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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곡자의 제자 | |||
방연 | 손빈 | 소진 | 장의 |
龐涓
? ~ 기원전 342년
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위(魏)나라의 장수이자, 병법가.2. 생애
귀곡선생의 밑에서 장의, 소진, 손빈과 함께 수학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중 장의, 소진은 처세술을 배웠으며, 손빈과 방연은 병법을 위주로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1][2]그중 손무의 손자(일 가능성이 있는) 손빈과 친해 나이가 많은 방연이 형이 되었다. 그러나 방연은 손자의 후예인 데다가 천재였던 손빈을 질투했다.
귀곡선생이 통칭 꽃점을 통해 손빈과 방연의 미래를 점쳐준 것으로 유명한데, 방연이 주변을 전부 뒤지고 다니면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가져온 반면, 손빈은 방안에 놓여진 꽃을 가져왔다. 방연이 가져온 꽃은 꽃잎이 12개였기에 귀곡선생은 방연에게 12란 숫자가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려줬다.[3]
본래 서자 출신으로 출세에 대한 강한 욕망이 있던 방연은 노력 끝에 10년 만에 위의 대장군이 되었는데, 이 즈음에 귀곡선생의 권유로 하산한 손빈이 어떻게 낙하산 좀 안 될까 하고 찾아온다. 동문수학한 친구를 어찌어찌 추천해서 요직에 앉혀놓자 주변 사람들이 그 꼴을 보다못해 그와 손빈의 사이를 이간질하기에 이르고, 결국 거기에 넘어가 손빈을 제나라의 스파이로 몰아 빈형(무릎 연골을 파내 앉은뱅이로 만드는 형벌.)+월형(발꿈치를 자르는 형벌. 제대로 걷는 것 힘들어진다.)+자자형(刺字刑: 이마에 죄목을 문신해 넣는 형벌. 이를 당하고 수치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에 처한 뒤 손빈에겐 "내가 말려서 사형은 못 시키고 이걸로 끝난 거임"이라고 얼버무리고, 손빈은 이를 고맙게 여겨 가문에 전해지던 손자병법을 방연에게 저술해주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때 정말로 제에서 온 세작들이 그를 제로 빼낼 생각을 해 손빈에게 진상을 알려주고,[4] 손빈은 광인 흉내를 내며 방연에게 버림받고 제로 탈출, 대장군이 된다.[5]
이후 방연은 배운 걸 최대한 활용하여 이름값을 하여 위를 당대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손빈에게 발린 것만 부각되어 그렇지(줄어드는 아궁이[6]를 비롯해서) 제를 이긴 적도 많았으며[7] 무엇보다도 방연은 조나라 수도 한단을 함락시킨 인물이다. 그러다가 대장군이 된 지 10년이 지나 귀곡선생을 떠난지 20년째, 손빈과 방연은 마릉의 전투에서 조우하게 된다. 방연은 앉은뱅이 손빈을 무시하고 방심했고, 후퇴하는 손빈의 제나라 군사들을 쫓아 협곡으로 유인된 끝에 야밤에 어떤 글귀가 적힌 나무를 보게 되었다. 방연은 글을 읽기 위해 불을 켤 것을 명했고 거기에는 "방연은 이 나무 밑에서 죽는다"고 써 있었다. 이후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고 방연과 위나라 군사들은 그 자리에서 모조리 사살되었다고 전해진다.(사기 위세가)
다만 사기의 내용과는 달리 1972년 뒤늦게 발견된 손빈병법에서는 마릉 전투에서 방연을 사로잡았다고 기술되어 있어 방연이 실제로 전사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그 손빈병법조차 실제로 손빈이 기록한 것인지 진위여부가 불분명하기 때문.
3. 평가
3.1. 방연 옹호론
많은 독자와 후세사람이 손빈을 배신한 방연의 최후에 대하여 통쾌하게 여기고 손빈을 배신한 방연의 행동을 비판하지만 막상 전국시대를 연구한 학자들은 방연의 행동을 옹호하면서 오히려 방연이 손빈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을 비판한다.당시 전국시대는 약육강식의 시대로 강대국이 약소국을 먹고 먹히는 시대였고, 한 나라안에서도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방연은 자신의 능력이 손빈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손빈이 모국인 제나라로 돌아가면 방연의 조국인 위나라가 위험해진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손빈이 위(魏)나라에 등용되면 자신의 설 곳이 없어진다. 거기다 자신 혼자 설 곳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혈족 그리고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의 설자리도 사라지게 되는 것은 불보듯 뻔하니 손빈을 제거하여 위나라와 자신의 위험을 사전에 차단한 것으로 냉혹하였던 전국시대에서 살아남고자 한 방연의 행동은 일방적으로 욕할 수 없다. 오히려 자신에게 해가될 존재를 사전에 죽이는 것은 전국시대의 생존전략으로 위나라 재상 공숙좌는 상앙을 등용하지 않을 바에는 죽일 것을 왕에게 청하였고 이를 무시한 위혜왕은 훗날 상앙의 변법으로 강해진 진나라에게 영토를 상실하게 되면서 상앙을 죽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에 큰 공을 세운 이사도 한나라의 한비자가 진나라의 통일전쟁을 막고자 진나라에 온 것을 알고 한비자를 제거하여 한나라의 마지막 희망을 무제거한 사례도 있다. 현재도 타국의 뛰어난 학자가 자국의 안보에 위험이 된다고 판단하면 제거해 버리듯이 방연은 자신의 라이벌을 제거하는 동시에 자국의 안위를 챙긴 것으로 현재 중국역사학자들은 판단한다.
3.2. 방연 비판론
당시 전국시대는 약육강식의 시대이며 강대국이 약소국을 먹고 먹히고 심지어 자국 내에서도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여졌으나 방연의 행적들은 치열했던 전국시대의 인물임을 감안해봐도 상당히 그릇된 판단을 하였으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속한 위나라도 망친 자충수의 연속이였다.우선 손빈에 대해서는 방연이 전적으로 잘못 대한 것이 맞다. 뛰어난 인재가 적대 국가로 들어간다면 당연히 제거를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문제는 이것은 그 다음의 수이고 대부분 뛰어난 인재를 자신의 편으로 회유해 자신이 속한 세력을 위해 싸우게 하는 것을 우선시 하였다.[8] 그리고 이조차 '제거'가 아니라 현대보다 명예가 더 중시되던 그 시대에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들고 연명만 되는 상태로 놓아둔 것이다. 정말로 나라를 위해 제거하려고 했다면 그냥 확실하게 생명만을 박탈하는 게 제일이다. 게다가 감시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손빈이 고국인 제나라로 가서 등용되는 사태까지 초래한지라 '위협요소[9] 제거'는 결코 되지 않았고 방연이 주장한 '제나라 인이니 제나라를 위해 일할 위협요소'가 직접 고국에서 더 넓고 안전한 입지를 갖고 고국을 위해 일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져 '위협요인 극대화'만 초래했다.
상앙만 해도 위나라의 재상 공숙좌 본인도 우선 자신의 왕에게 상앙을 크게 써줄 것을 줄곧 요청하였다. 하지만 위나라 왕이 이를 거부한 것이다. 결국 공숙좌도 어쩔 수 없다 생각되어 포기하고 왕에게 상앙을 기용하지 않으실 거면 차라리 후환이라도 없게 상앙을 제거하라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다.[10] 공숙좌의 사례로써 방연이 정당화되려면 방연이 공숙좌처럼 '손빈을 중용하거나 중용하지 않으려면 타국이 중용할 수 없게 처형하라'는 상소를 올렸음에도 국왕이 기각하고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들고 국왕 자신의 의지로 극형을 내린 경우에나 가능할 것이다.
손빈은 위나라로 간 것은 전적으로 방연의 초대에 응해 위나라로 간 것이다. 즉 손빈은 방연과 위나라가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위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후 방연은 손빈에게 억지로 제나라의 첩자라고 혐의를 뒤집어 씌워 처벌을 받게 하면서 선을 넘어버렸다. 그리고 이후 손빈을 모욕하기 위해 손빈을 살려두고 자신이 거둬들였다.
즉 손빈과 방연 사이에 흐르던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시작은 가만히 있던 손빈을 먼저 자극하고 건드린 방연이었던 것. 관중과 포숙아처럼 평화롭게 공존한 사례도 분명 있고, 군주의 입장에서는 인재가 다다익선인 만큼, 무조건 너 죽고 나 살자는 정글법칙만을 주장하는 건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사의 경우 아예 후환이 없게 한비를 죽였을 뿐이고 의도적으로 심적인 고통을 주려고 살려두는 짓은 하지 않았고 사망과정에서 특별히 고통을 주는 형벌을 한비에게 동반시킨 기록은 아직까지 확인되고 있지 않고 있다. 또한 상기한 공숙좌도 상앙이 뛰어난 인재니 신하로서 크게 쓰려면 쓰고 아니면 특별한 고통을 주지 말고 생명만 거두어 타국에서 쓰이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일 뿐 정신적 고통을 주기 위해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들고서 연명을 시키라는 의미로 한 말이 절대 아니다. 그저 명예가 현대에 비해 중시되던 시대에 동문수학하던 사람을 심리적으로 더 고통을 주려고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들고서 연명만 시킬 속셈으로 살려둔 대가를 본인 자신의 생명 뿐 아니라 본인의 소속 국가의 국력에 큰 타격을 주는 굉장히 비싼 대가로 치른 셈이다. 상기한 이사-한비자, 공숙좌-상앙의 관계에서 이사와 공숙좌가 주도했던 계획과는 전혀 다른 경우로 '타국에서 쓰일 위험 방지 차원의 제거'조차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다. 본인이 그저 남에게 심적 고통을 주기 위해 연명을 시키는 바람에 화근을 남겨버렸고 그 화근은 '타국에서 기용'으로 이어졌으며 그것은 모두 '고통을 주기 위한 연명을 결정한 방연 자신이 초래한 일'이었다. 그리고 방연옹호론에 언급된 이사-한비자, 공숙좌-상앙의 사례들은 모두 그 자체로 반박이 가능한게 이사는 초나라 출신, 상앙은 위(衛)나라 출신이 진(秦)나라에 가서 본인의 모국이 아닌 본인을 중용한 나라의 국력신장을 위해 전념한 사례에 해당한다. 그리고 공숙좌는 엄연히 본인 입장에서 타국 태생인 위(衛)나라 출신 인물을 본인 소속 국가인 위(魏)나라를 위해 중용하거나 확실하게 제거 둘 중 하나를 하라는 메시지며 한비자는 기본적으로 당시 이사를 등용하던 국가가 시행하고 있고 실제 효과를 거두고 있던 '각 나라의 내부역량을 악화시키기 위해 각 나라의 간신들에게 뇌물을 주는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입장이었기에 이사가 한비를 처형을 주청한 이유가 '더 뛰어난 인재인 한비에 대한 이사 본인의 개인감정'이 요인인가 아니면 '실제 효과가 있는 외교정책을 유지하기 위한 진나라 관료라는 신분'이 요인인가가 논쟁대상이며 당시 이사가 댔던 '한나라 공자니 한나라를 위해 일할 것이다.'는 주장은 논쟁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뛰어난 인재가 들어오는 것에 자신이 속한 세력에서 자신이 소외될 것을 우려하여 인재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은 보통 인의 장막이라고 불리는데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군주나 지도자가 결코 처해서도 안되며 이러한 상황이 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철저하게 금기시 되는 사항이다.[11] 한 집단이나 세력이 계속해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뛰어난 인재들이 유입이 되어야만 하며 그렇지 못하게 되는 것은 마치 물이 새로운 물이 유입되지 못하고 계속 고여있는 상태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고인 물은 썩게되기 마련인데, 이런 관점에서 방연은 오로지 자기자신의 안위를 위해 자기가 몸 담고 있던 위나라도 저버리고, 동문수학한 자신의 친구마저 저버린 인간이다.[12] 약육강식의 법칙을 들면서 이런 방연이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똑같은 논리로 약육강식의 법칙대로 행동한 이완용도 틀리지 않은 게 된다.
또 방연이 취한 전략 역시 위나라의 국력을 소모하는 데 일조했다. 위문후와 오기 시절의 주요 전략은 위나라를 중심으로 삼진이 연합하여 초와 제를 견제하는 와중에 하서 지역을 공략하여 진나라 땅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지도를 보면 관중에서 중원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황하와 위수가 만나는 지점, 즉 효산 부근을 지나는 길밖에 없다. 당시 황하와 위수가 만나는 지역은 진(晉)이 차지하고 있다가 진의 분열 이후 위(魏)가 차지하고 있었다. 진(秦)으로서는 위를 꺾지 못하면 관중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며 위로서는 진(秦)이 차지하고 있는 관중을 점령하면 관중과 하동 땅을 바탕으로 삼진을 통합하여 초와 제를 공략하면 되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오기가 축출된 이후 위나라는 조, 한을 공격하여 삼진의 연합을 깨트리고 동쪽으로 진출하여 제나라와 겨루는 등 전선을 확대하는 행동을 보였다. 단기적인 관점에서 위가 공략한 지역은 당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나쁜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관중 땅을 먹고 중원의 인구를 이주시켜 개발하는 것보다 못한 행위일뿐더러 안 그래도 천하의 중심에 있어 잠재적인 적이 많은 위나라의 전선만 확대한 것이었다. 방연 역시 오기의 전략과 반대로 동방으로 진출하는 전략을 취했다. 여러 지역에서 전술적인 승리를 거뒀으나 동쪽에서는 제나라한테 마릉에서 대패하고 서쪽에서는 진나라의 상앙한테 하서 지역을 빼앗기면서 위나라의 전성기는 끝나고 진나라한테 심심하면 처맞는 샌드백이 되고 만다.
다만 이 부분은 방연보다는 양혜왕의 책임이 큰데 앞서 말했듯 원래 위나라는 삼진과 친하고 진, 초, 제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문제는 그 사이 좋다는 삼진과의 관계는 이미 위무후 때부터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고 또한 양혜왕 시기는 위나라의 내부적 모순이 벌어지기 시작한 때였는데 특히 위문후 시기에 영입된 인재들의 보수화된 후손들과 새로 유입되는 인재간의 갈등이 컸다. 양혜왕은 이를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문제는 계획적으로 한게 아니라 아무에게나 시도하다 보니 적이 많아졌다. 즉 방연이 아니더라도 양혜왕 스스로가 그런 행위를 추구하고 있었다.
4. 대중매체에서
삼국지 12,13 |
삼국지 12에서는 전국칠웅에서 위나라 소속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력 79/무력 72/지력 82/정치력 78로 균형잡힌 능력치이지만,[13] 전법이 전공속공이라서 백도어용으로 쓸 만하다. 참군신세가 된 손빈에 비하면 전장에선 더 나은 편이지만 초일류 참군과 이류 장군 중에 이류 장군인 방연을 택할 사람은 거의 없을 듯. 일러스트는 손빈이 매복시킨 복병들에게 당해 죽어가면서 "결국 그 꼬맹이가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구나!"라고 탄식하는 장면이다. 몇몇 다른 무장들도 마찬가지지만 최후의 모습을 묘사한 일러스트다보니 싸움에 이겼을 때나 즐거운 일이 있을 때나 항상 화살에 맞고 절규하는 모습만 보인다. 역사 고증대로 혐오무장은 손빈. 능력치는 전체적으로 실제 삼국시대 장군 중 전예와 복붙 수준이다.
삼국지 13에서도 능력치는 전작과 같게 나온다. 중신특성은 없고 전법은 돌진지휘. 병과는 B/A/B 특기는 상업3 / 훈련3 / 언변5 / 신속5으로 내정, 전투 모든 면에서 쓸 만하다. 귀곡자의 제자 중 무력이 심각하게 낮은 손빈, 지력과 정치만 높은 장의보다 능력치 총합은 앞서지만 귀모가 거의 만렙(8)이라 병격 맞을 일이 없는 손빈, 말빨 관련 특기 3개를 전부 마스터한 장의보다 활용도는 낮은 편.
권교정 단편 만화 붕우에서는 새롭게 각색되었다. 방연이 손빈을 아끼던 선배였으나, 방연이 사랑하여 맺어진 아내가 손빈이 워낙 능력좋아 남편 출세길을 가로막을 존재라고 하여 음해하여 모함해 손빈을 그렇게 만든다. 손빈은 이걸 방연 탓으로 오해하여 증오해 결국 역사대로 방연을 그렇게 죽게한다. 정작 방연은 화살에 벌집이 되어 죽어갈 때, 미소지으며 손빈이 이름을 날릴 걸 반가워하며 편히 죽는다. 이 단편에서 미망인이 된 방연의 아내가 당신을 그렇게 모함한 것은 죽은 남편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했다라고 모든 사정을 쓴 편지를 보내지만, 이 편지를 가지고 가던 하인이 도적에게 죽는 통에 끝내 손빈은 영원히 방연이 자신을 모함해 이렇게 장애인으로 만들었다고 여겼다.
TV 프로그램 천일야사에선 마지막에 손빈이 직접 나타나 네가 그토록 원했던 손자병법의 핵심은 싸우는 걸 피해야 하지만, 굳이 싸운다면 적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 거라고 타이르듯이 빈정대자 닥치라고 욕하면서 칼을 뽑아들어 덤비나 했지만, 자결하려는 것이었고 결국 내가 또 네 이름을 드높이는구나..라고 힘없이 중얼거리다 죽는다. 이걸 본 손빈 왈 : 자네는 실력은 있지만, 질투와 탐욕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것 같네. 적의 정세를 살피지 못하면 그 싸움은 지는 것이라는 걸 왜 모르는가.
고우영의 십팔사략에선 방연은 손빈이 귀곡학당에 들어왔을 때부턴 손빈을 미워했지만, 보다 더 크게 굴욕을 주기 위해 일부러 좋은 선배 행세를 한다. 이후 귀곡선생이 가지고 있던 손자병법을 몰래 훔쳐보다 스승에게 들켜 파문을 당하고,[14] 귀곡학당을 떠나면서 손빈에게 하산하면 위나라로 자신을 찾아오라 하며 떠난다. 이후 손빈도 귀곡학당을 떠나 방연이 있는 위나라로 가서 방연을 만나지만 방연은 그런 손빈에게 누명을 씌워 앉은뱅이로 만들어 버린 뒤 노골적으로 손빈에게 굴욕을 주는 등 본색을 드러냈다고 서술하고 있다. 손빈이 손자병법을 재구성한 손빈병법을 쓴 것도 방연이 죽은 이후라 적고 있다.
여기서는 방연이 죽을때, 이런 말을 하고 죽었다고 나온다.
드디어 그 꼬마 녀석이 천하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구나....[15]
[1] 그러나 시기상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는데 밝혀진 바로는 장의는 소진보다 한 시대 위의 인물이고 손빈과 방연은 장의보다 한 시대 위의 인물이다. 손빈과 방연은 진 효공 때의 인물이며 장의는 효공의 아들인 진 혜문왕 때의 인물이고 소진은 혜문왕의 아들인 진 소양왕 때의 인물이다. 즉 이들을 가르친 귀곡자가 동일인일 가능성이 희박하며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있다.[2] 그러나 장의, 소진, 손빈, 방연 모두 시기적으로 기원전 300년대에 활동했던 사람들이며 생몰년만을 봐도 장의가 기원전 342년, 소진의 사망년도 알 수 없음, 방연이 기원전 342년, 손빈이 기원전 316년이다. 태어난 해가 유일하게 알려진 손빈이 기원전 382년이다. 또한 방연이 손빈과 붙은 계릉 전투가 기원전 353년이므로 이때의 손빈의 나이는 38세이며 방연의 태어난 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손빈보다 나이가 약간 연상이라 중국 학계에서 40대 초반으로 유추되고 있다. 그리고 계릉 전투가 있었던 353년에 이미 장의와 소진은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네 명의 스승인 귀곡자가 동일인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소진의 사망년도가 기원전 284년인데 이는 위키피디아 등에 소진의 사망년대가 기원전 284년이라 된 것이 그대로 여과없이 옮겨진 것으로 역사 사료에서 소진의 사망년도는 확인된 바 없다. 제민왕(재위 기원전 300-284)대에 죽었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고, 소진의 합종책이 기원전 333년에 이루어지고 당시 합종책에 가담한 국왕 중 제민왕이 있었으며 제민왕은 기원전 330년에 재임을 시작했고 소진의 합종책이 달성되는 시기가 3년으로 알려졌으므로 소진이 기원전 330년경부터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추측되고 있으며 이때 최대한 젊게 20대에 활동을 시작했다고 봐도 이미 사망했다고 알려진 기원전 284년은 그는 70대의 노인이었다. 그리고 소진은 사기에서 귀곡자에게 공부를 마치고 나서 백수로 지내던 시기가 있으므로 이걸 감안하면 사망 당시에 80대가 된다. 소진은 제민왕 사망 이전에 사망했다는 사기 기록이 있으므로 소진이 기원전 284년 사망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이들 네 명은 동일한 귀곡자라는 스승을 둔 사형제라는 가능성이 크다.[3] 어떤 책에서는 세부적인 부분만 다르다. 방연이 처음 꽃을 찾으러 나갔을 때 막 발견한 것이 수수한 들풀인 마두령이었는데, 그것이 자신의 원대한 꿈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다른 꽃을 찾다 못 찾아 마두령을 가져갔다고도 한다. 마두령은 한 번에 열두 송이의 꽃을 피우므로 12년간 부귀를 누릴 것이라 해석되었다. 소설 열국지에서는 더하여 방연은 지혜로워서 남에게 잘 속지는 않겠지만 남을 절대 먼저 속이지 말라며 남을 먼저 속이면 그 행보가 인과응보가 되어 남에게 속아서 죽게 될 것이라고 충고한다.[4] 고우영 열국지에선 방연의 부관 중 손빈을 흠모한 부관이 방연의 진실을 알고 "책을 저술하지 마십시오! 방연은 당신을 질투해서 책이 완성되는 날 당신을 죽이려고 칼을 갈고 있습니다!"라고 얘기한다.[5] 손빈의 고향인 데다 무엇보다도 제는 손빈이 위왕의 노여움에 의해 처벌을 당했기에 이후 분쟁의 소지가 되더라도 위나라로부터 손빈을 보호해주고 지켜줄 수 있는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매우 중요한 것인데 당시 위는 전국 칠웅 중에서도 국력이 최강인 패권국이었다. 당시 제나라도 초나라와 같이 위나라에 위협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위나라로선 제나라를 무시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제나라는 예전부터 위를 탐탁지 않아 했다.[6] 감조유적(減竈誘敵)/감조지계(減竈之計)[7] 당장 기원전 353년 위위구조 계책에 당해 계릉 전투에서 손빈이 이끈 제나라 군대에게 패배한 방연은 그 직후 기세를 타고 자국 영토인 양릉(襄陵)을 포위한 제, 송, 위 연합군을 상대하게 되는데, 한(韓)나라 군대와 연합해 이를 다시 격파하고 제나라 측의 강화를 이끌어냈다.[8] 삼국지연의에서 속 좁은 놈이라고 알려진 주유도 우선은 제갈량을 오나라에 회유하려는 시도부터 하고, 그게 거부당한 뒤에야 제갈량을 제거하려고 했다.[9] 당시 춘추전국시대에 통용되던 관념조차 아니며 객관적으로 입증도 안된 방연 본인의 주장이다.[10] 이 공숙좌라는 사람은 언급되는 경우가 보통 두 경우인데 이 사람이 바로 위나라 전성기가 끝나기 전의 재상이라는 것과 중국 역사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낸 두 걸물 오기와 상앙과 연관된 인물로서이다.[11] 아예 이러한 것에 대해 망국의 징조라고 하며 학을 떼며 증오하는 사람들도 많다.[12] 아이러니하게도 방연 시대의 위나라가 딱 이 꼴이었다. 위나라는 위문후 시절만 해도 각국에서 여러 인재를 받아들이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써서 국력을 빠르게 증강시켰는데 방연이 활약한 양혜왕 대에 이르자 그 때의 인재들의 후손들이 위나라에 눌러앉아 기득권화된 채 새 인재의 유입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방연 역시도 외지에서 왔으면서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이다.[13] 손빈의 경우 무력은 방연보다 훨씬 낮지만 나머지 능력치는 방연보다 높다.[14] 이때 "역시 출생이 그런 놈은 할 수 없구나"라며 방연의 출신 성분을 가지고 심한 모욕을 주는 건 덤. 이런 모습은 모든 제자를 사랑하는 열국지의 귀곡선생과 비교해 전혀 다른 인물이라 봐도 된다.[15] 참고로 이희재가 감수한 사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가 손빈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했구나..라고 비슷하게 내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