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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8:27:13

조영규


1. 여말선초 인물
1.1. 대중매체에서1.2. 관련 문서
2. 조선 중기의 무신3.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1. 여말선초 인물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개국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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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英珪
(? ~ 1395년[1])

여말선초의 인물로 조선의 개국공신. 초명은 평(評).

이성계가 고려의 장수로 활약할 때부터 그를 따라 종군했는데, 1385년 가을 9월에 왜구가 함주, 홍원, 부청, 합란북 등지를 공격해 백성들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이성계를 따라 종군했고 이지란, 고여 등과 함께 왜구를 유인해 추격해온 적의 선봉 수백을 매복한 군사들로 습격, 적 20여 명을 죽였다. 이 당시 벼슬이 '판위위시사'였는데, 이는 의장에 쓰는 물건과 기구를 관리하는 '위위시'의 책임자이며, 정3품 벼슬로 고위 관료였다.

이후 판전객시사를 지내다가 1392년 여름 4월에 이방원의 지시를 받아 조영무, 고여, 이부 등과 함께 도평의사사에 들어가 정몽주를 죽이려 했지만 변중량으로 인해 이 계획이 누설되었고 정몽주는 변고를 살피기 위해 이성계의 병문안을 갔다.

이방원의 지시로 이성계의 저택에서 칼을 가지고 와 정몽주의 집 근처에 기다리면서 선죽교에서 조영무, 고여, 이부 등 3 ~ 4명이 뒤따라갔으며, 정몽주가 이르자 달려가서 공격했지만 말을 이끌고 달아나자 다시 쫓아가 말을 넘어뜨렸다. 이 때 조영규가 넘어뜨린 정몽주는 달아났지만 고여 등이 쫓아가서 죽였다.

여담으로 각종 매체에서는 주로 이방원의 수하나 사병처럼 묘사되는 조영규지만 위에 서술했듯이 정몽주를 암살할 당시에도 외빈 접대를 관장하는 관청인 전객시의 책임자인 '판전객시사'라는 정3품 관직에 있었으므로 그런 말단은 아니었다.[2] 하지만 정몽주 암살때 이방원이 조영규를 불러서 명령을 내리고 조영규가 이를 기꺼이 따르는 실록의 묘사로 보아 이미 이성계의 사저를 들락거리다가 이방원과 모종의 관계가 형성되긴 한듯 하다.

요컨대 정몽주 암살 사건은 오늘날로 치면 외교부 차관이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인 국무총리 아들의 사적인 명령을 듣고 군인들을 몰고 가서 직접 야당 대표이자 부총리를 암살해버린 여러 모로 막장스러운 사건이다.

7월 17일에 이성계가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이 건국되고 8월 20일에 예조전서로 있으면서 개국 공신이 되었으며, 1395년 1월 9일에 사망했다. 그가 죽자 참찬문하부사로 올려서 임명되었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조주(趙珠)·조인(趙仁)·조우(趙祐)이다. 벼슬 변천을 보면 의전이나 외빈 접대 같은 예조 쪽의 벼슬을 맡고 있는데, 아무리 개국공신이라지만 무관 출신으로 예조의 수장까지 올라간걸 보면 의전 업무에는 상당히 도통했던 모양이다.

조영무와 이름 가운데가 '영(英)'자 돌림이어서 형제같이 보이지만 둘다 본관도 다른 인물이다. 조영규는 신창 조씨[3], 조영무는 영흥 조씨다.[4]

조영규는 평민 출신에 천거를 받아 관직에 올랐으며 본인이 신창 조씨의 시조인걸로 보아, 전장에서 병사로 지내다가 두각을 드러내어 이성계에 의해 등용된 무관인듯 하다. 조영규 본인은 바닥에서 시작해서 개국 2등 공신에 사후 정2품까지 올라가는 명예를 누렸음에도 그 후손인 신창 조씨는 이후로 그다지 번창하지 못했다. 아들 3명에 대한 기록도 미비하고,[5] 이후로 조선 중기까지 간혹 몇명의 후손이 말단 관직을 겨우 지낸 기록이 있다. 이후 어떻게 단절되었는지조차 모르게 대가 끊겨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성씨이다. 개국 공신이라 공신전도 세습 받았을텐데 가문이 소리소문 없이 쇠락했다니 어찌보면 특이한 사례다. 하지만 다른 개국공신들은 대개 이미 고려시대부터 명망 높은 가문들이라 본인이 일찍 죽어도 형제나 일가 친척을 통해 가문이 보전되어 방계나 다른 종친들이 관직에 올라 권력을 유지 할 수 있다.[6] 하지만 신창 조씨는 조영규 본인이 시조인데다 기록에 따르면 1382년 천거 된 후 1395년에 죽었으니 관직생활은 15년이 채 안된다. 늦은 나이인 40살에 천거 되었다 해도 50대초반 이전에 죽었다는 얘기인데[7], 자수성가한 개인이라면 아들들까지 청요직이나 고위직으로 올려 가문을 명문가의 반열에 올릴 시간이나 동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으므로 후손이 번창하지 못했어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다.

1.1. 대중매체에서

여말선초가 사극에서 많이 다뤄진 시기이다 보니 조연급으로 자주 등장한다. 왜구 토벌에서 활약해 실전 참여 경험이 있는 군인이자 정식 관리였음에도 <용의 눈물>을 제외한 사극에 등장하는 조영규는 암살자나 사병같은 이미지로 등장하는게 특징인데 정몽주 암살의 임팩트가 상당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부터 이성계 막하에서 종군했기에 가신 그룹에 속하던 인물임에도 이성계보다는 이방원의 심복처럼 등장하는 것 역시 공통점. 이런 이미지가 더 어울리는 인물은 이방원의 핵심 공신이자 진짜 졸병에서 출세한 조영무인데 <정도전>에서 조영규에게 이런 이미지를 부여한 이후 캐릭터가 고정된 상태.

1.2. 관련 문서

2. 조선 중기의 무신

趙英圭
1535년(중종 30년) ~ 1592년(선조 25년)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직산(稷山), 자는 옥첨(玉瞻).

1535년 전라도 장성도호부 북이면 백암리(현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백암마을)#에서 태어났다. 이후 무과에 급제하여 종4품 용천군수를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는 종4품 양산 군수로 재직 중이었다. 1592년 동래성 전투 당시, 일 때문에 동래에 갔다 왜군이 쳐들어 와서 송상현과 함께 순절하였다. 왜군의 침공소식을 듣고 송상현이 순국할 결심을 보고 같이 하겠다면서도, 다만 어머님의 피난처만 챙겨드리고 오겠다고 해서 도망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지만, 약조한 날짜에 되돌아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는 얘기가 류성룡의 문집에 전해진다고 한다.현종실록 16권, 10년 3월 11일 갑진 1번째 기사현종개수실록 권21, 10년 5월 13일 을사 2번째기사

1669년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1713년에는 정발을 비롯한 임진왜란 때 같이 전사한 사람들과 함께 충렬사에 배향되었다.숙종실록 권54, 39년 12월 2일 을해 1번째기사

선조 실록에는 한자가 趙英로 되어있다.#

3.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1] 태조 4년[2] 이때 이방원은 왕명을 출납하는 정3품 우부대언을 지내고 있었다. 조영규의 출생년도는 미상이나 관직에 처음 등용된 시기가 1382년으로, 22살에 일찍 관직에 오른 편인 이방원보다도 7년이나 더 이르기 때문에 이방원보다 나이가 더 많은 것은 확실하다.[3] 조영규 본인이 성씨의 시조이다.[4] 당시는 영흥이었으나 사후 일가가 본관을 한양으로 바꿨다.[5] 장남 조주가 태종의 배려로 호군~대호군의 무관직을 지낸 기록이 있지만 무례한 논란을 일으키고 다닌 기록 뿐이고 나머지 둘은 기록도 없다.[6] 예를 들어 태종의 외척 숙청을 당한 것으로 유명한 여흥 민씨청송 심씨도 그럼에도 조선시대 유력 가문으로 남아 이후로도 왕후를 몇번 배출할 정도로 위세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었다.[7] 20대 초 부터 관직생활을 했다면 40살 전에 죽은 것이 된다.[8] 배우 신하균이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