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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정창연 鄭昌衍 | |
출생 | 1553년 1월 20일[1] (음력 1552년, 명종 7년 12월 26일) |
사망 | 1637년 1월 9일 ~ 1월 31일 사이 (향년 83 ~ 84세) (음력 1636년, 인조 14년 12월 14일 ~ 인조 15년 1월 6일 사이)[2] |
경기도 수원도호부 쌍부리 | |
본관 | 동래 정씨 |
자 | 경진(景眞) |
호 | 수죽(水竹) |
부모 | 부친 - 정유길 모친 - 원주 원씨 원대은개(元大隱介, 1492 ~ ?)[3] |
형제자매 | 1남 5녀 중 4째[4] 누나 - 정환(鄭還, 1533 ~ ?) 누나 - 정양정(鄭楊貞, 1541 ~ 1620)[5] 누나 - 정말정(鄭末貞, 1542 ~ ?) 누나 - 정혜정(鄭蕙貞, 1546 ~ ?) 여동생 - 정윤양(鄭胤養, 1559 ~ ?) |
부인 | 청주 한씨 - 한세건(韓世健)의 딸 |
자녀 | 2남 장남 - 정광성(鄭廣成, 1576 ~ 1654) 차남 - 정광경(鄭廣敬, 1586 ~ 16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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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관.2. 생애
1552년(명종 7년)에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정광필이고 할아버지는 강화부사를 역임했던 정복겸이며 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냈던 정유길이다.18세이던 1579년(선조 26년)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조 좌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좌부승지와 부제학, 이조 참판, 지돈녕부사 직을 역임했다.
누이 중 한 명이 광해군의 장모(문성군부인의 어머니)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광해군이 분조했을 때 세자좌빈객 자격으로 여기에 참여하여 광해군과 함께 움직였다.
이후 예조판서와 대사헌, 동지성균관사, 좌참찬 직에 임명받았다가 해직된 후 다시 맡기를 여러 번 했다. 또한 이조, 형조의 판서도 역임했으며 지중추부사와 혜민서 제조로서도 활동했다. 그리고 정승으로서는 실세인 우의정과 좌의정 직까지 맡았다.
상술했듯, 정창연은 광해군 장모의 형제였고 분조에서도 함께 활동한, 광해군의 핵심 지지 세력 중 한 명이었고 당파도 당연히 대북이었다.
그런데 우의정을 지낼 무렵에 조정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광해군이 적모 인목왕후를 서궁에 유폐시키고 동생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귀양보낸 것이다. 정창연은 이에 반대했고 이때 뜻을 같이하는 류몽인, 이명, 유만 등과 함께 중북으로 분당했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사망한 영창대군의 죽음에 강화부사 정항이 책임져야한다는 상소를 부사직 정온이 올렸는데, 이 상소를 본 광해군이 분노하여 정온을 잡아들이고 국문하려하자 정창연이 직접 나서서 광해군에게 정온을 용서해달라는 청을 올렸다.
그러나 광해군은 끝내 정온을 친국한 뒤 제주도로 유배보냈고, 이에 실망해서였는지는 몰라도 직후 정창연은 사직소를 올렸다. 표면적인 사유는 병 때문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받아주지 않았고 계속된 요청 끝에 결국 2년이 지나서야(...) 겨우 물러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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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영돈녕부사로 임명받기는 했으나 이 자리는 왕실의 친인척을 관리하는 자리라 그저 실권없는 명예직일 뿐이었다. 이후 정창연은 두문불출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하지만 폐모론을 반대했다는 전적 때문인지 대북파는 계속해서 그에게 공격을 가했다. 유학 한천정, 한보길, 윤지임, 이구 등은 그를 귀양보내라는 상소를 계속 올렸고# 심지어 유학 송영서는 칩거 행위 자체를 꼬투리 잡기도 했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북인이었음에도 무사했다. 이는 폐모살제에 반대하여 대북파의 공격을 받았으며, 서인 측과도 무난하게 지냈기 때문이다.[6] 그래서 정창연은 반정 직후에 좌의정으로 복귀했고# 얼마 후에는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625년(인조 3년)에는 판중추부사로 임명받았다가# 3년 뒤에 허유 역모사건에서 이름이 언급되자 이에 책임지고 사직을 청했으나 인조가 윤허하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한창일 때 세상을 떠났다.
3. 가족과 후손
정창연이 페모론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후손들은 정치적으로 생존했고, 서인에 합세한다. 다른 북인 출신 가문들의 몰락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다. 장남 정광성은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차남 정광경은 이조 참판 직을 맡았다. 정광성의 아들 정태화는 현종의 치세에 영의정을 지냈다. 정태화의 다섯번째 아들 정재륜은 정태화의 동생 정치화에게 입적하고, 효종의 딸 숙정공주와 결혼했다. 그래서 동평위 작위를 받은 부마가 되었다.4. 묘역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에 정창연과 그의 조상 및 후손들의 묘역이 있다.<colbgcolor=#c00d45,#94153e>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에 있는 정창연의 신도비[7] |
[1] 율리우스력 1월 10일[2]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갈 때 수원으로 피난갔으나 전쟁이 끝난 후 사망이 확인되었다.[3] 원계채(元繼蔡)의 장녀로, 정석군의 외증손녀.[4] #[5] 광해군의 왕비 문성군부인의 모친으로, 봉호는 봉원부부인(蓬原府夫人)이다.[6] 애당초 정창연의 외조카 중 2명이 서인 세력을 대표하는 김상용, 김상헌 형제이다.[7]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