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로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마에다 토시이에 | 모리 데루모토 | 우키타 히데이에 |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
우에스기 카게카츠 |
五大老
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 도요토미 정권하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다섯 명의 다이묘를 의미한다.2. 일반적인 이야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생전에 자신의 뒤를 이을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하게 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다. 원 취지는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서 호시탐탐 기회를 넘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타카카게 생전에는 이에야스를 제외한 네 명의 다이묘들의 고쿠다카[1]를 합쳐야 겨우 우세를 점할 정도로 이에야스의 세력은 그만큼 막강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 간토(関東) 256만 석[2]
-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 호쿠리쿠(北陸), 카가(加賀) 등지 83만 석
-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 쥬고쿠(中国) 112만 석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 쥬고쿠, 비젠(備前) 57만 석
-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 키타큐슈(北九州), 치쿠젠(筑前) 33만 석
-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 - 도호쿠(東北), 아이즈(会津) 120만 석
원래 오대로는 상기 5인이었으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은거한 1595년 이후에는 양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대행한 정황이 있고, 1597년에 완전히 사망하자 그 공석은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채우게 되었다.[3] 또한 마에다 토시이에가 1599년에 사망한 후에는 아들인 마에다 토시나가(前田利長)가 들어가게 된다.
오대로 제도는 히데요시가 살아있었을 때는 그가 의도한 대로의 효과를 거두었으나, 1598년에 히데요시가 사망하자마자 이에야스가 본색을 드러냄으로써 유명무실해지게 된다. 1599년, 마에다 토시이에가 사망함으로써 이에야스를 견제 가능한 최후의 보루마저도 사라져 버렸고, 불과 1년 후 1600년에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고, 그 결과 이에야스 반대파인 서군에 속했던 나머지 세 오대로들은 영지를 죄 몰수당하거나, 세력이 크게 약화되게 된다.
이후, 대로 제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설립된 에도 막부 시대로 접어들어서는, 쇼군의 직속 가신 로쥬(老中)(오늘날의 장관급, 10~12명의 항시직) 위에 서는 서열 2위 자리로 필요할 때 임시적으로 임명되는 제도가 되었다.[4] 에도 시대 가장 유명한 대로는 막부 말기의 이이 나오스케로, 대대로 도쿠가와 집안의 충신이었던 이이 가문은 4명의 대로를 배출했다.
NHK 대하사극 천지인에서는 나오에 카네츠구와 이시다 미츠나리가 아이디어를 낸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이후에 들어간데서 나온 추측이 아닐까 싶다.
3. 사실은
일단, 오"대로"라는 호칭 자체가 당대에 쓰이지 않은 것이며, 도요토미 정권 후기를 지도한 다섯 다이묘들을 현재 "오대로"라고 칭하는 것은 에도 시대에 대로가 생기면서 그에 비유하여 유래된 것이다.오대로는 기본적으로 히데요시의 죽음 직전인 1598년 경 후계 보필 차원에서 나온 개념이며, 1597년에 사망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따라서 대로가 아니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를 도요토미 정권의 대로라 칭하는 것은 도요토미 히데츠구 숙청 이후 히데요시가 만든 온오키테(御掟)에 연서한 6인의 다이묘(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리 데루모토, 마에다 토시이에, 우키타 히데이에, 우에스기 카게카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중 하나가 타카카게인데, 이 6인 다이묘에서 타카카게를 빼면 오대로의 명단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물론 온오키테에 연서한 6인 다이묘가 도요토미 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사실이나, 6인 다이묘를 오대로와 동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오대로에 대하여 흔히 잘못 알려진 것은 타카카게의 사후 그 지위가 카게카츠에게 계승되었다는 것인데, 상술했듯 온오키테 연서 다이묘는 6인이며 카게카츠는 온오키테 6인 다이묘에 포함되어있다. 타카카게 사후 "대로"의 지위가 카게카츠에게 옮겨간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단, 도요토미 정권에서 소위 '오대로'에 속한 다이묘들은 히데요시가 죽기 한참 전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던 것은 맞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관백이 되면서 무가의 일인자인 동시에 조정의 최고 통치자까지 겸하게 되어 버렸고, 공가의 여러 격식에 따르자면 히데요시는 공가보다 훨씬 격이 낮은 무가 다이묘들과는 같은 자리에서 의논하는 것조차 제약되어 있었다. 이에 히데요시는 주요 다이묘들에게 관위를 뿌림으로써 공가 질서와 무가 질서를 통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관위를 받은 다이묘들 중 가장 높은 관위를 받은 것이 섭가 다음으로 높은 청화가(清華家)에 상응하는 관위를 받은 청화성 다이묘(清華成大名)들이었고, 후대에 오대로로 알려진 다이묘들(도쿠가와, 마에다, 모리, 우에스기, 우키타, 코바야카와)과 더불어 도요토미 방계(도요토미 히데나가 등), 오다 노부나가의 일부 후손 등이 이에 속했다.
4. 동방 오대로
위의 것을 어원으로, 동방 프로젝트 세계관에서 가장 연륜있어보이는[5] 야쿠모 유카리, 사이교우지 유유코, 야고코로 에이린, 야사카 카나코, 히지리 뱌쿠렌 등을 한꺼번에 가리키는 이름이다.5. 아머드 코어 라스트 레이븐의 등장인물 烏大老
자세한 내용은 오대로(아머드 코어 시리즈) 문서 참고하십시오.[1] 석고, 토지의 쌀 생산량[2] 도요토미 히데요시 본인보다 고쿠다카가 많은 유일한 다이묘. 참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22만석이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경우 유력 가신들이 다이묘로 독립해 따로 계산되기 때문에 사실상 222만 석 전체가 직할령이나 다름없었지만 도쿠가와의 256만 석은 가신들의 영지까지 다 합친 것으로 이에야스 직할령은 약 100만 석 전후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히데요시가 압도적 우위 상태였다. 그래서 히데요시 생전에는 제아무리 이에야스라고 해도 명분과 세력에서 밀렸기 때문에 잠자코 있어야 했지만 나중에 가면 구 영지였던 미카와, 스루가, 도토미의 영향력을 완전히 되찾고 전봉되었던 관동의 영지도 완전히 개발하는데 성공해서 과거보다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자랑하게 되었지만 도요토미 가는 히데요시 사후 가신들이 완전히 흩어졌기 때문에(거기다 일부는 도쿠가와 측에 붙었다.) 도쿠가와는 도요토미를 능가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3] 히데아키는 나이가 어려 정식 오대로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친족이라는 배경이 겹쳐 다른 다이묘들 이상의, 오대로에 준하는 대우를 받기는 하였다.[4] 평시에는 로쥬 중 한명이 수좌로 활동하는 형태를 취했다. 대로는 평시보다 더 큰 권위가 필요할 때 임명되었다.[5] 동방 오대로에 포함되지 않은 이나바 테위나 모리야 스와코, 곽청아가 명백히 사이교지 유유코나 히지리 뱌쿠렌보다 나이가 많은 등, 힘이나 겉모습을 기준으로 결정된 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