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간섭기
, 여몽 관계
1. 개요
立省策動원 간섭기 시절 고려를 원나라의 성(행정구역)으로 편입하고자 했던 시도. 총 4번의 입성책동이 있었다.
이러한 시도들은 세조구제(世祖舊制)로 인해 전부 실패했기 때문에 고려는 명목상으로나마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시도가 계속될수록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입김은 점차 강해졌다.
2. 배경
입성책동이 있었다는 것은 고려가 원 간섭기 동안 원나라의 강한 간섭을 받고 휘둘리고 있었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고려가 원나라에 완전히 복속되지 않은 독립국이었다는 나름의 증거이기도 하다. 원나라는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고려 내정에 간섭하긴 했지만, 정동행성은 원나라의 다른 행성과는 달리 지방행정기구가 아니었다.하지만 실상 '충'자 돌림의 고려 왕들은 원나라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책봉[1]되었고 고려 정계의 주요 권신들도 원나라와 이어져 있는 자들이었으며 정동행성이나 쌍성총관부, 다루가치 등 원나라에 의해 공직의 인사권이나 형벌권을 통제되기도 한만큼, 원 간섭기의 고려는 완전한 독립국이라기에는 나사가 많이 빠져 있던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고려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에서도 고려 국왕의 존재, 혹은 고려의 독립국이라는 지위가 원나라의 대내적, 대외적 정치구도와 연결되면서 고려 국왕이나 독립국이라는 지위를 원나라의 힘을 빌려 소멸시키려고 한 것이다.
3. 목록
3.1. 1차 입성책동
1309년, 충선왕은 원무종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심양왕 작위를 책봉받는 등 원나라 내부에서도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이때 요동에 자리를 잡고 있던 그 일대의 유력자 홍중희[2]에게 심양왕은 위협 그 자체로 다가왔다. 때문에 홍중희는 심양왕 왕장을 국법을 어기는 개혁을 하고 있다는 죄목으로 중서성에서 대질심문할 것을 요구했으나 충선왕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원나라에 해명하자, 도리어 홍중희가 장형을 맞고 유배를 떠나게 된다. 다만 원나라는 홍중희를 크게 혼낼 생각이 없었으므로 머지 않아 다시 복권되었다. 이후 홍중희는 고려를 완전히 복속시킬 것을 원나라에 청했다. 충선왕은 쿠빌라이 칸의 약속인 세조구제(世祖舊制)를 근거로 내세워 이러한 홍중희의 주장을 반박하였고 고려의 관료들도 강력히 반대해서 고려의 합병은 무산되었다.3.2. 2차 입성책동
충선왕이 정치에 완전히 뜻을 잃은 1313년 고려 국왕의 자리를 아들 충숙왕에게 물려 주고, 연이어 심양왕 직위도 조카 왕고에게 물려준다. 이러한 충선왕의 선택은 두 왕 사이의 다툼을 야기한다.1320년, 왕위를 전부 넘기고 학문을 벗삼아 유유자적하게 살아 가던 충선왕이 원나라 조정의 환관 임백안에 의해 실각하고 토번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듬해, 고려왕위를 탐내던 심양왕 왕고의 모함으로 충숙왕은 원나라에 억류되고, 고려 국왕인까지 빼앗기는 지경에 이른다.[3]
이렇게 고려 왕권이 흔들리는 와중에 1323년, 충숙왕을 따라 원나라에 머무르고 있던 류청신, 오잠 등의 권신들이 왕고를 옹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들은 고려에 지방행정기구로서 행성을 설치하여 고려를 원나라에 복속시키고 심양왕의 통치를 받기를 원나라에 요청했다.
이때 원나라는 이 입성책동을 꽤나 진지하게 받아들여 삼한행성(三韓行省)으로 명명한 통치기구의 설치를 검토하기도 했으나, 이제현 등의 상소와 원나라 내부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다. 더불어 이제현은 충선왕이 유배지에서 돌아오는 데에도 일조하였다.
3.3. 3차 입성책동
1330년, 충혜왕이 즉위하면서 정동행성의 관리를 역임했던 장백상이란 중국인이 원나라에 머물면서 입성책동을 주장하였다. 어떤 목적에서 그러한 주장을 했는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원나라에 충혜왕이 요청함으로써 장백상의 입성책동은 무마된다.장백상은 계속 원나라에 머물다가 충숙왕이 복위하자 고려로 돌아와서 충숙왕의 복위를 전하면서 국새와 창고를 접수하였으며, 이후 정동행성에서 일하다가 복위한 충혜왕의 투고로 원나라에 의해 수감된다.
3.4. 4차 입성책동
1343년, 충혜왕의 막장행패가 심해지자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부원배 권신 기철 등이 입성책동을 주동하였다. 원나라는 충혜왕을 폐위시켰으나 입성책동 요구는 무시해버렸다.4. 기타
제주도 지역은 목호의 난(牧胡─亂)이 벌어지는 지역이었던 만큼, 목호(牧胡)[4]들과 고려 조정의 대립이 자주 일어나는 편이었는데 1367년 제주의 목호들이 조정에서 파견한 목사(牧使)와 만호(萬戶)를 살해하자 공민왕은 김유(金庾)를 파견해 목호들을 공격하게 했다. 이때 목호들은 원나라 황제 원혜종(元惠宗)에게 "(원나라의) 만호부를 설치해 달라." 고 요구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김유는 목호들을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왜구들 토벌하려다가 제주도까지 간 것 뿐인데, 쟤들이 괜히 오버하고 있으니 크게 신경 쓰지 마시라." 며 왜구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이에 원나라 황제는 공민왕의 말에 따랐다고 한다.5. 같이보기
[1] 후대의 명나라나 청나라가 조선 국왕에게 했던 명목상의 책봉과는 다르다. 명, 청은 (심지어 반정의 형태더라도) 어쨌든 조선 국내에서 왕이 바뀌면 사후 인정(추인)을 해주었다. 하지만 '충'자 돌림의 고려 왕들은 원나라의 의도에 따라 책봉되기도 하고 퇴위되기도 하다가 다시금 책봉되기도 하는 등, 실질적으로 원나라에 의해 책봉되었다.[2] 여몽전쟁 초기부터 몽골에 항복하고 적극적으로 몽골을 도운 후에 기어코 1500호에 이르는 사람들과 땅을 몽골에 바친 홍복원의 손자.[3] 이때 충숙왕은 몽골인 왕비였던 복국장공주가 갑자기 죽게 되면서 원나라로부터 눈초리를 받고 있었다.[4] 원나라에 상납할 말들을 관리하던 몽골인이다. 얼핏 보기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엄연히 군마를 조련하던 이들인 만큼 기병전에도 능했을 것으로 보는 해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