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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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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공(文獻公)
정여창
鄭汝昌
파일:정여창 사진.jpg
백욱(伯勗)
일두(一蠹)·수옹(睡翁)
시호 문헌(文獻)
본관 하동 정씨
출생 1450년 (세종 32)
경상도 함양군 덕곡리 개평
(現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개평마을)[1]
사망 1504년 (연산군 10)
함경도 종성도호부
(現 함경북도 종성군)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부모 부친 - 정육을(鄭六乙)
모친 - 경주 최씨(慶州 崔氏)
부인 전주 이씨(全州 李氏)
자녀 2남 4녀
장남 - 정희직(鄭希稷)
차남 - 정희설(鄭希卨)
장녀 - 최호문(崔浩文)의 처
차녀 - 조효온(趙孝溫)의 처
3녀 - 이현손(李賢孫)의 처
4녀 - 설공순(薛公諄)의 처
1. 개요2. 생애3. 기타4. 학문과 사상5.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조선 전기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으로 사림파 계열에 속하는 성리학자이자 문신.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오현으로 불리며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사람. 그의 성리학 이론은 정몽주·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어서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승무(陞廡)되었으며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에 배향되었다. 학역재 정인지, 하성위 정현조, 정숭조, 선조임금의 생모 하동부대부인 등은 그의 일족들이다. 중종반정이후 복권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2. 생애

1450년(세종 32) 경상도 함양군 덕곡리 개평(현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개평마을)에서 함길도병마우후 증한성부좌윤[2]을 지낸 아버지 정육을(鄭六乙)과 어머니 경주 최씨(慶州崔氏)로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정여유(鄭汝裕)가 있었고, 아래로 동생 정여관(鄭汝寬)이 있었다. 이시애의 난으로 아버지 정육을이 전사하자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고사하고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과 함께 학문을 수학하였다.

22세부터 성균관에 입학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지내면서 조정에서 부터 수차례 관직을 내렸으나 매번 사양하고 학문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다. 종9품 전력부위(展力副尉)의 품관으로 있다가 1483년(성종 14) 식년시 진사시에 2등 20위로 급제하였으며#, 1490년 참의 윤긍(尹兢)[1432~1493]에 의하여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昭格署參奉))에 제수되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소격서참봉으로 재직하던 1490년(성종 21) 별시 문과에 병과 7위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設書)가 되었다.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스승)하였지만 곧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연산군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1494년(성종25년) 안음(현재 함양군 안의면)현감에 임명되어 일을 처리함에 공정하였으므로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498년(연산군 4년)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있을 때 김일손(金馹孫)[1464~1498]과의 서찰 왕래와 관련하여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鍾城)도호부로 유배되었으나 유배지에서도 청년들과 학동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며 지역유지들과 한성부와 시국담론, 시문을 주고 받으며 변방지역에도 학문과 문물을 전파하였다.

1504년 4월 1일 55세를 일기로 (연산군 10년) 사망하였다. 이때 동료 유생들과 제자들이 함경도 종성에서 경상남도 함양으로 시신을 운구하였다. 2개월 운구 끝에 1504년 6월 고향인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승안동(昇安洞)에서 반장(返葬)[3]하였다.[4] 갑자사화부관참시되었으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 즉위 후 복작추증(復爵追贈)[5]되어 명예가 회복되어 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과 같이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1517년(중종12년) 증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고, 1568년(선조1년) 문헌공(文獻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1610년(광해2년) 정몽주,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와 더불어 동방5현으로 문묘에 승무(陞廡)되었다.

3. 기타

본관은 하동 정씨이나 그의 증조부인 정지의(鄭之義)가 처가의 고향인 경상남도 함양군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함양 사람이 되었다.[6]

《용학주소(庸學註疏)》, 《주객문답설 (主客問答說)》, 《진수잡저 (進修雜著)》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소각되고, 지금은 정구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가 전할 뿐이다.

1689년 3월에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글은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지었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의 그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186호로 지정되었다.

4. 학문과 사상

그는 학맥상으로 정몽주의 학맥으로 분류되며, 사림파로서 성리학을 따랐다. 도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 성리학의 시조 안향에게까지 닿으며,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으로 이어진다.

논어 전문가였으며,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도학자이면서 성리학자로서 이기론과 심성론, 선악론 등을 기본으로 소학과 주자가례의 실천을 강조했다. 소학과 가례를 강조한 것은 조선 초 성리학자인 조광조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그는 그중에서도 효를 매우 강조했고, 실제로 그는 부모님에 대한 효성 깊은 일화로도 유명하다. 정치에 있어서 백성을 위하는 왕도정치를 주장했다.

그는 기(氣) 없는 리(理)가 없고 리 없는 기가 없기 때문에 리기가 구별이 없는 것 같지만, 리는 총괄적으로 말하여 지선(至善)하고 영위(營爲)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기는 청탁(淸濁)의 구별이 있으므로 리기가 구별된다는 이기이원론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一而二 二而一]라는 입장을 버리지는 않았다. 리기의 선악(善惡)에서 정자(程子)와 주돈이(周敦)의 입장에 반대하고, 성(性) 또한 선으로 악이 생기는 것은 기의 청탁(淸濁)이 있기 때문이라며 천리(天理)가 인욕(人欲)으로 덮여 악이 된다고 보았다.

학문의 목적은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라 하여, 학(學)이란 성인을 배우는 것이며, 지(志)란 그 학문을 완성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자면 뜻을 굳게 세우고 그것을 관철하려는 강인한 의지가 필요하므로 물욕(物欲)에 이끌리고 공리(功利)를 추구해서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먼저 굳건히 뜻을 세우는 일[立志]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학문하는 목적을 성인되는 데 있다고 하여 성학(聖學)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송유(宋儒)들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여 붕우간의 책선(責善)을 강조했으며, 학문은 성(誠)으로 하고, 율신(律身)은 경(敬)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즉 성으로써 궁리(窮理)하고 거경(居敬)으로써 수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5. 가족 관계



[1] 인근의 덕암리·마산리와 함께 하동 정씨 집성촌이다.[2]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3] 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가 살던 곳이나 그의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를 지냄[4]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5] 나라에 공이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빼앗은 벼슬을 다시 돌려주고 품계를 올려 줌[6] 자녀 균분 상속제가 지켜지던 당시에는 거주지를 옮길 때 처가나 외가로 옮겨가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