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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고려시대의 정변 | }}}}}}}}} |
1. 개요
진주민란은 1200년에 경상도 진주에서 노비들이 일으킨 난이다.2. 원인
민란이 발생한 이유는 무신정권과 지방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때문이였다.[1]3. 1차 봉기
1200년, 진주에서 공·사노비들이 향리들의 횡포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향리들의 집 50여 채를 불태웠지만, 향리들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크게 확산되지는 않았다.4. 전수룡의 실수로 정방의의 난이 발생하다
그런데 당시 창고 관리를 담당하던 정방의가 반란을 진압하던 중 사록(관리의 직책) 전수룡을 찾아갔다가 오히려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다.
이에 정방의의 동생 정창대가 무력을 동원해 형을 구출하고 불량배들을 모아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그 과정에서 평소 원한을 품고 있던 사람들을 무려 6,400명이나 죽였다.
이제 단순한 노비들의 저항이 아니라, 지방 세력 간의 대립으로 바뀌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관리들을 파견했지만, 정방의 일당의 세력이 너무 강해 쉽게 진압할 수 없었다.
5. 광명·계발의 난이 일어나다
정방의가 난동을 부리는 것을 보다 못한 진주 일부 농민들은 합주의 저항 세력인 광명, 계발과 손을 잡고 정방의를 공격한다. 하지만, 실패했고, 오히려 합주의 부곡민 마을까지 피해를 입게 된다.6. 진주 사람들이 힘을 합쳐 정방의의 난을 토벌하다
1201년, 진주 사람들이 결국 힘을 합쳐 정방의를 토벌해 죽이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정창대는 도망쳤고, 그의 일당들도 뿔뿔이 흩어지면서 진주민란은 마무리되었다.[1] 특히 진주는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최충헌의 식읍(개인적으로 소유한 땅)이라 지배층의 수탈이 더욱 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