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3-04 12:02:47

비지(신라)


이 문서는 토막글입니다.

토막글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개설3. 필사본 화랑세기에서

1. 개요

비지(比智)
?~?

삼국시대 신라에서 혼인동맹으로 백제 동성왕에게 시집간 왕비의 아버지인 왕족.

2. 개설

백제 동성왕신라왕비아버지이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이 가열되니 이를 막고자 신라백제나제동맹(羅濟同盟)을 체결하였다.

백제신라는 이 군사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왕실 가문 사이의 결혼동맹을 맺었다. 493년(소지마립간 15)에 백제 동성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자 신라왕(소지 마립간)이 이벌찬(伊伐飡)[1] 비지의 딸을 동성왕의 왕비로 시집 보냈다. 그리하여 두 나라의 친선과 동맹은 더욱 굳어졌다.

동성왕은 이름이 모대(牟大) 혹은 말다(末多)·마제(摩帝)라 하는 바, 이 동성왕의 국제혼인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진평왕의 선화공주(善花公主)와 백제 무왕 마동(薯童)의 연담설화(緣談說話)로 굴절되어 내려왔다는 설도 있다[2]. 다만 학계에서는 마동/서동의 정체를 무왕 본인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정확한 가계는 알 수 없지만 소지 마립간이 신라의 대표로 비지의 딸을 선택한 것과 이벌찬 또는 이찬으로 사서에 기록에 남은 것을 보아 당대 신라에서 제법 위세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이었던 걸로 추정된다.[3] 신라에서 성씨를 제대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가 진흥왕 대에 가서이기 때문에 정확한 성씨도 불명이나 대체로 김씨 족단 출신으로 추정한다.

3. 필사본 화랑세기에서

신라의 화랑이었던 사다함문노의 증조 할아버지로 등장한다. 다만 두 화랑의 증조할머니가 다른데,으로, 별개의 두 가문을 다루는 두 계보도에서 배다른 공통 증조할아버지로 등장하고 있다. 이 중 사다함은 내물 마립간의 7대손[8]이기 때문에, 필사본 화랑세기의 설정에 의하면 이(벌)찬 비지는 내물 마립간의 4대손(=5세손)[9]에 해당한다. 내물 마립간의 4대손에 해당하는 동일한 항렬에 위치한 신라인으로는 법흥왕[10]거칠부[11]가 있다. 나제동맹의 당사자였던 소지 마립간은 내물 마립간의 3대손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와 필사본 화랑세기를 섞을 경우 이(벌)찬 비지는 소지 마립간의 아들 혹은 (사촌)조카뻘에 해당한다.

현대 학계에서는 필사본 화랑세기는 위서라고 추정하기 때문에 비지의 계보도 마냥 취신할 수는 없다.
[1] 신라 쪽 소지 마립간 15년조 기준. 백제 동성왕 15년조에는 이벌찬보다 한 단계 낮은 이찬(伊飡)으로 등장해서 양국 기록간 차이가 있다.[2] 이병도, 1976, 서동설화의 신고찰,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3] 삼국사기에서 신라 출신 외국 왕후라 명시된 인물은 백제 동성왕의 처인 비지의 딸과 반파국 이뇌왕의 처인 이찬 비조부의 누이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비조부의 누이는 신라와 반파국의 외교 갈등으로 인해 신라로 귀국했고 그 아들인 월광태자도 정확한 시기는 불명이나 즉위 전에 신라로 건너가 신라 장수가 된 것이 금석문에서 확인된다.[4] 지증왕의 장인이었던 모량부 상공 박등흔의 누나/여동생[5] 가야의 이뇌왕에게 시집 간 양화(兩花)공주의 남동생(삼국사기), 혹은 아버지(동국여지승람)[6] 1세 위화랑조에선 묘양(妙陽)으로도 나온다.[7] 비처왕(毗處王)의 마복칠성 중 한 사람.[8] 삼국사기 사다함 열전[9] 시조를 1세로 삼으면 세손(世孫), 시조의 아들을 1대로 삼으면 대손(代孫)으로 계산한다고 한다. 시조의 아들은 2세손이자 1대손이므로, N대손 = N+1 세손에 해당한다.[10] 법흥왕의 부친인 지증왕이 내물왕의 증손이다. (출처: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 마립간)[11] 내물 마립간의 5세손=4대손 (출처: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