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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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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구성3. 집필 동기4. 의의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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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고(渤海考)는 1784년(정조 8년)에 규장각검서 류득공이 간행한 역사서이다. 류득공은 과거 고려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음에 크게 곡하고 구당서, 신당서 등 17종의 중국 사료와 삼국사기, 고려사 등 한국 사료, 속일본기 등 모두 22종의 기록들을 참고[1], 연구하여 이 책을 썼다. 한국에서 '현존'하는 발해 역사서 중 최초의 역사서이다.[2] 고(考)라고 제목을 붙인 것에 대해서는 아직 자료 수집 및 정리에 그쳤을 뿐 역사서로써의 체계를[3] 갖추지 못한 책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발해고의 판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경희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성해응과 박제가가 지은 서문이 붙어 있다. 1911년 조선 고서 간행회에서 활자로 간행하였고 1976년에 경인문화사에서 영인본을 내놓았다. 1981년에 이용범이 한국의 역사사상(삼성출판사)에서 처음으로 번역하였는데, 한국에서는 서울대학교 송기호 교수 번역본(홍익출판사)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송기호에 따르면 발해고는 '1권본'과 '4권본'[4] 두 가지 판본이 있다고 하며, 시중에 유통되는 번역본은 모두 1권본 발해고를 모본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4권본 발해고는 1권본 발해고의 오류 및 빠진 내용을 차후에 류득공이 수정하고 보완한, 즉 개정 증보판으로 보인다. 4권본 발해고의 경우 1권본과 비교해 서두나 목차도 다르고 분량도 35%가 늘어났으며,[5] 특히 지리고 부분이 대폭 늘어난 것이 확인되었다고. 또한 발해고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서문도 제외가 되었다. 다만 4권본 발해고의 경우 독립된 단행본이 아니라 류득공의 문집인 영재서종(泠齋書種)에 포함된 형식이며,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영재서종'으로 검색하면 원본을 영인한 마이크로필름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원본과 복사본이 있는데 원본은 열람이 제한되어 있고 복사본은 상태가 영 안 좋다고. 4권본 발해고는 2017년 2월에 위즈덤하우스에서 새롭게 번역본이 나왔다. 번역자는 성균관대학교 김종성 교수. 이후 4권본 발해고를 바탕으로 같은 대학교 박물관 학예사 김종복이 내용을 증보해 <정본 발해고>라는 제목으로 재번역본을 내놓았다.

다만 시대가 시대이다보니 현재 와서는 논파된 학설도 적지 않다. 이는 류득공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류득공이 자료로 인용했던 요사(遼史)나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문제이기도 하고,[6] 류득공 본인은 이들 서적의 잘못을 인식하고 문제점을 제기하고자 했다.[7] 발해 5경의 위치에 대해서 1권본과 4권본을 비교해보면 지리 부분에서의 요사나 대청일통지의 오류를 지적한 류득공의 기술이 현대 사학계의 위치 비정과 거의 비슷하게[8]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9]

류득공 본인도 자료 수집 및 정리에 그치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지만 개중에는 발해를 고구려의 후신이고 우리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한 저자의 견해와는 상충되는, 중국 기록의 모순된 부분마저 복붙해 놓은 점도 있어서(예를 들면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을 신당서에 기록된 대로 "고구려에 더부살이하던 속말말갈"이라고 적어놓은 점) 번역자인 송기호도 이 점을 발해고의 모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또한 발해가 926년에 멸망하지 않고 그 뒤로도 어느 시점까지는 더 이어졌다고 한 것도 발해고의 미숙함이라면 미숙함.[10]

여담으로 송기호 교수가 1권본 발해고를 복사해놓은 후, 발해고 번역이 다 끝나갈 즈음에 국립중앙도서관을 다시 방문해 1권본 발해고 원본을 확인했는데, 필사본 첫머리에 있었던 발해의 왕계도가 사라졌다고 한다.

2. 구성

1권본을 기준으로 하면,다음과 같다.

0. 서문(序文): 왕계도와 박제가 및 유득공의 서문, 간단한 목록과 인용 서목이 소개되어 있다.
1. 군고(君考): 역대 발해 왕의 치세가 기록되어 있다.
2. 신고(臣考): 대문예 등 이름있는 신하들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3. 지리고(地理考):『요사』, 『신당서』,『청일통지』등을 참고로 하여 발해의 지리가 기록되어 있다.
4. 직관고(職官考): 발해의 주요 관직이 기록되어 있다.
5. 의장고(儀章考): 발해의 의식과 복장이 기록되어 있다.
6. 물산고(物産考): 발해에서 생산되는 물품이나 특산물이 기록되어 있다.
7. 국어고(國語考): 발해의 언어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8. 국서고(國書考): 발해 왕이 일본에 보낸 서찰이 실려 있다.
9. 속국고(屬國考): 발해의 부흥 국가인 정안국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4권본의 편제는 조금 다른데, 먼저 서문의 경우 발해 오경에 대해 설명하는 도표가 실려 있으며 목록도 더 상세해졌다. 또 의장고가 직관고에 포함되어 있으며, 물산고와 국어고가 없고 군고에 포함되었고, 국서고가 예문고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 속국고가 '부(附) 정안국고' 로 바뀌어, 정안국이 제목에 명시되어 있다.

3. 집필 동기

류득공은 서문에서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밝혔는데 다음과 같다.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략)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南北國史)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고려는 남쪽의 신라만 계승한 것이 아니라 북쪽의 발해를 계승하였는데, 고려가 마음만 먹고 발해사를 편찬하려고 했다면 후삼국시대 때 고려로 투항한 발해인을[11] 동원해서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고[12] 하면서, 외국인 당나라 사람인 장건장도 발해에 사신으로 잠깐 왔다[13] 가고서도 『발해국기(渤海國記)』(전3권)를 썼는데 정작 고려인은 발해사를 왜 저술하지 않은 거냐고 지적하였다.[14]

4. 의의와 평가

정리하자면, 오늘날 '동북공정'으로 발해가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데에 반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지만, 사학적으로도 발해고는 굉장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사서이다. 한국사로써의 '남북국'이라는 학술 용어 및 이론을 정립, 제시한 발해사 전문 연구자가 남긴 한국 사학사, 아니 동아시아 사학사 최고(最古)의 발해사 총서(叢書)이기 때문.[15]

류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하기 이전에 발해사는 중국의 정사나 일부 문인들의 문집, 고려 시대의 삼국사기제왕운기, 조선 초기의 동국통감 등에 단편적으로 기술되었고, 그 이전까지 제대로 정리된 기록이 전해지지 않은 탓에 분량에 한계가 있었다. 류득공의 지적대로 발해가 멸망한 뒤에 대광현을 비롯해 10만 명의 발해인들이 망명한 고려 왕조뿐 아니라, 고려보다 훨씬 많은 발해인들이 고위 관료로 출세한 거란족요나라여진족금나라[16], 양쪽 모두 이상하게도 발해사를 총괄적으로 정리해 기술할 생각들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이러한 상황은 계속된다. 기껏해야 이승휴가 제왕운기에서 발해를 고구려의 후신으로 언급한 정도.

조선 후기에 와서 이익의 성호사설, 이종휘의 동사(東史) 등에서 발해사는 하나의 항목으로 분립되어 서술되게 되는데, 이는 당시 17세기, 18세기 조선 사회에 불던 실학의 풍조, 그리고 만주족에 의해 세워진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생겨난 백두산 등 북방 영토와 변경 문제에 대한 관심의 증대도 한몫했다. 물론 거의 발해가 위치하고 있었던 만주 지역이나 한반도 북부 지역의 지리를 국가 단위로 조사할 때나 간간히 "여기가 예전에는 고구려, 발해의 무슨 주 어디 고을이었고 이름은 이랬는데..."로 가는 정도였지, 발해고처럼 발해의 전체적인 역사나 문화상에 대해 따로 '발해사 통사(通史)'라는 하나의 분야로 설정해 이를 조망한다는 연구 목적을 세우고 관련 자료를 수집 정리한 책도, 그걸 시도한 학자도 없었다.

안정복동사강목 단계까지도 발해사에 대한 고려나 조선 사학계의 인식은 그야말로 '어디서 데려온 자식' 취급이었다. 안정복은 "발해는 우리 역사에 기록할 수 없는 것"이라며 발해사에 대해 한국사와는 별 관련이 없는 나라라고 못박는 듯한 발언을 남겼고,[17] 이는 안정복의 생각만이 아니라 당장 조선 초의 동국통감도 고려 태조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무도한 나라라면서 국교를 단절하고 유명한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것을 "발해가 멸망한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발해의 원수를 갚겠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강국인 거란하고 척을 졌대? 바보같이"라고 지적한 사론이 남아 있다. 이러한 동국통감의 사론은 조선 초의 학자인 최보라는 사람이 쓴 것인데, 동사강목에도 이러한 동국통감식 사관이 알게 모르게 녹아들어 있다. 당장 발해사의 귀속을 두고 한국 학계 안에서도 의견이 분분한데, 조선 시대에도 그러한 문제는 지금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18]

그런 풍조 속에서 류득공의 발해고 저술은 조선 학계에서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에서 연구, 분석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최초의 사례였고, 정약용, 한치윤으로 이어졌다. 중국에서는 이후 20세기인 1919년에 들어서야 청의 학자였던 당안[19]이 발해국지를 펴냈고, 이에 영향을 받아 1935년에 김육불이 발해국지장편이라는 발해사 사료 모음집을 편찬했으니, 의외로 한국이 중국보다 발해사 연구를 더 일찍 시작했던 셈이다.

일제 시대의 민족주의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는 류득공에 대해 "유혜풍(柳惠風)의 발해고는 대씨 3백 년 동안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의 사업을 수록하여 1천여 년이나 사학가들이 압록강 이북을 베어버린 결함을 보충하였다"고 호평한다. [20]

여담으로 2016년 한국사 국정교과서에서는 신라와 발해가 병존했던 해당 시기인 7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대한 용어 설명이 기존의 남북국시대가 아닌 통일신라시대로 수정기술될 것이라 알려져 논란이 되었다. 편찬 위원인 이기동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의 말에 따르면 '남북국시대'라는 용어가 북한 사학계에서도 쓰는 용어인데다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가지고 현재의 남북대치를 '제2의 남북국시대'라 오버랩시키게 되어 자칫 북한 정권을 인정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것. (한국일보 기사)


[1] 그 중에는 영순 태씨 족보도 있다. 고려 고종 때 몽골제국과의 전쟁에서 군공을 세우고 영순현에 봉해졌다는 영순군 태금취를 중시조로 하는 가문인데 한국에서 태씨의 경우 영순군에서 갈라져 나온 태씨가 대부분이다. 영순현은 지금의 경북 문경시 영순면. 다만 류득공 당대의 영순 태씨 족보와 현재 전하고 있는 영순 태씨 족보가 서로 같은 내용인가에 대해서는 의혹이 있다.[2] 발해의 귀속문제는 항시 논란이 되고는 있으나 적어도 한국사의 일부로도 넣어도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 학계의 통설인데, 만약 발해고가 없었다면 한국사에도 포함된다고 주장하기 더욱 어려웠지도 모른다. 다만 발해를 한국사의 영역에서 다루는 경향은 제왕운기에서도 보이는 등 발해고가 등장하기 수백년 전부터 있었다.[3] 기전체처럼 본기, 세가, 열전, 지(志) 등으로 이루어진 구성.[4] 경희대학교 도서관에도 4권본 발해고가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5] 국서고의 경우 4권본에는 당현종이 발해 무왕에게 보냈던 네 통의 국서를 더 추가했다.[6] 애초에 대청일통지가 요사의 기록을 기본 자료로 하고 있다.[7] 예를 들어 신당서에서는 누락된 발해 곽주(郭州)가 대청일통지에는 있다는 점을 찾아낸다던가, "요사에서 거란 태조가 발해를 멸하고 103개 성읍을 얻었다고 했는데 기록에는 왜 113개나 있냐?"고 지적한다던가, 발해의 동경용원부를 개주(지금의 랴오닝 성 봉성진), 남경남해부를 해주(지금의 랴오닝 성 해성현)로 비정한 요사의 기록이 틀렸고 동경용원부나 남경남해부는 한반도 함경도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거나. 물론 남경남해부는 함경도에 있으니 절반은 맞긴 했지만 말이다.[8] 물론 비슷하게 가고 있지 그 지역을 딱 짚어낸 것은 결코 아니다. 동경용원부나 남경남해부의 위치에 대해서 류득공은 각각 지금의 함경도 경성군함흥시를 지적했지만(이는 정약용 역시도 같은 견해였다) 현대에는 고고학 발굴 성과를 통해 지금의 훈춘과 북청군이 유력시되고 있다. 상경의 위치도 1권본이나 4권본 모두 일관되게 영고탑 등지라고 주장했지만 현재는 (일제 만주국시절부터 축적된 발굴 조사 성과에 따라) 요사의 기록대로 헤이룽장 성 닝안 현이 상경용천부 지역으로 확인되었다(서경압록부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마저도 어디인가. 당시에는 고고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9] 요사에서 발해의 중경 현덕부를 지금의 랴오양(遼陽)으로 비정한 것과 달리 류득공은 지린 성 지린 시 지역으로 비정했고, 현대 사학계에서 지목하고 있는 중경현덕부의 위치는 지금의 중국 지린 성 허룽 현(和龍縣) 서고성자 유적.[10] 다만 조선 시대의 역사관은 지금의 역사관과는 조금 달랐던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는 것이 백제부흥운동의 경우 우리는 백제의 멸망은 660년에 있었고 백제의 마지막 왕을 의자왕으로 알고 있지만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은 백제 부흥군에 의해서 옹립된 풍왕까지 백제 국왕으로 쳐서 백제의 역사를 3년 더 끌어올렸다. 류득공의 발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발해 멸망 이후 발해 땅에서 벌어진 부흥 운동이나 그 결과로 생겨난 정안국이나 대발해국, 흥료국 등 발해의 후계를 자처한 국가들을 발해 역사의 연장으로 볼 것이냐 말 것이냐의 차이에 있는 것이다. 당장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 관계나 발해 왕조 수립 과정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발해사에 대한 한국과 중국 학계의 인식 차이를 가르고 또 양국이 엄청난 단위의 역사 전쟁을 치르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만 생각해도 류득공이 지적한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하고 또 민감한 요소이기도 한데, 발해가 고구려 부흥을 선언한 국가이기에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써 발해는 한국사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발해의 계승을 자처한 국가들은 또 한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가? 한국사에서 이들 국가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발해 멸망 시점을 모호하게 잡았던 점은 류득공의 한계임이 틀림없으며, 현재 학계에서는 발해는 926년에 상경 용천부 함락과 함께 역사에서 수명을 다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11] 류득공에 따르면 전후로 10만 명이었다고 한다.[12] 일단 발해도 중국 제도를 따라 당연히 사관을 두었을 것이고, 사관이 아니어도 갖고 온 책이 한두 권은 있었을 것이고, 그마저도 아니면 대광현을 통해 발해의 왕실 계보를, 은계종을 통해서는 발해의 예법을... 하는 식으로. 대광현은 고려 귀순 이후 왕씨 성을 받고 고려 왕실 족보에 편입되었는데, 대광현의 아들로 거란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던 대도수가 대씨 성을 쓰고 있었고 현대에도 태씨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대광현의 아들들 모두가 왕씨를 받고 고려 왕족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닌 모양. 고려 멸망 이후에 왕족이 아니면서 왕씨 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원래 성으로 돌아가던지 아니면 어머니 쪽 성을 따르게 했다. 왕씨 학살 참조. 은계종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재미있는 기록이 있는데, 은계종이 처음에 항복해서 개경의 천덕전에서 왕건을 보고 절을 세 번 했다. 주변에서 "저거 폐하 앞인데 좀 무례한 거 아님?"이라고 수군댔는데, 대상(大相) 송함홍(고경참문의 내용을 해석했던 그 사람)이 "원래 자기 나라를 잃은 사람은 세 번 절하는 게 예에 맞음"이라고 가르쳐 주었다고. 안정복춘추좌씨전진혜공(晉惠公)이 쫓겨나 진(秦)에 망명했을 때 진목공(秦穆公) 앞에서 세 번 절했던 전례가 있다며, 아울러 당시 행해지던 삼궤구고두례진나라 이후에 생겨난 것으로 선진 시대의 예법과는 안 맞는 것이라고 에둘러 깠다. 발해인들이 지녔던 유교 소양이나 독서 수준을 엿볼 수 있는 부분.[13] 1956년에 장건장의 묘지명이 베이징에서 발견되었는데, 묘지명에 따르면 장건장은 833년 발해 사신을 배웅하는 송사로 발해를 방문해 1년 남짓을 머무르고 835년 8월 당의 유주(지금의 베이징)로 돌아왔다.[14] 고려가 발해에 무관심했다기보다는 발해유민들이 발해사를 편찬하는 것에 무관심으로 대응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와 고려 사이에 끼어있는 발해를 정통 왕조로 인정하고 부각시키면 그럴수록 발해와 무관하게 건국된 고려왕조의 계승성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고려라는 나라는 옛 고구려 영토 중 통일신라가 차지하고 다스렸던 지역에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고구려-통일신라의 통일-고려의 재통일 순서를 부각시키는 게 더 유리하고 실제로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했다. 고려 왕조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많은 수의 발해인들이 고위 관료로 출세하고 왕실의 연척이 되었던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조차도 발해의 역사를 정리해 기술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들은 차라리 발해를 적국으로, 나아가 자신들과는 혈연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전혀 관련이 없는 별개의 존재로 간주했으니 그랬다고 치더라도, 고려가 발해의 역사를 굳이 정리하지 않은 것은 류득공의 말마따나 분명히 아쉬운 점은 틀림없다.[15] 이러한 점 때문에 현재 발해사 연구의 권위자로 유명한 송기호, 한규철 교수 등의 학자들도 류득공을 발해사의 선배 연구자로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16] 이쪽은 아예 옛 발해 왕족들이 황후가 되기까지 했으니 고려보다는 훨씬 조건이 나았다.[17] 물론 발해사가 한국사와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보다는 명분론이나 정통론의 입장에서 '정통' 왕조로 보기는 어렵다는 인식에 가깝다. 동사강목 항목 참조.[18] 다만 안정복의 발해관과는 달리 그의 동사강목에서의 발해사 서술은 그 자체로 거꾸로 류득공의 발해사 서술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항목 참조[19] 만주족이라고 한다.[20] 발해고의 서문을 보면 류득공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임을 고증해 한국사의 범주에 있음을 강조했고 또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진이나 거란에게 역사적 영토 권리를 내세우지 못했다고 주장하였지만, 서희 항목을 보면 당시 고려는 굳이 발해가 아니어도 고려 자체로 고구려의 계승자로써 거란에 대해서 고구려 옛 땅에 대한 연고권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애초에 고구려 옛 땅에 대한 연고권이 아니라 을 치기 전에 고려를 좀 밟아놓고 고려와 송이 연계하는 것을 막자는 목적이 더 강하기는 했지만) "고려는 신라에서 일어났고 우리는 고구려 땅에서 일어나 옛 고구려 땅을 차지했는데 너희가 멋대로 차지한 자비령 이북 고구려 땅 당장 내놓지?"라며 으르던 거란의 소손녕이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고 수도도 (고구려 옛 수도인) 평양으로 삼은 우리가 곧 고구려인데 뭔 개소리야, 국경으로 따지면 너희 동경(지금의 랴오양)도 우리 땅이거든?"이라고 반박하는 서희의 말에 별 반박을 하지 못한 것이나, 훗날 쿠빌라이 칸이 고려에서 찾아온 태자 왕전을 보고 "옛날 당태종도 몸소 쳐들어 갔지만 함락 못 시켰다는 그 고려가 알아서 나한테 먼저 항복하러 왔어?"라며 반겼던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류득공의 말처럼 발해 역사를 편찬해 놓고 나면 장군 한 명 시켜서 "여기 우리 땅임. 역사에도 나옴. 그러니 우리가 도로 가지는 게 맞지?"라면서 '그 땅을 우리 것으로 찾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현실과는 동떨어진 지나친 낙관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