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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12:48:14

검모잠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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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연대 부흥운동 주요인물 결과
670~673 한성고구려국 검모잠 / 고연무 / 안승 실패
681 안동도호부에서의 보장왕의 모반 보장왕 무산
684 금마저에서의 보덕국의 반란 대문 실패
696~698 요동 일대의 반당전쟁 걸걸중상 / 걸사비우 / 대조영 발해
897~901 송악의 궁예 정권 궁예 후고구려
918 왕건의 역성혁명 왕건 고려
1217 최광수의 난 최광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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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대형
검모잠
관등 <colbgcolor=white,#191919> 대형(大兄)
검(劍)
이름 모잠(牟岑)
출신지 고구려 수림성(水臨城)
사망지 한성(漢城)(?)
생몰연도 ? ~ 670년 (음력)
1. 개요2. 일생
2.1. 고구려부흥운동2.2. 죽음과 사후
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대조영3.2. 드라마 연개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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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부흥운동가.

고구려의 왕족안승을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와 연합 작전을 펼쳐 당나라에 맞서서 부흥 운동을 지도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죽었다.

2. 일생

2.1. 고구려부흥운동

본래 수림성(水臨城) 출신의 사람으로 대형(大兄) 벼슬을 지내고 있다가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670년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당나라의 관리와 당나라 승려 법안 등을 죽이고 궁모성(窮牟城)[1]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으로 이동했다.

다만 요동의 안시성에서 검모잠의 남은 무리가 당군과 싸웠다는 기록도 있어, 부흥운동의 지휘부가 황해도로 이동했지만 휘하 세력은 여전히 고구려 전역에서 항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와중에 서해 사야도[2]에서 왕족 안승[3]과 만나자 한성(漢城)[4] 안으로 맞아들여 왕으로 추대했다. 이는 하급 귀족이자 지방인 출신이던 검모잠으로서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주도하는 데 신분적으로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왕족인 안승을 명목상으로 내세워야 부흥운동이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끊어진 고구려 왕조를 계속 이어간다는 명분으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성을 거점으로 선택한 건 여기가 고구려 3경 중 하나일 정도로 고구려 안에서 나름대로 개발된 지역이면서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중국이나 신라의 직접적 공격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에[5] 오랜 전쟁으로 초토화된 다른 지방보다는 여기가 사회적, 군사적 기반이 고구려 영토 중에서 비교적 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우군을 만들기 위해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로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 신라에 원병을 청하는 조건으로 충성을 맹세했다.[6] 신라 문무왕은 이들의 청을 받아들여 사찬(沙飡) 수미산(須彌山)을 보내어 안승을 '고려왕'으로 봉했으며 군량미전쟁 물자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후에 안승 일행을 서쪽 금마저(金馬渚)[7]에 머물게 했다.[8] 자존심은 버렸지만 이로서 석문 전투 때까지 고구려 부흥군은 후방 걱정 없이 신라 지원군의 도움을 받아 함께 싸웠다.

2.2. 죽음과 사후

안승이 고구려왕에 봉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당고종은 대장군 고간을 동주도 행군총관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대군을 내주어 고구려 부흥 세력을 토벌하도록 했다. 이 시기에 검모잠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안승과 의견이 대립하다가 결국 안승에게 피살당하여 생을 마감했다. 백제부흥운동의 귀실복신과 똑같은 최후를 맞은 것. 검모잠이 죽은 후에 안승은 아예 신라로 도망쳐 내려왔다.[9]

그러나 검모잠 피살 이후에도 고구려 부흥군은 계속 옛 고구려 영토 각지에서 활동했다. 검모잠에 이어 누가 이들을 이끌었는지 혹은 안승이 여전히 상징적인 구심점으로 행동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다 결국 671년에 요동 안시성에서 농성하던 검모잠의 남은 무리가 토벌당했고 672년 석문 전투 패배로 신라군이 고구려부흥군을 도울 여력이 없어졌고[10] 결정적으로 673년 호로하 전투에서 고간이 지휘하는 대군에 고구려부흥군이 패배하면서 일대의 부흥 운동까지 완전히 소멸했고 살아남은 부흥군 잔여 세력은 신라 땅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한편 신라로 도망친 안승은 보덕국의 왕으로 봉해져 신라로 피난한 고구려인 자치 집단의 왕이 되었다.

안정복은 검모잠을 충신이라고 하면서도 검모잠이 한 방법에 대해서는 "굳이 불필요하게 당나라의 관리를 죽여가면서까지 당나라와 등지고서 신라에 아첨해 붙었다"고 "선택하는 방법을 몰랐다"고 비판하면서, "고구려를 부흥시킬 목적이었다면 신라가 아니라 차라리 당나라에 접근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11][12]

고구려 입장에서 신라와 당나라는 일단은 둘 다 적국이기는 하지만 중국과는 고구려-수 전쟁 때부터 수십, 수백만 병력 단위로 수십년간 죽기 살기로 싸워온 관계였고 반면 신라와는 이미 100년도 지난 진흥왕 시대 이후로는 전면전은 많지 않았고 그나마 칠중성 전투, 온달의 공격 등 고구려에서 먼저 공격한 것이 많았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피터지게 싸우느라 바빴다. 게다가 668년 신라가 북진할 때도 검모잠 집단의 영역이었던 황해도 지역은 전투 1번 없이 신라에 항복했기 때문에[13] 검모잠과 황해도 지역 고구려 유민 입장에서 중국과 신라에 대한 원한의 정도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으니 선택지가 둘밖에 없는 668~670년 시점에서는 신라와 손을 잡는 것이 자연스럽다.

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대조영

배우 김명수[14]가 연기했다. 원래부터 평양성에서 연개소문의 부하로 있었으며 일찍이 태학에 같이 있던 개동이가 범상치않은 인물이라는걸 알고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특히 연남생이 대조영을 죽이려 할 때 여러번 구해준 바 있다.[15] 사수 대첩이 일어난 2차 당나라 침공때도 참여해 공을 세우기도 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며, 대중상이 개동이와 대조영의 연관성을 확인할 때 그를 불러서 알아보는 등 비중이 꽤 높은 캐릭터. 하지만 그가 일생일대의 실수가 있었으니, 바로 신라로 귀순했던 고구려의 마지막 혈통 고안승을 고구려국의 국왕으로 추대한 것. 그로인해 고구려국을 건국하고 대막리지가 된다. 하지만 유약한 안승은 하나부터 열까지 신라를 통하지 않고서는 일처리를 하지 않았으며, 안승신라의 관계를 의심하는데, 안승은 대조영을 없애려는 당나라의 전술과 신라 문무왕의 밀지, 대조영과 김찬의 갈등으로 결단력이 매번 흔들려 자기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기밀을 유출했다. 제50화에서 대조영의 선발 부대가 이해고의 기습공격에 전멸하고 나머지 일행은 흩어지며 대조영은 생사를 알수 없게 된 시기에 안승이 내통한 것과 진의를 알아 목숨을 뺏으려고 했지만 마지막 정으로 신라로 가라며 결국 하지 못했는데 안승이 신라군에게 도움을 요청한 친위 쿠데타로 측근인 온사문, 이기우가 암살당하고 그대로 신라군에게 체포된 후 안승에게 저주를 퍼붓고 살해당한다.
네 이놈 안승아! 네놈이...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한 줄 알긴 하느냐? 너를 이 고구려국의 태왕으로 내세운 것은 죽은 이 땅에 살아있는 뜻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헌데 네놈은 눈 앞의 영달만을 좇는 졸장부였느니라! 살아 있는 땅에 죽은 나뭇가지만을 꽂아 놓은 꼴이 되고 말았어...... 안승은 내 말을 똑똑히 듣거라. 네놈의 부귀영화는 반백년도 가지 못하리라! 허나 그 치욕은 자손만대로 이어질 것이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고안승과 함께 더럽혀지는 내 이름 석자가 애석하구나....하하하하하....[16]

3.2. 드라마 연개소문

배우 안승훈[17]이 연기했다. 2부에서 무술 대회에 참가해 연개소문과 무를 겨루나 패배한 뒤에 의형제를 맺는다. 연개소문이 평가하길 검모잠은 무식하고 지략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후 장군이 되어서 비사성의 성주가 되지만, 당나라 수군을 얕잡아보고 전투에 대한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당나라 수군의 기습 공격에 패퇴한다. 하지만 이후 절치부심하여 물속에 말뚝을 박고 유인하는 계책으로 당나라 수군을 전멸시키는 공을 세웠으며, 2차 전쟁에서도 사수대첩 당시에도 당나라 수군을 훌륭하게 유인해냈다. 작 중에서 연개소문과 의형제를 맺었던 생해, 고돌발, 뇌음신이 전부 전사하거나 참수를 당하는 등 사망했지만[18] 유일하게 의형제 중 사망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생존했다. 무기는 철퇴를 사용했으며, 무술 대회에 참가할 때랑 연개소문의 반란 당시 연개소문의 정적들을 처형할 때 썼다.

[1] 어디인지는 미상인데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의 옛 이름이 궁홀(弓忽) 또는 검모현(劍牟縣)ㆍ궁모현(窮牟縣)으로도 불린다"는 단재 신채호의 지적이 있다. 또한 연천의 옛 이름이 공목달현(功木達縣)이었던 점을 들어서 연천으로 비정하는 설(정구복)도 있으며, 지금의 신의주의 옛 지명이 궁구문(弓口門)이었던 데서 의주의 압록강서해가 접하는 지역에 위치한 옛 고구려 수군 기지였다고 하는 설도 있고(강경구), 개모성(蓋牟城)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으며(이상훈), 평양 인근이었다는 설(이케우치 히로시)도 있다.[2] 이병도는 지금의 덕적도 근처에 있는 소야도라고 비정했다.[3] 보장왕의 아들 혹은 보장왕의 외손이자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의 아들.[4] 서울을 뜻하는 한성이 아니라 오늘날 황해도 부근의 지명으로 황해도 재령군 일대.[5] 수, 당의 공격은 대동강 이북 위주였고, 신라와의 전선은 임진강 유역에서 형성돼 있다가 고구려 말기에 내분이 일어나 연정토 등이 남부 방어선을 통째로 바치고 항복해 668년 신라군은 별 저항 없이 중간지역을 순조롭게 건너뛰고 평양 근처 사수까지 바로 진격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황해도 지역은 고구려 멸망 시점까지 쭉 안전한 후방이었다.[6] 정확히는 "신라가 원병을 보내어 나라를 되찾는 것을 돕는다면 번병(藩屛, 번국)이 되어주겠다"며 충성을 맹세했다.[7] 오늘날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8] 이는 검모잠이 죽고 안승이 신라로 내려온 후일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9] 문무왕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한 것은 검모잠이 살아 있었을 적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안승 일행이 금마저에 머물게 된 것은 검모잠이 죽은 이후라는 말도 있다.[10] 672년 기준 신라군 주력은 옛 백제 지역에 남아있던 당나라 잔여 세력인 웅진도독부와 싸우고 있었다.[11] 동사강목은 어디까지나 18세기 유학자, 그것도 성리학이 한창 교조화된 시대에 쓰인 것이다. 안정복의 생각은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신하 몇몇의 잘못일 뿐이니까 잘만 말했다면 당나라가 다시 고구려를 부활시켜 줄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것으로 백제웅진도독부처럼 군주가 당나라의 직접 임명과 책봉을 받는 형태로써 최소한의 부흥이라도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나라에게 '도독'소리 듣는 상태 따위가 '부흥'이라고 불러줄 수 있는 상태인지는 차치하고 고구려의 보장왕이 안정복의 말대로 당나라에 의해 요동도독 조선왕에 봉해져서 고구려 땅에 파견되기는 했지만 결국 말갈족과 짜고 당나라에 반란을 꾀했다는 이유로 재소환당한 것을 생각하면 안정복이 "당나라에게 잘만 이야기했어도 고구려 부흥을 이룰 수도 있었다"라는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이상일 뿐인지 알 수 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성리학의 입장에서 나온 이상론의 하나일 뿐이다.[12] 그런 식이라면 일제강점기 때도 이씨 조선은 멀쩡하게 유지된 셈이다. 나라만 멸망했지 왕가는 멀쩡히 일본의 왕공가로 굴러 들어가 있었으니까. 애초에 이씨 왕실 복위론이 현대의 대한민국에서 헛소리가 된 이유를 뻔히 아는 현대인 입장에선 정말로 기가 차는 사대주의적 사고방식의 표본인 셈.[13] 668년 북진하는 신라군이 처음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인 게 평양성 근교에서 벌어진 사천 전투다. 이미 연정토 항복 때 고구려 남부 국경 방어선은 구멍이 뚫려버려 있었다.[14] 불멸의 이순신에서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15] 대조영이 연개소문의 집을 호위하던 시절 모종의 사건으로 안시성으로 꺼지라며 연개소문에게 쫓겨나자 근처에 있는 태학으로 숨었는데, 연남생이 그걸 간파하고 죽이려 든 적이 있었다. 이에 장산해가 대조영을 숨겨주고 검모잠이 자객으로 위장해 연남생의 어그로를 끄는 방법으로 대조영을 구하기도 했다.[16] 그대로 쓴웃음을 짓고 목을 치라는 안승의 지시대로 신라 병사의 칼에 베인다.[17] 불멸의 이순신에서 정운 역, 야인시대에선 이화룡을 연기했다.[18] 그 외에는 마두랑 점박이가 왕빈을 계속 따라가는 것으로 극중에서 하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