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부흥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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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고려시대의 정변 | }}}}}}}}} |
1. 개요
고려 무신정권 시기에 최광수(崔光秀: ? ~ 1217년 음력 6월[1])가 일으킨 반란. 신라부흥운동, 이연년 형제의 난과 함께 고려시대에 일어난 삼국부흥운동과 관련된 사건들 중 하나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여 건국된 나라임에도 고려에 반대해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다는 게 특이한 점이다.2. 전개
서경병마사 상장군(西京兵馬使 上將軍) 최유공(崔兪恭)의 사졸이었던 최광수는 최유공이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때 거란군과 상대하기는 커녕 수탈을 즐기고 병사들을 학대하자, 최광수는 출전하지 않고 군졸들과 함께 서경(西京: 오늘날 평양)으로 돌아와 서경에 웅거해서 고구려흥복병마사 금오위 섭상장군(高勾麗興復兵馬使 金吾衛 攝上將軍)을 자칭하게 된다.최광수는 막료들을 모으는 한편 북계의 여러 성에 격문을 돌리고 큰일을 일으키기에 앞서 여러 신사(神祠)에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반란은 어이없게 진압되었는데, 청주 출신으로 최광수와 같은 마을에 살았던 정의(鄭顗)가 그의 행동에 분개해서 교위 김억(金億)·백유(白濡)·필현보(畢玄甫)[2]·신죽(申竹) 등 10여인을 이끌고 소매에 도끼를 숨긴채 최광수의 처소에 가서 그와 이야기하다가 최광수의 목숨을 빼앗았기 때문. 정의는 최광수의 당여 8인을 죽이고 나머지는 불문에 부치면서 서경은 안정되었다고 한다.
이 반란은 삼국부흥운동을 표방한 사건이나, 가장 허무하게 제압당했으며, 이연년 형제의 난을 끝으로 여몽전쟁 이후에는 삼국의 부흥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