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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9:47:26

도요토미 히데나가

파일:Hidenaga_Toyotomi.jpg
성명 도요토미 히데나가 豊臣秀長
출생 1540년 오와리 국 나카무라
사망 1591년 2월 15일 야마토 코리야마[1]
국적 일본
직업 무장, 다이묘
초명 하시바 히데나가 羽柴秀長
통칭 고이치로 小一郞
아명 고치쿠 小竹
이명 야마토 다이나곤 大和 大納言


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통칭은 코이치로(小一郞)로 개명 전에는 기노시타 코이치로(木下小一郞)이라고 불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참모로 알려진 타케나카 시게하루구로다 간베에보다 현대 매체에서 덜 조명되는 감이 있지만 히데요시를 가장 오래 섬긴 중신이고, 히데요시에게 부족한 장기적인 시각으로 움직여야 하는 정치능력을 가져서 정치와 전투 양면에서 형을 보좌한 사실상 도요토미 정권의 진정한 일등공신이며 히데요시의 폭주를 막는 최소한의 방지턱 역할이라는 평가가 강하다.

2. 생애

일단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동생이긴 한데 정확한 관계가 밝혀지지가 않았다. 일단 가장 유력한 설은 어머니가 같으나 아버지가 다른 형제라는 설[2]이 있고, 어머니만 다른 이복형제라는 설도 있으며 히데요시의 친동생이라는 설이 있는 등 확실치가 않다. 설이 여러 가지로 갈리지만 어쨌든 히데요시와 혈연관계로 이어진 동생인건 확실하다. 전국시대 관련 매체에서는 친형제인지 이복/이부형제인지에 대한 언급 없이 그냥 '히데요시의 동생'으로만 묘사되는 경우가 흔한 편이다.

히데요시는 미천한 출신이라서 믿을만한 가신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친가와 외가 친척이나 마누라 코다이인 집안[3] 사람들을 중용했다.

당연히 동생인 히데나가는 그 중에서도 정치인으로써의 실력이 으뜸이었다.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할 무렵 사무라이가 돼서 돌아온 형을 도왔다고 하며[4], 장기적인 시각에서 움직여야 하는 정치능력이 매우 부족[5]한 형 히데요시의 정치는 물론 전쟁에서도 보좌, 도와가며 형의 출세에 큰 도움이 되었다. 1573년 아자이 나가마사가 패망하고 형 히데요시가 나가하마 성을 영지로 받자, 나가하마성의 죠다이[6]를 맡았으며 이시기에 히데나가라고 이름을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1575년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 성을 받았으며 이 시기 쯤 도도 다카토라가 히데나가의 가신이 되었다.[7] 이후 히데나가는 히데요시가 주고쿠 방면 군단장으로 나섰을 때에도 정략과 전투 양면에서 활약하여 마침내 타지마국 내의 7군 등을 가증 받아 10만 5천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히데요시의 주고쿠 회군에 함께하여 아케치 미츠히데를 쓰러뜨린 야마자키 전투에도 참전했으며 시바타 가츠이에와의 시즈가타케 전투[8]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고마키 나가쿠테의 전투에도 참전했으며,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있었던 시고쿠 정벌에서는 총대장으로 일군(軍)을 이끌어 시고쿠 평정에 큰 공을 세웠다.[9] 이 공으로 야마토 고리야마 성을 거성으로 하는 116만 석의 대다이묘로 출세했다.

1587년에는 규슈 정벌에서 별동대 총사령관으로 공을 세워서 종2위 다이나곤까지 올랐지만[10] 1590년 즈음 병으로 쓰러져 히데요시의 호죠 정벌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이 동생을 걱정하여 건강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결국 1591년 1월, 야마토 고리야마성에서 향년 52세로 죽었다. 아들이 요절했기 때문에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야스를 양자로 들여 가독을 잇게했으나, 히데야스도 17세의 나이에 요절해서 히데나가의 가문은 단절되었다.

3. 기타

상당히 온화하고 유한 성격으로 인해 인망이 두터웠던 인물로 사람간의 대립을 조정하는 데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가 죽어 장례를 치를 때 "들과 산에 사람이 가득 찼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백성들에게도 인망이 두터웠던 것을 알 수 있다. 히데요시 역시 그의 도움이 막대했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히데나가의 진언에는 항상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도도 다카토라는 한때 히데나가의 가신이었다. 다카토라는 히데나가 사후 그의 아들을 모셨으며 그의 아들이 요절하자 잠시 출가하기도 하였다. 도요토미 멸망 이후에도 히데나가의 무덤을 돌본 것을 보아 가신이었을 적 감명을 많이 받은 듯.[11][12]

임진왜란을 반대했다는 설이 있다. <무공야화>에 의하면 죽을 무렵에 조선을 침공하려는 계획에 대해 "전쟁을 하면 얻을 것은 없고, 차라리 화친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이 낫다."는 요지로 발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공야화는 진위가 의심스러운 기록이 많아서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히데요시 몰락의 대표적인 원인으로 꼽히는 임진왜란만 봐도 원인이 너무 복합적[13]이라서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다. 당장에 임진왜란의 경우는 이미 히데나가가 살아있던 1590년부터 그 징후를 보였다.

어쨌든 그가 죽고 츠루마츠도 동일한 해에 사망하면서 1년 후에 임진왜란을 일으키거나 히데요시의 후계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츠구 할복 사건과 다도의 달인이라 불렸던 센 리큐할복 등 히데요시의 미숙한 정치적 판단과 총기를 잃고 난행, 숙청 폭주를 저지르게 되었고, 히데나가의 죽음과 타이밍이 일치하기 때문에 히데나가의 죽음과 츠루마츠의 죽음, 히데요리의 탄생이라는 3박자가 히데요시의 타락을 연관되는 시각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도요토미 정권의 중추이자 뛰어난 기량인이었던 '히데나가'가 오래 살았더라면 히데요시의 난행도 어느 정도는 방지할 수 있었고, 형을 따라 경력을 많이 쌓았던 그가 어린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옆에서 보좌했으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쉽게 전횡하지 못했을 것이며[14] 따라서 도요토미 정권의 수명도 길어졌을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스가 요시히데관방장관 시절 본 받고 싶은 인물로 꼽은 바 있다. 도요토미 히데나가가 이상적인 보좌역으로 꼽히는 인물인 만큼 관방장관 시절에 아베 신조오른팔이었던 스가 입장에서는 롤 모델로 삼을 만한 인물이기도 했다.

4. 창작물에서

4.1.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태합입지전 시리즈

파일:豊臣秀長1.png 파일:豊臣秀長.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파일:109853.jpg
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도 훌륭한 인재다. 정치력이 발군이며 전투나 지모도 중간은 한다.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는 형과 함께 족경 고유 전법인 천성금을 배울 수 있지만 히데나가의 전투력이 높은 편이 아니라서 부장을 끼고 써야지 데미지를 기대할 수 있다. 노부나가의 야망 천도에서 특기는 '농락'이다. 창조에서는 사망 이벤트도 있는데, 그의 사망 이후 히데요시가 변하기 시작했다는 나레이션이 나온다. 동생의 죽음이 히데요시를 흑화시킨 시발점이라고 해석한 듯하다.

태합입지전 5에서는 역시 주인공이 히데요시인만큼 비중 있게 등장한다. 히데요시로 플레이하면 초반부터 배하 가신으로 쓸 수 있는 귀중한 인재. 정치와 전투 양쪽으로 모두 쓸만해서 실제 역사에서 히데요시의 1급 보좌역이었던 것을 제대로 체감할 수 있다. 사람 좋아보이는 얼굴 CG가 특징이다.

4.2. 센고쿠 여고생담

이 작품에서는 실눈캐이자 형을 보좌하는 시절의 히데나가로 등장. 실눈캐답게 속이 시커먼 흑막포스를 보인다. 주인공 아야노코지 시즈코의 능력을 감탄하면서도 "후일 천하를 지배할 형님을 위해 능력을 쓰도록 만들겠다."며 호시탐탐 시즈코를 영향하에 두려는 수를 두려고 하고 있다.

4.3. 효게모노

이 작품에서는 대담하게 혼노지의 변을 히데요시 형제가 꾸민 것으로 그리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에게 회군을 주장했던 구로다 간베에는 이 작품에서는 정 반대로 히데요시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에게 속아서 회군하자는 히데나가의 의견에 따르게 된다. 그러나 훗날 히데요시 형제가 노부나가를 죽인 것을 알게된 구로다는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히데나가를 병문안 하는 척 하면서 독살한다.

4.4. 고우 ~공주들의 전국~

여기서는 형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이전부터 판단력이 흐려지고 무모한 행동을 일삼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 계기가 츠루마츠의 죽음과 더불어 히데나가의 죽음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설정한다. 히데나가도 생전에 이를 크게 염려해서 유언으로 히데요시에게 '귀에 달콤한 말을 하는 자보다 귀에 아픈 말을 하는 자를 가까이 하라'라고 말하며 아랫사람들의 충언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고 사망한다.

4.5.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

2부에서 등장. 아버지가 다른 이부동생이라 그런지, 히데요시보다는 훨씬 말끔하게 잘생긴 미중년으로 그려진다. [15]

어린 시절 계부 치쿠아미와 다투고 "무사가 되어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가출한 형 히데요시가 정말 약속을 지켜 돌아오자, 이에 크게 감복하여 형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게 된다. 평소엔 온화하지만, 형의 안위나 하시바 가문의 이름이 모욕당한다 싶을 때에는 가차없이 잔인해진다. 하지만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형에 비하면 분명 합리적이고 용서해야 할 상대를 용서할 줄도 안다. 당장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용서하자는 센 리큐의 간언에 동조하며 히데요시를 달래던 것도 히데나가였고, 허황된 꿈이었던 명나라 정벌도 리큐와 함께 쌍수를 들고 반대하여 전국 각지의 다이묘들이 리큐와 히데나가에 의지하는 형국이었다.

과거, 형인 히데요시가 니오 패거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간신히 구해온 으름 열매를 분뇨통에 빠뜨렸는데, 이를 들고 와 히데나가와 아사히에게 준 일이 있었다. 이 날은 히데요시가 "무사가 되어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가출한 날이었고, 히데나가 또한 이 날을 기억하며 "다시는 그 날의 비천한 신세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각오를 다진다.

1화는 임진왜란 중기 잘 풀리지 않는 전황을 묘사하는 화이기에, 히데나가는 이미 사망한 상태이다. 히데요시는 히데나가를 비롯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이 점점 떠나간다고 한탄하면서도, 이들을 위해 명나라 정벌을 지속하겠다는 망집을 보인다.

키요스 회의 이후 히데요시의 야욕을 다룬 2화에서는 형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4남이자 히데요시의 양자였던 히데카츠와 작당하여 오다 가 중신들과 노부나가의 다른 유족들의 상의 없이 노부나가의 장례를 주관할 때 장례식 비용을 담당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승려들이 히데나가가 전달한 히데요시의 요구를 듣고 그 사치스러움에 놀라 "비용은 어떻게 하실 셈이냐?"고 묻자, 히데나가는 "형님께서 은자 천 백 개에 보시금 일만 관을 베풀어 주셨다."며 선심을 쓴다.

시즈가타케 전투를 다룬 5화에서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고 주변 백성들을 매수하여 횃불을 들린 후 히데요시 군의 지원군이 신속히 당도한 것처럼 속이는 공작을 펼친다. 적장인 사쿠마 모리마사는 몇 번의 승리에 취해 히데요시군 진중에 깊숙히 들어온 상태였고, 히데나가의 공작에 "설마 히데요시의 지원군이 벌써 올 줄이야?!"라며 당황하다 마에다 토시이에 등의 배신을 신속히 포착하지 못했다. 결국 시바타군 선발대의 내부 분열로 시즈가타케에서 히데요시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하시바 히데츠구가 대패하자, 히데요시의 명을 받고 전황을 바꾸기 위해 키소 강 수공을 지시한다. 인명피해를 걱정한 부하들이 머뭇대자 히데나가는 하이라이트가 없어진 눈동자로 "하시바 가문에 대든 자들은 이렇게 된다."고 경고한다. 결국 히데나가의 지시대로 키소 강 수공이 행해져 오와리 국 일대에는 엄청난 사상자가 나온다. 이후 텐쇼 대지진이 오사카를 덮치자, 처소에서 잠을 자던 중 창졸간에 지진 피해를 입어 목숨이 위태로웠으나, "죽음에 먹히지 마라."는 히데요시의 일갈에 제정신을 차리고 잔해더미에서 빠져나온다.[16] 비록 급한 불은 껐다지만 지진은 해가 바뀌고서도 계속되었고, 하시바 형제의 거점인 오사카도 이에서 무사하진 못했다. 히데요시는 미카와 출정을 기획하는 등 이에야스를 기어이 죽이려고 했지만, 히데나가는 이에야스를 끝까지 쳐서 죽이는 것보다는 살려서 다테 가 같은 북방의 강력한 영주들을 견제하는 것이 하시바 가에 이득이라 여겼기에 센 리큐와 함께 주화파에 섰다.[17] 두 심복의 간언에 히데요시는 "일단 이에야스를 오사카로 불러들이고 나중에 죽이든 말든 하겠다."고 했고, 결국 이에야스를 복속시키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렇게 형의 대업을 착실히 도와가던 히데나가였지만, 히데요시가 천하인이 되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히데나가는 병을 얻게 된다.[18] 병중에서도 친분이 있던 센 리큐와 함께 형의 명나라 정벌을 말렸으며, 리큐와 히데나가의 존재는 명나라 정벌을 싫어하던 전국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큰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주라쿠테이에 원인 모를 돌림병이 돌아 히데나가 본인은 물론 누이동생 아사히히메, 어머니 오만도코로, 형수 네네, 조카 츠루마츠까지 병에 걸리고, 머잖아 츠루마츠, 아사히히메, 히데나가는 병사한다. 츠루마츠가 사망할 때처럼 히데나가가 사망할 때 히데요시는 히데나가의 시신이 도철에 잡아먹히는 환상을 보게 된다.

4.6. 도요토미 형제!

도요토미 히데나가를 주인공으로 한 NHK 대하드라마. 나카노 타이가가 히데나가를 연기할 예정이다.


[1] 현재의 나라 현 야마토코리야마 시. 후쿠시마 현의 코리야마 시와 다르다. 야마토코리야마 시도 원래는 코리야마 였으나, 후쿠시마 현의 코리야마 시와 구분하기 위해,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자세한 것은, 한국어 위키백과의 야마토코리야마 시 항목 참고.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두 도시의 코리야마는 발음 뿐만 아니라 한자까지 같다.[2] 이 설에 의하면 히데요시 양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한다.[3] 이 쪽은 히데요시만큼 미천한 건 아니지만, 객관적 기준으로 볼 땐 가난하기도 했고 그리 유력한 집안은 아니었어서 히데요시 인맥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중용될 집안은 아니었다.[4] 이 역시 언제부터 형을 도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대개 히데요시가 성공을 위해 집에서 나온 뒤 오다 노부나가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사무라이 즉 장수가 되고서 히데요시가 동생들을 데리고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5] 히데나가가 생존해 있었을때는 히데요시의 정책안을 듣고 수정해준 인물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평탄한 정치를 이어갔지만 히데나가가 죽은 이후 도요토미 가문의 정치력에 영향을 줄 만한 패착을 히데요시가 연달아 터트리는 바람에 히데나가의 정치능력이 더더욱 고평가 받았다.[6] 城代, 성주의 부재시 성을 대신해서 관리하는 사람[7] 다카토라는 히데나가의 양자 도요토미 히데야스가 사망할 때까지 히데나가 가문의 가신으로 있었고 히데야스 사후 출가했다. 다카토라가 아까웠던 히데요시는 다카토라를 계속 설득해 자신의 가신으로 삼았고, 이때 히데요시는 다카토라에게 기존의 영지에 5만석을 가증시켜 줌으로써 다카토라는 7만석의 다이묘가 되었다.[8] 여기서 시바타 측의 사쿠마 모리마사가 돌격하는 바람에 히데나가의 부장이었던 나카가와 키요히데가 전사했다. 그 때문에 히데요시의 질책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기록의 출처인 <노인잡화>가 신빙성이 별로 없는 사료라고 한다.[9] 여담으로 이 시코쿠 공략 도중 죠소카베 가문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어 히데요시가 직접 나서려고 했었으나, 처음으로 대규모 군의 총대장을 맡는 동생 체면도 생각해 달라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이 있었다.[10] 그의 영지가 야마토(大和) 지역에 있어서 이 관위를 받은 후 '야마토 다이나곤(大和大納言)'이라고 불렸다.[11] 주군을 7번이나 바꾼 걸로 유명한 다카토라 입장에서는 처음 맞는 제대로 된 주인이었다. 이전에는 사고를 쳐서 도망치거나 전공을 세워도 알아주지 않아 탈퇴했지만. 히데나가 아래에선 그 재능을 인정받아 사실상 오른팔격의 대우를 받았다. 낭인에서 출발한 신참자였으나 여느 유력가문 중신들에 못지않은 2만석을 받았으며, 히데나가의 후계자인 히데야스의 대리인격으로 왜란에 참가한 적도 있으니 사실상 히데나가의 가신들 중엔 가장 상석을 차지했던 걸로 보인다.[12] 도도 다카토라와 비슷한 일례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있는데,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들 중 가장 으뜸의 공을 세웠고 이로 인해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필두로서 5천석을 받았고(나머지는 모두 3천석) 임진왜란 이후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의 1인자로서 활약했다. 세키가하라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나서 히로시마 번 49만 8,000석(나중에 51만 5,800석으로 증가)을 가증받고 나서도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했고 이로 인해 시나노 번 4만 5천석으로 감봉된 이후 아들 타다카츠의 사망으로 2만 5천석을 막부에 헌납하고 본인의 사망으로 나머지 2만석이 몰수되어 아들 마사토시가 3천석의 하타모토로 몰락한 걸 보면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들 중엔 가장 상석을 차지했던 걸로 보인다.[13] 도요토미 가문의 기반이 될 친위 무장 시종들인 칠본창에게 줄 영지가 없다는 점, 센고쿠 시대를 통해 외교와 무력으로 복속시킨 영주들의 사병들이 너무 많았고 소모시킬 이유가 있었다는 점 등등...[14] 실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사후에도 마에다 토시이에가 살아있던 1599년까지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15] 어릴 때에도 잘생겼었는데, 이 외모 때문에 야에몬이 "코이치로(= 히데나가의 초명)는 내 아이가 아니다."라면서 나카와 갓난아기인 히데나가를 학대하기도 했다.[16] 히데요시가 뺨을 때리기까지 하며 히데나가가 정신을 차리도록 했는데, 아니었으면 히데나가는 잔해에 깔려 죽었을지도 모른다.[17] 이는 히데나가가 냉정하게 하시바 가가 도쿠가와를 완전히 치는 것은 텐쇼 대지진 시점에서 어려운 일이었음을 헤아린 것이었다.[18] 이에야스가 미카와에서 에도로 전봉당할 때, 히데요시가 댄 명분이 "내 친아우 히데나가가 병에 걸려서 북방의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어렵다. 이에야스 네가 대신 해 달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