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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秦(? ~ ?)
1. 개요
중국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종횡가 중의 한 명. 자는 계자(季子). 진나라를 제외한 6국이 힘을 합쳐 대항하자는 합종책을 기획한 전략가이다.2. 《사기》의 기록
본래 낙양(洛陽) 사람으로 제나라에 가서 친구 장의와 함께 귀곡자에게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공부를 모두 마친 후에는 주나라 낙양 땅으로 돌아왔는데 곤궁한 상태로 돌아왔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무시를 받았다. 하도 구박받는 게 서러워서 방에 틀어박혀 책들을 파다가 군주를 설득할 한 수를 얻었다고 자부하며 주나라 궁궐을 찾아가서 벼슬을 얻고자 하였으나 주 천자의 좌우 대신들이 본래부터 그를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하찮게 여기고 그를 믿지 않아서[1] 그의 등용을 반대했고 결국 주나라에서의 입관은 물 건너간다. 이에 소진은 주나라를 벗어나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것으로 입신양명을 꿈꾸게 되었다.
일단 진나라에 도착해서 군주를 설득하나, 마침 이 무렵의 진나라는 상앙을 처단한 직후라 상앙같이 변설에 능한 자를 미워했기 때문에 소진을 등용하지 않았고, 조나라의 경우 봉양군이 그냥 설득되지 않아서 조나라에서도 등용받지 못한다. 마침내 연나라의 군주 문후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여기서 소진은 진을 제외한 연·제·초·한·위·조를 종적(縱的), 즉 세로로 합하여 서쪽의 진나라와 대적하자는 합종(合縱)의 웅대한 계획을 문후 앞에서 펼쳐보였다.[2]
이에 문후는 뜻을 움직여 다른 6국을 설득할 수 있도록 소진을 지원해주었고, 소진은 조·한·위·제·초를 돌며 각국의 군주들에게 함께 뭉쳐서 강대한 진나라와 맞서도록 설득하였다. 결국 소진은 기원전 333년, 연나라에서 초나라에 이르는 거대한 동맹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 합종 동맹이 만들어진 후 진나라는 감히 함곡관 밖으로 군대를 보내지 못했으며 그런 상태는 15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소진은 무려 6개 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이로써 최강대국 진나라의 동방 진출은 장장 수십 년간 저지당하게 되었고, 날백수가 그야말로 '말' 하나로 천하를 움직인 이 사건이 너무나 임팩트가 큰지라 후대에 친구 장의와 함께 입만 산 사람의 예를 들 때 간간이 소진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한다.[3]
이렇게 6국의 재상이 되어 큰 권력과 부를 한 손에 쥐게 된 소진은 많은 호위병들과 재물을 끌고 고향으로 금의환향한다. 주나라 천자에게 퇴짜맞고[4] 돌아왔던 시절에 자신을 박대하던 가족들이 그 앞에서 벌벌 떨며 어쩔 줄 모르는 광경을 보고는 가족들에게 많은 재산과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때 형수에게 "형수님께서는 전에는 오만하더니 지금은 어떻게 이리 공손하십니까?"라고 물었는데, 형수는 "지금 도련님의 지위가 높고 재물이 매우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걸 보고 소진이 남긴 말은 어찌 보면 인간의 본질을 잘 표현한 대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똑같은 사람인데 부귀해지자 친척이 나를 경외하고 가난할 때는 나를 경시하니,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만약 내가 낙양 근교의 좋은 밭 두 이랑만이라도 있었다면 설마 6국 재상의 인수를 찰 수 있었을까?
합종 연맹이 성립한 후 연 문후가 사망하고 연나라의 국상 분위기를 틈타 제나라가 급습을 해서 연나라의 성 10개를 빼앗았다. 이때 소진은 제나라 왕 앞에 나아가서 연나라의 성을 빼앗은 것을 축하하고, 이어서 갑자기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제나라 왕이 의아해 묻자 소진은 제나라가 연나라의 성을 빼앗은 것은 독초를 먹은 것과 같으며, 연나라를 뒤를 봐주고 있던 것은 다름아닌 연나라의 장인 국가인 막강한 진나라인데 이 사실을 알면 제나라를 침공할 것이라며 제나라에게 미리 조의를 표한다고 한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제왕은 깨달은 바가 있어 연나라에 성을 다시 반환하였고, 합종은 유지되었다.다만 당시에 소진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벼슬을 얻어내는 것을 보고 '여러 나라의 이름을 팔고 다닌다'는 비판도 받았다.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재상을 지냈다고는 하나, 딱히 어느 나라의 재상인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관계에 따라 물타기를 한다거나 다른 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또 다른 나라를 속이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동맹 자체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5]
소진은 결국 6국의 동맹이 깨진 이후로 발붙일 곳이 없어지자, 자신이 처음으로 관직을 얻었던 연나라로 돌아가서 다시 벼슬을 지내게 되었다. 연 역왕도 주변 신하들이 소진을 참소하자 그를 박대했지만, 소진의 설득에 넘어가 그에게 다시 벼슬을 내렸다.
그러던 와중에 제나라를 망쳐놓으라는 역왕의 밀명을 받고 제나라로 가게 되었다.[6]제나라 왕은 소진의 명성과 능력을 알고 있어서 그가 찾아오자 환대해주었다. 소진은 제나라에서 벼슬을 지내며 제나라 왕을 꼬드겨서 큰 토목 공사를 일으키고 재정을 탕진하게 하여 나라를 망치도록 부추겼다.
소진은 그런 음험하기 짝이 없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나라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뛰어난 말재주 덕분에 전혀 의심을 받지 않았다. 제민왕은 소진의 속내를 알지 못한 채 되려 그에게 큰 벼슬과 상을 내리며 총애했다. 그러던 중 어디서 굴러들어온 돌이 큰 대접을 받자 제나라의 한 대부가 소진을 시기하여 자객을 보냈는데 소진은 그의 집으로 숨어들어온 자객의 기습을 받아 치명상을 입고 만다. 결국 그는 부상으로 인해 얼마 가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되었다.
소진은 죽어가던 중에 제나라 왕에게 유언으로 자신이 죽거든 반역죄를 씌워서 시체를 거열형에 처해 거리에 내놓으면 자객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그대로 따르자 곧 자객이 왕에게 상을 받기 위해 스스로 'ㅋㅋ 내가 죽였는데' 하고 나섰고, 결국 배후에 있던 대부까지 적발해 처형한 왕은 죽어가면서도 꾀를 내어 원수를 잡은 소진의 지혜를 칭찬했다. 마지막까지 전국시대 대표 유세가다운 최후였다.[7]
하지만 위키피디아 등에 소진의 사망년대가 기원전 284년이라 했으나 그 근거는 없다. 제 민왕(재위 기원전 300~284)대에 죽었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고, 기원전 330년경부터 활동하기 시작했다면 20대에 활동을 시작했어도 이미 그는 70대의 노인이었다.
사마천은 〈소진 열전〉에서 그의 능력을 칭찬했다. 사실 6개의 나라를 홀로 동맹맺게 하고 그걸 유지하는 건 웬만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우였던 소대(蘇代)와 소려(蘇厲) 등도 나중에 유세가로 활동했다.[8]
3. 《사기》 기록의 모순
이상의 기록은 모두 사마천의 《사기》에 나와있는 내용이지만 후세의 연구에 의해 모순이 지적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소진은 이제 막 왕위에 오르고 상앙을 죽인 진 혜문왕의 앞에서 진나라의 영토는 한중·파·촉에 닿는다고 했다. 혜문왕이 즉위하고 상앙을 죽인 건 기원전 338년의 일이며, 소진이 혜문왕을 만난 건 330년대의 일이다. 그런데 진나라가 파·촉을 점령한 건 기원전 316년이며, 한중을 점령한 건 혜문왕이 죽기 1년 전인 기원전 312년의 일이다.
- 소진은 연 문후에게 진나라와 조나라가 싸워 진나라가 2번 이기고, 조나라가 3번 이겼다고 말하는데 연 문후가 사망할 때까지 진나라와 조나라가 직접적으로 부딪힌 적은 없었다. 또 연 문후는 조나라와 제나라를 강대국이라 평가했으나, 조나라가 강대국으로 성장한 건 연 문후 때의 조나라 군주인 조 숙후 사후의 일이다.
- 소진은 조 숙후와 만나 조나라를 산동의 국가 중 가장 강대하다고 말했으나, 위에서도 말했듯이 조나라가 산동의 강대국이 되는 건 조 숙후 사후, 조 무령왕 시기의 일이다. 애초에 당시 조나라는 위나라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피폐해진 상황이었다. 진짜 웃긴 건 연나라 왕에게 갔을 때 "진·조 두 나라가 진이 2번, 조가 3번 이겼는데 두 나라가 싸우느라 지쳐 당신이 무사할 수 있던 겁니다." 라고 말했던 것. 그러니까 연나라 왕에게 가서는 조나라가 약해졌다 하고 조나라에 가서는 조나라가 산동의 국가 중 가장 강하다고 한 것이다.
- 소진과 초 위왕이 만났을 때, 초 위왕은 소진에게 진나라가 파·촉을 병탄하고 한중을 넘본다고 말했으나 진나라가 파·촉을 병탄한 건 초 위왕 사후, 위왕의 아들인 초 회왕 시기의 일이었다. 초 위왕이 재위할 당시 진나라의 영토는 파·촉·한중은커녕 장안 일대에 머무르고 있었다.
- 애시당초 《사기》에 나온 소진의 주 활동시기는 기원전 330년대인데, 이 시기의 진나라에게는 다른 여섯 나라가 합종을 맺어야 할 정도의 위협적인 국력이 없었다.
- 또한 동생인 소대(蘇代)의 기록도 눈여겨볼 법하다. 사기에서 소대는 장평대전 당시 진나라의 재상이었던 범수를 설득하여 조나라의 멸망을 막았는데, 이때는 무려 기원전 260년이다! 소진이 330년대에 활동하였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이때 소대의 나이는 100세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또한 어부지리의 고사는 전국책이 원전인데, 연 소왕과 조혜문왕 시기의 이야기라고 한다.
4. 여담
소싯적에 공부할 때 졸음이 올 때마다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렀다고 한다. 여기서 자고현량(刺股懸梁)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현대 외교에서 소진의 합종책과 장의의 연횡책이 주목받고 있는데 2차대전 전후 서유럽과 호주, 뉴질랜드, 동아시아의 반공 국가[10]를 휘하에 두고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세계대전의 동지였지만 냉전의 적이 된 소련을 견제하고자 신생 독립국의 사회주의화를 저지하고 군사 개입도 주저하지 않는 식으로 대소 포위망을 구축했다. 이에 소련은 신생 독립국을 지원하면서 미국의 포위망에 대항했는데, 중소결렬을 계기로 미국이 중국과 수교 후 중국을 사실상 소련 중심 사회주의 진영에서 이탈시키면서[11] 미국은 냉전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고 여기에 소련의 실책이 거듭되면서 20세기 냉전은 소련 해체로 끝났다.
이후 초강대국 미국의 일방주의 패권을 저지하려면 다시금 연대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자각한 중국과 러시아는 2010년대 후반~2020년대에 들어 특히 미국이 신냉전 구도를 통해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려고 하자 다시금 손을 잡고 미국의 일방주의 패권에 대항하는 이란 등과 연계하여 일극 체제 대신 다극 체제를 주장하는 식으로 대항하고 있다. 튀르키예는 나토 회원국임에도 오히려 그 점을 역이용하여 전술한 반미 진영에 합류하려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물론 미국도 이런 대항의 흐름을 모를 리가 없으며 복합전이나 대리전을 불사하면서도 이 합종을 붕괴하려는[12] 연횡책으로 여전히 대응하고 있다. 21세기 세계 정세를 전국시대에 비유하자면 미국이 진나라이며 중국, 러시아, 이란, 인도, 라틴 아메리카, 튀르키예 등이 나머지 6국이라고 볼 수 있겠다.
5. 대중매체에서
5.1.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2·13 |
삼국지 13에서도 장의와 더불어 세 치의 혀로 유명하다. 능력치는 통솔력 90/무력 47/지력 97/정치력 90으로 90대를 3개나 보유하고 있는 완소급 무장이라 부락탈취와 동맹셔틀로도 악명이 높다. 장의가 없으면 무조건 손해보는 경우가 태반이라 혼자 가서 동맹에 포로반환까지 죄다 100%이므로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 중신특성은 적중작적으로, 장의가 가서 농락을 벌이면 충성도가 확 떨어진다. 군사중신으로 임명시키면. 혼자서 무쌍을 찍을 정도이니. 그 위용을 짐작할 만하다. 전법은 연환계. 특기는 상업6 / 문화3 / 훈련6 / 설파8 / 교섭9 / 언변8 / 견수6.
[1] 실제로 사마천의 《사기》〈소진 열전〉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근데 어디 명문가도 아니고, 평범한 집의 백수인데 천자의 대신들이 매우 잘 알고 있었다는 걸 보면 일단 유명하긴 한 거 아닌가?[2] 이때 문후가 소진에게 "진나라 그 까짓 것이 아무리 강해도 우리는 북쪽 끝자락에 있으니 어떻게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냐"고 하자 소진이 "연나라의 울타리와 같은 위나라와 조나라가 깨지면 울타리 안의 집(연나라)은 곧 함께 깨진다"고 답했던 일화는 유명하다.[3] 《삼국지연의》의 〈설전군유〉라는 대목에서 제갈량은 오나라의 중신들과 설전을 벌인다. 오나라의 논객 중의 한 사람인 보즐이 소진·장의처럼 우리를 말로 꼬시려고 온 거냐고 하며 힐책했을 때 제갈량은 소진과 장의를 칭찬하며 보즐을 역관광보냈다. "당신은 소진과 장의를 일컬어 말에만 능한 사람이라 하는데 소진과 장의가 호걸이라는 것을 모르는구려. 소진은 6개국 재상의 인장을 차고, 장의는 두 번 진나라의 재상을 지냈소이다. 그들 모두 나라를 바로세울 지모를 가졌었소. 강한 자를 두려워 하고 약한 자를 능멸하는 자들이나 창칼을 무서워 하는 자들과 비할 사람들이 아니오. 그런데 당신네는 조조의 허풍을 듣자마자 두려워 바로 항복하기를 조르는데 감히 소진과 장의를 비웃을 수 있소?(步子山以蘇秦、張儀為辯士,不知蘇秦、張儀 亦豪傑也。蘇秦佩六國相卬、張儀兩次相秦、皆有匡扶人國之謀、非比畏強凌弱、懼刀避劍之人也。君等聞曹操虛發詐偽之詞、便畏懼請降、敢笑蘇秦、張儀乎?)" 물론 정사에선 그런 거 없었다. 물론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가지는 위치를 본다면 저자인 나관중이 소진을 큰 인물로 봤다.[4] 그 천자는 이때 부하들을 보내 그를 위해 길을 쓸고 닦게 한다. 역관광을 탄 셈.[5] 애초에 6개국이 서로 이런저런 이해관계로 얽혀있던 관계였던 지라 하나로 뭉쳐 진나라를 오래 막기는 힘들었다. 진나라 또한 일대다수 구도를 깨기 위해 첩자와 뇌물을 뿌리기도 했고.[6] 《열국지》에서는 연나라 왕의 모후와 밀통하던 소진이 꼬리가 밟힐 것 같자 제나라를 망치겠다는 핑계를 대고 제나라로 도망갔다는 식의 서술이 되어 있다. 국내 학습만화인 세계대역사 50선에선 연왕이 알면서도 모른 체 넘어가주었으나 제 발 저린 소진이 자청하고 묵인만 하지 좋게 보지 않던 연왕은 순순히 허락해주는 것으로 나온다.[7] 다만 후에 소진이 정말로 제나라를 망치기 위해 공작을 펼쳤던 것이 드러나자 제나라 왕이 부들부들했다고 한다.[8] 소대 역시 형처럼 연나라와 제민왕을 오가며 벼슬을 지냈다. 장평대전 당시 범수를 설득하여 조나라의 멸망을 막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문제는 장평대전은 기원전 260년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9] 사실 사마천도 사기를 쓸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10] 일본, 한국, 대만 등.[11] 즉 중국을 미국의 파트너로 끌어들이는 연횡책을 구사한 것이다.[12] 기존 반미/비미 진영의 정권 붕괴를 다양한 방식, 다각도로, 때로는 보편적 문제(인권 등)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획책하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