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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9:08

고혜진

高惠眞
(? ~ ?)

1. 개요2. 행적3.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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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한국사고구려 말기의 장수, 남부 위두대형(5품) 관등, 욕살(褥薩)[1]의 직책을 가졌다. 고구려-당 전쟁 당시 고연수과 함께 주필산 전투에서 패해 항복한다.

2. 행적

보장왕대 645년, 당태종 이세민영류왕을 시해한 역적 연개소문처벌한다는 명분으로 고구려-당 전쟁을 일으켜 안시성에 쳐들어오자 보장왕(그리고 연개소문)은 고혜진, 고연수에게 안시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고혜진은 남부 욕살 고연수와 함께 고구려군말갈병의 연합군으로 구성된 15만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에 맞서려 하였다. 이때 나이가 많아서 노련하고 경험이 많았던 대로(對盧)[2] 고정의가 "당 태종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 당나라 군사와 정면으로 대적하지 말고 방어선을 구축하여 시간을 벌다가 적의 보급로를 끊어 패퇴시켜야 한다."라고 하였으나 고연수는 이를 듣지 않았다.[3]

당 태종은 우선 돌궐 기병을 보내서 고혜진을 가까이 유인한 다음, 고혜진이 이끌고 온 고구려군에게 겁을 먹은 척하며 서신을 보내어 화의를 요청하였다. 고혜진은 이를 보고는 안심하여 방어를 가볍게 하였는데, 당 태종은 그 틈을 노려서 명장 이세적, 장손무기 등에게 병사를 나누어 주어 부대를 배치시켜놓았다.

6월 22일의 주필산 전투에서 초전에는 고구려군이 장창으로 벽을 쌓은 이세적의 군대에 맞서 우세하였다.[4] 또한 말갈 기병이 당태종의 본진까지 쳐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의 본진이 무너지기 전에 배후에서 장손무기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오자 고구려군의 진이 어지럽혀졌고 고구려군은 양면에서 포위당한 형국이 되었다. 이때 설인귀, 신라 출신의 설계두[5]가 선두에서 뛰어난 무용으로 고구려군을 몰아붙였고 당 태종의 친위기병까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역습을 가해 고구려군은 마침내 패배한다. 산속으로 달아난 고혜진은 사방이 당나라 군대에게 포위당하고 산 밖으로 빠져나갈 통로인 교량마저 개발살내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고연수와 함께 항복하였다. 당 태종은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전투가 벌어졌던 육산을 '주필산'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붙였고[6], 이후 역사는 이 전투를 주필산 전투로 불렀다.

항복한 고혜진은 고연수와 함께 당 태종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 이후로 당나라 군대를 따라 종군하였으며, 안시성 전투에도 참전했는데, 안시성주[7]가 굳건히 수성하면서 안시성에서 시간이 지체되자 고구려에 두고 온 가족들이 걱정되어 당 태종에게 안시성에서 시간을 끌지말고 주력군을 우회하여 오골성부터 치고 평양성직공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장손무기가 배후의 안시성, 신성의 10만 고구려군의 배후 위협을 이유로 반대하는 바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군은 안시성, 신성 그리고 건안성을 필두로 하는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을 와해시키지 못하고 결국 제1차 고구려-당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이 났다. 고혜진은 당군과 같이 철군하여 당나라 수도 장안에 도착했다.[8]

3. 같이보기


[1] 당나라도독과 비견되는 고위 지방 관,군직.[2] 혹은 대대로.[3] 구원군이 안시성과의 연계를 하지 않고 당태종과 전면 승부를 펼친 이유는 여러가지 가설이 제시되는데 안시성과의 알력이 있었을 가능성, 당태종을 비롯한 거물들을 일거에 노린 승부수로써 전략적인 유연함이 떨어졌을 가능성, 당에 의해 안시성과의 연계가 차단했을 가능성 등이 제시된다.[4] 류공권의 소설에서는 이세적의 군대가 포위되고 고구려군의 흑기군에게 당태종 본인의 금군까지 제압당하여 당태종이 크게 두려워하였다고 한다.[5] 설계두는 신라의 신분제도 골품제에 절망하여 당으로 건너가 고구려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주필산 전투에서 전사하여 당태종이 시신에 용포를 덮어주는 추모를 받았다.[6] 주필(駐蹕)은 황제의 행차를 일컫는 말이다.[7] 흔히 양만춘이라 일컫는 안시성 전투의 명장.[8] 반면 함께 항복했던 고연수는 당 태종의 군대와 함께 당나라로 향하던 중에 나라를 배신하고 항복한 일에 대하여 후회하고 탄식하다가 결국 근심으로 병을 얻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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