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2:15:22

경순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신라의 국왕에 대한 내용은 경순왕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경순양함의 준말에 대한 내용은 경순양함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운대 28장
{{{#!wiki style="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margin: 0 -10px;"
{{{#ece5b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181818,#e5e5e5
고밀후

등우
광평후

오한
교동후

가복
호치후

경엄
옹노후

구순
무양후

잠팽
양가후

풍이
격후

주우
영양후

채준
약양후

경단
안평후

갑연
안성후

요기
동광후

경순
낭릉후

장궁
양허후

마무
신후

유륭
전초후

마성
부성후

왕량
축아후

진준
참거향후

두무
곤양후

부준
합비후

견담
회양후

왕패
아릉후

임광
중수후

이충
괴리후

만수
영수후

비동
창성후

유식
산상후

왕상
고시후

이통
안풍후

두융
선덕후

탁무
}}}}}}}}}}}}}}}

후한서(後漢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권 「광무제기(光武帝紀)」 2권 「명제기(明帝紀)」 3권 「장제기(章帝紀)」
유수 유장 유달
4권 「화제상제기(和帝殤帝紀)」 5권 「안제기(安帝紀)」 6권 「순제충제질제기(順帝沖帝質帝紀)」
유조 · 유륭 유호 유보 · 유병 · 유찬
7권 「환제기(桓帝紀)」 8권 「영제기(霊帝紀)」 9권 「헌제기(獻帝紀)」
유지 유굉 유협
10권 「황후기(皇后紀)」
곽성통 · 음여화 · 명덕황후 · 장덕황후 · 효화황후 · 등수 · 염희 · 양납 · 양여영 · 등맹녀 · 두묘 · 효인황후 · 효령황후 · 영사황후 · 복수 · 조절 · 무양장공주 · 열양공주 · 관도공주 · 육양공주 · 역읍공주 · 획가장공주 · 평양공주 · 융려공주 · 평지공주 · 심수공주 · 평고공주 · 준의공주 · 무안공주 · 노양공주 · 낙평공주 · 성안공주 · 무덕장공주 · 평읍공주 · 음안공주 · 수무장공주 · 공읍공주 · 임영공주 · 문희공주 · 무양장공주 · 관군장공주 · 여양장공주 · 양안장공주 · 영음장공주 · 양적장공주 · 만년공주
※ 사마표의 속한서는 志에 해당. 후한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3><tablewidth=100%><tablebgcolor=#a11><width=50%> 11권 「유현유분자열전(劉玄劉盆子列傳)」 ||<-3><width=50%> 12권 「왕유장이팽노열전(王劉張李彭盧列傳)」 ||
유현 · 유분자 왕창 · 유영 · 방맹 · 장보 · 왕굉 · 이헌 · 팽총 · 노방
13권 「외효공손술열전(隗囂公孫述列傳)」 14권 「종실사왕삼후열전(宗室四王三侯列傳)」
외효 · 공손술 유인 · 유량 · 유지 · 유흡 · 유사 · 유순 · 유가
15권 「이왕등내열전(李王鄧來列傳)」 16권 「등구열전(鄧寇列傳)」 17권 「풍잠가열전(馮岑賈列傳)」
이통 · 왕상 · 등신 · 내흡 등우 · 구순 풍이 · 잠팽 · 가복
18권 「오갑진장전(吳蓋陳臧列傳)」 19권 「경엄열전(耿弇列傳)」 20권 「요기왕패채준열전(銚期王霸祭遵列傳)」
오한 · 갑연 · 진준 · 장궁 경엄 요기 · 왕패 · 채준
21권 「임이만비유경열전(任李萬邳劉耿列傳)」 22권 「주경왕두마유부견마열전(朱景王杜馬劉傅堅馬列傳)」
임광 · 이충 · 만수 · 비동 · 유식 · 경순 주우 · 경단 · 왕량 · 두무 · 마성 · 유륭 · 부준 · 견담 · 마무
23권 「두융열전(竇融列傳)」 24권 「마원열전(馬援列傳)」 25권 「탁노위유열전(卓魯魏劉列傳傳)」
두융 ,두헌, 마원 탁무 · 노공 · 위패 · 유관
26권 「복후송채풍조모위열전(伏侯宋蔡馮趙牟韋列傳)」 27권 「선장이왕두곽오승정조열전(宣張二王杜郭吳承鄭趙列傳)」
복담 · 후패 · 송홍,송유, · 채무 · 풍근 · 조희 · 모융 · 위표 선병 · 장담 · 왕담 · 왕량 · 두림 · 곽단 · 오량 · 승궁 · 정균 · 조전,조계,
28권 「환담풍연열전(桓譚馮衍列傳)」 29권 「신도강포영질운열전(申屠剛鮑永郅惲列傳)」 30권 「소경양후낭의양해열전(蘇竟楊厚郞顗襄楷列傳)」
환담 · 풍연 신도강 · 포영,포욱, · 질운 소경 · 양후 · 낭의 · 양해
31권 「곽두공장염왕소양가육열전(郭杜孔張廉王蘇羊賈陸列傳)」 32권 「번굉음식열전(樊宏陰識列傳)」
곽급 · 두시 · 공분 · 장감 · 염범 · 왕당 · 소장 · 양속 · 가종 · 육강 범굉 · 음식
33권 「주풍우정주열전(朱馮虞鄭周列傳)」 34권 「양통열전(梁統列傳)」 35권 「장조정열전(張曹鄭列傳)」
주부 · 풍방,풍석, ,유희, · 우연 · 정홍 · 주장 양통 장순 · 조포 · 정현
36권 「정범진가장열전(鄭范陳賈張列傳)」 37권 「환영정홍열전(桓榮丁鴻列傳)」 38권 「장법등풍탁양열전(張法滕馮度楊列傳)」
정흥 · 범승 · 진원 · 가규 · 장패 환영,환언, ,주총, · 정홍 장종 · 법웅 · 등무 · 풍곤 · 도상 · 양선
39권 「유조순우강유주조열전(劉趙淳于江劉周趙列傳)」 40권 「반표열전(班彪列傳)」
유평 · 조효 · 순우공 · 강혁 · 유반,유개, · 주반 · 조자 반표
41권 「제오종리송한열전(第五鍾離宋寒列傳)」 42권 「광무십왕열전(光武十王列傳)」
제오륜 · 종리의 · 송균 · 한랑 유강 · 유보 · 유강 · 유연 · 유언 · 유영 · 유창 · 유형 · 유형 · 유경
43권 「주악하열전(朱樂何列傳)」 44권 「등장서장호열전(鄧張徐張胡列傳)」 45권 「원장한주열전(袁張韓周列傳)」
주휘 · 악회 · 하창 등표 · 장우 · 서방 · 장민 · 호광 원안 · 장포 · 한릉 · 주영
46권 「곽진열전(郭陳列傳)」 47권 「반양열전(班梁列傳)」
곽궁 · 진총 반초 · 양근
48권 「양이적응곽원서열전(楊李翟應霍爰徐列傳)」 49권 「왕충왕부중장통열전(王充王符仲長統列傳)」
양종 · 이법 · 적포 · 응봉 · 곽서 · 원연 · 서구 왕충 · 왕부 · 중장통
50권 「명제팔왕열전(明帝八王列傳)」 51권 「이진방진교열전(李陳龐陳橋列傳)」
유건 · 유선 · 유공 · 유당 · 유연 · 유창 · 유병 · 유장 이순 · 진선 · 방참,시연, · 진귀 · 교현
52권 「최인전(崔駰傳)」 53권 「주황서강신도열전(周黃徐姜申屠列傳)」 54권 「양진열전(楊震列傳)」
최인 주섭 · 황헌 · 서섭 · 강굉 · 신도반 양진,사마포, ,마영,
55권 「장제팔왕열전(章帝八王列傳)」
유항 · 유전 · 유경 · 유수 · 유개(劉開) · 유숙 · 유만세 · 유승
56권 「장왕충진열전(張王种陳列傳)」 57권 「두난유이유사열전(杜欒劉李劉謝列傳)」 58권 「우부갑장열전(虞傅蓋臧列傳)」
장호 · 왕공 · 충고 · 진구 두근 · 난파 · 유도 · 이운 · 유유 · 사필 우후 · 부섭 · 갑훈 · 장홍
59권 「장형열전(張衡列傳)」 60권 「마융채옹열전(馬融蔡邕列傳)」 61권 「좌주황열전(左周黃傳)」
장형 마융 · 채옹 좌웅 · 주거 · 황경
62권 「순한종진열전(荀韓鍾陳列傳)」 63권 「이두열전(李杜列傳)」 64권 「오연사노조열전(吳延史盧趙列傳)」
순숙 · 한소 · 종호 · 진식 이고,이섭, ,조준, · 두교 오우 · 연독 · 사필 · 노식 · 조기
65권 「황보장단열전(皇甫張段列)」 66권 「진왕열전(陳王列傳)」
황보규 · 장환 · 단경 진번 · 왕윤
67권 「당고열전(黨錮列傳)」
유숙 · 이응,이수, · 두밀 · 유우 · 위영 · 하복 · 종자 · 파숙 · 범방 · 윤훈,윤목, · 채연 · 양척 · 장검 · 진상 · 공욱 · 원강 · 유유 · 가표 · 하옹
68권 「곽부허열전(郭符許列傳)」 69권 「두하열전(竇何列傳)」 70권 「정공순열전(鄭孔荀列傳)」
곽태 · 부융 · 허소 두무 · 하진 정태 · 공융 · 순욱
71권 「황보숭주준열전(皇甫嵩朱儁列傳)」 72권 「동탁열전(董卓列傳)」 73권 「유우공손찬도겸열전(劉虞公孫瓚陶謙列傳)」
황보숭 · 주준 동탁 유우 · 공손찬 · 도겸
74권 「원소유표열전(袁紹劉表列傳)」 75권 「유언원술여포열전(劉焉袁術呂布列傳)」
원소 ,원담 · 원상, · 유표 유언 · 원술 · 여포
76권 「순리열전(循吏列傳)」
위립 · 임연 · 왕경 · 진원 · 왕환 · 허형 · 맹상 · 제오방 · 유구,유광, · 유총 · 구람 · 동회
77권 「혹리열전(酷吏列傳)」
동선 · 번엽 · 이장 · 주우 · 황창 · 양구 · 왕길
78권 「환자열전(宦者列傳)」
정중 · 채륜 · 손정 · 조등 · 선초 · 서황 · 구원 · 좌관 · 당형 · 후람 · 조절 · 여강 · 장양 · 조충
79권 「유림열전(儒林列傳)」
유곤 · 규단 · 임안 · 양정 · 장흥 · 대빙 · 손기 · 구양흡 · 모장 · 송등 · 장순 · 윤민 · 주방 · 공희 · 양륜 · 고후 · 포함 · 위응 · 복공 · 임말 · 경란 · 설한 · 두무 · 소순 · 양인 · 조엽 · 위굉 · 동균 · 정공 · 주택 · 손감 · 종흥 · 견우 · 누망 · 정증 · 장현 · 이육 · 하휴 · 복건 · 영용 · 사해 · 허신 · 채현
80권 「문원열전(文苑列傳)」
두독 · 왕륭 · 하공 · 부의 · 황향 · 유의 · 이우 · 소순 · 유진 · 갈공 · 왕일 · 최기 · 변소 · 장승 · 조일 · 유량 · 변양 · 역염 · 후근 · 고표 · 장초 · 예형
81권 「독행열전(獨行列傳)」
초현 · 이업 · 유무 · 온서 · 팽수 · 삭로방 · 주가 · 범식 · 이선 · 왕돈 · 장무 · 육속 · 대봉 · 이충 · 무융 · 진중 · 뇌의 · 범염 · 대취 · 조포 · 상허 · 양보 · 유익 · 왕열
82권 「방술열전(方術列傳)」
임문공 · 곽헌 · 허양 · 고획 · 왕교 · 사이오 · 양유 · 이남 · 이합 · 단예 · 요부 · 절상 · 번영 · 당단 · 공사목 · 허만 · 조언 · 번지장 · 선양 · 한열 · 동부 · 곽옥 · 화타 · 서등 · 비장방 · 소자훈 · 유근 · 좌자 · 허자훈 · 해노고 · 장초 · 왕진 · 학맹절 · 유화평
83권 「일민열전(逸民列傳)」
상장 · 봉맹 · 주당 · 왕패 · 엄광 · 정단 · 양홍 · 고봉 · 대동 · 한강 · 교신 · 대량 · 법진 · 한음노보 · 진류노보 · 방공
84권 「열녀전(列女傳)」
환소군 · 조아(趙阿) · 반소 · 이목강 · 조아(曹娥) · 여영 · 마륜 · 조아(趙娥) · 순채 · 조원강 · 숙선웅 · 채염
85권 「동이열전(東夷列傳)」 86권 「남만서남이열전(南蠻西南夷列傳)」 87권 「서강전(西羌傳)」
부여국 · 읍루 · 고구려 · 북옥저 · · 남만 · 서남이 서강
88권 「서역전(西域傳)」
구미국 · 우전국 · 서야국 · 자합국 · 덕약국 · 안식국 · 대진국 · 대월지국 · 고부국 · 천축국 · 동리국 · 율과국 · 엄국 · 엄채국 · 사거국 · 소륵국 · 언기국 · 포류국 · 이지국 · 동저미국
89권 「남흉노열전(南匈奴列傳)」 90권 「오환선비열전(烏桓鮮卑列傳)」
남흉노 오환 · 선비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11><tablebgcolor=#a11> ||
}}}}}} ||

耿純
(? ~ 37년)
1. 개요2. 일화

1. 개요

후한의 인물로, 자는 백산(伯山). 기주 거록군(鉅鹿郡) 송자현(宋子縣) 사람이다. 광무제를 도운 운대 28장의 공신 중 하나.

2. 일화

경순의 아버지 경애(耿艾)는 왕망 정권으로부터 관직을 받아 제평윤(濟平尹)을 지내고 있었다. 당시 장안(長安)에서 유학 중이던 경순 또한 관직에 임용되어 납언사(納言士)가 되었다.

경시 원년(23년), 왕망이 패망하고 경시제현한 정권이 들어섰다. 경시제 유현(劉玄)은 각지에 사신을 파견해 순시하면서 투항을 권했는데, 이때 아버지 경애는 사신으로 온 무음왕(舞陰王) 이일(李軼)에게 항복하여 제남태수로 임명받았다. 이일 형제는 경시제 치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그의 곁에는 언제나 빈객들이 들끓었다. 경순도 이일과의 만남을 청했으나 오랜 기다림 끝에 겨우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경순이 이일에게 말했다.
"대왕께서는 용호(龍虎)의 자태로 풍운이 일어나는 때를 맞아 재빠르게 일어나신 덕에 한 달만에 형제가 왕을 칭하게 되었습니다. 하나, 백성에게 아직 덕망과 신의를 베풀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총애와 녹을 받으셨으니, 이는 지혜로운 자라면 꺼리는 바입니다. 지금은 전전긍긍 하시면서 스스로를 위태롭다 여기시고 총애와 녹이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 하셔야 할 때임에도, 오히려 스스로 만족하고 계시니 어찌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이일은 경순의 말을 기의하게 여겨 그의 뒤를 조사하니, 머지않아 그가 거록의 유력가 출신임을 알아내, 승제하여 기도위로 삼고 부절을 주어 조(趙), 위(魏) 땅을 평정하도록 했다.

유수가 경시제의 명령을 받들어 하북의 군현을 위로하기 위해 한단(邯鄲)에 이르렀다. 경순은 유수가 장병들을 다스리는 것이 여타 경시제의 장수들과 다름을 알아보고는 유수를 따르기로 마음먹고 말과 비단 수백 필을 상납하였다. 유수는 이내 북진하여 중산(中山)으로 떠났고 경순은 그대로 한단에 머물렀다. 그 해 12월, 한단의 점쟁이 왕랑이 반란을 일으키고 유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유수는 계성(薊城)에 머물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현상금을 탐내 유수를 노리니, 유수는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장수들만 거느려서 동남쪽으로 도주했다. 유수는 왕랑에게 복종하길 거부한 신도군(信都郡)에 이르러 병사를 징발하고 군대를 정비한 뒤, 본격적인 왕랑 토벌에 나섰다.

유수군이 허장성세의 계책으로 당양(堂陽)을 항복시키고 다시 북서쪽으로 이동할 동안, 경순은 사촌동생 경흔(耿訢), 경숙(耿宿), 경식(耿植) 등 자신의 친척과 빈객 2,000여 명을 거느리고 육현(育縣)에서 유수군을 영접하였다. 유수는 경순을 전장군에 임명하고 경향후(耿鄕侯)에 봉하였으며, 경흔, 경숙, 경식을 모두 편장군으로 삼아 경순과 함께 선봉에 서도록 하였다. 이들은 고향인 송자현(宋子縣)을 항복시키고 유수를 수행해 하곡양(下曲陽)과 노노(盧奴)로 향하였다.

경순은 송자를 떠나기 전, 경흔 등 자신을 따라나선 친척들이 변심할 것을 염려해 고향집을 불태우게 하였다. 유수가 경순에게 이유를 묻자 경순이 대답했다.
"제가 보건대, 명공(明公)께서는 수레 한 대를 타고서 하북으로 오셨지만, 창고에 수많은 재물을 비축해 놓지도 않으셨고, 후한 상과 달콤한 미끼로 사람을 모은 것도 아니며, 오직 은덕으로 백성들을 품으셨기 때문에 백성들이 기꺼이 따랐던 것입니다. 지금 한단이 스스로 독립하여 북주(北州) 사람들이 의혹을 품고 있습니다. 제가 비록 모든 친척을 다 명공의 명에 따르게 하고 노약자도 따르게 하였으나 친족과 빈객 중 절반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라 염려되었기 때문에 가옥을 전부 불살라서 그들의 뒤돌아 볼 생각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유수는 그의 충성심에 감탄하였다. 유수군이 호(鄗) 땅에 이르렀을 때, 유수는 객사(客舍)로 들어가 잠시 머물렀다. 호의 호족 소공(蘇公)은 왕랑과 내통하여 몰래 왕랑의 장수 이운(李惲)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사전에 소공의 꿍꿍이를 간파해 미리 대비를 해두었던 경순은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이운의 군대를 습격하여 전멸시켰다. 이후로도 유수를 따라 한단성까지 함락시키고 마침내 왕랑 세력을 멸하였다.

유수를 수행해 관도와 포양산(蒲陽山)에서 동마적과 싸워 이들을 격파하였다. 이때 도적떼 적미(赤眉), 청독(靑犢), 상강(上江), 대동(大彤), 철경(鐵脛), 오번(五幡) 등의 무리 100,000명이 사견(射見)에 주둔해 있었는데, 유수는 동마에 이어서 이들을 공격했다. 경순의 부대는 선봉이라 다른 부대와 몇 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에 도적들은 밤을 틈타 경순의 부대부터 전멸시키기 위해 기습하였다. 도적들이 화살을 비 오듯 퍼붓자 경순 진영에 사상자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경순은 부하들을 진정시키고 굳게 지키며 자리를 움직이지 않았다. 이후 결사대 2,000명을 선발해 각자 강노(彊弩) 하나와 화살 세 발씩 쥐어주고 조용히 행군하여 적군의 후방으로 이동했다. 경순이 결사대에게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화살을 쏘도록 지시하니, 적들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크게 놀라 도주하기 시작했다. 경순은 도적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대파한 뒤, 기병을 보내 유수에게 보고하였다. 다음 날 아침, 유수는 제장들을 거느리고 경순의 진영을 방문해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어젯밤은 곤란하지 않았는가?"
경순이 대답했다.
"명공(明公)의 위엄 덕분에 다행히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유수가 다시 말했다.
"대병(大兵)은 야간에 이동시킬 수 없는 법이라 서로 구하지 못한다네. 군영의 진퇴에는 정해진 것이 없으니, 앞으로 경의 친족들을 군중에 거주하게 하지 말도록 하게."
지금까지 경순의 가솔들은 유수를 향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비전투인원이라도 경순을 따라 전장에 다니며 진중에 남았다. 이에 유수는 경순의 친척 경급(耿伋)을 포오현(蒲吾縣)의 장(長)으로 삼아 친족을 거느리고 포오에 거주할 수 있게 하였다.

건무 원년(25년) 6월, 유수가 황제를 칭하자 고양후(高陽侯)에 봉해졌다. 그 해, 경순은 현한의 양왕(梁王) 유영(劉永)을 제음(濟陰)에서 공격하고 정도(定陶)를 점령하였다. 경순은 일전에 왕랑을 토벌하던 중 낙마하여 어깨에 부상을 입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 전투를 마치고 부상이 덧나는 바람에 수도 낙양으로 귀환해 회궁(懷宮)에서 광무제를 알현하였다. 광무제가 경순에게 그를 대신할 만한 인재를 추천해달라 하자, 경순은 사촌동생 경식을 천거하였다. 광무제는 경식에게 경순의 군대를 거느리도록 하고 경순을 그대로 전장군에 남게 하였다.

그 무렵 진정왕(眞定王) 유양(劉揚)이 당시 유행하던 예언서를 조작해, 「적구지후 영양위주(赤九之後 癭揚爲主)」라는 문구를 퍼뜨렸다. 여기서 '적(赤)'은 화덕(火德)을 섬기던 한나라의 국색이나 마찬가지며, '구(九)'는 한고조의 9대손인 광무제를 의미한다. 그리고 '영양(癭揚)'이란 혹이 난 양(揚) 즉, 담낭증을 앓고 있던 유양을 말하니, 이는 곧 유양이 광무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다는 뜻이었다. 유양은 이런 예언서로 군중을 현혹하는 동시에 면만적(綿曼賊)과 교류하면서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다.

건무 2년(26년) 정월, 광무제가 기도위 진부(陳副), 유격장군 등륭(鄧隆)을 보내 유양을 소환하였으나, 유양은 성문을 닫아걸고 불응하였다. 이에 광무제는 다시 경순을 불러 부절을 지니고 유(幽), 기(冀) 땅으로 가 사면령을 내리는 동시에 지나는 곳의 왕후(王侯)를 만나 위로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보여주기식 명령이었고 경순에게는 유양을 만나거든 사로잡으라는 밀명을 전했다. 경순은 관리 백여 명을 거느리고 원씨(元氏)에서 진부, 등륭과 합류해 진정으로 갔다. 유양은 병을 핑계로 만나려 하지 않았으나, 경순과는 친척 사이라 그가 객사에 들어갔을 때 은밀히 사람을 보내 따로 만나자는 의사를 전했다. 경순도 유양에게 답장을 보냈다.
저는 황제의 사신으로서 왕후(王侯), 목(牧), 태수(太守)를 만나야 하므로 먼저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 만나고 싶거든 친히 객사로 나와 주십시오.
유양은 자신의 동생 임읍후(臨邑侯) 유양(劉讓)과 사촌형 유세(劉細)가 각자 10,000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경순이 설마 자신을 해치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유양은 객사로 행차하여 안으로 들어가고, 그의 형제들은 날렵한 병사를 거느린 채 밖에서 대기하였다. 경순은 유양을 예를 다해 극진히 맞이하고 밖에 있는 두 형제들에게도 안으로 들어오라 청하였다. 유양과 두 형제가 객사 내로 들어오자, 경순은 즉시 태도를 돌변하여 미리 숨겨둔 병사들을 발동해 세 사람을 모두 참수해 버렸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진정 사람들은 두려워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다. 광무제는 유양을 소환해 조사할 참이었지만 되려 죽어버렸으니, 이를 불쌍히 여겨 유양의 아들 유득(劉得)을 진정왕에 봉해 아버지의 뒤를 잇게 하였다.

경순은 유양을 처단하고 수도로 돌아와 광무제에게 아뢰었다.
"신(臣)은 본래 관리 집안의 자손이나, 다행히 대한(大漢)이 부흥하고 성제(聖帝)께서 천명을 받으시는 때를 만나 장군을 지내고 후작에 올랐습니다. 이제 천하가 평정되어 신은 재능을 발휘할 데가 없으니, 한 군(郡)의 관리로 부임하여 최선을 다해 다스려 그 효과를 거두기를 원합니다."
광무제가 웃으며 말했다.
"경은 지금까지 무치(武治)를 하였건만, 이제 문치(文治)를 하고 싶은 것이오?"
그리고는 경순이 원하는대로 동군태수(東郡太守)에 임명하였다. 당시 동군은 아직 평정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경순이 부임한 지 몇 개월만에 도적들은 사라지고 지역은 안정을 되찾았다.

건무 4년(28년), 경순은 광무제의 명령을 받아 과거 경시제가 임명한 동평태수 범형(范荊)을 치고 그의 항복을 받아냈다. 경순은 더 나아가 태산(太山), 제남(濟南), 평원(平原)에서 날뛰던 도적들까지 공격하여 전부 토벌하였다. 그 해에 발간현(發干縣)의 장(長)이 죄를 짓자 경순은 군사를 거느려 현장을 포위하고 광무제에게 상주하였다. 하지만 광무제의 명령을 받기도 전에 현장이 그 자리에서 자살하니, 경순은 이 일로 면직당하고 봉조청(奉朝請)이 되어 의례나 행사가 있을 때에만 조정에 참석하였다.

광무제가 동해(東海)의 군벌 동헌(董憲)을 정벌하기 위해 친정에 나설 때, 경순도 황제를 수행하여 종군하였다. 광무제의 군대가 동군을 지나려는데, 동군의 백성들이 나와 길을 막고 울면서 경순을 다시 부임시켜달라 청하였다. 이 광경을 본 광무제는 자신을 따르던 공경(公卿)들을 향해 말했다.
"경순은 젊었을 적부터 갑주를 입고 군리(軍吏)의 일만 하였다. 그런데도 군을 다스리자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것이 이와 같을 수 있는가?"[1]

건무 6년(30년), 동광후(東光侯)로 전봉되었다. 경순이 봉지를 사양하자 광무제가 말했다.
"문제(文帝)께서 주발(周勃)에게 이르길, 『승상은 내가 중히 여기니, 군(君)은 나를 위해 제후를 거느리고 봉국을 취해 주시오』라 하였는데 지금도 그와 같구려."
광무제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경순은 조서를 받고 봉국으로 떠났다. 경순이 봉국으로 가던 도중 업(鄴)에 이르렀을 때 광무제가 곡식 10,000 휘(斛)를 하사하였다. 마침내 봉국에 도착한 경순은 죽은 자를 조상(弔喪)하고 병든 자를 위문하니,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건무 8년(32년), 동군(東郡), 제음(濟陰) 땅에서 도적떼가 일어났다. 광무제는 대사공 이통(李通)과 횡야대장군 왕상을 보내 도적을 진압하게 하였다. 광무제는 경순의 위신이 위(衛) 땅에 현저히 높음을 알고 사신을 파견해 그를 태중대부에 임명한 뒤, 병사들을 거느리고 동군으로 향하게 하였다. 경순의 군대가 동군에 들어섰다는 소식을 들은 동군의 도적떼 9,000명이 모두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 광무제가 서신을 보내 그를 다시 동군태수로 삼자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건무 13년(37년), 동군태수로 재직하던 중 사망하고 그의 아들 경부(耿阜)가 아버지의 작위를 이었다. 시호는 성(成). 경순의 시신은 봉지이자 고향인 거록에 묻혔는데, 명나라에서 이를 발굴하려다가 너무 땅 속 깊숙이 묻혀 있어 실패하고 대충 그 위치에 묘비만 세워두었다고 한다.#


[1] 경순이 젊었을 적 지냈던 납언사는 한나라의 상서부(尙書府) 소속 관리와 마찬가지라 광무제가 군리(軍吏)라 표현한 것이다. 전한 말기에 상서가 가졌던 권한을 생각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