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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5:22:09

소손녕

요사(遼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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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

1. 개요

蕭遜寧
? ~ 997년(성종 15)

요나라(= 거란)의 장군으로 본명은 소항덕(蕭恒徳) 또는 소긍덕(蕭恆德)이었다. 한국에서 부르는 소손녕의 손녕(遜寧)은 소항덕의 로,《고려사》에서 본명이 아닌 소손녕으로 나오기에 이 이름으로 더 알려졌다.[1] 가족 중에 형으로 제3차 여요전쟁때 거란군 사령관이었던 소배압(蕭排押)[2]이 있다.

2. 생애

983년 거란 야율씨 황실의 황녀인 월국공주[3]를 아내로 맞아 제5대 황제인 경종예지황후, 즉 승천황태후 소작의 부마가 되었으며 이후 동경유수가 되었다. 그래서 소배압과 소손녕은 형제이자 동서이기도 했다. 소손녕도 형 소배압처럼 북송과의 전쟁에서 실전 경력을 쌓았는데 중요한 요충지인 연운 16주를 두고, 986년에 벌인 북송과의 전쟁에서 선봉대가 되어 성을 함락시켰으나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당시 성종의 모후로 섭정이었던 승천태후 소작은 직접 소손녕을 문병하고 약까지 직접 내려주었다. 회복한 뒤에도 북송과의 전쟁때 계속 선봉에 나서 전공을 세움으로써 고모인 승천태후의 총애를 받았다.[4]

993년 제1차 여요전쟁이 시작되면서 군대를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다. 봉산에서 고려군을 격파하고(봉산 전투) 남하하다가 안융진 전투에서 대도수유방 등의 분전으로 패배한 후, 서희와의 담판으로 철군했다. 이때 소손녕은 자신의 부대가 800,000명이라고 허풍을 쳤지만 사실 거란의 군 편제상 그의 휘하 부대가 그 정도의 대군이었을리는 없다. 정확한 병력수가 사서에는 없지만 거란군의 경우, 원정을 할때 병력이 100,000명이 넘으면 총사령관급인 '도통'을 두는데 소손녕은 당시 도통도 아니었고, 도통이 없는 거란군은 대개 기병 60,000명 미만이었으니 실제로는 최대로 잡아도 60,000명이었을 것이다.[5][6]

사실 당시 거란군은 이렇다 할 영토나 요충지도 점령하지 않고서 다짜고짜 "항복하라"는 공갈포를 쳤지만 이때 소손녕의 이 말이 허풍임을 서희 혼자만 간파했고, 고려 조정은 대부분 서경 이북의 을 떼어 주면서 항복하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할지론) 그러나 때마침 안융진에서 고려군이 승리를 거두자 분위기가 바뀌게 되었고, 마침내 서희와 소손녕 사이에서 협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강동 6주라는 요충지를 고려에 넘겨주어 이후의 전쟁에서 거란군이 고전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7] 그러나 소손녕은 서희의 주장을 납득해 자신이 목적을 이뤘다고 생각해서 서희에게 7일 동안 잔치를 베풀며 낙타 10두, 100필, 1,000마리, 비단 500필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줬다. 아무래도 문무를 겸비한 형 소배압과는 달리 나름 무용은 있었으나 정치전략을 생각하는 머리는 모자랐던 듯하다고 서술되는 경우가 많지만[8] 이런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당시의 상황을 《요사》에서는
"고려 왕 왕치가 항복하므로 땅을 떼어 주었다."
라고 기록했지만 거란 측 관점이므로 역사 왜곡이다.

이 고려 원정을 공적으로 평가했는지 요 성종 치세하의 거란 조정으로부터 '계성갈력공신'(啟聖竭力功臣)의 칭호를 받았고,(994년) 그 뒤 화삭노(和朔奴)라는 장군의 휘하에서 옛 발해 유민들의 세력인 올야국에 대한 원정에 참전했다. 당시 올야국은 거란군과 싸우기 전에 항복했으나 소손녕이 항복한 올야인들을 포로로 취급하고, 함부로 다뤄서 올야인들의 거센 저항을 받게 되었다. 화삭노는 퇴각을 생각했으나 소손녕은 공을 세우기 전에는 퇴각할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에 화삭노는 동남 방향으로 진격해서 고려와의 북쪽 경계까지 이르렀으나 식량 보급도 끊기고 많은 사상자를 낸 채 대올야 원정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이 책임을 물어 소손녕은 작위를 빼앗기게 되었다. 그래도 996년에 행군도부서(行軍都部署)에 올라 포로모타부(蒲盧毛朵部)를 공략했다.

997년 아내인 월국공주가 병에 걸리자 승천태후 소씨가 현석(賢釋)이라는 궁녀를 보내 간병을 시켰는데 소손녕이 이 궁녀와 간통을 하게 되었다. 이에 월국공주는 분에 못 이겨 죽고 말았고(恚而薨) 이 사실을 듣고 격노한 승천태후가 소손녕에게 사약을 내려(賜死) 죽인다.[9] 사후에는 난릉군왕(蘭陵郡王)에 추봉받았고 아들인 소필적(匹敵)이 소손녕의 뒤를 이어 '난릉왕'의 작위를 받았으며 그 역시 종실 야율씨와 결혼했다.[10]

3. 여담

고려 성종의 장인이 될 뻔한 사건이 있었다.

『요사』에 따르면, 통화 14년(996년으로 고려 성종 15년에 해당한다.) 3월에 고려 왕 왕치(성종)가 표문을 올려 혼인을 청하니 동경유수 부마 소항덕(=소손녕)의 딸을 시집 보내는 것을 허락한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듬해인 997년에 소손녕의 간통 사건이 터지고, 부인인 월국부인이 죽자 소손녕도 마침내 사사되고 말았고, 뒤이어 고려 성종도 승하하자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4. 대중매체



[1] 비슷한 예로 삼국통일전쟁한반도에 원정 온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도 있는데, 정방(定方)은 자(字)이고, 본래 이름은 소열(蘇烈)이었다. 덧붙이자면 당시 거란의 최고 명장야율휴가라는 사람의 자도 손녕이었다. 한자까지 遜寧으로 같다. 당연한 얘기지만 중국쪽 사이트에서는 본명인 소항덕으로 쳐야 나오고 소손녕이라고 하면 잘 안나온다.[2] 소배압 항목에도 설명이 되어있지만 배압이라는 이름은 다른 한자로도 음차되었는데 몽골어족 언어에서 기쁨을 뜻하는 바야르(Bayar)를 음차한 것이다.[3] 월국공주 야율씨는 제5대 경종예지황후(승천황태후) 소작 사이의 딸이었다. 따라서 제6대 성종의 누이였다.[4] 형인 소배압보다 먼저 부마가 됐다는 것외에 여러 사실을 종합해보면 적어도 말년에 큰 사고를 치기 전까지는 형보다 더 신임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5] 안주섭의 저서인《고려거란전쟁》에서 발췌했다.[6]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도 0 하나는 빼야할 것이라고 언급했다.[7] 이전에 후진의 석경당연운 16주를 거란에게 내어주어 송이 거란에게 고전했다는 걸 생각하면 재밌는 부분.[8] 전쟁은 기본적으로 국가 간의 정치 / 외교적인 현안을 무력으로 해결하기 위해 동원되는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사령관급의 고위 관료가 정세 판단을 잘못하면 무의미한 전투에 휘하 장병들만 갈아넣는 상황이 된다.[9] 채널A <천일야사> 제149회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소손녕이 너무 젊게 나왔던 데다가 본명인 '소항덕'으로 나왔다.[10] 요 성종의 동생 야율보현노의 장녀 한국장공주, 소필적의 어머니인 월국공주가 야율보현노의 여동생이니 고모인 동시에 시어머니도 된다. 훨씬 뒤의 일로 요 성종의 붕어 이후 측실이자 요흥종의 생모인 소누근이 정실황후인 소보살가를 모함하여 죽인 사건이 있었는데, 소필적은 소보살가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함께 죽을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에 부인이 여진 땅으로 도망가자고 했으나 거절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