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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문충공(文忠公) 이정구 李廷龜[1] | |
출생 | 1564년(명종 19) |
한성부 성저십리 청파 (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2] | |
사망 | 1635년 6월 13일 (향년 70 ~ 71세) (음력 인조 13년 4월 29일) |
거주지 | 한성부 동부 숭교방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4가)[3] |
시호 | 문충(文忠) |
본관 | 연안 이씨 |
자 | 성징(聖徵), 성중(聖重) |
호 | 월사(月沙), 보만당(保晩堂), 치암(癡菴), 추애(秋崖), 습정(習靜), 응암(凝菴) |
부모 | 부친 - 이계(李𡹘) 모친 - 광산 김씨 김표(金彪)의 딸 |
부인 | 안동 권씨(安東 權氏, 1569∼1637) - 권극지(權克智)의 딸 |
자녀 | 장남 - 이명한(李明漢, 1595 ~ 1645) 차남 - 이소한(李昭漢, 1598 ~ 1645) 장녀 - 풍산 홍씨 홍영(洪霙, 1584 ~ 1645)의 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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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문관이다.2. 생애
1564년 종5품 현령(縣令)을 지낸 아버지 이계(李𡹘)와 어머니 광산 김씨 김표(金彪)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성부 성저십리 청파에서 태어났으며, 기자헌과 동향 출신이다.이후 거주지를 한성부 동부 숭교방으로 옮겼으며 죽을 때까지 숭교방에서 살았다.
처는 예조판서 권극지의 딸로 안동 권씨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5년(선조 18) 식년시 진사시에 3등 47위로 입격하고# 정9품 종사랑(從仕郞)의 품계에 올랐다. 이후 1590년(선조 23) 증광시 문과에 병과 20위로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중국어에 능하여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걸친 어려운 시기에 어전통관으로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을 접대할 때에 조선 조정을 대표하며 중요한 외교적 활약을 했다. 양호 사건과 정응태 무고 사태에 조선 조정이 휘말려서 명나라에게 대판 곤혹을 치르게 생겼을 때 이정구가 명 조정에 상신한 주문(奏文)으로 겨우 혐의를 벗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명나라 사람들이 조선 국왕의 충간의담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는 평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전한다고 한다.[5]
3. 후손
아들은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 과 현주(玄州) 이소한(李昭漢) 두 명이다. 딸 중 한 명은 참판 홍영과 결혼한다.홍영과 이정귀의 딸이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 홍주원이다. 홍주원은 선조의 딸 정명공주와 결혼하여 이후 홍봉한, 홍인한 형제와, 혜경궁 홍씨, 홍국영의 선조가 된다.
이명한과 이소한 둘 모두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세 부자가 송나라의 소순, 소식, 소철 3부자에 비견되어 삼소(三蘇)라고 불렸다.
이명한과 그의 장남 이일상은 부친에 이어 대제학에 올라 조선 최초 3대 대제학을 지낸 가문이 되었으며, 후손 중에 노론의 영수인 이천보, 이존수가 있다. 더 후대에 이르러 관동파를 만들고 동촌 이씨라고도 불렸다. [6]
4. 문장가
그의 문학 작품은 《월사집(月沙集)》으로 남아 있다.우리말 전문 번역 링크신흠, 장유, 이식과 더불어 조선 중기의 한문학 4대가인 월상계택 중 한 명이다. 이는 네 명의 호를 딴 것으로 이정구는 월(月)로 첫번째에 든다.
5. 여담
5.1. 바둑
월사는 바둑을 좋아고 매우 잘했는데 하루는 월사가 친구와 바둑을 두고 있는데 어떤 승려가 시를 받으러 왔다가 대국이 계속되자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기다렸다. 월사는 밤늦게야 바둑을 마치고 그 승려에게 아래의 시를 써줬다고 한다.[7]5.2. 명나라
5.2.1. 문집
이정구는 사신으로 중국을 4번 방문하였는데, 4번째 갔을 때는 병이 들어 귀국하지 못하고 6개월 동안 북경에 체류하게 되었다. 이정구가 북경에 머문다는 소식을 들은 중국인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각지에서 찾아왔고, 사신 숙소인 옥하관 앞에서 이정구를 한 번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병중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글을 써줘야 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명나라에서는 개인 문집을 출판하는 일이 성행했기에 중국인들이 이정구의 문집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이정구가 서울에서 북경 오는 길에 쓴 시 100여 수를 모아 <조천록>이라는 제목을 붙여 보여주었는데, 이정구의 문집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곧 출판을 함으로써 조선 문인 최초로 중국에서 책을 출판한 사람이 되었다.5.2.2. 쌀밥
쌀밥과 관련된 일화도 전해지는데 이정구가 1599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재상의 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그의 집에 가니 마침 재상은 공무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에 이정구가 돌아가려 하자 그대로 보내면 실례가 된다고 생각한 집안 사람이 그를 붙잡아 주찬을 대접하였는데, 이정구는 이를 먹고도 식사 전이라며 돌아가려고 했다. 이대로는 대접이 변변찮았다는 것이 될까 싶어 집안 사람은 다시 그를 붙잡고 떡이며 과일이며 여러 차례 음식을 내왔지만, 이정구는 그걸 다 먹고 그때마다 식사 전이라며 돌아가려고 했고, 결국 오전 내내 음식을 먹고도 이정구는 식사 전이라며 숙소로 돌아갔다. 나중에 집에 돌아온 재상이 이 일을 알고 "조선 사람은 쌀밥을 먹지 않으면 굶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미리 집안 사람에게 말해두지 않은 나의 잘못이다"라고 했다는 이야기다.5.3. 부인 권씨
부인 권씨에 대한 평가도 있는데 부인 권씨은 평생을 베옷만 입고 산 현숙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이에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정명공주[8]의 집에서 신부를 맞아들일 때 나라에서 공주의 집을 빛나게 하기 위해 "모든 재상 부인들을 잔치에 참석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재상집 부녀자들은 부귀를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복장에 값비싼 패물들을 차고 휘황찬란하게 잔치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날 가장 뒤늦게 한 늙은 부인이 허술한 가마에서 내리는데, 무명 베저고리에 무명치마를 입은 모습이 영락없는 농촌 여인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에 여러 부녀자들은 그 노부인을 보고 “촌 늙은이가 어찌하여 이런 자리에 나오나.”하고 의아해하며 업신여겼다. 그 늙은 부인이 뜰에 올라오자 정명공주는 버선발로 뛰어 내려가 부축하여 극진히 맞아들여 제일 상석에 앉히고 공손하게 대접하는 것이었다. 이에 부녀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잔칫상이 들어온 후, 그 늙은 부인이 맨 먼저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이에 정명공주가 "해가 아직 멀었으니 더 놀다 가시라"고 만류하였으나, 부인이 대답하길 “저희 집 대감은 ‘약원도제조’로 새벽에 입궐하셨고, 큰아들은 이조판서로 정원에 나가있고, 둘째아들은 승지로 임직하여 내일 아침에나 돌아올 것인즉, 늙은 제가 돌아가서 저녁식사를 차려 보내야 하므로 부득이하게 일찍 돌아가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여러 재상집 부녀자들이 비로소 그 늙은 부인이 월사의 부인임을 알고 자신들의 차림을 부끄럽게 생각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런데 이정구의 딸이 정명공주의 시어머니가 되므로 비록 공주일지라도 남편의 외할머니인 권씨를 극진히 모시는 것은 지위고하에 상관없는 것이기도 하다.5.4. 홍복산
홍복산은 본래 황골산으로 임진왜란 당시 월사 이정구가 왜병과 15일 이상 전투를 한 장소인데, 이때 이정구가 다리에 총상을 입었지만 살아남게 되어서 황골산의 명칭을 홍복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1] 거북 구 자를 귀 자로 읽을 수도 있어서,이정구는 이정귀로도 혼용해서 불린다.[2] 링크의 자료에 의하면 기자헌과 이정귀는 한양도성 남쪽 청파 출신이다. #[3] 혜화역 4번출구 인근에 이정구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4] 선조의 10녀인 정명공주의 부마 홍주원의 어머니.[5] 송복 명예교수의 경우, 관련 저서를 통해 이는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제 조상 제 나라 역사의 자부심과 자긍심까지 팔아먹으며 명 조정에 용서와 아량을 구걸하는 참담한 글이었다고.[6] 이명한의 넷째 아들인 이단상도 부제학에 오른다.[7] 이 때의 시가 전해진다. 다음은 시의 내용이다.
坦腹風簷午景遲 橘中眞樂一枰棋
人間歲月柯應爛 庭下山僧爾是
(사방이 툭 트인 바람 부는 처마 밑에 한낮이 더디 가네 귤 속의 진짜 즐거움은 바둑 한판뿐이라네 신선이 바둑 한판 두는 동안 인간 세상에서는 도낏자루 썩는다는데 뜰아래 구경하는 스님아 그대는 누구인가?)[8] 정명공주의 남편인 영안위 홍주원은 이정구의 외손자이다.
坦腹風簷午景遲 橘中眞樂一枰棋
人間歲月柯應爛 庭下山僧爾是
(사방이 툭 트인 바람 부는 처마 밑에 한낮이 더디 가네 귤 속의 진짜 즐거움은 바둑 한판뿐이라네 신선이 바둑 한판 두는 동안 인간 세상에서는 도낏자루 썩는다는데 뜰아래 구경하는 스님아 그대는 누구인가?)[8] 정명공주의 남편인 영안위 홍주원은 이정구의 외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