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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24 05:22:52

월상계택

[ruby(월상계택,ruby=月象谿澤)]
[ruby(이정구,ruby=월사)] [ruby(신흠,ruby=상촌)] [ruby(장유,ruby=계곡)] [ruby(이식,ruby=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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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조(李朝)의 예원(藝苑)에서 문장정종(文章正宗)을 말하는 자 반드시 손가락을 꼽아 (월사 이정귀), (상촌 신흠), 谿(계곡 장유), (택당 이식)의 사대가(四大家)를 말한다. 대개 이 4인은 직접 중국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를 접종(接踵)코저 함으로 그 문장이 순정(醇正)하기를 요구하나니 (···) 즉 사대가(四大家)라는 명칭은 어느 때부터 되었는지 모르되 인의(仁義)의 언(言)- 다시 말하면 유가(儒家)의 척도에 탈선되지 않는 문장가 4인이란 말이다.
김태준, 《조선한문학사》
당시에 또 상촌(象村), 월사(月沙), 계곡(溪谷), 택당(澤堂)이 있었는데, 세상에서 상월계택(象月溪澤)이라 일컬었다 상촌의 글은 단련하고 깨끗하게 씻어내어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문기(文氣)가 있었고 월사의 문장은 아로새기고 채색하는 데 힘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문장을 짓는 것이 순조롭고 익숙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할 뿐이었다. 논하는 이들이 또 말하기를 “계곡은 타고난 재주가 넉넉하고 택당은 인위적인 솜씨가 뛰어나다.”라고 하였으니, 각기 그 잘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김윤식, 《운양속집》
월상계택은 조선 중기의 문장에 뛰어났던 4명의 문장가들이다. 상월계택(象月溪澤), 계택상월(溪澤象月), 한학사대가(漢學四大家), 사대문장가(四大文章家),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등으로도 불린다.

구성원인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1564 - 1635), 상촌 신흠(象村 申欽, 1566 - 1628), 계곡 장유(谿谷 張維, 1587 - 1638), 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 - 1647)의 호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2. 구성원

2.1. 월사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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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상촌 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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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계곡 장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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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택당 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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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조선 중기 한문학의 모범이 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동시대 인물들이며 당송팔대가의 영향을 받았고, 명문가 출신의 주자학 위주로 공부하고 관료로도 출세한 인물들이다. # 곧 전후로 살짝 세대가 다르거나, 조선 후기 정권을 잡은 노론계의 선조가 아니고, 규격에서 벗어난 인물은 아무리 대가라도 이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래서 당대 문단의 변화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인물들인 윤근수(尹根壽, 1537 ~ 1616)[1], 최립(崔岦, 1539 ~ 1612)[2], 이항복(1556 ~ 1618)[3], 유몽인(柳夢寅, 1559 ~ 1623)[4], 허균(1569 ~ 1618)[5]이 빠지게 된 것이다. 김창협의 경우에는 세대가 뒤다.

이들 4대가가 대표성을 획득한 것은 김창협 계열의 문인들의 비평과 영향이 지대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문단에서는 앞선 세대인 '월상'에 비해 '계택'에 대한 평가가 일반적으로 더 높았고, '월상'을 빼고 최립과 김창협을 더해 '사군자(四君子)'로 규정된 적도 있으며, 당송8대가를 본떠 만든 문집에서 '월상'이 빠진 적도 많다. 결국 4대가라는 건 만든 사람 마음인 것이지 여기 포함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6]

4. 기타

신흠이식허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들이다. 신흠은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의 이종사촌이며, 김성립은 허균의 매형이다. 이식은 허균의 제자인 적이 있었으며, 허균 사후 저서에서 허균이 쓴 홍길동전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다.


[1] 세대가 빠르다.[2] 세대가 빠르기도 하고 명문가 출신이 아니어서 조정의 주변부만 맴돌았다. 청요직도 역임하지 못했고 학문을 소관하는 관청에 재임한 적도 없다.[3] 후손인 이광좌 등이 소론이 되었다. 유연한 성품으로 문학적으로도 상대적으로 개방적이라고 평가되는 장유가 보기에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생경하고 기이한 글을 좋아했다고 한다.[4] 북인으로 인조 반정 이후 역적으로 몰렸다.[5] 재기발랄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사는 방식이 당대 사람들과 달랐다. 사회 비판 의식과 격식에 맞지 않는 행동, 불교 및 천주교에 대한 숭상 및 관심 등으로 결국에는 역적으로 몰려 사망.[6] 참고: 김우정, 신흠의 ‘視古修辭’와 이정구의‘隨意抒寫’에 관하여, 2010 / 김우정, 16~17세기 近畿 지역 서인계 문인의 교류와 古文辭,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