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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숙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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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성종의 왕녀
순숙공주 | 順淑公主
출생 1478년(성종 9년) 혹은 1479년(성종 10년)
사망 1488년(성종 19년) 8월 20일[1]
(향년 10~11세)
부왕 성종
모후 정현왕후 윤씨
봉호 신숙공주(愼淑公主), 순숙공주(順淑公主)
1. 개요2. 생애3. 순숙공주=신숙공주
3.1. 잘못된 정보가 생긴 이유
4.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 9대 왕 성종정현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녀이자 중종의 친누나이다. 신숙공주(愼淑公主)라 하기도 한다.[2]

2. 생애

1478년(혹은 1479년) 정현왕후가 아직 후궁이던 시절에 태어났다.[3]

3살(혹은 2살)이던 1480년에 어머니 윤씨가 왕비가 되자 서출왕녀에서 적출왕녀가 되었다. 이는 3번째이자 마지막 사례에 해당되는 경우[4]로 첫번째는 문종현덕왕후 권씨의 딸 경혜공주, 두번째는 예종안순왕후 한씨의 딸 현숙공주로, 두 공주도 어머니가 후궁이었을 때 태어났다.[5]

사망하기 전, 도승지 송영(宋瑛)[6]의 집에 피접해서 병의 차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7]

그러나 10일 후인 1488년 7월 14일, 11살(혹은 10살)의 나이로 병사하였다.[8] 성종은 미성년 공주가 사망할 경우 순숙공주의 예를 따르도록 하였으나[9] 1494년에 사망한 연산군의 맏아들 원손의 장례에만 적용되었고 후대까지 적용되지는 않았다.[10][11]

3. 순숙공주=신숙공주

성종실록》에는 순숙공주(順淑公主)로 나오지만《연려실기술 7권 - 성종조 고사본말》과 《선원계보》에는 신숙공주(愼淑公主)로 기록되었다. 이 때문인지 순숙공주와 신숙공주를 별개의 인물로 보고 있으며 신숙공주가 1481년에 태어나 1486년에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고 있다. 이 둘이 별개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과 1481년~1486년 생몰년이 틀렸다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 《유명 조선국 소의흠숙정현왕후(昭懿欽淑貞顯王后) 선릉지(宣陵誌)》와 《중종실록》1530년 8월 23일 기사를 보면
후(后, 정현왕후)는 금상(今上, 중종)을 탄생시켰고, 또 세 공주를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였다. - 《유명 조선국 소의흠숙정현왕후(昭懿欽淑貞顯王后) 선릉지(宣陵誌)》
기해년에 옹주(翁主)를 낳으셨고 <중략> 을사년 11월에 9달 만에 공주(公主)가 출생하므로 궁중(宮中)이 깜짝 놀랐었고, 무신년 3월 기사에 대군(大君) 【곧 금상(今上)임.】 이 출생하였고 경술년 11월에 공주가 출생하였으며 <후략> - 《중종 25년(1530) 8월 23일》
두 기록을 종합해보면 정현왕후가 세 공주를 낳았고 그 공주들이 기해년(1479년), 을사년(1485년), 경술년(1490년)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 어느 곳에서도 신축년(1481년) 생인 신숙공주에 대한 기록이 없다.
2번째 신숙공주가 사망한 해라고 주장하는《성종실록》1486년 2월 14일 기사를 보면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새로 낳은(新生) 공주(公主)가 비록 허무하기는 하나 어제 죽었으니, 내일의 조하(朝賀)는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성종 17년(1486) 2월 14일》
작호를 적지 않고 그저 새로 낳은 공주(新生公主)가 죽었다고만 적혀있다. 정말 신숙공주란 존재가 따로 있었다면 신숙공주가 죽었다고 적지, 굳이 새로 낳은 공주가 죽었다고 기록할 이유가 없다.
3번째《성종실록》1483년 6월 12일 기사를 보면
다음 배필은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의 딸로, 딸을 낳았는데 어리다. -《성종 14년(1483) 6월 12일》
만약 별개의 인물이었다면 정현왕후가 2녀(生二女, 1478년생 순숙공주와 1481년생 신숙공주)를 낳았다고 적혀있어야 한다. 하지만 1483년 당시 실록에는 "딸을 낳았는데 어리다(生女幼)"고만 기록되어 있다.[12]
4번째 성종 가계도가 적힌 사료 8개를 확인해 보면
파일:순숙공주 선원록.jpg 파일:순숙공주 선원계보기략.jpg
《선원록》[13] 《선원계보기략》
파일:순숙공주 선원보략.jpg 파일:순숙공주 소화귀감.jpg
《신편 척독대방》 《소화귀감》
파일:순숙공주 국조첩록.jpg 파일:순숙공주 청구풍운.jpg
《국조첩록》 《청구풍운》
파일:순숙공주 역대총요.jpg 파일:순숙공주 연려실기술.jpg
《역대총요》 《연려실기술》
전부 순숙공주(국조첩록 1건)나 신숙공주(선원록, 선원계보기략, 신편 척독대방, 소화귀감, 청구풍운, 역대총요, 연려실기술 7건) 둘 중 하나만 적혀있다. 만약 별개의 인물이었다면 1녀 순숙공주, 2녀 신숙공주라고 적혀있어야하는데 8개의 사료 어느곳에서도 두번째 공주에 대해 적혀있지 않은거보면 이 둘은 동인인물로 보는건이 맞다.
이렇듯 작호를 받지 못한 정현왕후의 다른 딸들도 기록되어 있는데, 작호까지 받은 신축년(1481년)생 신숙공주의 기록이 어디에도 확인이 되지 않는 점, 전부 성종의 (작호를 받은)공주는 한 명이라고 적혀있는거 보면 순숙공주 = 신숙공주이며 생몰년이 1481년~1486년 아닌 1478년(혹은 1479년)~1488년 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왕녀의 작호가 2개인 경우가 꽤 있었다.[14]
태조의 서차녀 숙신옹주(淑愼翁主)의 이칭은 신숙(信淑)[15]
태종의 적장녀 정순궁주(貞順宮主)의 이칭은 정신(定愼/貞信)[16], 서4녀 숙정옹주(淑貞翁主)의 이칭은 숙진(淑眞)[17], 서13녀 숙신옹주(淑愼翁主)의 이칭은 숙순(淑順)[18]
덕종의 적장녀 명숙공주(明淑公主)의 이칭은 명의(明懿)[19]
예종의 적장녀 현숙공주(顯肅公主)의 이칭은 정숙(貞淑)[20]
성종의 서차녀 휘숙옹주(徽淑翁主)의 이칭은 혜신(惠愼)[21], 서3녀 공신옹주(恭愼翁主)의 이칭은 공순(恭順)[22]
연산군의 적장녀 휘신공주(徽愼公主)의 이칭은 휘순(徽順)[23]이였다.
왕자의 작호도 이런한 경우가 있었는데, 순숙공주의 친동생인 중종의 대군시절 작호는 진성대군(晉城大君)이었는데 이칭은 진산대군(晉山大君)이었다.[24]

3.1. 잘못된 정보가 생긴 이유

이런 잘못된 정보가 알려지게 된 계기는 삼태리 노인회관 앞에 있는《밀양 조선 성종 왕녀 태실 (密陽 朝鮮 成宗 王女胎室)》[25]의 안내판의 내용을 사람들이 잘못 이해한게 크다.
성화 17년 왕녀태실은 조선 성종 왕녀의 태를 봉안한 것으로 삼태리 태봉산 정상부에 위치하였는데 현재 이곳에는 원형의 석물과 태실 앞에 세운 표석만 남아있다. 왕녀태실은 오래전에 도굴되어 태항아리는 없어지고 태항아리위에 덮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개석만 남아있다. 그리고 두 개의 표석에는 전면에 《왕녀태실》, 후면에 《성화십칠년십월십일》[26]이라고 각자되어 있어 이로미루어 성종12년에 당시 임금인 성종 왕녀의 태를 이곳에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밀주구지》에는 《조야산리(助也山里) 재부서이십리(在府西二十里)당성공주태(唐成公主胎)출김선생필재집(出金先生畢齊集)》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조야산리는 태봉이란 뜻에서 지금의 태봉이란 지명이 나온 것이라 한다. 성종과 정현왕후 사이에는 신숙공주밖에 없기 때문에 밀주구지의 당성공주는 신숙공주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많다. 표석의 크기는 오른쪽의 것은 높이 115cm, 폭 36cm, 두께 20cm이고, 왼쪽은 높이 115cm, 폭 38cm, 두께 23cm정도이다. 또한 개석의 크기는 높이 120cm정도, 내부크기는 50cm 정도이다.
-《성화 17년 왕녀태실 안내판 내용》
위 안내판에는 밀양 성종 왕녀 태실 = 당성공주태로 신숙공주의 것일 확률이 높다라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신숙공주가 성화 17년(1481년)에 태어났다고 말한 적이 없다.
태실이 세워진 연도만 보고 태실이 세워진 연도 = 태어난 연도로 착각하여 신숙공주가 1481년에 태어난게 사실인 마냥 주장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태실은 입석연도와 태실 주인의 출생일 전부 적는 경우[27]도 있지만 《밀양 성종 왕녀 태실》처럼 입석연도[28]만 적는 경우도 있다. 혜숙옹주 태실처럼 태실이 세워진 연도와 출생연도가 같은 경우도 있지만 경숙옹주[29] 태실처럼 태실이 세워진 연도와 태어난 연도가 다른 경우가 있어서 태실이 세워진 연도 = 태어난 연도가 무조건 맞다고 할 수 없다.

특히, 순숙공주의 경우에는 신숙이 순숙공주의 다른 이칭이었다는 것과 순숙공주의 생년 역시 확실히 나타났기 때문에 1481년 생이라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된다. 만약《밀양 성종 왕녀 태실》 중 1개가 정말 순숙공주의 것이라면 그냥 순숙공주의 태를 1481년(성화 17년) 10월 초9일에 묻었다는 것일 뿐이지 출생연도와는 전혀 상관 없다.

여담으로 태실의 주인 후보는 1481년 10월 초9일 전에 태어난 성종의 딸들인 순숙공주(順淑公主), 휘숙옹주(徽淑翁主), 숙신옹주(淑愼翁主)이며[30] 혹은 이 셋 외에 아기 때 사망하여 기록에서 누락된 다른 왕녀들일 가능성도 있다.[31]

4. 여담

기해년(1479)에 옹주를 낳으셨고 경자년(1480) 10월에 왕비로 책봉되셨는데 - 《중종 25년(1530) 8월 23일》
순숙공주(順淑公主)가 졸(卒)하니, 조시(朝市)를 3일 동안 정지하였다. 공주는 주상의 딸인데, 나이가 11살이다. - 《성종 19년(1488) 7월 14일》


[1] 음력 7월 14일[2]연려실기술》의 영향인지 순숙(順淑)보단 신숙(愼淑)이라는 작호로 더 잘 알려져있다.[3] 순숙공주의 생년을 두고 《성종실록》은 1478년, 《중종실록》은 1479년으로 나뉘었지만 정현왕후가 왕비가 된 시기는 1480년이라 서출왕녀로 태어난 것은 맞다.[4] 정현왕후 이후로 후궁이 왕비가 되는 경우는 2번(장경왕후 윤씨, 희빈 장씨)뿐였다. 그 중 희빈 장씨는 딸이 없었고 장경왕후는 딸 효혜공주가 있었지만 윤씨가 왕비가 된 후에 태어나서 해당되지 않는다.[5] 여담으로 왕자의 경우에는 당시 왕세자였던 예종과 종5품 소훈이었던 안순왕후의 서출왕자로 태어났다가 안순왕후가 왕비로 승격되어 적출왕자가 됨으로써 원자가 된 제안대군이 있다.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은 서출왕자로 태어났다가 장씨가 왕비가 되면서 적출왕자가 되었지만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어 삶을 마쳤으므로 서출왕자로 남게 되었다.[6]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사촌형제이다.[7] 도승지(都承旨) 송영(宋瑛)에게 필단의(匹段衣) 1령(領), 사라의(紗羅衣) 각 1령, 흑화(黑靴) 하나, 활 하나를 내려 주고 인해서 전교하기를, "공주(公主)가 경(卿)의 집에 피우(避寓) 하여 병없이 지났으므로 이를 내려 준다." 하였다. -《성종 19년(1488) 7월 4일 을축 2번째기사》[8] 순숙공주(順淑公主)가 졸(卒)하니, 조시(朝市)를 3일 동안 정지하였다. 공주는 주상의 딸인데, 나이가 11살이다. 전교하기를, "공주는 나이 어린 미성인(未成人)이므로 상장(喪葬)의 모든 일을 일체 반드시 횡간(橫看)에만 따른 것이 아니고 참작해 할 것이며, 빈소(殯所)를 없애고 바로 장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성종실록》성종 19년(1488) 7월 14일 자 기사.[9] 전교하기를, "공주(公主)나 옹주(翁主)가 삼상(三殤) 안에 일찍 죽으면 일체 상장(喪葬)은 예조(禮曹)의 아뢴 바에 의하여, 공주는 순숙공주(順淑公主)의 예(例)에 의하고 옹주는 숙신 옹주(淑愼翁主)의 예에 의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으라." 하였다.- 《성종실록》성종 19년(1488) 7월 17일 무인 2번째 기사[10] 국기일(國忌日)이었는데, 원손(元孫)이 졸(卒)하였다. 전교하기를, "하늘(皇天)이 돕지 아니하여 지금 원손을 잃었으니, 슬픔을 어찌 다하겠는가? 태어난 지 한 달이 차지 못했으니 상(殤) 이라고 이를 수가 없으나, 그 상사(喪事)의 제도는 백일(百日)을 기한하되 순숙 공주(順淑公主)의 예(例)에 의하고, 예조(禮曹)로 하여금 관장하지 말도록 하되 지리학(地理學)으로 길(吉)한 곳을 가려서 장사 지내게 하라." 하였다. - 《성종 25년(1494) 3월 29일 무오 1번째기사》[11] 순숙공주의 조카 인순공주도 미성년일 때 사망하였지만 적용되지 않았고 약 200년 뒤에 명혜공주, 명선공주가 미성년인 상태에서 사망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인지 장례가 순숙공주의 예로 적용되지 않았다.[12] 자녀를 표현할 때, 딸 1명을 낳았으면 한 딸을 낳았다(生一女) 혹은 딸을 낳았다(生女)라고 기록한다. 여러 명이면 두 딸을 낳았다(生二女), 세 딸을 낳았다(生三女) 등으로 기록한다. 한 예시로 《성종대왕 묘지문》에서 폐비 신씨의 두 딸을 언급할 때, "두 딸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生二女, 皆幼)" 라고 기록되어있다.[13] 이 다음 페이지에는 성종의 서장자 계성군과 그의 자손들이 기록되어있다.[14] 2개의 작호를 번갈아가며 사용하기도 했고 아예 작호를 변경을 해서 전(前) 작호와 현(現) 작호 2개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15] 신숙 옹주(信淑翁主)가 졸하였다. 옹주는 태조(太祖)의 딸로서 당성군(唐城君) 홍해(洪海)에게 출가하였었다. - 《단종 1년 2월 8일 을미 2번째기사》[16] 맏딸은 정신 궁주(定愼宮主)이니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출가하였고, - 《태종 4년 2월 18일 기축 2번째기사》[17] 태상왕의 딸을 봉하여 숙진 옹주(淑眞翁主)라 하였으니, 곧 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간 사람이다. - 《세종 4년 2월 4일 신묘 1번째기사》[18] 승빈(承賓) 윤평(尹泙)이 졸(卒)하니, 파평(坡平) 사람이었는데, 뽑혀서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의 딸 숙순 옹주(淑順翁主)에 장가들어 파원군(坡原君)에 봉(封)해졌고, - 《세조 13년 10월 6일 무술 3번째기사》[19] 월산군(月山君) 이정(李婷)에게 종자 3석을 할 만한 땅과 농사(農舍) 2구, 벼·황두 아울러 3천 석을, 자을산군(者乙山君) 【 금상(今上) 의 휘(諱).】 ·경근(慶根) 【곧 명의 공주(明懿公主)이다.】 에게 수전(水田)으로 종자 2석을 할 만한 땅과 농사(農舍) 1구, 벼·황두 아울러 3천 석을 내려 주게 하였다. - 《세조 14년 3월 20일 경진 6번째기사》[20]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듣건대, 정숙 공주(貞淑公主)가 일찍이 예종(睿宗)을 여의고 임사홍에게 의지하여 중히 여기기를 친아버지와 같이 하고, 일찍이 임사홍의 집에 있으면서 아버지로 불렀다고 한다. - 《성종 9년 5월 7일 무진 2번째기사》[21] 임숭재(任崇載)의 아내 혜신 옹주(惠愼翁主)에게 노비(奴婢) 15구(口)를 내렸다. - 《연산 11년 8월 14일 병인 2번째기사》[22] 그리고 공순 옹주(恭順翁主)의 집은 이미 4실(室)을 세웠지만 옛날 가옥을 모두 철거하지 못했습니다. - 《성종 25년 5월 17일 갑진 5번째기사》[23] 구수영(具壽永)은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사위이고, 그 아들은 또 왕의 딸 휘순 공주(徽順公主)에게 장가들어, - 《연산 12년 9월 2일 기묘 1번째기사》[24] 밤에 서리가 왔다. 어서(御書)를 내리기를,"진산 대군(晉山大君) 집 여종 종귀(從鬼)와 계성군(桂城君) 집 여종 물단(勿丹)·효동비(孝同非)와 이성군(利城君) 집 여종 현비(玄非)와 여천위(驪川尉) 집 여종 북간(北間)·어리덕(於里德)·막장(莫藏)이 말을 서로 통하였으니, 당직청(當直廳)에게 잡아오도록 하라." -《연산 10년 4월 3일 갑오 1번째기사 》[25] 본래 성화 17년 왕녀태실이라 불렸다가 현재 밀양 조선 성종 왕녀 태실로 명칭이 바뀌었다.[26] 실제로 2개의 태실에는 성화십칠년십월초구일입석(성화17년 10월 초9일에 세웠다)이라고 적혀있다.[27] 성종의 서장녀 혜숙옹주의 태실을 보면 "성화14년(1478년) 4월 26일 묘시에 태어난 왕녀 수란(혜숙옹주의 이름)의 태를 성화 14년(1478년) 6월 21일 을시에 묻었다(세웠다)."라고 적혀있다.[28] 成化十七年十月初九日立石(성화 17년 10월 초9일에 태실을 세우다)[29] 성종과 명빈 김씨의 딸로 태지석에서는 1483년에 태어났고 태실은 1485년에 묻었다고 적혀있다.[30] 혜숙옹주(惠淑翁主)와 공신옹주(恭愼翁主)는 출생연도와 입석연도가 적힌 태지석이나 태항아리가 발견되었다.[31] 실제로 성종의 후궁 귀인 정씨와 숙의 김씨에게 일찍 사망한 딸이 있었다.[32]성종실록》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성종실록》에는 성종의 서녀 숙신옹주가 1487년, 1489년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2차례나 나온다. 한자는 다르고 발음만 같은 작호가 아니라 두 기록 모두 '淑愼翁主'로 동일인이다.[33] 연희궁터(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194)와 안산鞍山(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의 주변으로 순숙공주의 묘는 연희궁 궁내에 있었다고 한다.[34] "순숙 옹주(順淑翁主)의 묘소가 사을한일(沙乙漢日)에 있으니 법에 의하여 경작(耕作)과 벌채(伐採)를 금하고, 그 사당(祠堂)은 동대문 밖에 있으니 수호하는 노비에게는 일체 잡역(雜役)을 면제시켜 제사에 전념하게 하고, 잡인도 엄중히 금단하도록 하라." 사신(史臣)은 논한다. 상이 동기를 사랑하고 생각함은 존몰(存沒)의 차가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옹주는 곧 성종의 딸이다.】- 《중종 9년(1514년) 4월 8일》[35] 순숙공주처럼 작호는 받았지만 혼인하지 못하고 죽은 왕녀들인 정소공주, 인순공주, 숙신공주, 명선공주, 명혜공주, 화억옹주, 영온옹주의 묘는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 순숙공주는 태어난지 1년도 못 돼서 사망한 예종의 둘째 딸 혜순공주과 함께 현재 묘가 실전 된 두 공주 중 한 명이다.[36] 순(順)과 신(愼)이 거의 같은 글자로 쓰여서 신숙(愼淑)으로 적힌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서 태조신의왕후의 딸 경궁주(慶宮主)를 경궁주(慶宮主)로 잘못 적어버린 기록도 있고(경순공주태조신덕왕후의 딸이다.) 태종의 딸 숙옹주(淑翁主)는 숙옹주(淑翁主)로도 기록, 연산군의 딸 휘공주(徽公主)는 휘공주(徽公主)로 기록되어있기도 하고 성종의 딸 공옹주(恭翁主)도 공옹주(恭翁主)로 적혀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