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寇恂
(? ~ 36)
1. 개요2. 생애

1. 개요

후한의 개국공신. 자는 자익(子翼). 유주 상곡군 창평현 출신으로 집안은 명문가까진 아니지만 지방에서 나름 이름있는 가문이었다고 한다.

2. 생애

상곡군의 공조로 관직을 시작하여 상곡태수 경황의 신임을 받았다. 이후 왕망이 패망하고 경시제 유현의 현한이 들어서자, 경시제는 여러 군에 사자를 파견해 '투항하면 직위를 보존해주겠다.'고 알렸다. 상곡군에도 경시제의 사자가 왔는데, 경황이 경계에서 사자를 영접할 때 그를 수행하기 위해 따라갔다. 경황이 태수의 인수를 바쳤고 사자가 이를 받으면서 항복 의식을 마쳤으나, 사자는 밤새도록 인수를 돌려줄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구순은 병사를 거느리고 사자를 찾아가 기존의 약속대로 인수를 돌려줄 것을 청했다. 하지만 사자는 거부하며 "천왕의 사자를 공조인 그대가 위협하려 하는가?"라 하였다. 이에 구순이 답했다.
감히 사군(使君)을 위협하려 함이 아니라 계책을 불분명해 상심하는 것입니다. 이제 천하가 비로소 평정되었으나나라의 신의(信義)가 아직 펴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군께서 왕명을 받아 부절(符節)을 앞세워 사방을 순행하시니 여러 군현들이 목을 늘어뜨리고 귀를 기울여 명(命)에 귀의하지 않는 군현이 없습니다. 헌제, 이제 상곡군에 이르시어 큰 신뢰를 실추시키고 충성하려는 마음을 막으며 모반할 틈을 생기게 한다면 장차 어떻게 다시 다른 군현을 호령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경부군(耿府君)은 관리와 백성들의 친애하는 사람이니, 지금 그를 바꾸어 버린다면 현인을 얻어도 편안치 못할 것이고 현인을 얻지 못하면 더욱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사군을 위해 계책을 세우자면, 다시 그를 복위시켜 백성을 안심시키는 편이 나을 듯 합니다.
그럼에도 사자가 대답하지 않자 구순은 좌우에 명해 사자의 명령이니 경황을 불러오라 소리쳤다. 이윽고 경황이 도착하자 구순은 사자로부터 태수의 인수와 허리띠를 배앗아 경황에게 넘겨주었다. 사자는 어쩔 수 없이 조서를 받들었고 경황은 그대로 태수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경시 2년(24년), 하북에서 왕랑이 거병하여 상곡에 장수를 보내 원조를 요청했다. 구순과 문하연 민업(閔業)이 경황에게 말했다.
왕랑은 한단(邯鄲)에서 일어났으나 향방을 신뢰하기 힘듭니다. 과거 왕망 대에 어려움에 처했던 이는 오직 유백승(劉伯升)[1]이 있을 따름입니다. 지금 듣건대 대사마 유수와 백승(伯升)의 어머니, 동생 등이 사대부들을 우대하여 많은 인재들이 그에게 귀의하니 우리도 그를 따르는 편이 좋겠습니다.
경황은 "한단은 강성하여 우리에겐 홀로 저항할 만한 힘이 없으니 어찌해야 하오?"라 묻자 구순이 대답했다.
"지금 상곡은 완실(完實)하여 당장 부릴 수 있는 궁기병이 1만 정도 있고, 전 군(郡)의 물자를 모은다면 스스로 거취를 택할 정도의 힘은 됩니다. 이 순(恂)이 동쪽 어양(漁陽)으로 가 서로 동맹을 체결시키고 한마음으로 맞선다면 설령 한단이라도 저희를 도모할지는 못할 겁니다."
경황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구순을 어양으로 보내 어양태수 팽총(彭寵)과 동맹을 맺고 군사를 지원받았다. 임무를 마친 구순은 돌아오다가 창평(昌平)에 이르러 왕랑의 사자를 습격해 죽이고는 그의 군대까지 흡수했다. 때마침 경황의 아들 경엄도 아버지로부터 군사를 받아 남하하고 있었기에 그와 합류해 유수가 있는 광아(廣阿)로 향했다.

구순과 경엄은 도중에 왕랑의 장수들을 수 차례 격파해가며 마침내 광아에 도착해 유수를 만났다. 유수는 구순을 편장군에 임명하고 승의후(承義侯)라는 호칭을 내렸다.[2] 구순은 이후로 유수를 따라다니며 적들을 격파해나갔다. 그 와중에 등우와 만나 서로 의논하고 술과 소고기를 나누면서 우정도 쌓았다.

왕랑을 잡고 하북을 평정한 유수는 하내태수 한흠(韓欽)의 항복을 받아 하내(河內)를 점거하면서 경시제의 세력권인 하남까지 세력을 뻗쳤다. 이때 남으로는 현한의 대사마 주유(朱鮪)와 무양왕 이일(李軼)을 비롯한 현한의 장수들이 낙양에 주둔해 있었고, 북으로는 아직 병주(幷州)에 경시제의 잔당들이 설치고 있어 하내를 지키는 것은 매우 힘들어보였다. 하지만 하내는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인 만큼 유수는 이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 하내 수비를 누구에게 맡겨야할지 고민하다가 등우에게 물었다. 이에 등우가 구순을 적극 추천하니, 유수는 구순을 하내태수에 임명하고 대장군의 일을 대행하게 하였다. 유수는 구순에게 반드시 하내를 지켜야한다 당부한 뒤 연(燕)과 대(代)를 정벌하러 떠났다.

경시 3년(25년), 유수가 원정을 간 사이 구순은 하내군 산하 현마다 군사 훈련을 시켜 이를 감독하고, 기원(淇園)의 대나무를 베어 화살 백여만 개를 제작하였다. 또, 군마 2천 필을 기르고 조세로 400만 곡의 양식을 거두어 군자금으로 돌렸다. 한편, 유수가 북으로 원정을 떠났다는 정보를 입수한 주유는 토난장군 소무(蘇茂)에게 부장 가강(賈彊)과 군사 3만여 명을 주고 하내를 공략하게 했다. 소무의 군대가 공하(鞏河)를 건너 하내군 온성(溫城)으로 향하자, 구순은 보고를 받고 즉시 출병하면서 각 현에 온(溫)으로 모이라는 격서를 돌렸다. 구순이 먼저 온성에 들어가니, 아직 군이 전부 모이지 않아 소무보다 군세가 약소하였다. 구순의 군리(軍吏)들은 일단 군이 다 모인 후에 소무를 쫓아내자고 제안했지만, 구순은 온을 잃고선 하내를 지킬 수 없다며 거절했다.

다음 날 아침, 양군은 교전에 들어갔는데 마침 편장군 풍이(馮異)의 구원군과 각 현에서 보낸 군대들이 도착하였다. 사방에서 모여든 병사와 말들로 각 군대의 번기(幡旗)가 온성 아래를 뒤덮었다. 구순은 병사들을 시켜 성에 올라가 북을 두드리면서 크게 "유공(劉公)의 군대가 도착했다!"라 소리치게 했다. 소무의 진영은 크게 동요하니, 구순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출격하여 적군을 대파하고 부장 가강을 베었다. 패배한 소무의 군대가 강 너머로 후퇴했음에도 구순의 추격이 멈추지 않아 낙양까지 달아났으며, 중간에 강에 투신한 자가 수천이었고 포로로 사로잡힌 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구순과 풍이는 낙양성 앞에 이르러 성 한 바퀴를 돌면서 무력 시위를 마치고 나서야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고, 이 여파로 낙양성은 공포에 떨며 한낮에도 성문을 굳게 닫았다. 승전보를 들은 유수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구자익이 가히 일을 맡길 만한 인물이라 믿고 있었소!"
제장들은 승전을 축하하며 칭제를 권했고, 유수는 이를 받아들여 동년 6월, 호현(鄗縣)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당시 광무제의 군대는 항상 식량이 부족하여 구순은 친히 보급을 감독하면서 군수품이 끊이지 않고 운반토록 하였다. 소가 부족해 축력으로 수레를 끌 수 없다면 사람을 동원해 인력을 써서라도 수송한 덕에 다행히 악조건 속에서도 광무제의 군대가 굶는 일은 없었다. 광무제는 여러 번 책서를 보내 노고를 치하하니 구순의 동문인 무릉(茂陵) 사람 동숭(董崇)이 구순에게 경고했다.
"주상께서 막 즉위하시어 사방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군후(君侯)께선 대군을 거느리고 계시며, 안으로는 민심을 얻고 밖으로는 소무를 무찔러, 그 위엄이 적을 떨게 하였고 공명을 널리 떨치셨습니다. 이는 참소로 인해 화를 입기 좋은 시기입니다. 과거 소하가 관중을 지킬 때도 포생(鮑生)의 말에 깨달은 바 있어 그대로 행하자 한고조가 기뻐하였습니다. 지금 군께서 거느리고 계시는 장수들도 모두 같은 가족이니, 옛 일을 거울 삼아 마땅히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구순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그때부터 병을 핑계로 사무를 보지 않았다. 이윽고 광무제가 낙양을 공략하기 위해 하내로 오자, 구순은 동숭의 말에 따라 종군하기를 청했지만 광무제가 하내를 더 다스리라며 거절하였다. 이에 구순은 조카 구장(寇張)과 외조카 곡숭(谷崇)을 입대시켜 각자 낙양 정벌군 선봉대에 서게 하니, 광무제는 그 뜻을 헤아려 흡족해했고 둘을 모두 편장군으로 삼았다.

건무 2년(26년), 구순이 함부로 상서부의 관원을 징계하여 면직되었다. 이때 영천(潁川)에서 도적 엄종(嚴終), 조돈(趙敦)이 만여 명을 모아 밀(密)의 가기(賈期)와 연합하여 주변 지역을 약탈하였다. 덕분에 구순은 수 개월만에 복직되어 영천태수로 발령받았고 파간장군 후진(侯進)과 협력해 도적들을 쳤다. 가기가 구순에게 잡혀 참수당하면서 도적들은 몇 달만에 진압되었고, 광무제로부터 영천이 안정을 되찾은 공로를 인정받아 옹노후(擁奴侯)에 봉해져 식읍이 1만여 호에 이르렀다.

집금오 가복의 부장이 영천에서 사람을 죽여 구순이 그를 체포해 감옥에 가뒀다. 당시 분위기상 군인들은 법을 조금 어겨도 군영에서 따로 처벌하지 않은 채 눈감아 주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였지만 구순은 법대로 가복의 부장을 저자거리에서 처형하였다. 광무제를 따라 숱한 군공을 쌓아온 가복은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했고, 구순이 일부로 자신을 모욕했다 여겨 좌우 사람들에게 구순을 죽여버리겠다고 선언하고 영천으로 갔다. 구순은 가복의 말을 잘해듣고 그와 절대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니 사람들은 모두 구순이 가복을 두려워한다 생각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곡숭은 삼촌이 걱정없이 다닐 수 있게 자신이 호위주겠다 제안했지만 구순은 거절하며 말했다.
"그럴 필요없다. 과거 진왕(秦王)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인상여염파에게 굴복한 것은 오직 나라를 위해서였다. 보잘것없는 조나라조차도 이러한 의를 가졌는데 내가 어찌 그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구순은 각 현들에 명해 음식을 준비하도록 하고 가복의 군대가 영천군의 경계에 들어서면 한 사람에게 2인분의 술과 음식을 제공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구순 자신은 영접하러 가는 길에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돌아왔다. 가복의 군대는 영천에서 뜻하지 않은 환대를 받아 병사들은 모두 취했고, 가복은 구순을 추격하려했지만 이미 그의 병사들이 모두 풀어져버린 탓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하였다.

구순은 곡숭을 보내 광무제에게 이 일을 보고하니, 광무제는 두 사람을 화해시키고자 자리를 마련했다. 가복이 구순을 보고 자리를 뜨려 하자 광무제는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두 호랑이가 어찌 사사로이 싸우려 드는가? 오늘 짐이 그대들을 화해시키리라."며 그를 제지하였다. 광무제는 술자리에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는 데 성공했고, 가복과 구순은 같은 수레를 타고 나가서 친구의 의리를 맺고 헤어졌다. 가복과 화해한 구순은 다시 영천으로 복귀하였다.

건무 3년(27년), 광무제가 구순을 여남태수로 부임하게 하고, 표기장군 두무(杜茂)에게 군사를 주어 구순을 도와 도적을 토벌하도록 명했다. 구순과 두무는 순식간에 도적들을 평정했고 이후로 여남군에는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구순은 본래 학문을 좋아하여 향교(鄕校)를 정비하고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좌씨춘추(左氏春秋)》에 능통한 사람을 초빙해 몸소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건무 7년(31년), 구순은 주부(朱浮)의 뒤를 이어 집금오에 임명되었다.

건무 8년(32년) 8월, 광무제가 외효를 친히 정벌하려는데 영천에서 도적떼가 다시 일어나 광무제의 뒤를 노렸다. 광무제는 군사를 물리면서 구순에게 "영천은 장안과 가까우니 한시라도 빨리 평정하는 편이 좋소. 생각해보니 오직 경만이 이를 평정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짐을 따라 출정하고 말았구려." 라 말했다. 이에 구순이 대답했다.
"영천의 도적들은 사납고 민첩하나, 폐하께서 농(隴), 촉(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활하게 그 틈을 타 일어났을 뿐입니다.만약 폐하께서 군대를 남쪽으로 돌리신다면 그들이 이 소식을 듣고 놀라 당황할 겁니다. 원컨대 신을 선봉에 세워 주시옵소서."
광무제는 그 날로 구순을 앞장세워 군대를 남쪽으로 돌리니, 과연 대부분의 도적들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였다. 이제 다시 북진하려는데 영천의 백성들이 황제의 군대를 막고 부디 구순이 1년만 영천을 다스리게 해달라 탄원하였다. 광무제가 백성들의 청을 받아들여 구순을 영천군 장사(長社)에 남겨두어 백성과 관리들을 위무케 하자, 남은 도적들도 전부 투항해왔다.[3]

건무 10년(34년), 광무제가 장안에 도착해, 안정군 고평현(高平縣) 제일성(第一城)에서 옹주병 1만여 병력을 거느리며 투항을 번복하고 반란을 일으킨 외효의 장수 고준(高峻)을 친히 토벌하려 했다. 곁에서 황제를 수행하던 구순이 간했다.
"장안은 낙양과 고평 사이에 위치해 있어 접근하기가 편리하며, 안정, 농서 지역도 반드시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을 터이니, 이를 이용해 장안에만 머무르고 있어도 사방을 여유롭게 다스릴 수 있습니다. 지금 병사와 말들이 험로를 행군하는 바람에 모두 지쳐있어 제작년 영천을 치던 때와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하지만 광무제는 따르지 않고 진군하여 견현(汧縣)에 이른 뒤, 고준에게 항복을 권하는 사자를 보내려 하였다. 광무제는 구순에게 "경이 지난 번 짐에게 거사하지 말라 충고하였으나 부디 지금의 나를 위해 사신으로 가주시오. 만일 고준이 즉시 항복하지 않는다면 경엄을 비롯한 5군영을 일으켜 바로 공격하겠소."라 말하고 구순에게 서신을 주어 제일성에 보냈다.

고준의 군사(軍師) 황보문(皇甫文)이 나와 구순을 맞으며 무례한 태도로 일관하자, 구순은 노하여 제장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황보문을 참수했다. 그리고 황보문을 따라온 부하를 고준에게 돌려보내 다음과 같이 이르게 하였다.
"그대의 군사가 무례하여 그를 죽여버렸소. 투항할 거면 빨리 하고, 투항하기 싫으면 굳게 지키시오."
고준은 황보문의 죽음에 두려워 그 날로 성문을 열고 바로 항복하였다. 제장들이 축하하며 어떻게 한 것이냐 묻자 구순이 대답했다.
"황보문은 고준의 심복으로, 지금까지 고준의 모든 계책은 황보문에게서 나왔소. 이번에 황보문이 와서 굴복하려 하지 않았는데, 이는 투항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예 없다는 뜻 아니겠소. 그를 살려두면 반드시 다음 계책을 짜낼 것이나, 그를 죽이면 고준은 기댈 곳을 잃게 될테니 투항할 게 분명하지 않소."
제장들은 우리가 미칠 바가 못된다며 입을 모아 감탄하였고, 이미 한번 배신의 전적이 있는 고준은 안전을 위해 수도 낙양으로 보내졌다.

구순은 중앙에 들어가서도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고 경명(經明)하여 조정 내에서 그 명망이 높았다. 그는 녹봉을 받으면 혼자 누릴 수 없다며 친구나 자신의 부하 관원들에게 후히 베풀었다. 당시 사람들은 구순을 뛰어나다 여겨 그를 재상의 그릇이라 생각하였다.

건무 12년(36년), 구순이 사망하였다. 시호는 위(威). 이후 60년 2월에 운대 28장 중 하나로 선정되어 서열 5위에 올랐다.

아들 구손(寇損)은 아버지의 옹노후 작위를 이었다가 후에 협류후(挾柳侯)로 전봉되었다. 또, 구손의 서형 구수(寇壽)는 효후(洨侯)에 봉해지는 등, 구순의 자제들 가운데 스스로 공을 세워 열후(列侯)에 봉해진 사람이 여덟이나 되었다. 구순의 손녀는 훗날 후한의 권신이자 외척인 대장군 등즐에게 시집을 갔으며, 증손자 구영(寇榮)도 한환제 때 시중을 지냈다. 다만, 후한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으로 인해 자손들의 끝은 좋지 못했다. 손녀 구씨는 등즐이 실각하면서 전재산이 몰수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고, 구영은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면직 + 유배되었는데 너무 억울한 나머지 수도로 가 소송을 제기했다가 유주자사 장경(張敬)에게 무단이탈죄로 잡혀 처형되었다.


[1] 광무제 유수의 형인 유연(劉縯)의 자[2] 당시 유수는 아직 황제에 즉위하기 전이라 작위는 내릴 수 없었다.[3] 물론 태수로 다시 부임한 것은 아니고 집금오 직책은 그대로 유지한 채 임시로 다스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