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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일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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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신라의 삼한일통에 대해 다룹니다. 고려의 삼한일통에 대한 내용은 후삼국시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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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기타4. 같이보기

1. 개요

일통(一統)통일(統一) 두 단어 모두 고전에 용례가 있는 서로 다른 말이며, 사실상 거의 유사한 의미지만 미세하게 다르다. 통일은 통섭(統攝)하여 하나(一)가 된다는 뜻이고, 일통은 하나(一)로 통섭(統攝)한다는 뜻이다. 통일은 여럿을 하나로 만든 뒤의 결과물인 하나 그 자체에 방점이 있으며, 일통은 하나로 만들기 이전에 존재하던 여럿에 좀더 방점이 있다.

그래서 진시황의 천하통일이란 말에는 멸망당한 육국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고 오직 통일이후의 진제국 하나가 부각되는 반면, 삼한일통이라는 말에는 일통이전의 삼한(三韓)의 존재가 더 부각된다. 삼한통일이라고 하면 '3개의 한(韓)이 통섭하여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고, 삼한일통이라고 하면 '3개의 한(韓)이 하나로 통섭했다'는 뜻이다. 일통삼한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삼한은 고대에 존재했던 마한, 진한, 변한을 부르는 말이다. 7세기삼국시대 부터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를 의미하는 말로도 쓰였다. 마한·진한·변한이 고구려·백제·신라가 되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지칭하는 삼한에 가야는 들어가지 않는다. 애초에 가야는 하나의 일원화된 국가가 아닌 중소국가 연맹체 수준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다만 당시에는 삼한이 백제, 신라, 가야 세 나라를 의미했고 동시대에 중국에서 삼국을 삼한으로 혼동하여 같은 의미로 사용한 것이 후대 한반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 있다.
...마침내 '삼한'의 백성의 목숨이 칼과 도마 위에 올라가게 하였고...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百濟本紀) 제6 의자왕(義慈王) 11년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일컫는 삼한의 관념은 당나라로부터 수입된 개념일 가능성도 있다. 6세기 이후 당대 중국 지식인의 시각에서 요동과 삼한을 같은 종족으로 보는 인식이 확장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신라삼국통일전쟁 후 삼국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삼한일통이라는 개념을 사용했고, 이후 다시 고려가 후삼국시대를 거쳐 삼한을 평정하는 데 성공한다.

2. 역사

통일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지배하기 위한 명분으로 단순히 신라가 고구려, 백제 땅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신라가 삼한을 하나로 만들었다'는 삼한일통 의식을 내세웠다. 그리고 신라 왕실은 어떻게든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을 신라인으로 통합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오백 년도 더 넘게 이어진 신라 초기 육부의 직계 후신 진골들은 기득권을 좀처럼 양보하지 못했고, 때문에 다시 셋으로 쪼개지고 말았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에 속했던 이들은 다시 쪼개졌을망정 삼한일통 이데올로기까지 잊은 건 아니었고, 때문에 고려가 이 삼한일통 의식을 이어받아 재통일을 실천하였다.

고려 시대에도 삼한일통 의식과는 정반대인, 원심력인 분립적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무신정권기에 삼국의 부흥운동은 또 벌어졌다. 그러나 이는 후삼국시대처럼 파급력이 크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삼한일통 의식은 여몽전쟁 이후 여기서 더 나아가 '삼한(삼국)은 본디 한 나라였으므로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아 고조선 계승 의식으로까지 발전하여 고대 삼국에 기반을 두는 분립적 의식은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692년에 김유신이 삼한을 통일해 그 공업이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고 언급했으며, 김유신의 열전에서는 지금 삼한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들이 두 마음을 갖지 않아 태평무사하다고 할 수 없지만 편안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외에 더 자세한 내용은 삼국통일전쟁 문서 참고.

3. 기타

4. 같이보기


[1] 여기서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읽을 수 있다.[2] 이걸 위해 고려 시대부터 민족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이념으로 민족 최고(最古) 국가인 단군조선단군이 대두된 것이다. 이후 고조선을 이어받는 조선 시대로 들어 단군의 중요성은 더욱 확고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