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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23:42:32

거창군부인

폐비 신씨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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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산군의 왕비
거창군부인 | 居昌郡夫人
파일:연산군20100529-6.jpg
연산군묘 전경
출생 1476년 12월 24일(음력 11월 29일)
사망 1537년 5월 26일(음력 4월 8일)
(향년 60세)
조선 한성부 거창군부인 사저
능묘 연산군묘(燕山君墓)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488년 2월 17일 ~ 1495년 2월 3일
조선 왕비
1495년 2월 3일 ~ 1506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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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거창 신씨
부모 부친 거창부원군 신승선
(居昌府院君 愼承善, 1436 ~ 1502)
모친 중모현주 전주 이씨[1]
(中牟縣主 全州 李氏, 1435 ~ ?)
형제자매
3남 5녀 중 4녀 [ 펼치기 · 접기 ]
오빠 - 신수근(愼守勤, 1450년 ~ 1506년)
오빠 - 신수겸(愼守謙, 1453년 ~ 1506년)
오빠 - 신수영(愼守英, 1461년 ~ 1506년)
언니 - 이형(李泂)의 처(1466년 ~ ?)
언니 - 남경(南憬)의 처(1467년 ~ ?)
언니 - 안환(安煥)의 처(1469년 ~ ?)
여동생 - 유윤범(柳潤範)의 처
배우자 연산군
자녀 4남 3녀 (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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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 휘신공주 이수억(徽愼公主, 1491 ~ 1524 )
차녀 - 공주(1492년 또는 1493년) 요절
장남 - 원자(1494 ~ 1494) 요절
3녀 - 공주(1495 ~ ?) 요절[2]
차남 - 폐세자 이고(廢世子 李𩔇, 1498 ~ 1506)
3남 - 창녕대군 (昌寧大君, 1500 ~ 1506)
4남 - 이인수(李仁壽, 1501 ~ 1503)
여덟째 - (1502 ~ ?) [3][4]
종교 유교 (성리학)
봉작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
존호 제인원덕왕비(齊仁元德王妃) }}}}}}}}}
1. 개요2. 생애3. 평가4. 가족 관계
4.1. 친정 (거창 신씨)4.2. 왕가와 외가 (전주 이씨)
5. 기타6. 대중매체에서7. 참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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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정비. 연산군의 정실로 영의정 신승선의 딸로 4녀(일곱째)이며 좌의정 신수근의 누이이다. 중종의 비 단경왕후에게는 고모이자 손위 동서가 된다.[5]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외손녀이기도 하다.#[6]

2. 생애

1487년(성종 18년) 3월, 성종에 의해 세자빈으로 정식 내정되었으며 11세가 되는 다음해인 1488년(성종 19년) 1월 26일, 동갑내기인 연산군과 가례를 올려 세자빈이 된다. 창덕궁 인정전에서 책빈례를 거행하고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는데 간택 없이 책봉된 첫 사례이다.

갑자사화 당일 남편 연산군이 시아버지 성종후궁귀인 정씨귀인 엄씨를 때려 죽이고 장검을 뽑아든 채 자순대비의 처소로 쳐들어가자, 신씨는 이를 뒤쫓아가 남편 연산군을 극구 말리면서 자순대비를 구원하였고 의붓며느리 덕분에 다행히 자순대비는 안도할 수 있었다.

1502년(연산군 8년), 아버지 신승선이 사망할 당시의 연산군일기 기록을 보면, "신씨는 만삭이라 친상 중이지만 고기를 못 먹게 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연산군은 아예 거애(곡하는 것)도 못하게 막아버린다. 만삭인 만큼 유산하거나 신씨의 건강이 상하는 것을 우려해서였던 것 같다. #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가는 처지의 남편 연산군을 모시기 위해 자신도 그와 같은 유배지로 보내달라며 울부짖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대신 친정이 있는 사저로 보내졌다.[7] 남편 연산군이 죽고 난 후 그의 신주를 직접 모신 것으로 추정되며, 시동생인 중종에게 강화도에 묻혀있던 연산군 시신을 양주 해촌으로 이장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중종은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때 이자 이복형이었던 연산군의 시신을 거두어 양주 해촌에 이장하게 했다. 다만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은 매우 비참한 말로를 겪었고 전부 본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8]

1521년(중종 16년) 11월, '빈(嬪)'의 예우와 함께 속공[9]한 죄인 안처겸(安處謙)의 집을 받는다.

3. 평가

신씨(愼氏)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和平)하고 후중(厚重)하고 온순(溫順)하고 근신(勤身)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므로, 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매양 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난,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로는 울며 간하되 말 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또 번번이 대군‧공주‧무보(姆保)‧노복들을 계칙(戒勅)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울부짖으며 기필코 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4. 가족 관계

4.1. 친정 (거창 신씨)


조선 역대 왕후들 중에서도 인현왕후와 더불어 보기 힘든 명문가 출신이다. 이는 자신의 조카딸이자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단경왕후도 마찬가지였다.[13]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어머니 중모현주 이씨임영대군의 딸이자[14] 세종의 친손녀로 신씨는 임영대군의 외손녀가 되며 부군인 연산군칠촌 고모이기도 하다. 오빠 3명 역시 고위직을 역임했다.

언니가 남경[15]이라는 인물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인 남치원이 성종의 서4녀인 경순옹주(숙용 심씨 소생)와 결혼한다. 거창군부인에게는 손아래 시누이 임과 동시에 이질부가 된다.

4.2. 왕가와 외가[16] (전주 이씨)


14살이었던 1491년부터 최소 25살 때까지 자식들을 연년생으로 낳았다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보통은 막장 남편인 연산군을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하는 어질고 선량한 캐릭터로 나온다.

7. 참고 문서


[1]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딸이다.[2] 다만 중궁(中宮)의 산실(産室)이 동궁(東宮)에 있는데, 다음 달은 바로 중궁의 산월이라 <후략>-《연산 1년 2월 11일 을축 1번째기사》[3] 부친 신승선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사산한 것으로 추정된다.[4]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중략) 1. 왕비(王妃)의 해산(解産)이 임박했는데, 만약 해산한다면 상사(喪事)와 소선(素膳)에 관한 일을 예관(禮官)을 불러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후략) - 《연산군일기, 연산 8년 5월 29일 경자 3번째기사》[5] 조선에서는 근친혼이 터부시되었지만 겹사돈에는 관대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6] 계산해보면 연산군 쪽이 7촌 조카가 되는 관계. 세종대왕연산군에게 고조부가 되고, 처 신씨 입장에서는 외증조부. 그리고 시할아버지인 의경세자가 외당숙이기도 했다. 다만 나이는 거꾸로 되어서 연산군이 생일이 20일 정도 빠른 동갑이다. 칠촌 관계이면 현재 민법으로는 혼인할 수 없는 관계지만 조선 시대에는 동성동본 혼인만 기피했을 뿐이지 성씨와 본관만 다르면 육촌, 칠촌 사이의 혼인은 매우 흔하게 이루어졌다.[7] 여담으로, 나중에 폐위된 광해군의 경우 아내 문성군부인 류씨와 함께 유배되었다.[8] 8명의 자식들 중 4명은 아기 때 죽었고 1명은 유산되었다. 남은 3명 중 폐세자 이고와 창녕대군은 왕자라는 이유로 살해되었고 휘신공주는 딸이라 살아남았지만 1524년에 구문경과 휘신공주의 묘를 세웠다는걸로 보아 이 무렵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폐비 신씨는 1537년에 사망하였다.[9] 屬公. 임자가 없는 물건이나 금제품, 장물 등 관부로 넘기던 일을 말한다.[10]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폐비 신씨를 해당 호칭으로 표현했다.[11]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갑자사화를 시작으로 연산군은 조금이라도 자기를 거슬리게 했던 이들을 집어내 보복했는데 이게 진짜 죽여도 무방할 정도로 무례하게 굴어서 등의 이유가 아니라 단순한 간언(이극균)이나 경연에서 큰 소리를 내었다(권헌) 등의 이유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비슷한 행보를 보인 신씨에게는 역정 하나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12] 1436년(세종 18년) ∼1502년(연산군 8년). 세조 12년인 1466년, 문과에 장원급제했으며, 예종의 즉위년(1468년) 때 익대공신으로서 거창군에 임명된 후 고위직을 역임하다 신씨가 중전이 된 것을 계기로 영의정에 올랐다. 다만 과거 장원급제 등 본인의 능력도 좋은 인물이다.[13] 단경왕후는 한술 더떠 친가 외가를 통틀어 거의 모든 일가친척들이 조선 왕실의 후손이거나 사돈을 맺은 어마어마한 명문가였다.[14] 그것도 첩 소생의 서녀가 아니라 임영대군의 정실부인 소생의 적장녀였다.[15] 신극성, 이장길과 더불어 삼맹호(三猛虎)라 불리며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한다.[16] 외할아버지가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이므로 외가와 시가가 같다.[17] 《세자빈녀수억아기씨태지》에는 1491년 9월 22일 해시에 태어났다고 적혀있고《선원록》에는 1492년 생이라고 적혀있다.[18] 추정이다. 1495년 1월, 성종이 죽은 이후에 쓰인 《성종대왕묘지문》에 "신씨가 두 딸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성종이 죽기 전 태어난 것은 확실하고, 휘신공주와 원자의 출생연도를 감안하면 1492년, 혹은 1493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19] 다만 중궁(中宮)의 산실(産室)이 동궁(東宮)에 있는데, 다음 달은 바로 중궁의 산월이라 <후략>-《연산 1년 2월 11일 을축 1번째기사》[20] 부친 신승선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유산한 것으로 추정된다.[21]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중략) 1. 왕비(王妃)의 해산(解産)이 임박했는데, 만약 해산한다면 상사(喪事)와 소선(素膳)에 관한 일을 예관(禮官)을 불러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후략) - 《연산군일기, 연산 8년 5월 29일 경자 3번째기사》[22] 물론 당시 시대는 영아 사망이 상당히 흔했던 상황이라 너무 어릴 때 죽었던 아이가 더 있었을 수는 있으나 그걸 감안해도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23] 사실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당대 기록에서 단경왕후의 경우는 '성+비'로 된 명칭인 '신비(愼妃)'로도 호칭하는 경우가 많으나 '폐비 신씨'는 그렇지 않다. 거창군부인의 경우 남편이 폐출된 왕이었기 때문에 폐비로 불릴 수 밖에 없었으나 단경왕후는 단지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반정공신들에 의해 강제로 내쳐졌기 때문이다.[24] 여덟 번째 아이는 유산되었다.[25] 사사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절차상 성인에게 합법적으로 사형을 선고 후 집행했을 때다. 이 건은 조선 시대의 법으로도 엄연한 불법이었다. 역적의 자손이라 해도 16세 미만이거나 16세 이상이라도 여성이라면 법적으로 사형은 불가했기 때문이다. 노비로 전락시키는 것이 최고형이었다. 당장 황사영의 일가는 몰살했지만 자손은 사형을 면했으며 김자점의 자손도 마찬가지. 윤임이 역적이 되어 일가가 몰살했지만 윤임의 아들 중에서 윤흥신부터는 사형을 면했는데 선조가 복권시켜 줘서 윤흥신이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다대포에서 왜군을 막다가 장렬히 전사했다.[26]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의 외손자이다.[27] 태종이 늙어서 세종에 의해 들여진 후궁이지만 태종의 이른 죽음으로 청상과부가 되었다. 원래 이 은 임영대군의 땅이자 조씨가 묻힌 무덤이었다.[28] 역사의 라이벌 장희빈 vs 인현왕후 편에서 장희빈 역할을 맡았다.[29] 하필이면 자신의 처소에서 아버지, 오빠와 함께 폐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예상치 못하게 연산군이 처소에 들어와서 "폐비에게는 아들이 있었다지요?"라고 물을 때 엄청 뜨끔해한다. 이 때 아직 연산군은 성종의 함구령으로 인해 자신이 폐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