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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9:39:25

후지와라노 미치쓰나의 어머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yakuninisshu_053.jpg

藤原道綱母
936년 ~ 995년

1. 개요2. 생애
2.1. 배경2.2. 결혼2.3. 카네이에와의 갈등2.4. 말년
3. 카게로 일기4. 기타5. 백인일수

1. 개요

이름은 불명. 후지와라노 미치쓰나의 어머니이며 후지와라노 토모야스의 딸이다. 남편은 후지와라노 카네이에(兼家)[1]이며 그와의 사이에서 후지와라노 미치쓰나를 낳았다.

와카로도 유명하며 백인일수 중의 한 명이다.

2. 생애

2.1. 배경

미치쓰나 어머니의 아버지인 후지와라노 토모야스는 후지와라氏의 자손이기는 했지만, 당시 세력의 중심이었던 북가北家[2]에서 보면 방계였으며 중류 귀족에 속했다. 토모야스는 미치쓰나 어머니를 할 수 있는 만큼 후견해 주었으며, 미치쓰나 어머니를 설득해 이혼을 결심하게 만든 것도 토모야스였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토노모노 수령主殿守 후지와라노 하루미치藤原春道의 딸로 추정된다. 이 어머니는 964년 가을에 세상을 떠나는데, 본 일기 속에 그 슬픔이 절절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보면 작자가 일상생활에서 그 어머니에게 얼마나 많이 의지했는지 알 수 있다.

미치쓰나 어머니는 문장생文章生[3] 출신의 학식 있는 아버지 밑에서 와카, 한시문, 코토琴[4]와 같은 교양 덕목을 배워 익힌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헤이안 시대 3대 미인으로 꼽힐 정도로 교양 있고 용모가 단정했던 것으로 보이며, 와카에는 특히 재능이 뛰어나 나름대로 자긍심 강한 여자로 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5]

형제로는 마사토理能와 나가토長能가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이복 관계다. 그중에서 작자와 동복 관계였던 쪽은 작자와 같은 집에 거주하며 이 일기에 언급되는 마사토였을 것으로 보인다. 나가토는 본 일기의 <권말 가집>을 편찬한 사람으로, 본인 역시 가인으로 유명했다. 이복 여동생은 사라시나 일기를 쓴 스가와라노 타카스에의 딸(菅原孝標女)의 어머니이며, 이복 여동생과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2.2. 결혼

954년 미치쓰나 어머니는 당시 우대신(右大臣)이었던 모로스케(師輔)의 3남 카네이에(兼家)로부터 구혼을 받고 결혼하기에 이른다. 카네이에의 증조부는 모토츠네(基經)로 미치츠나 어머니의 증조부 타카츠네(高經)의 동생이지만, 섭관가로서 점점 권세를 증대시켜 가던 모토츠네의 자손과 타카츠네 후손인 미치쓰나 어머니의 집안은 큰 격차가 있었다. 카네이에는 948년 20세에 서작해, 시종侍從을 거쳐서 951년에 우병위좌가 되었다. 작자와 결혼할 당시에도 우병위좌였으며 나이는 26세였다. 당시 카네이에는 토키히메(時姬)를 첫째 아내로 맞이해 미치타카(道隆)[6]가 태어난 상태였다.

미치쓰나 어머니가 카네이에의 구혼을 받아들인 것은 카네이에의 집안이 세력가라는 점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작자가 결혼한 후 아버지 토모야스는 미치노쿠(道奥) 지방 수령으로 임명되는데 그것은 지방관으로서 첫 부임이었으며, 첫 부임지로서 미치노쿠 지방은 큰 지방이었다. 당시 미치쓰나 어머니의 나이는 20세에 가까운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1~12세만 되어도 성인식을 치르고 결혼하는 일이 종종 있던 당시로서는 상당한 만혼이었다.[7]

2.3. 카네이에와의 갈등

미치쓰나 어머니는 한때 토키히메와 함께 카네이에 옆집으로 옮겨 카네이에가 누굴 정실로 할까 간을 본 적이 있었지만 몇 년 뒤 자식을 많이 낳았던[8] 토키히메를 정실로 집안에 맞이한다. 그런 상황에서 카네이에가 젊은 시절에는 나름대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챙겨주었지만 권력자가 되며 많은 여자와 어울리자[9] 큰 상처를 받고, 자존심이 강하고 괄괄했던 미치쓰나 어머니는 이런 카네이에의 행동을 넘기지 못하고 틈만 나면 싸우게 되면서 카네이에도 점점 미치쓰나 어머니를 찾지 않게 된다. <카게로 일기>에서는 미치쓰나가 없었으면 훨씬 빨리 이혼했을 거라고 서술한다.

거기다 당시 귀족 여성들이 선호하던 남성상과 카네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여성들이 정치에 관여할 수 없고 한 집에 사는 게 아니라 남자들이 일일이 아내 집에 찾아가야 한다는 당시 시대 특성상 여성들이 선호하던 남성은 여성에게 온화하고 늘 찾아와서 챙겨주는 남성상이었지 권력욕에 미쳐 정치에만 파고드는 남자가 아니었다. 미치쓰나 어머니가 카네이에와 가장 친했던 시절도 몇 년간 진급 적체가 생겨서 궐에 잘 안 가고 아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던 시기였다. 그 때문에 당시 귀족 여성들은 고귀한 남성을 원하면서도 너무 정치 권력에 집중하는 남자는 꺼렸다.

카네이에는 온갖 암투 끝에 천황의 외조부로서 섭정이 된 역사상 두 번째의 인물이며, 그 과정에서 안나의 변이나 가잔 덴노 출가를 통한 실질적 폐위 등의 온갖 음습한 행각을 떨친 걸로 유명했다. 거기다 세 번째 아내였던 무로마치 여자나(친왕의 사생아라고 한다) 넷째 아내인 미나모토노 카네타다(源兼忠)의 딸,[10] 여섯 번째 아내였던 호시 내친왕(保子內親王)[11]와는 얼마 안 가 파국을 맞았고 그중 무로마치 여자나 재상 카네타다의 딸은 잊기까지 할 정도로 여자에게 고압적이고 냉정한 면이 있었다.

미치쓰나 어머니는 처음에는 그냥 싸우다가 도중부터는 참배를 자주 나가며 아들 잘 되고 옆에 둘 딸 생기게 해달라는 등의 기도를 하면서 감정을 삭히고[12] 한 번은 산속 절에 오랫동안 틀어박혀 친정 가족들과 미치타카까지 내려오라고 설득했지만[13] 버티자 카네이에가 직접 찾아와서 집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 그러고는 미치쓰나 어머니를 디스한 뒤에 다시 안 찾아갔다.

2.4. 말년

카네이에가 잊어버린 딸을 자신의 양녀로 거두고[14] 미치쓰나에게 성인식을 치러준 뒤[15] 미치쓰나 어머니가 이사하면서 이혼하게 된다.

이후 묘사를 보면 아들과 양녀 건 때문에 완전히 잊지는 않고 종종 교류는 했던 모양이다. 미치쓰나 어머니도 카네이에의 행동에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점점 권력의 정점에 올라 사람들의 선망을 받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는 빛나가지만 자신은 비참해져 가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이혼 이후에도 그와 다시 만나고 싶어하는 등 그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말년에 모노가타리를 접하고 자신의 생애를 글로 남기는 게 좋겠다 싶어 쓴 글이 <카게로 일기>다.

3. 카게로 일기

미치쓰나 어머니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은 남편과의 결혼생활, 이혼에 이르는 삶을 서술한 카게로 일기다. 만년의 미치쓰나 어머니가 모노가타리를 보고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일기로 쓰는 것이 단순한 허구의 이야기보다 더 교훈이 될 것이며, 또 자신처럼 중류층 여성임에도 최상류층 남성과 결혼한 여자의 삶을 궁금해할 여성들에게 사례를 제시하기 위해 남긴 일기이다. 모노가타리 작법의 영향을 받아 모노가타리풍으로 쓴 게 특징이며, 현대 기준으로는 회고록에 더 가깝다. 말하자면 재벌 2세랑 결혼해 사모님 해봤던 썰 푼다 이런 정도(...)

카게로 일기는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겐지모노가타리에 영향을 준 작품 중에 하나로 여겨진다. 미치쓰나 어머니는 미치나가보다 한 세대 위의 사람으로 당시 시중에 나돌던 모노가타리의 주 독자층은 여성이었지만 저자는 대부분 남자였다. 당시 모노가타리의 여주인공은 좋은 남주인공을 만나 성공하고 행복해진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미치쓰나 어머니에게 그런 모노가타리의 내용은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모노가타리는 그것만 읽어대는 젊은 여자들이 환상만 갖게 돼서 모노가타리와 현실이 다르다는 걸 모른다며 청소년 유해물 진짜 귀공자와 살아봤고 온갖 마음고생 다 했던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카게로 일기의 내용은 겐지모노가타리에 나온 여성들의 고뇌와 일맥상통하는 내용이 많다.[16]

가네이에의 청혼에서부터 왠지 아니다 싶었던 삘, 그럼에도 수락했지만 예감이 옳았는지 계속 다른 애인을 만드는 남편과의 끊이지 않는 불화와 아들 미치쓰나 출생, 남편의 사랑을 바라며 싸움과 화해를 되풀이한 부부는 아들이 성인이 될 무렵 결별한다. 남편과 함께 하는 정실이 되기 바라며 아픈 남편을 문병해 화해, 고민 끝에 출가하려고 해도 쫓아와 훼방하는 남편과 부부 사이를 회복해보려는 주인공의 노력, 남편이 밖에서 낳은 딸의 입양과 아들의 성장 등을 술회하고 있으며 안나의 변 같은 정치적 건에 대한 기록은 중요한 자료로 꼽히기도 한다.

가네이에한테 어지간히 데였는지 개같이 까는 내용이 수두룩하다(...). 싸우고 나면 다른 여자에게 가버리고 연락도 방문도 없는 건 예사, 방문 약속을 무시해 맞이할 준비를 무색하게 하기도 한다. 일부러 그녀 집을 지나쳐 애인 집으로 가는 것을 과시하거나 아들에게 화풀이를 해 상처를 주는 등 남편이 그녀를 실컷 물먹인 데 비해 제대로 반격할 수 없던 게 쌓였던 듯.

4. 기타

중류 귀족 출신으로 태어났음에도 최상류층 남성의 눈에 들어 그의 부인이 되고 자식을 낳았고 (결국 이혼하지만) 수십 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는, 상당히 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평생 귀족 영애이자 부인으로만 살았던 미치쓰나 어머니가 청령일기라는 글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자신의 극적인 인생과 연관이 있다.[17] 따지고 보면 카네이에가 젊은 시절에 만나 결혼한 둘째 부인이며 수십 년간 함께했다는 걸 생각할 때 미치쓰나 어머니도 조강지처였다고 볼 수 있다.

카게로 일기에서 카네이에의 아홉 부인 중 원 정실인 토키히메를 제외한 여자들은 모두 적대와 저주로 일관되어 있다.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었던 미치쓰나 어머니 성격상 이상하지는 않다. 반면 첫째 아내였던 토키히메와는 서로 고민 상담을 하거나 토키히메가 자식이 많은 걸 부러워하거나 출가 소동이 있었을 당시 미치타카가 찾아와서 말리는 등 사이가 무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8]

아들인 미치쓰나는 토키히메의 아들들처럼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당대인들이 학문과 시를 나름 고평가했다고 전해진다.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은 듯. 이즈미 시키부와도 친분이 있었다.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 중 사이쇼 여방이라고 미치쓰나의 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쩌다 뻗어자는 모습을 기록했는데, 그나마 귀엽다는 정도로 나쁘지 않게 써주었다. 다른 여자들은 죄다 까는데[19]

5. 백인일수

百人一首
백인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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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번 후지와라노 미치쓰나의 어머니(右大将道綱母)
なげきつつ ひとりぬる[ruby(夜, ruby=よ)]の あくるまは いかに[ruby(久, ruby=ひさ)]しき ものとかはしる
서글퍼하며 나 홀로 지새는 밤 새벽녘까지 얼마나 길고 긴지 알고 계시런지요

카게로 일기에도 나오는 와카다.


[1] 이치조 덴노의 외조부이자 그 유명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아버지.[2] 그 외에 남가南家, 식가式家, 경가京家 등이 있었다.[3] 대학료에서 기전이나 한시문 등을 배워 식부성式部省의 시험에 합격한 사람[4] 거문고와 유사한 현악기로, 현의 수에 따라서 킨琴(7현), 소箏(13현), 와곤和琴(6현)으로 세분화되었다.[5] 미치쓰나 어머니가 카네이에에 비해 상당히 신분이 떨어졌음에도 카네이에와 부부싸움을 곧잘 벌이거나 강경하게 나가는 모습이 많은데, 어지간히 자존심이 강하지 않으면 그러기 힘들다.[6] 후지와라노 테이시의 아버지[7] 다만 헤이안 시대에서는 결혼이 늦으면 꽤나 늦어져서, 무라사키 시키부는 20대 중후반에 결혼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카인 <사라시나 일기>의 저자 스가와라노 타카스에의 딸은 요즘 기준으로도 만혼인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결혼했다.[8]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와 센시가 이 사람 소생이다.[9] 기록에 남은 카네이에의 아내는 9명이다. 그중 상당수는 오래가지 않았지만.[10] 그녀가 남긴 외동딸을 나중에 미치쓰나 어머니가 수양딸로 거둔다. 훗날 센시 중궁이 황태후가 될 때 선지(宣旨) 여관이 된 사람으로 추정된다.[11] 무라카미 덴노의 제3황녀.[12] 당시 아들은 성인이 되면 독립했지만 딸은 평생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13] 이 사람은 토키히메의 아들이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14] 이 아이의 생모와도 싸우다 헤어졌는데(...) 나중에야 자기 딸인 것 같다는 말에 아들 하나 밖에 없는 미치쓰나 모친이 환심도 살 겸 아이도 더 가질 겸 찾아 데려온 것이다. <카게로 일기>에 따르면 서프라이즈로 깜짝 소개시켰는데 상당히 귀엽게 생겼는지 카네이에는 이 아이가 옛날 잊어버렸던 그 아이라는 말을 듣고 정말 귀엽다며 자신이 데려가고 싶다고 평했다.[15] 카게로 일기에 따르면 부부싸움의 여파인지 당시 귀족 소년치고는 늦게 한 편이라고 한다. 작중에서도 부부 싸움을 크게 하고 나면 남편이 일부러 아들을 건드리거나 무시해 그녀의 복장을 터뜨리는 얘기가 있다.[16] 무라사키 시키부 본인도 아버지 친구라는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했고 바람둥이에 화려한 성격이었던 노부타카(宣孝)와 성격 차이도 컸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마쿠라노소시>와 <소우기小右記>를 보면 얌전히 차려입어야 하는 자리에 '화려하게 입는 게 뭐 어때서'라며 화려하게 입고 나와 구설수에 올랐다고 한다) 무라사키 시키부도 카게로 일기의 내용에 공감했을 가능성이 높다. 차이점이 있다면 노부타카는 결혼한 지 몇 년 안 되어 죽었기 때문에 미치쓰나 어머니처럼 수십 년간 부부싸움하지는 않은 정도. 그 남편들도 히카루 겐지처럼 자기 주장, 성격이 강하고 본인이 원하는대로 안 해주는 여자는 못된 여자라고 욕하며 발을 끊는 것도 비슷하다.[17] 극적인 걸로 따지면 카네이에의 정실 토키히메가 가장 두드러지는데, 자신과 같은 계층 출신이었음에도 최상류층 귀공자의 첫째 아내가 되고 자식을 많이 낳아 그 공으로 정실이 되었고 그 자식 중 한 명이 무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다. 사실상 당시 여성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인생역전 스토리의 주인공이었던 사람이다.[18] 미치쓰나 어머니는 미치타카가 태어나고 나서 카네이에와 결혼했다. 미치타카 본인의 입장에서 아버지와 두번째 어머니의 부부싸움으로 인한 갈등이 심각해지자, 정실의 아들인 자신이 나서서 두번째 어머니를 설득해야 하는 기도 안 차는 상황이다.[19] 무라사키 시키부는 내성적인 자신의 성격과 다르게 대신들과 잘 응대하고, 한시와 와카를 나누고 겨루는 당찬 세이 쇼나곤이나 같은 입궁 동기이자 입궁 전 두 황족과 연애 스캔들을 낸 이즈미 시키부를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다만 세이 쇼나곤은 그리 잘난 척을 하는 이는 말년이 비참하다고 깐 반면, 이즈미 시키부는 본받을 게 하나도 없지만 연문(연애편지)와 와카는 인정할 만하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