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DAB2D, #4CCB3B 20%, #4CCB3B 80%, #3DAB2D); color: #fbe673; min-height: 27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be673> 온조왕 | 다루왕 | 기루왕 | 개루왕 |
다루의 모후 | 기루의 모후 | 개루의 모후 | 초고, 고이의 모후 | |
<rowcolor=#fbe673> 초고왕 | 구수왕 | 고이왕 | 책계왕 | |
구수의 모후 | 사반의 모후 | 책계의 모후 | 보과부인 | |
<rowcolor=#fbe673> 분서왕 | 비류왕 | 근초고왕 | 근구수왕 | |
계의 모후 | 차비 | 왕후 진씨 | 아이부인 | |
<rowcolor=#fbe673> 침류왕 | 진사왕 | 아신왕 | 전지왕 | |
왕후 진씨 | 진손의 모후 | 왕후 해씨 | 팔수부인 | |
<rowcolor=#fbe673> 구이신왕 | 비유왕 | 개로왕 | 문주왕 | |
왕후 | 개로의 모후 | 대후 | 왕후 해씨 | |
<rowcolor=#fbe673> 삼근왕 | 동성왕 | 무령왕 | 성왕 | |
왕후 진씨 | 비지의 딸 | 왕대비 | 창의 모후 | |
<rowcolor=#fbe673> 위덕왕 | 혜왕 | 법왕 | 무왕 | |
아좌의 모후 | 선의 모후 | 왕후 | 왕후 사택씨 | |
<rowcolor=#fbe673> 무왕 | 의자왕 | 풍왕 | ||
선화공주 | 은고부인 | 왕후 오오씨 | ||
}}}}}}}}} |
선화공주 관련 틀 | |||||||||||
|
백제 무왕의 왕후 선화공주 | 善花公主 | |
<colbgcolor=#7C2A8D><colcolor=#fbe673> 신라 진평왕의 왕녀 선화공주 | 善花公主 | |
| |
선화공주 표준영정 | |
이름 | 선화(善花/善化) |
생몰년 | 미상 |
본관 | 경주 김씨 |
부왕 | 진평왕 |
모후 | ? |
배우자 | 무왕 |
자녀 | 슬하 1남(?) 아들 - 의자왕(?) |
호 | 선화공주(善花公主) |
[clearfix]
1. 개요
신라의 공주.삼국유사 서동요에 기록된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며, 백제 무왕의 젊은 시절로 대체로 추정하는 인물 서동(薯童)의 아내다. 즉 기록상 진평왕의 장녀로 기록된 선덕여왕의 여동생인 셈이다.[1]
다만 서동요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과 논란이 뒤따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서동요 문서의 단락을 참조. 서동을 백제 동성왕이라고 주장하는 설에 따르면 선화공주는 비지의 친딸이자 무왕의 증~고조모가 된다.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이름은 소지 마립간의 두 왕비인 선혜부인(善兮夫人) 및 벽화부인(碧花夫人)과 한 글자씩 동일하기 때문이다.
2. 서동 설화
서동은 원래 백제의 왕족이지만 집안이 몰락하면서 마를 캐면서 생활했기에 마 서자를 써서 서동이라고 불렸는데, 서동은 어느 날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선화공주와 혼인하기로 결심한다. 신라에 가서 지나가는 어린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이 불순한 노래(서동요)를 부르게 하여 스캔들을 조장하고는, 진평왕의 명령으로 쫓겨난 선화공주에게 접근해 결혼에 골인했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및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말통(末通)대왕"이란 명칭으로도 나오는데, 이는 바로 "薯童"을 훈독한 "맛둥", 즉 맏이 정도의 어휘를 적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서동은 어찌어찌 해서 금도 얻고 인심도 얻은 뒤 백제의 왕이 되었고, 이후 선화공주와 함께 유명한 백제 사찰인 미륵사(彌勒寺)[2]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설화의 전문이다.
선화공주의 후에 대해서는 진평왕이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선화공주를 자기 딸이 아니라고 선언하여 왕족 족보에서 지워버렸다는 등, 하늘의 뜻이라 여겨 매년 백제에 사신을 보내 인사를 하게 했다는 둥 결말이 분분하게 전해진다.
삼국유사의 <서동 설화> #1 무왕의 출생
삼국유사의 <서동 설화> #2 서동이 노래로 선화공주를 얻다
삼국유사의 <서동 설화> #3 서동이 왕위에 오르다
삼국유사의 <서동 설화> #4 미륵사를 짓다
3. 실존 여부
현대에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면서 나온 사리함의 기록에는 "미륵사를 중건한 왕비는 백제 토착 귀족인 사택씨의 딸"이라고 써져 있어서, 설화에 나오는 신라 출신 선화공주라는 말과 모순이 생겨버렸다. 또한 당시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험악했기에 두 나라 왕실간의 결혼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도 꽤 많은 편.[3] 현재는 보완 차원에서 무왕이 여러 명의 왕비를 두고 있었다거나,[4] 기록에 나온 사택왕후는 선화공주 이후 뒤에 들인 후처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사리함 발견 직후인 2011년 방영한 드라마 계백에서도 선화공주와 사택비가 작중 모두 등장하며 둘 다 무왕의 비인 것으로 설정되었다.[5]선화공주와 서동요 해석 문제에 관한 더 상세한 부분은 서동요 문서를 참조.
선화공주에 대한 논란은 당대 백제의 왕계가 꼬였던 것이 원인이다. 개로왕 대 장수왕에 의해 한성백제가 멸망하면서 개로왕의 직계는 대부분 장수왕에게 죽고, 동생인 문주왕과 그 아들 삼근왕이 잇달아 즉위하였으나 모두 살해당하면서 개로왕과 문주왕의 동생 부여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그러다 동성왕 또한 살해당하면서 이복형 또는 사촌형인 무령왕이 즉위하였고,[6] 무령왕의 아들 성왕[7]이 관산성 전투에서 비명횡사하면서[8] 위덕왕이 즉위한다. 위덕왕은 45년이나 재위하였으나 말년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아들인 아좌태자가 아니라 동생인 혜왕이 즉위,[9] 혜왕이 1년만에 사망하면서 법왕이 즉위하지만[10] 역시나 1년만에 사망한다.
이런 상황에서 600년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이 즉위하는데, 무왕은 삼국사기에서는 법왕의 아들로 나오지만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왕계는 후기까지도 오류가 상당히 많고, 위덕왕의 아들이라 기록한 북사는 혜왕과 법왕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에 오류가 확실하다. 일본 기록에서도 무왕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학계에서는 무왕이 정말 법왕의 아들이 맞는지 의견이 갈려 아버지 후보도 많다. 삼국사기의 백제 후기 왕계 왜곡 때문에 무왕이 문주왕이나 동성왕의 후손이라는 가설까지 있을 정도다.[11][12]
의자왕의 장남 부여융이 615년생이라서 10대 후반~20대 초반에 장남이 태어나던 근초고왕 이후 왕계의 특성상 아무리 늦어도 혜왕 즉위(598년)보다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즉 의자왕은 위덕왕 재위 후기에 태어났다는 결론이 나온다. 수도와 떨어진 익산의 방계 왕족이 신라 공주와 혼인해서 의자왕을 낳는 건 당대 백제 정국상 불가능에 가깝다. 근초고왕계는 초기부터 후기까지 왕위를 둔 친족 살해가 상당히 잦아서 위덕왕 시대에 신라 공주와 혼인해 아들을 가졌다가는 무왕은 즉위하기도 전에 혜왕-법왕 부자에게 죽었을 것이며, 그 이전에 신라가 응해줄 리가 없다.[13] 거기다 혜왕이 1년만에 사망한 것은 그렇다 쳐도[14] 많이 잡아봐야 50대였을 법왕이 1년만에 사망하고 아버지가 불명이고 신라 관련 전승이 있는 무왕이 즉위한다는 것은 미심쩍은 점이 많다.
다만 당대 신라에서는 만명공주처럼[15] 왕의 직계 자손이 아님에도 공주 작호를 가진 인물이 있었고, 신라에서 외국에 정략혼으로 보낸 인물들은 죄다 진골이기는 해도 왕의 직계는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진평왕의 딸만 아닌 것일 수도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소지 마립간은 나제동맹의 일환으로 동성왕에게 자신의 딸이나 누이가 아니라 비지의 딸을 왕후로 시집보냈고,[16] 반파국의 이뇌왕이 혼인동맹을 요청하자 비조부의 누이를 시집 보내 월광태자(도설지왕 추정)를 낳았다.
이때 주목할 것은 삼국사기에서는 이뇌왕에게 시집 보낸 여성이 직계 왕족이 아니라 명시한 반면 일본서기에서는 신라왕의 딸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보아 신라에서는 외국에 왕족을 시집 보낼 때 왕녀라고 구라를 치거나 형식적으로 양녀로 삼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17]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이라 전해지는 건 백제가 처음부터 선화공주를 왕녀로 잘못 알고 있어서 구전이 꼬인 것일 수도 있다.
기록에는 안 나오지만 진평왕을 비롯한 신라 조정이 관산성 전투로 악연이 MAX를 찍게 된 성왕계가 부담스러워서 위덕왕 말기 성왕계의 내분을 틈타 성왕계가 아니며 지방 호족으로 살 정도로 처지가 애매했던 부여장(무왕)과 이해관계의 일치로 손을 잡았고, 적당한 진골 하나를 보내서 증표로 삼았는데[18] 정작 무왕은 즉위한 뒤 신라를 맹공격하며 신라를 통수 쳤고, 신라인의 아들이었던 의자왕도 무왕이 즉위하면서 후처로 들인 사택씨[19]의 아들과 경쟁하면서 처지가 불안정했지만 사택씨의 환심을 사면서 간신히 즉위한 탓에 자신의 지위를 공고화하고자 신라를 멸망시키려 했을 수도 있다.[20]
한편, 익산의 쌍릉 2곳의 고분 중 대왕릉 쪽에서 출토된 유골이 20-40대 사이의 여성이고, 부장품 중에 신라토기가 있어, 선화공주가 아니냐는 추론도 나왔었지만(전설과 역사 사이 ‘선화공주 연애담’ 진실 밝혀지나) 두 증거 모두 의심의 여지가 있어 인정받지 못하다가 결국 2018년 7월 바로 무왕의 유골이라는 발표가 나와 선화공주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기사 2018년 7월 17일 오후 가톨릭대 병원에 고고학, 역사학, 법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만장일치로 무왕의 유골이 맞다고 판정을 내렸다. # 발굴조사를 주도한 원광대 교수의 제의로 무왕의 뼈앞에 학자들이 모두 고개를 숙여서 예를 표했다고 한다.
쌍릉 대왕릉의 주인이 무왕으로 결정된 이상 옆에 있는 소왕릉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설이 제기되었다. 일단 소왕릉의 피장자는 무왕과 매우 가까운 인물인 것은 확실하므로, 그 후보로 무왕의 아버지 법왕설, 사택왕후설, 선화공주설 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소왕릉은 대왕릉보다 훨씬 도굴피해가 심해서 피장자를 밝혀줄 새롭고 결정적인 유물이 발견될 가능성은 낮은 상황이다. 2019년 재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소왕릉은 말 그대로 티끌 하나도 남지 않고 전부 도굴당했기 때문에 무덤 어디에도 피장자가 선화공주임을 알려주는 단서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피장자가 선화공주가 아님을 알려주는 단서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4. 기타
강원도 동해시에 감추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은 선화공주가 처음 세웠다고 전해지며 공주가 여생을 감추사에서 마쳤다고 한다. 선화공주의 묘 또한 이 절에 있었다고 한다.5. 창작물에서
일단 사료에는 나오지만 그것이 삼국유사에 설화적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당시 시기를 다룬 사극에서도 나왔다 안 나왔다 한다. 백제 쪽이 주로 다루어진다면 나오고 신라를 주요 배경으로 한 선덕여왕, 대왕의 꿈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다.삼국기에서는 김용선이 연기했다. 젊은 시절에 왕이 되기 전이었던 서동과 사랑해서 결혼해 백제의 왕비가 되었지만, 고국인 신라와 남편의 나라 백제의 사이가 악화되며 남편과도 갈등을 겪는 등 마음 고생을 한다.[21][22]
서동요에서는 이보영이 연기했다. 아역은 설리. 어린 시절 우연히 만났던 서동과 성장한 후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되고, 서동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하다가 결국 백제의 왕이 된 서동과 결혼한다. 하지만 이쪽도 위에 나온 삼국기의 선화공주처럼 신라와 백제 사이가 악화되면서 왕비로서의 입지가 흔들리고 마음 고생을 하다가 남편 품속에서 사망한다. 그래도 이쪽은 남편이 끝까지 아내를 사랑하고 지켜주려 애썼으니 삼국기 속 선화공주보다는 낫다.
점프 2에서도 등장하였다. 배우는 당시 그림 속의 여였던 여민주.
계백에서도 백제 황후로 등장했다. 배우 신은정이 연기.
서동요 이야기를 재해석하고 각색한 순정만화 '선화공주와 서동요'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서동요 소문이 퍼지기 이전부터 서동과 서로 사랑에 빠져 몰래 만남을 가졌던 관계로 나온다. 여기서 서동요가 퍼지게 된 것도 짧은 만남도 잠시, 선화공주가 정략혼으로 인해 궁궐로 돌아가게 되자,[23] 서동이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꾸민 일로, 선화공주도 이를 눈치채고 궁에서 쫓겨난 뒤 바로 서동을 찾아가 그와 이어진다.
[1] 다만 진평왕의 다른 딸 천명공주는 몇째인지에 대한 기록이 따로 없기 때문에 둘째일 수도, 넷째 이후일 수도 있다.[2] <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주석이 있음[3] 게다가 그 이후에도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더 악화되었지 결코 좋아지지 않았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역으로 무왕과 진평왕, 선덕여왕 사이의 전쟁을 왕위 계승 전쟁이라는 시각으로 이해하고 있다. 당시 선화공주가 신라의 왕이 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신라의 귀족들이 출가했던 덕만공주를 환속시켜 선덕여왕으로 옹립했다는 것. 서동요 설화가 사실이라면 의자왕은 이모인 선덕여왕이 다스리는 신라를 수시로 침공했던 것이다. 거기에 태종 무열왕은 당나라와 손잡고 사촌형인 의자왕을 패망시킨 셈이 되는 것인데 실제로 이런 내용이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4] 원래 백제와 고구려는 일부다처제 국가였다. 그리고 백제는 여러 명의 왕비가 있었단 다른 사례가 따로 없지만 동시대 옆나라 고구려에는 산상왕이 우씨 부인과 소후 두 명의 왕비가 있었다고 삼국사기에서 전하고, 일본서기에는 고구려 안원왕에게 정부인, 중부인, 소부인 3명의 왕비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무왕의 왕후가 여러 명이었다고 추정하는 또다른 근거로, 왕후가 한 명이면 성씨를 쓰지 않고 그냥 '왕후'라고 적으면 되는데 미륵사지 사리봉안기에서 굳이 '사택씨 왕후'라고 성씨를 적은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백제 가까운 시대인 무령왕릉의 사례를 보면 무령왕의 지석은 내용이 자세하지만 왕비의 지석은 성씨를 생략하고 그냥 '백제국왕대비(百濟國王大妃)'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무왕의 경우 왕후가 여러 명이니 굳이 성씨까지 표기써서 특정한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한국 고대사의 기본 사료 p.98[5] 참고로 이 작품에서 선화공주는 아들인 의자를 살리기 위해 자결로 최후를 맞는다.[6] 일본서기에 따르면 개로왕의 서자설과 곤지의 서자설이 모두 전해지는데 개로왕과 곤지가 형제이기에 동성왕에게는 이복형 또는 사촌형이 된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문주왕과 동성왕 모두 살아남은 남계 후손들이 있었기 때문에 무령왕의 즉위는 이들의 후손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대 백제 왕위계승의 혼란 과정에서 배제된 걸로 보인다.[7] 513년 순타태자가 죽었다는 기록과 성왕의 추정 생년(504)이 무령왕(461/462)과 40살 넘게 나고 무령왕이 401년 즉위했다는 점에서 성왕은 무령왕의 즉위를 뒷받침한 가문 출신 후처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8] 일본서기에 따르면 무왕은 태자 시절 위덕왕이 직접 싸우자 아들을 위로하러 가다가 이를 눈치챈 신라군에게 걸려서 어이없이 살해당했다는데 정황상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9]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좌태자는 597년 왜로 파견되어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정황상 암살당했거나 왜에 눌러앉은 것으로 추정진다.[10] 삼국사기에는 혜왕의 아들, 수서에서는 위덕왕의 아들로 나오나 수서에서는 혜왕이 누락되어 있어 대체로 혜왕의 아들로 여겨진다. 후기 백제 왕계의 가장 정확한 기록인 일본서기에서는 법왕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11] 위덕왕 즉위한 혜왕과 법왕은 성왕의 아들-손자이며, 무왕에게 동성왕의 신라 왕후 전승과 겹치는 것이 많은 선화공주 전승이 내려오는 것을 보아 최소 성왕의 자손은 아닐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아무리 그래도 관산성 전투로 인해 신라에 대한 증오가 MAX를 찍는 상황에서 신라 왕후 전승이 남을 인물이라면 성왕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인물인 것이 더 현실적이다.[12] 삼국사기에서 개로왕&문주왕&곤지 형제(비유왕의 아들들)를 개로왕-문주왕&곤지 부자로 왜곡했고, 문주왕-삼근왕과 곤지-동성왕은 그대로지만 동성왕의 형을 아들로 왜곡해 놓았다. 이후 무령왕-무왕-위덕왕&혜왕-법왕 가계는 대체로 사실로 여겨지기 때문에 문주왕&곤지와 무령왕이 왜곡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무령왕은 일본서기에서 아버지가 개로왕/곤지 형제 전승이 둘 다 내려오기 때문에 이들의 가계만 왜곡될 만한 모종의 이유가 있었던 걸로 보인다. 또 동성왕은 신라 왕후 기록이 정사에 명시되어 있으며 선화공주의 이름이 소지 마립간의 부인들 이름과 겹치는 등 선화공주 전승과 동성왕은 상당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무령왕은 아버지가 누구든 서자로 추정되는데 서자 형이 나중에 즉위하면서 왕계가 꼬여 삼국사기의 왜곡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13]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는 가야 최강국인 반파국의 이뇌왕에게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시집 보냈지만 반파국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일방적으로 왕후를 귀국시켜 버렸고, 월광태자도 그 여파로 신라로 망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신라의 성격상 일개 방계 왕족에게 공주를 시집 보내는 무리수를 감행할 리가 없다.[14] 일본서기에 따르면 혜왕의 형인 위덕왕은 무려 73세에 사망하였다.(백합야 전투 나노리에서 525년생이라 밝힌다) 따라서 동생인 혜왕 또한 즉위 당시 고령이었을 것이다.[15] 진흥왕의 동생 김숙흘종의 딸로 진흥왕의 손자 진평왕의 5촌 고모이며, 진흥왕과 숙흘종의 아버지 입종갈문왕은 지증왕의 아들이지만 법흥왕의 동생이라 부계로만 따지면 지증왕의 증손녀다. 그러나 숙흘종의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이자 입종의 3촌 조카인 지소태후라 법흥왕의 증손녀이기도 하며, 만명공주의 어머니도 기록이 없어서 그렇지 성골~진골로 확실시되므로 모계까지 포함하면 더 가까운 촌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황상 어떻게 보아도 진평왕의 직계후손이 아님은 확실하다.[16] 동성왕이 살해당한 뒤 이복형/사촌형인 무령왕이 즉위해서 후손이 있었는지 불명이나,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동성왕에게는 일본으로 도망친 남계 후손이 있었다고 한다. 그게 비지의 딸이 낳았는지 알 수 없을 뿐.[17] 동아시아 사회에서 직계가 아닌 방계를 외국 왕실에 시집보낼 때 양녀로 삼는 건 흔한 편이었다. 원 간섭기 원나라에서 고려로 시집온 원 공주들과 청나라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에게 시집간 조선의 의순공주가 대표적이다.[18] 이 경우 신라 조정에서는 삼면전선(고구려, 백제, 왜)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잠깐이라도 신라에게 우호적일 왕족 하나를 물색해서 협력을 요청했을 것이고, 만약 무왕이 동성왕과 신라 왕후의 후손이었다면 무왕 전승과 동성왕 기록이 겹치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무령왕이 동생 다음에 즉위한 서형(庶兄)이라 동성왕계는 무령왕계의 왕위 독점에 불만이 많았을 테니 거래가 성립 가능하다. 당대 신라에서 진골의 기준이 내물 마립간의 후손이고 동성왕에게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 보낸 게 소지 마립간임을 고려하면 해당 여성이 소지계일 수도 있다.[19] 금석문에 따르면 사택씨는 말기 백제 수도인 사비성(부여군)의 토착 호족 출신이다. 이 때문에 사택씨는 백제 말기 대성팔족 중에서 최고 권력을 누렸다.[20] 의자왕의 어머니가 신라 진골이 맞다면 신라 왕위 모계계승 전통 때문에 본인은 정당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21] 신라와 백제 사이에 분쟁이 생기자, 선화공주의 큰언니 덕만공주(훗날의 선덕여왕)가 백제 왕비인 선화공주의 입장이 곤란할 것을 생각하며 "그래서 서동과 결혼하는 것을 말렸는데."라고 안타까워 한다.[22] 아버지 진평왕이 승하한 후 여자라서 왕위승계가 위태로웠던 큰언니 선덕여왕이 무사히 즉위했단 소식에 기뻐하는데, 옆에 있던 남편 무왕이 "장인에게 아들이 없으니 사위인 내가 신라의 왕이 되었어야 맞는 것 아니냐"고 비웃는다.[23] 여기서 나오는 선화공주의 약혼남은 화랑 출신 답게 얼굴만 잘생겼지 인성은 개판인 놈이며(작중 한 평민 아이가 실수로 선화공주의 앞에 넘어지자 공주는 괜찮다고 했지만 감히 공주의 앞을 가로막았다며 아이가 보는 바로 앞에서 아이의 어머니를 죽였다. 이에 선화공주도 바로 뺨을 갈기며 일침을 놓았다.) 선화공주도 이 놈을 매우 싫어하고 있다. 이후 이 약혼자는 훗날 아막성 전투에서 무왕(서동)과 만나 그와의 결투에서 죽는 최후를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