倡后 창후 | ||
<colbgcolor=#4169E1> 출생 | 조나라 | |
사망 | 기원전 228년 조나라 | |
재위(왕후) | 왕후 | 기원전 236년 |
재위(태후) | 태후 | 기원전 236년~ 기원전 228년 |
성 | 알 수 없음 | |
씨 | 창(倡) | |
휘 | 알 수 없음 | |
부모 | 알 수 없음 | |
부군 | ?(첫 남편), 조 도양왕, 춘평군(사통) | |
자녀 | 조유류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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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나라의 왕후. 무려 창기에서 태후로까지 나름대로 입지전적인 출세를 했지만 좋지 못한 행실을 일삼았으며 결정적으로 곽개와 함께 이목을 죽게 하여 조나라의 멸망에 일조한 여인이다.2. 생애
본디 조나라 도읍인 한단의 창기 출신으로서 도양왕과 만나기 전에 이미 한 번 결혼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집안을 망쳤다고 한다.[1] 여튼 이렇게 다시 홀몸이 되고 나서 도양왕을 만났다고 하는데 아들인 조유목왕의 출생년도가 기원전 245년이니 아마 도양왕이 태자 시절에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2]본격적으로 창후가 등장하는 것은 도양왕 말년으로 이 때에 도양왕은 그녀를 왕후로 삼으려 했는데 이 때에 당시의 상방인 이목이 나서서 창후가 이전에 한 집안을 망친 일이 있음을 예로 들어 반대하였으나 도양왕은 내가 정치를 잘 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며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도양왕은 아얘 태자마저 기존에 있던 조가를 쫓아내고 창후 소생의 조천을 태자로 삼았으며[3] 그해에 도양왕이 사망하니 조천이 조나라의 왕이 되니 그가 바로 조유류왕이며 창후는 태후가 되었다.[4]
그러나 태후가 된 창후는 춘평군과 간통하였으며 진나라의 뇌물을 받았으며 그녀의 일족이 국정을 농단하는 등 악업을 쌓아나갔다.
한편 창후가 왕후가 되는 과정에서 이목이 반대한 일로 창후와 유류왕이 이목을 싫어하긴 하였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것이 폭발하지 않았던지 유류왕 재위 초반에는 이목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무안군에 봉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진나라가 본격적으로 천하통일을 시도하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금이 간다.
진나라는 첫 발판으로 조나라를 택해서 4차례에 걸쳐 조나라를 침공했지만 이목의 활약으로 저지당했고[5] 이에 진나라는 울료의 제안을 받아들여 육국의 내부에 분란을 일으키기로 했고 이 작전은 성공해서 기원전 230년 한나라가 멸망했고 진나라는 다시 조나라로 방향을 틀었다.
한편 당시 조나라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기원전 231년에는 지진이 일어났으며 기원전 230년에는 대기근이 들어 '진나라는 웃고 조나라는 운다'는 노래가 유행하는 지경이었다.[6] 하지만 아무리 장평대전의 후유증으로 쇠약해졌다고는 하나 앞서 진나라의 4차례에 걸친 침공을 막아낸 저력은 어디 가지는 않았던지 이목이 이끄는 조나라군은 진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에 진나라는 당시의 상방이던 곽개를 구워삶았고 곽개는 이목을 모함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일전에 왕후가 되기 전에 이목의 반대를 받은 원한을 가진 창후까지 개입하였고 결국 유류왕은 이목의 병권을 회수하려고 했는데 이목이 거절하자 그를 참살했고 이에 사마상 또한 나라를 떠나고 만다.
이렇게 창후 입장에서는 속시원한 복수를 했지만 당장 눈앞에 수십만의 적군이 드글드글한 상황에서 최전방 사령관을 제거한 것은 옳은 결정일 리가 없었다. 이목과 사마상을 대신해 조총과 안취가 지휘하게 되었으나 그들의 능력은 이목과 사마상만 하지 못했다. 결국 기원전 228년에 진군은 총공세를 펼치니 조총이 전사하고 안취가 도망쳤으며 이내 수도인 한단이 포위되었다.
그리고 이 때에 진나라에 매수되어 있던 곽개가 유목왕에게 항복을 권했고 결국 기원전 228년에 조나라는 멸망했다. 항복한 유류왕은 유배되었으며 거기서 병을 얻어 17세의 나이에 사망하였고 창후는 나라가 멸망하기 전, 그 일족과 함께 망국의 죄가 물어져 대부들에 의해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