕족이자 대장이었던 전단의 계략에 의해 악의가 물러나고 기겁이 대장이 되자 오히려 얻은 땅을 모두 잃고 퇴각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악의 항목 참고.
3. 기타
소설 열국지에서는 105cm의 허리 둘레에 몸무게도 무려 140kg에 육박하는 뚱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뜀박질로 말(馬)을 따라잡거나 참새를 맨손으로 잡을 정도로 동작이 빨랐다고 묘사되며, 자지가 시피와 싸운 전투에서의 묘사를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이 전투 자체가 웃음거리였다고 한다. 이 전투를 구경하려고 많은 주민들이 몰려들었고 전투를 벌이는 당사자 군인들은 피를 흘리며 고통스럽게 있는데도 구경꾼들은 너무나 웃겨서 배꼽을 잡고 나뒹굴었으며, 심지어 일부 구경꾼들은 어느 군대가 이길지 도박판까지 벌였다.이런 사례가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닌 게, 한국의 조선 왕조 시기에 일어난 이괄의 난 때에도 무악재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한성 주민들이 성벽에 올라 구경하다가 이괄군이 패퇴해 들어오자 서대문을 걸어잠근 사례가 있다.[4] 더불어 춘추시대 초반의 전쟁이란 귀사족 중심의 전차전이 주류였기에 전국시대 말기에 비해 처절한 총력전의 양상보다는 대규모 결투 같은 느낌이 강했다. 송양지인의 고사에서 송양공의 우행이 이런 시대착오적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 해서라는 해석도 있다.
한국에서는 그의 이름의 발음과 한글 표기가 남성의 성기를 뜻하는 자지와 같기 때문에, 고자(告子)[5]와 더불어 실없는 놀림(...)을 받기도 한다.[6]
[1] 시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름으로 부른다.[2] 실제로는 이때 사망한 듯하다. 기록이 적어서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죽서기년에 '자지가 공자 평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자지에게 잡혀서 암살당한 모양.[3] 모 교수님 왈, "이 왕은 이름도 괴이한데 말이야, 이름이 자지야 자지."[4] 《연려실기술》제24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이괄(李适)의 변(變).[5] 성무선악설의 제창자[6] 사실 한국 역사에도 왕자지, 김자지, 신보지라는 걸출한 성함을 가진 분들이 계시기도 하다. 거기다 이들은 그냥 이런 이름을 가진 장삼이사도 아니고 고려나 조선에서 꽤나 유능한 관리였고 그래서 이름이 알려진 것이다. 당장 왕자지만 해도 윤관, 척준경과 함께 둥북 9성을 개척한 유능한 장수였고 김자지는 형조판서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천문 지리에도 견식이 있는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으며 신보지는 명종대의 장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