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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25 10:27:42

풍이(후한)

운대 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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溤異
(? ~ 34)
1. 개요2. 생애

1. 개요

후한의 개국공신. 자는 공손(公孫). 예주 영천군 부성현 출신으로 아버지를 비롯한 조상들의 행적에 관하여 알려진 바는 없다. 독서를 좋아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좌씨춘추》와 《손자병법》에 능통했다고 한다.

2. 생애

제황 3년(22년), 신나라 말기에 유연(劉縯)과 그 동생 유수유현(劉玄)을 추대하고 현한을 건국해 거병하였다. 당시 영천군의 하급 관리로 일하던 풍이는 5개 현(縣)을 감독하면서 부성현장 묘맹(苗萌)과 함께 밀려오는 한나라군을 막았다. 유수는 영천군을 유린하면서 부성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건거향(巾車鄕)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풍이는 이 틈에 성 밖으로 나가 자신의 관할 속현들을 순시하다가 유수의 병사들에게 붙잡혔다. 이때 풍이의 사촌형 풍효(馮孝)와 풍이와 같은 영천군 출신인 정침(丁綝), 여안(呂晏) 등은 이미 유수에 투항한 상황이었는데, 이들은 유수의 진영으로 끌려온 풍이와 마주쳤다. 풍효 등은 그 자리에서 모두 유수에게 풍이를 천거하였고, 풍이 또한 입을 열어 말했다.
"저 이(異) 한 남자의 힘은 강약(彊弱)을 따질 수 없습니다. 저의 노모께서 성내에 계시니 돌아가 5개의 성을 장군께 바쳐 공을 세우고 은덕에 보답하겠습니다."
유수는 이를 허락하고 풍이를 풀어주었다. 풍이는 다시 부성으로 돌아가 현장 묘맹을 설득하고 자신이 관할하던 다섯 현을 유수에게 바쳐 항복했다.

경시 원년(23년), 유수는 영천을 떠나 완(宛)으로 돌아갔다. 풍이는 유수만을 따를 뿐 파견나온 다른 경시제의 장수들을 따르지 않았기에, 부성은 10여 명의 경시제 장수들에게 다시 공격을 받았으나 풍이가 굳게 지켜 함락시키지 못했다. 유수가 사례교위에 임명받아 낙양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낙양성으로 이동하였다. 유수 일행이 부성을 지날 때, 풍이는 즉시 성문을 열고 나와 소고기와 술을 대접하면서 유수를 영접했다. 유수는 풍이를 자신의 주부(主簿)로 삼고 묘맹을 종사(從事)로 삼았다. 풍이는 동향인 요기(銚期), 숙수(叔壽), 단건(段建), 좌륭(左隆) 등을 유수에게 천거했고, 유수는 이들 모두를 연사(掾史)로 등용하였다.

경시제는 낙양에 입성하여 현한의 도읍으로 정하고 유수의 형 유연을 의심해 죽여버렸다. 유수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숙부 밑에서 자랐는데, 유일한 일족인 친형 유연을 누구보다도 잘 따랐다. 사실상 아버지나 다름없는 가족을 잃은 유수는 경시제의 눈치가 보여 겉으로는 애도를 표할 수 없었으나, 술과 고기에는 전혀 손대지 않았으며, 그의 침상에는 항상 눈물 자국이 있었다. 풍이가 이를 눈치채고 홀로 머리를 조아리며 넌지시 슬퍼하는 기색을 드러내자 유수가 "경은 망언하지 않도록 하시오."라며 만류하였다. 풍이는 유수에게 좌승상 조경(曹竟)과 상서 조후(曹詡) 부자와 교류하라 건의하여 유수가 이에 따랐다.

유수를 제거할 명분 찾기에 실패한 경시제는 유수를 군벌들이 도사리는 하북으로 보내, 적들의 손을 빌어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경시제가 유수를 하북 토벌에 보내려하자, 여러 제장들이 가능성이 없다며 반대하였다. 물론 애초에 가능성 따윈 신경 안썼던 경시제는 반대 의견을 전부 묵살한 채 유수에게 조서를 내렸고, 유수는 이에 따라 하북으로 출발하였다. 경시제의 지원은 턱없이 부족했으나, 조경 부자의 지원에 힘입어 조금이나마 부족한 물자를 충당할 수 있었다. 풍이는 유수를 따라 종군하면서 그에게 조언했다.
"천하가 왕씨 밑에서 고통받아 모두 한나라를 그리워한지 오래되었습니다. 헌데, 오늘날 경시제의 제장들은 포학하여 이르는 곳마다 제멋대로 노략질을 하니, 백성들은 실망하여 의지할 곳을 잃고 있습니다. 지금 공께서는 오로지 천명에 따라 은덕을 베풀고 계십니다. 걸주(桀紂)의 어지러움이 있고 나서 탕무(湯武)의 공(功)이 있었듯이, 사람은 오래 굶주리고 목마르면 오히려 쉽게 배를 채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관속들을 나누어 파견해 여러 현들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의 응어리 맺힌 원한을 위로하여 은택을 베푸소서."
유수는 풍이의 말을 받아들여, 하북으로 향하면서 풍이와 요기 등을 각 현에 파견해 억울한 죄수들을 석방시키고 부패한 지방관을 제거하였다. 풍이는 2천석 이상의 재산을 지닌 호족과 관리들 가운데 뜻을 같이 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유수에게 보고했다.

경시 2년(24년), 왕랑이 한단에서 한성제의 아들 유자여(劉子與)를 사칭하고 황제를 칭하며 거병하였다. 유수는 계(薊)에 있었는데, 왕랑이 유수의 목에 건 엄청난 현상금 때문에 계에서 쫓겨나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유수는 밤늦게까지 행군하며 어떤 날에는 풀밭에서 자면서 계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요양현(饒陽縣) 무루정(無蔞亭)에 이르렀다. 이 날 날씨가 몹시 춥고 매서워 유수 일행은 모두 지쳐있었다. 이때 풍이가 급히 콩을 구해다 죽을 끓여 유수를 비롯한 일행들을 먹였다. 비록 배를 채우기엔 무척 부족한 양이었지만 다음 날 아침, 유수는 출발하기 전 제장들에게 이르길, "어제 공손의 콩죽 덕에 굶주림과 추위가 모두 풀렸구나!"라며 다시 힘을 내어 남쪽으로 이동했다.

유수 일행이 어느덧 남궁현(南宮縣)에 이르렀을 때 큰 비바람을 만났다. 유수는 길을 가다가 폐가를 발견하여 잠시 그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풍이가 폐가 안에서 땔감으로 쓸만한 목재를 모았고, 등우가 불을 지피자 유수는 부뚜막에 대고 옷을 말렸다. 풍이는 다시 보리밥을 짓고 토견(菟肩)을 구해 굶주린 일행들을 먹였다. 유수가 호타하(虖沱河)를 건너 신도(信都)에 입성하면서 마침내 긴 도망길이 끝났다. 유수는 한숨 돌리고 풍이를 하간(河閒)으로 보내 병사를 징집했다. 풍이가 돌아오자 유수는 그를 편장군에 임명하였다. 이후로 풍이는 유수를 따라다니며 수 차례의 전투 끝에 왕랑을 주살했고 응후(應侯)에 봉해졌다.

풍이는 천성이 겸손하여 행군 중 다른 장수를 만나면 늘 수레를 한쪽으로 끌어 길을 비켜주었다. 풍이의 진지에는 언제나 표식을 붙어있었고, 그의 부대는 늘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기로 유명했다. 휴식시간에 제장들이 모여 자신의 공을 자랑할 때에도 풍이는 항상 홀로 나무 아래에 앉아 공적을 자랑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장수들은 그를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 불렀다. 한단이 격파된 후, 유수는 군을 재배치하였는데 이때 많은 장수들이 앞다투어 대수장군 휘하에 들어가고 싶다 하니, 유수는 풍이를 더욱 중히 여겼다. 한단 이북은 도적떼와 오랑캐들로 크게 혼란스러워 유수는 풍이를 보내 난을 평정하게 했다. 풍이는 나아가 북평(北平)에서 도적단 철경(鐵脛)을 무찌르고, 흉노를 격파해 우림흡돈왕(于林闟頓王)에게 항복을 받아냈다.

현한의 하내태수 한흠(韓欽)이 항복하여 유수는 하내(河內)를 힘들이지 않고 얻었다. 그는 북쪽으로 연(燕), 조(趙)를 정벌하여 후방을 안정시킨 다음 하남을 공략하고 싶었지만, 당시 낙양에는 무음왕 이일(李軼), 늠구왕 전립(田立), 대사마 주유(朱鮪), 백호공 진교(陳僑), 하남태수 무발(武勃)이 호왈 30만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자신이 떠나면 하내를 빼앗낄까 두려워하였다. 유수는 고민 끝에 구순을 하내태수로 임명하고, 풍이를 위군(魏郡) 맹진(孟津)에 주둔시켜 반드시 수비하라 당부한 뒤, 하내를 떠났다.

풍이는 과거 유수와 친분이 있던 이일에게 서신을 보냈다.
우매한 제가 듣기로는 밝은 거울로 형체를 비추듯이, 지나간 일로 오늘날의 일을 예측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과거 미자(微子)는 상나라를 떠나 주나라로 들어갔고, 항백초나라를 등지고 한나라에 귀순하였으며, 주발대왕(代王)을 맞아들여 소제를 내쳤고, 곽광은 효선(孝宣)을 받들고 창읍(昌邑)을 철폐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천명을 알았으며, 존망의 부호를 보고 일을 폐하거나 성사시킴으로써 만세의 업(業)을 드리웠습니다. 설령 경시제를 아직 지지한다 해도 왕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것은 시간 문제일 따름이거늘, 그리 되면 왕께서 과연 한 지방을 점거해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적미가 장안을 어지러이 유린하여 왕후들이 난을 일으키고, 대신들이 괴리되며 기강이 끊어지고, 사방이 무너져 유씨(劉氏)가 아닌 이성(異姓)들이 다투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소왕(蕭王)께서 눈서리를 맞으며 하북을 지키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영웅들이 소왕의 휘하로 구름처럼 모이고 백성들이 바람에 쏠리듯 기대오고 있으니, 상나라의 빈(邠)과 기(岐)가 주(周)에 호응할 때라도 지금 상황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왕께서 진실로 승패를 깨닫고 큰 계책을 정하여 과거 위인들의 공적을 거울삼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지금입니다. 만약 맹장이 정예병을 몰아 성을 포위하게 된다면 그 때 가서 후회하게 되더라도 이미 돌이킬 수 없을 것입니다.
이일은 원래 유수 형제와 친분이 있었음에도 공을 탐하여 주유와 함께 경시제로 하여금 유연을 죽이라 꼬드겼던, 사실상 유수에게 있어선 형의 원수나 다름없는 그런 인물이었다. 유수가 하북에서 대박을 터뜨리자 이일은 유수에게 귀순하려 했지만 차마 형의 일이 마음에 걸려 귀순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타이밍 좋게도 풍이로부터 이런 서신을 받으니 이를 기회라 여겨 곧바로 풍이에게 앞으로 안에서 협력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이일의 답장을 받은 풍이는 북쪽으로 출진하여 천정관(天井關)을 넘어 상당군(上黨郡)의 두 성을 함락시켰다. 풍이가 현한의 영역을 침노했음에도 과연 이일의 공작 덕에 낙양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풍이는 안심하고 더 나아가 하남군(河南), 성고(成皐)의 13개의 성을 추가로 공략하니 항복하는 자가 10만 명에 달했다. 현한의 장수 무발(武勃)이 만여 명을 이끌고 반격해오자, 풍이는 강을 건너 사향(士鄕) 남쪽에서 무발군을 대파하고 적장 무발을 참수했으며, 적군 오천여 명을 죽였다. 무발이 개박살이 나는 와중에도 이일은 지켜만 볼 뿐 무발을 구원해주지 않았다. 풍이는 이일을 믿을 수 있다 여겨 조 땅에 있는 유수에게 서신으로 모든 일을 알렸다. 풍이의 보고를 전부 읽은 유수는 이일은 신용하지 못할 인물이라 판단해 이일과 풍이가 내통했다는 정보를 공공연하게 폭로했고, 사건의 전말을 파악한 주유는 분노하여 이일을 잡아 죽였다. 다만, 이일은 나름 영향력 있던 인물이라 그의 죽음과 배신 사실은 낙양성 안을 떠들썩하게 하였고, 많은 이들이 성을 빠져나와 유수에게 투항해왔다.

건무 원년(25년), 유수가 주력과 함께 더 북쪽인 연(燕) 땅으로 들어가면서 하내와 거리가 멀어지자, 주유는 토난장군 소무(蘇茂)에게 병력 3만을 주어 하내를 침공하게 했다. 풍이는 자신의 교위와 호군을 보내 구순을 도와 소무를 무찔렀고, 구순이 소무를 추격할 때 직접 합류하여 함께 낙양성을 한 바퀴 돌면서 적군을 위협한 뒤 맹진으로 돌아왔다. 풍이는 격문을 뿌려 승전했다는 사실을 사방에 알리고 내친 김에 하늘의 뜻이라며 유수에게 칭제할 것을 권하였다. 여러 제장들도 동의했지만 정작 유수는 세 차례에 걸쳐 사양하였다. 결국, 장수들의 권유를 못 이긴 유수는 호현(鄗縣)에서 황제에 올라 존호를 사용하였다.

건무 2년(26년) 봄, 양가후(陽夏侯)에 봉해졌다. 이후 군사를 이끌고 영천군 양적(陽翟)에서 일어난 도적 엄종(嚴終)과 조근(趙根) 공격해 격파하였다. 마침 풍이가 영천군에 있는 것을 확인한 광무제는 조서를 내려 풍이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성묘하도록 하고, 태중대부를 시켜 술과 소고기를 하사했으며, 2백리 내의 태수와 도위 이하의 관리와 종족을 모이게 하였다.

당시 적미와 연잠이 삼보를 어지럽히고 있었고, 군현의 호족들이 각기 병사를 거느리며 지역을 호령했는데, 대사도 등우가 이를 평정하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삼보 지역에 대기근이 덮치자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먹고, 성곽은 텅 비었으며, 백골이 들판을 뒤덮었다. 광무제는 회심의 카드로 풍이를 지목하고 대략 답이 없는 상황에 빠진 삼보 지역을 평정하는 임무를 맡겼다. 광무제는 풍이를 하남까지 배웅하면서 그에게 수레와 7척 보검을 하사하며 말했다.
"삼보가 왕망, 경시제의 난을 만나고 또 다시 적미, 연잠의 만행을 겪으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그대는 오늘의 정벌에 나서면서 반드시 노략질과 백성들의 인명 피해가 많이 생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지역을 평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들을 편안히 모여 살게 해주는 것이다. 전투에서 장수들이 고생한다는 것을 짐이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이들은 대체로 노략질을 좋아한다. 경은 본래 관리와 병사들을 잘 다스리니 이를 반드시 염두에 두어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도록 하라."
풍이는 머리를 조아려 명을 받고 서쪽으로 가 이르는 곳마다 위신을 널리 떨쳤다. 홍농(弘農)의 도적떼 가운데 장군을 자칭하는 이가 10여 명 가까이 있었는데 모두 풍이에게 항복하였다. 이윽고 풍이는 경조윤 화음(華陰)에서 적미와 60여 동안 수십 번 전투하여 승리하고, 적미의 장수 유시(劉始), 왕선(王宣) 등 5천여 명의 항복을 받아냈다.

건무 3년(27년) 정월, 광무제는 서쪽에서 오랜만에 들려오는 승전보에 기뻐하며 풍이를 정서대장군으로 승진시켰다. 등우는 공로를 세우지 못함에 부끄러워하며 등홍(鄧弘)과 군을 합쳐 적미군을 공격하기 위해 나아갔다. 그렇게 진군하던 중 승리하고 돌아가던 풍이의 군대를 만나자, 등우와 등홍은 풍이에게 함께 적미를 치자 권하였으나 풍이가 거절하며 말했다.
"우리 군사가 적군과 수십 일 동안 싸워, 비록 여러 적장들을 잡기도 했지만 아직 적군은 많습니다. 지쳐있는 병사들을 급히 몰아 적들을 깨뜨리기란 무척 어려우니, 서서히 은덕과 신의로써 그들을 회유해야만 합니다. 폐하께서 지금 여러 장군들을 민지(黽池)에 주둔시켜 동쪽을 막으라 하시고 저에게 서쪽을 공격하라 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한꺼번에 그들을 이길 수 있는 필승의 계책입니다."[1]
등우는 풍이의 만류를 무시한 채 적미와의 교전했다. 먼저, 선봉인 등홍이 적미와 싸웠는데, 적미는 싸우다가 패한 척하고 치중을 버리고 달아났다. 적미의 수레는 흙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티가 안나게 위에만 콩으로 덮어놓았다. 등홍의 병사들은 무척 굶주려 있었기에 적미의 치중에 정신이 팔려 지휘관의 통제를 무시하고 치중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렇게 엉망이 된 등홍군을 적미군이 다시 덮치니, 등홍군은 크게 패하여 궤멸당했다. 등홍은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풍이가 소규모의 별동대를 거느리고 적미군의 측면을 돌파한 덕에 적미군이 놀라 후퇴하면서 살 수 있었다.

풍이 다시 한번 등우에게 병사가 피로하여 지금 싸워서는 안된다 간하지만, 등우는 듣지 않고 다시 적미와 싸워 또 대패했고 죽은 이가 3천여 명이나 되었다. 등우는 간신히 도망쳐 건위대장군 경엄이 주둔해 있는 의양(宜陽)으로 갔고, 풍이는 말도 구하지 못해 회계판(回谿阪)까지 두 발로 걸어갔을 정도로 처참하게 박살났다. 풍이는 다시 성벽을 굳게 하고 흩어진 패잔병들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다른 주둔지의 장수들로부터 어느정도 지원을 받아 병사 수만 명을 모으고 다시 있을 적미와의 전투에 대비하였다. 광무제는 이 소식을 듣고 등우를 우장군으로 강등하고 서부 전선을 풍이에게 맡겼다.

풍이는 날짜를 잡아 적미와 결전을 치르기로 하고, 병사들을 적미와 똑같이 변장시켜 길 옆에 매복하게 하였다. 다음 날 아침, 적미군 1만여 명이 풍이군 선봉대를 향해 돌진하니, 풍이는 일부로 구원병을 선봉이 전멸하지 않을 만큼만 조금씩 나누어 보냈다. 구원이 미약한 것을 본 적미군이 더욱 기세 좋게 총공격을 감행했고, 양군은 해가 저물 때까지 치열한 전투를 이어갔다. 분명 전투 초만 해도 다 이긴 싸움이라 생각했던 적미는 의외로 적이 줄어들지 않아 기세가 크게 꺾였다. 이렇듯 적미군이 슬슬 지칠 무렵, 풍이는 전군을 들어 총공격을 명하고 또, 복병들에게 신호를 보내 일제히 적미를 쳤다. 복병들의 복장이 자신들과 똑같은데다 날까지 저물어 피아식별이 불가능해진 적미는 크게 무너져 패주하기 시작했다. 풍이는 적미를 추격하여 효저(崤底) 남쪽, 효곡(崤谷) 아래에서 그들을 대파하고 남녀 8만 명의 항복을 받았다. 잔당 10여만 명은 풍이로부터 도망쳐 동쪽 의양으로 갔으나, 이미 그곳엔 광무제가 친히 6군을 주둔시킨 채 대기하고 있었다. 적미들은 매우 놀라 적미군의 황제 유분자의 형인 식후 유공(劉恭)을 보내 항복하였다. 광무제는 적미의 항복을 받아들여 그 세력을 흡수하고 책서를 보내 풍이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이제 적미는 소멸했으나 아직도 삼보에는 그 군벌들이 차고 넘쳤다. 남전(藍田)의 연잠, 하규(下邽)의 왕흠(王歆), 신풍(新豐)의 방단(芳丹), 패릉(霸陵)의 장진(蔣震), 장안의 장한(張邯), 장릉(長陵)의 공손수(公孫守), 곡구(谷口)의 양주(楊周), 진창(陳倉)의 여유(呂鮪), 견(汧)의 각굉(角閎), 주질(盩厔)의 낙연(駱延), 호(鄠)의 임량(任良), 괴리(槐里)의 여장(汝章) 등이 할거했고, 각자 많게는 만 명에서 적게는 수 천명의 사병을 부렸다. 풍이는 전투와 행군을 반복해가면서 상림원(相林園)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당시 연잠은 적미가 소멸하자 스스로 무안왕(武安王)을 자칭하고 삼보의 군현에 자신이 멋대로 임명한 태수와 현령을 파견했다. 연잠은 삼보 장악에 방해가 되는 풍이를 내쫓고자 장한, 임량과 동맹하여 함께 상림원을 쳤다. 풍이는 연잠의 연합군을 요격하여 크게 승리하였고, 적군 1천여 명을 죽였다. 이 전투로 인해 연잠에게 붙었던 군벌들은 전부 연잠을 버리고 광무제에게 귀순하였다. 도망친 연잠은 어떻게든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남은 군세를 몰아 석현(析縣)을 쳤으나 풍이는 복한장군 등엽(鄧曄)과 보한장군 우광(于匡)을 보내 연잠의 군대를 격퇴했다. 연잠은 세력을 잃고 무관을 지나 남양(南陽)으로 도주했으며, 연잠의 장수 소신(蘇臣)과 8천여 명이 항복해왔다.

이 무렵 풍이는 군량 부족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관중 지역의 대기근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아 백성들은 콩 5두에 황금 1근을 거래할 정도였으니, 풍이의 병사들은 곡식이 없어 길가의 과실 등을 따먹으며 버텼다. 이에 광무제는 우부풍 조광(趙匡)에게 명해 풍이에게 비단과 군량을 공급해주었다. 광무제의 적절한 대처로 풍이는 다시 관중 평정 임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호족들 가운데 불순한 자는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했고, 투항한 자들 중 공로가 있는 이에겐 적절한 포상을 내렸으며, 그 우두머리는 수도로 보내고 나머지는 본업에 열중하도록 하였다. 풍이의 위명은 관중에 널리 퍼져 대부분의 호족들이 귀순하였고, 여유, 장한, 장진만이 촉으로 사신을 보내 공손술에게 투항하였다.

건무 4년(28년) 12월, 공손술이 삼보를 노리고 수십만 군대를 한중군에 소집시켰다. 그는 장수 정언(程焉)에게 군사를 주어 진창의 여유와 연대하여 삼보 지역을 경략하게 하였다. 풍이는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고 조광, 외효와 힘을 합쳐 공손술의 군대를 대파했다. 정언은 황급히 한천(漢川)으로 군을 물렸으나, 이내 풍이가 그 뒤를 맹렬히 추격하였다. 여유는 급히 진창에서 나와 정언을 구원하러 갔지만, 기곡(箕谷)에서 둘은 풍이에게 궤멸당했다. 여유는 진창을 버리고 정언과 함께 촉으로 도망쳤다. 이후로도 공손술은 끊임없이 군사를 보내 삼보를 노렸으나, 번번이 풍이와 외효에게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풍이는 3년동안 관중을 통치하며 기근과 전란에 지친 백성들을 위로했다. 그가 주둔해있던 상림원은 나날이 발전하여 어느새 도시가 형성되니, 사람들은 그곳을 더이상 상림원이 아닌 함양(咸陽)이라 불렀다. 그러나 풍이는 너무 오래도록 외지에 나와있어 광무제의 의심을 살까 하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광무제의 곁에 있고 싶으니 제발 불러달라고 여러 차례 간청했으나 그럴 때마다 광무제는 이를 모두 불허하였다. 때마침 누군가가 '풍이가 권력을 남용하여 장안의 현령을 참수했다'는 참소를 하자, 광무제는 그 서신을 풍이에게 보내 그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풍이는 그 글을 보고 깜짝 놀라 곧바로 서신을 올렸다.
신은 본디 보잘 것 없는 선비이나 우연히 명을 받아 군대를 이끌 기회를 얻고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사사로이 은혜를 입어 작위를 하사받았으며, 사소한 임무를 받아 공을 세운 것은 모두 폐하의 덕이지, 결코 우매한 소생이 홀로 이룰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신이 머리를 조아려 생각하기엔, 폐하의 명을 받아 전공을 세울 때는 항상 뜻대로 되었으나, 제 임의로 결단한 작전에는 후회하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폐하의 탁월한 식견을 접한 지가 오래되다 보니, 이제서야 '성(性)과 천도(天道)는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2]라는 문구를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병사를 처음 일으키던 어지러운 때에는 호걸들이 서로 다투어 백성을 미혹하려는 자가 천(千)을 헤아렸으나, 신은 다행히 폐하를 만나 성스러운 명견(明見)에 몸을 의지했습니다. 위급하고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감히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하물며 천하가 평정되고 상하 질서가 바로잡힌 지금, 신이 폐하로부터 받은 작위가 높고 높아 헤아릴 수 없지 않습니까? 진실로 바라는 것은 폐하의 칙명을 삼가 받들어 분골쇄신하는 것입니다. 신에게 보여주신 참소문을 보니 오직 두렵고 떨리는 마음 뿐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밝으신 폐하께서 신의 우매함을 알고 계시니 감히 올리옵나이다.
광무제는 조서로 답하며 안심시켰다.
장군은 국가에 있어, 의(義)로는 군신 관계고 은혜로는 부자(父子) 관계와 같다. 어찌 의심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는가?

건무 6년(30년) 봄, 광무제는 풍이를 수도 낙양으로 불러 조회에 참석케 하였다. 광무제는 조회를 하면서 공경들 앞에 그동안의 풍이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며, 중황문을 시켜 보물, 의복, 금전을 하사하고 풍이에게 말했다.
"급작스러운 순간에 무루정에서 얻어먹은 콩죽과 호타하에서 얻어먹은 보리밥의 은혜를 오랫동안 갚지 못하였소."
풍이는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신이 듣기로, 관이오제환공에게 이르길, '원컨대 공께서는 허리띠에 화살이 박혔던 때를 잊지 마시옵소서. 신은 죄인으로 호송 수레에 끌려오던 일을 잊지 않겠나이다.'라 하였습니다. 이에 제환공은 관중에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하북에서의 어려움을 잊지 마시옵소서. 소신도 감히 건거(巾車)에서 살려주신 은혜를 잊지 않겠나이다."
이후 광무제는 여러 번 풍이를 불러 그를 대접하고, 촉을 정벌할 계책을 물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자 광무제는 풍이를 다시 서쪽으로 보냈고, 이번에는 처자식도 같이 데려가도록 하였다.

동년 5월, 광무제는 농(隴)에서 반란을 일으킨 외효를 정벌하기 위해 경엄, 갑연 등 여러 장수를 보냈으나 번번이 패하였다. 광무제는 풍이를 보내 순읍(楯邑)을 점거하게 하였다. 풍이가 순읍을 노린다는 정보를 입수한 외효는 대장군 왕원(王元)과 장수 행순(行巡)에게 2만여 병사를 주고, 풍이보다 먼저 순읍을 차지하라 명했다. 풍이의 부장들은 이 소식을 듣고 지레 겁을 먹어, 적군이 승세를 타고 오니 일단 충돌을 피해 적의 예기가 꺾이길 기다려야 한다며 순읍으로 진격하려는 풍이를 말렸다. 이에 풍이가 말했다.
"적군이 경계에 다다랐으니 그들은 분명 사소한 이익을 쫓아 더 깊숙이 들어오고 싶어할 것이오. 만약 적군이 순읍까지 얻게 되면 반드시 삼보(三輔) 전역이 동요할 것이니, 이는 내가 근심하는 바요. 손무가 이르기를, '공격하기엔 부족한 병력이어도 수비하기엔 여유롭다.'라 하였소. 지금 성을 먼저 점거하게 되면 유여로운 상태에서 피곤한 적군을 상대하는 것이니, 형세를 살피다 나중에 공략하는 계책보다 훨씬 낫소."
풍이는 재빨리 순읍에 도착해서, 몰래 들어가 성문을 닫고 성벽에 깃발과 북을 모두 내리게 했다. 행순은 풍이가 순읍을 먼저 점령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급히 달려왔다. 행순군이 순읍에 접근하자 풍이의 군사들은 갑자기 북을 두들기고 깃대를 세워 출병하였다. 행순의 병사들은 놀라 어지럽게 달아났고, 풍이는 수십 리를 추격하여 행순을 대파하였다. 아울러 행순과 군을 나눠서 견현을 차지하러 간 왕원도 광무제의 장수 채준에게 격파당해 도망쳤다. 이에 외효에게 붙었던 북지군(北地郡)의 여러 호족의 우두머리인 경정(耿定)이 광무제에게 투항했다. 풍이는 광무제에게 승전보를 올리면서 자신의 공훈을 전혀 자랑하지 않으니, 오한, 갑연 왕상 등이 풍이의 전공을 나누어 가지려 들었다. 광무제가 이를 근심하여 조서로 풍이의 겸양하는 태도를 본받으라며 이들을 꾸짖었다.

풍이는 북지군 의거(義渠)로 진군해 임시로 북지태수의 일을 대행했다. 이때, 풍이는 청산(靑山)의 오랑캐 무리 만여 명을 복속시켰고, 북지군 군벌 노방(盧芳)의 장수 가람(賈覽)과 흉노의 욱건일축왕(薁鞬日逐王)을 공격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북지군, 안정군, 상군은 평정되니, 광무제는 풍이를 안정태수로 삼았다.

건무 9년(33년) 정월, 견현에 주둔하던 정로장군 채준이 군진(軍陣)에서 병사하자, 풍이는 정로장군에 임명되어 그 군대를 물려받았다. 한편, 반란을 일으켰던 삭녕왕 외효가 중랑장 내흡의 활약으로 기성(冀城)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외효는 구비(糗糒)[3]를 먹다가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며 분사했고, 그 아들 외순이 뒤를 이어 삭녕왕에 올랐다. 공손술은 조광[4]과 전엄(田弇)을 보내 외순을 돕게 했으나, 천수태수에 임명된 풍이가 1년간 이들과 싸운 끝에 전부 잡아 참수하였다.

건무 10년(34년) 8월, 내흡의 지휘를 받아 여러 장수들과 함께 기성 낙문(落門)을 공격했다. 하지만 갑자기 병이 들어 군중에서 병사하였다. 시호는 절(節). 장남 풍창(溤彰)이 아버지의 작위를 이었고, 풍창의 동생 풍흔(溤訢)은 아버지의 공적 덕에 석향후(析鄉侯)에 봉해졌다. 풍창은 몇 년 후에 동민후(東緡侯)로 개봉되어 세 현을 식읍으로 거느리다, 마지막으로 평향후(平鄉侯)로 다시 봉해졌다.


[1] 광무제는 파간장군 후진(侯進)을 신안(新安)에, 건위대장군 경엄을 의양(宜陽)에 주둔시켜 적미가 도망치지 못하게 동쪽 방면을 틀어막은 상태였다.[2]논어》 공야장 제5편 제12장의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문장을 인용한 것.[3] 콩, 잡곡과 쌀가루를 섞어서 말린 전투식량으로 고대 중국의 건빵이라 보면 된다.[4] 원래 외효를 따르던 군벌로, 외효가 광무제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공손술에게 붙은 시점에 공손술 휘하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