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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신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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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성립2.2. 초반(우호적 관계)2.3. 중반(고구려 우위)2.4. 파탄2.5. 종결2.6. 또 다른 시작
3. 관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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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항목에서는 신라고구려의 관계를 말하며 고구려가 멸망한 7세기까지 관계를 이었다.

고구려-백제-신라로 대표되는 삼국간의 관계 중 한쪽 나라의 왕을 죽인 전적이 없는 유일한 관계다.[1][2] 그래서인지 사서의 여러 기록을 보면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나머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원만한 모습을 보인다.[3]

2. 역사

2.1. 성립

신라고구려는 기원전부터 존속했지만, 두 나라 사이에는 낙랑군, 대방군, 옥저, 동예 등의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직접적인 교류는 거의 없었다. 4세기에 이들이 모두 멸망, 축출로 정리되면서 비로소 두 나라의 직접 관계가 시작되었다.

2.2. 초반(우호적 관계)

처음부터 아주 우호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고구려가 3세기 전중반 즈음 동예 및 옥저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강원도 영동 지역에 영향력을 부식해나가고 있던 신라와 사소한 마찰을 빚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구려가 동천왕 때 비류수 전투에서 위나라에게 대패를 당하면서 강원도 일대 영향력을 잃게 되는 바람에 이 갈등은 뜻하지 않게 종식되었고, 그 동안에 고구려, 마한(목지국 및 신분활국 세력), 낙랑-대방군 등이 서로 싸우다 다들 사이좋게 큰 타격을 받고 세력을 잃은 이 시기에 백제가 부쩍부쩍 성장해 그 공백을 메우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우선 백제 전성기 때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했기에 고구려와 백제는 최악의 대립 관계였다. 한편 백제가 3~4세기에 삼한 전체의 명목상 수장이었던 목지국을 비롯한 충청도 일대 옛 마한 소국들을 정리해서 직접 지배령화한 후에는, 기리영 전투 이래로 개통된 바 있었던 옛 진한 - 낙랑, 대방군 무역 경로가 다시 막혀버린 상황이었기에 신라와 백제 또한 대단히 불편한 관계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신라와 고구려는 다툴 이유는 전혀 없을뿐더러 사이좋게 지낼 이유가 많아지게 되었다.

2.3. 중반(고구려 우위)

그러다 5세기에 고구려의 전성기가 열리는데, 이 때 신라가 광개토대왕의 고구려와 적극적인 관계를 맺어 신라로 침입한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을 고구려가 격퇴하는 등 크게 도움을 받았다. 고구려가 강원도 북부, 황해도, 충북 일대를 장악하면서 옛 진한 - 낙랑ㆍ대방 무역로가 복원된 것 또한 물론이었다. 그러나 이에는 대가가 있었다. 내물왕이 고구려 천하관을 받아들여, 광개토대왕에게 신하로서 복속하고, 경북 서북부를 고구려군 주둔지로 내주며 서라벌 근처에서도 고구려군 주둔지를 두게 해주는 관계가 형성된 것. 오늘날로 따지자면 주한미군과 유사한 상황이다.

이 기간 동안 신라는 고구려와 중국 북조의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군사적, 경제적, 행정적, 문화적으로 크게 동질화가 진행되었으나[4], 위와 같이 기분 나쁜 관계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다.

이후 4세기 중반에 신라가 백제와 우호 관계를 맺게 되자 대백제전을 크게 중시하던 고구려가 당황했으며, 이에 신라와 함께 충주 고구려비를 세우면서 둘의 관계설정을 다시 한다. 물론 고구려 우위는 변함 없었으나 이 때 신라왕은 고구려왕의 단순한 ‘신하’가 아닌 ‘동생’으로 의제되어 지위가 크게 높아졌다.

2.4. 파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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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국가적 역량이 크게 향상된 신라는 더 이상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얻을 게 없음이 분명해졌으며, 이에 경북 서북부에서 고구려군을 몰아내어 잃었던 영토를 되찾으며 고구려 적대 정책을 분명히 하면서 고구려와의 종속적 우호 관계는 완전히 끝난다. 이후로는 나제동맹의 시대가 되며, 그 결과 신라가 6세기 중반에 한강 상류를, 백제는 하류를 얻게 되며 고구려의 전성기 또한 끝난다.

하지만 신라와 백제의 동맹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신라는 백제를 상류에서 몰아내고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도 전사시킨다. 그 이후 신라의 전성기 때는 신라가 고구려와 동맹을 맺으려고 왔지만 고구려는 경기도 중ㆍ북부 일대를 반환하라고 하고, 결국 신라는 반환요구를 거절하고 당나라와 나당동맹을 맺게 된다.

2.5. 종결

신라와 당나라는 연합하여 먼저 백제를 무너뜨린다. 백제를 점령한 나당연합군은 이제 고구려를 치는데 결과적으로 고구려도 멸망하게 된다. 물론 그 뒤로 고구려 부흥 운동이 있었지만 안승검모잠의 부흥운동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며 고구려는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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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또 다른 시작

일단 신라는 고구려 유민으로 이뤄진 보덕국을 세우고 보덕국왕을 신라왕의 신하로 두는데, 이는 5세기에 있었던 신라-고구려 관계와 크게 비슷한 것이었다. 다만 서열은 완전히 뒤바뀐 것이었다.

보덕국은 오래지 않아 해체되지만 신라는 훗날 고구려를 이어받은 나라인 발해 그리고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게 되는데, 특히 신라와 고려의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고구려와 맺었던 관계를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양상이 흥미롭다. 고구려와 신라는 보덕국까지 합하면 처음에는 고(구)려대왕의 신하 신라왕 - 고(구)려대왕의 동생 신라왕 - 신라대왕의 신하 보덕국(=고려)왕 - 보덕국(=고려) 폐지 및 신라로의 흡수 이렇게 진행이 되었다. 한편 왕건의 고려는 처음에는 신라대왕의 신하 고려왕 - 931년 신라가 고(구)려에게 순(順)하기로 하면서부터는 고려대왕의 신하 신라왕 - 935년 신라국 폐지 및 고려로의 흡수 이렇게였다.

때문에 935년 신라가 고려에게 항복할 때는 이미 신라왕이 고려대왕의 신하였던지라 '선양'이 불가능하여 '귀부'형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적어도 신라 세계관으로 봤을 때 후백제는 반란 일으킨 신라 정규군 집단이었기에 후백제와는 어떤 외교적 형식도 불가능했음이 주목할 부분이다. 경순왕이 일부러 고려에게 순하기로 한 다음 귀부를 결정한 걸 봤을 때, 경순왕을 비롯한 신라 지배층이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상당히 잘 알고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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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련 사건


[1] 사서에서 백제의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였고, 고구려의 장수왕은 백제의 개로왕을 죽였으며,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의 성왕을 죽였다.[2] 다만 자세한 기록이 안 남아서 그렇지 신라와 고구려 모두 왕족과 외척까지 포함하면 많이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 대표적인 사례로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이 신라와의 싸움에서 전사해 고구려가 신라에게 분노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도 백제와 고구려가 왕실이 같은 씨족 출신임에도 서로의 왕을 죽일 정도로 갈등이 심했던 것과 신라가 일방적(?)으로 백제 성왕을 죽인 것에 비하면 임팩트는 상대적으로 덜하다.[3] 나제동맹 당시에도 신라와 고구려가 마냥 적대하지만은 않았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있다. 백합야 전투 참조.[4] 이 시기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기에 고구려가 그 전 백제처럼 무역로를 막는 등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립 관계라면 모를까 아예 복속된 속국의 경제적 이권이나 경로를 차단하는 종주국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