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명
- 실존인물
- 가상인물
1.1. 奇遵
1492년 음력 2월 23일 ~ 1521년 음력 10월 28일 (향년 29세)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행주 기씨. 유학자 고봉(高峰) 기대승의 숙부이다.[2]
행주 기씨의 부흥을 일으킨 기찬(1444~1492)의 5남 1녀 중 막내아들로, 본래 행주 기씨는 친척인 기황후 일가가 벌였던 가렴주구로 인해 기탁성과 기철 이후로 이렇다할 관직을 내놓지 못한 집안이었다가 고조부 기면 대부터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면서 과거의 핸디캡을 딛고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했고 아버지와 형들이 줄줄이 벼슬길에 나가면서 그 역시 1514년 장원 급제한 후 관직생활을 해왔지만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온성으로 유배되어 2년 뒤인 1521년 처형되었다. 비록 정치적 대사건에 휘말려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처형되었지만, 사후인 1545년 복권되어서 그의 직계 후손은 멸족되지 않고 현재에도 건재하고 있다. 거기다 본인만 화를 입었지 본인의 일가친척들까지 직접적으로는 연좌제를 겪지 않았다. 대신 둘째 형 기원과 넷째 형 기진은 이 여파로 인해 전라도로 이주해야 했으며 이 때문에 본래 행주 기씨는 경기도가 관향인 만큼 대부분 경기도에서 살았으나 기원과 기진의 후손들은 전라도에서 대대로 살게 된 것이다.
자녀로는 아들 기대항(1519 ~ 1564)과 딸 1명을 남겼다. 기대항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역적으로 처형되었다는 과거를 딛고 문과 급제 후 청요직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 해주 목사, 대사헌, 이조/공조참판 등 관직을 역임한다. 그리고 본인의 증손자이자 기대항의 손자인 기자헌(1562 ~ 1624)이 영의정까지 되면서 행주 기씨 가문의 정치적 재기는 완전히 성공한 듯 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정권에 출사를 거부하다 옥에 갇히고, 이괄의 난에 연루되면서 일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1.2. 箕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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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준왕#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준왕#|]] 부분을 참고하십시오.2. 단어
2.1. 基準
1. 기본이 되는 표준. 영어로는 'criterion(크라이티어리언,복
criteria)'이다.2. 제식 훈련에서, 대오(隊伍)를 정렬하는 데 기본이 되는 표준을 대원들에게 알리는 구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