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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9 21:49:58

대막리지

막리지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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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칭호와 별칭3. 상세4. 역임자
4.1. 막리지4.2. 태대대로4.3. 대막리지
5. 여담6. 같이보기

1. 개요



고구려보장왕 시기에 연남생이 역임하였고 연개소문 역시 지냈을 것으로 생각되는 관직이다. 동시기 신라태대각간이나 중국상국과 비슷한 전설의 관직 같은 특별한 이미지가 있다. 후대에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된 정이대장군과도 유사하다.

영어권에서는 군권을 장악한 권력자라는 의미에서 대막리지를 대원수(Generalissimo)로 번역한다. 영어권에서 대원수로 칭하는 인물들은 중화민국 특급상장 장제스, 스페인 카우디요 프란시스코 프랑코 등이 있다.

2. 칭호와 별칭

대막리지는 기록마다 칭호가 다른데 《삼국사기》에선 막리지와 동일시되는 기록이 있고, 대막리지라는 칭호가 나온다. 한편 <묘지명>에서는 태막리지, 태대막리지가 등장한다. 등장하는 수를 따져보면

* 대막리지(大莫離支): 1번(《삼국사기》 <개소문 열전>)
* 태막리지(太莫離支): 1번(<천남생 묘지명>)
*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 太大莫離之): 2번(<천남산 묘지명>, <천헌성 묘지명>)

또한 대체로 막리지에 태(太), 대(大) 자를 붙인 것임을 알 수 있다.[1]

3. 상세

《구당서》에는 막리지가 병권과 인사권에 관여하는 최고위직이라고 설명되어 있다.[2]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은 이후 막리지에 권한과 권위가 더해져 등장한 것이 대막리지이다. <연남생 묘지명>에는 연개소문이 역임한 관직이 태대대로(太大對盧)로 나타나 있다.

막리지는 '태대형'(2품)의 이칭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태대형과 같은 형 계통의 관직은 원래 연맹왕국시대에는 부족장급을 가리키던 말이었으나, 고구려 왕가를 중심으로 부족사회가 통합되고 국왕 중심의 관료화가 이루어지면서 최고위 귀족들의 관직으로 변화되었다고 보는 게 통설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설도 있는데, 제가회의에서 선출되었던 3년 임기의 수상이 '대대로'(1품)였다고 하는 기록과 무관 최고위직이었던 '대모달'(이명은 '막하라수지'이다.)이 대형의 일종인 '조의두대형'(5품) 이상의 매우 높은 직위를 가진 자만이 역임할 수 있었다고 하는 기록을 더불어, 직위가 분명하게 분화되지 않았던 귀족사회의 특성상 대대로의 경우도 고위 귀족들의 투표에 의해 후기 고구려 사회의 최고위직인 태대형들 중에서 주로 선발되었기에 혼동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고 보기도 한다. 다름 아닌 대대로=막리지/태대대로=대막리지로 보면 관직의 위계가 딱 맞아떨어지는 데다가 정작 태대형의 이칭으로는 막리지가 아닌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가 기재되어 있기 때문.[3]

연개소문 집권기에 장남 연남생이 막리지에 임명되었으며 이후에 실권을 잡을 때 《삼국사기》에 따르면 대막리지가, <묘지명>에 따르면 태막리지가 되었다고 나온다. 그 후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동생 연남건의 경우 대막리지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고 《삼국사기》에 막리지가 되었다는 기록만 있다.

이의 경우 연개소문 관련 기록을 보면 대막리지를 그냥 막리지라 줄여서 부르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연남건이 연남생의 자리를 탈취했다는 것은 정황상 거의 확실해 보인다. 연남건과 함께한 막내 연남산의 경우는 태대막리지를 역임했다고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연남산이 막리지 계열의 관직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이에 대해 잠깐 추론을 해보자면 첫 번째 경우 만약 연남생이 연개소문의 대막리지보다 높은 자리를 신설했던 것이라면 고구려의 일반적인 관직 작명법에 비춰볼 때 정확한 명칭은 태막리지가 아닌 태대막리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연남생, 연남건과 연남산은 차례로 태대막리지를 역임한 것이 된다. 연남산이 태대막리지를 역임했던 때가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멸망의 해인 668년 쯤으로 보이는데 보장왕과 연남산이 함께 항복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보장왕이 항복을 종용하기 위해 연남건의 관직을 삭탈하고 연남산에게 넘겼던 것일 수도 있다.

두 번째 경우 태막리지나 태대막리지 같은 관직명이 묘지명에 기록되었던 시기가 연남생과 연남산이 중국으로 넘어간 뒤였다는 걸 고려해볼 때 <묘지명> 기록시에 혼동이 생겼던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연개소문 때부터 연남산 때까지 그냥 쭈욱 대막리지였던 것이 된다. 이 추론이 맞는다면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연남건은 관직을 삭탈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 경우 태막리지는 대막리지의 오기가 맞으나 태대막리지는 실제로 존재했던 관직이었을 수도 있다. 이 경우 보장왕이 연남건의 의견을 찍어누르고 항복을 종용하기 위해 연남산에게 대막리지보다 높은 태대막리지라는 자리를 내린 것이 된다. 물론 어느 경우이든 연남산은 최고위직이 되자마자 항복한 것이므로 실질적인 의미는 없다.

4. 역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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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대막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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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왕대 <colbgcolor=#c5b356> 태대대로 연개소문
태대막리지 연남생
막리지 연남건
태대막리지 연남산
* 삼국사기, 연남생 묘지명, 연헌성 묘지명, 연남산 묘지명 원문 기준 각각 가장 높은 관직명 기술.
연씨 집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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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 임시정부 부수반 · 대한민국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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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막리지

4.2. 태대대로

4.3. 대막리지

5. 여담

연개소문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그런지 막리지는 연개소문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으며 먼 훗날 고려시대에 당시 몽골제국의 우승상이던 사천택이 '너희 나라에서는 재상을 막리지라 부른다지?' 라고 물어봐서 고려 사신으로 온 이장용(李藏用)이 뻘쭘해 했다 한다. 개인의 실수라기보다는 실제로 몽골측에서 고려를 고구려로 동일시한 것에서 기인한 듯하다.[4] 실제로 마르코 폴로의 견문록에 따르면, 몽골의 황족 중 한 명인 만주 쪽 군벌 나얀이 고려 북부와 만주를 다스리고 있다고 설명되어 있어 의아함을 자아내는데, 당시 몽골인들이 고려를 고구려와 동일시했다고 보면 고려가 점유하지 못한 요동과 한반도 북부 일부를 '고려 북부'로 칭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6. 같이보기



[1] 신라의 태대각간도 고구려와 유사하게 각간에 대와 태를 추가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고대 한국어에서 거센소리의 분화가 없어서(된소리의 분화는 한참 뒤의 일) 모양이 다른 같은 발음, 같은 뜻의 글자를 덧붙이는 걸 고구려가 먼저 사용했고, 고구려의 관제를 많이 참조했던 신라에서 벤치마킹했다는 설이 있다. 사실 뜻이 같고 발음이 비슷한 3글자인 大, 太, 泰의 유래를 거슬러가보면 처음엔 大에서 泰가 파생되었다가 泰에서 (아마 간단하게 쓰기 위해) 太가 다시 2차로 파생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래서 大 자체부터가 대, 태의 2가지로 읽을 수 있다.[2] 당나라의 중서령(중서성의 장관)+병부상서(병부의 장관)에 해당한다고 기록되어 있다.[3] 참고로 고구려의 관직명은 이칭이 정말 어지럽게 많은데, 왜 그런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원인은 불분명하다. 일단 한자로 지어놓고 고유어 명칭으로도 읽은 게 아니냐고 한다면 정작 고유어 관직명이 더 자주 쓰였어야 할 초기에는 한자식에 가까운 이름만 나오다가 후기에 들어서면서 한자로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되는 이칭이 같이 기록되기 시작한다. 그나마 비슷비슷하게 기록된 명칭들의 경우 화자의 방언 차이나 청자의 듣기실력(...) 등으로 인해 다르게 들렸던 것을 마구 받아적었던 걸로 추정된다.[4] 다만 설령 아예 같은 왕조, 국체가 이어져 내려왔다고 해도 시기상으로는 600년이나 차이가 나던지라 변화가 없을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