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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22:03:48

티발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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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티발트 1세.jpg
<colbgcolor=#EEE31F> Tibalt I.a Nafarroakoa
가문 <colbgcolor=#fff>블루아 가문(샨파냐 왕조)
생몰년도 1201년 5월 30일 ~ 1253년 7월 8일
출생지 샹파뉴 백국 트루아
사망지 나바라 왕국 팜플로나
재위
기간
<colbgcolor=#EEE31F> 샹파뉴 백작 1201년 - 1253년
나바라 왕국의 국왕 1234년 - 1253년
아버지 티보 3세
어머니 나바라의 블랑슈(수리아)
배우자 다그스부르크의 게르트루트, 보주의 아녜스, 부르봉의 마르그리트
자녀 블랑슈, 엘레오노르, 페드로, 마르그리트, 티발트 2세, 베아트리체, 헨리케 1세, 아녜스(사생아), 마르케사 로페스 데 라다(사생아)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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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라 왕국 18대 국왕. 나바라 왕국의 최초의 프랑스계 국왕이자 프랑스계 왕조인 샨파냐 왕조 초대 국왕이다.

2. 생애

1201년 5월 30일 샹파뉴 백국의 수도인 트루아에서 샹파뉴 백작 티보 3세와 나바라 국왕 안초 6세의 딸인 블랑슈 사이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티보 3세는 일주일 전에 십자군으로 활약하다가 무슬림과의 전쟁에서 전사했다. 그래서 그는 '유복자 티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태어나자마자 샹파뉴 백작이 되었다. 어머니 블랑슈는 아들이 21살이 될 때까지 섭정을 맡았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아기 티보의 대부가 되어줬다.

티보 3세의 형이자 전 샹파뉴 백작이었던 앙리 2세는 1197년 사망하기 전에 딸 필리파를 남겼다. 필리파와 그녀의 남편인 라메럽트 백작 에라르 1세는 어린 티보를 밀어내고 백작위를 가로채려 했다. 여기에 샹파뉴의 여러 귀족들도 백작 자리를 탐했다. 1216년 에라르 1세가 필리파와 함께 샹파뉴로 진군하면서 샹파뉴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필리프 2세가 양측에 휴전을 명령하고, 그해 7월 멜룬에서 백작위 계승 문제를 재판에 회부했다. 프랑스 왕실 법원은 몇 달간의 논의 끝에 티보가 이미 오랫동안 샹파뉴를 다스렸고, 필리파와 그녀의 가족들은 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상속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1217년 봄, 판결에 승복할 수 없었던 에라르 1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하는 블랑슈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샹파뉴의 여러 귀족들을 포섭했다. 또한 에라르는 로렌 공작 티보 1세와 동맹을 맺어 세력을 크게 키웠다. 그러나 1218년 교황청이 반란을 일으킨 샹파뉴 영주들을 상대로 파문을 선고했고, 이웃한 부르고뉴 공국과 바르 백국이 티보를 지지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블랑슈는 로렌 공작 티보 1세를 견제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맺었다.

1218년 5월, 블랑슈가 친히 이끄는 군대는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와 함께 로렌 공국의 수도 낭시로 진군하여 그 일대를 파괴했다. 이후 반란군은 세력을 빠르게 잃었고, 에라르와 필리파는 1218년 7월 4,000리브르의 돈을 즉시 지급받고 매년 1,200리브르를 받는 조건으로 티보의 집권을 인정했다. 이리하여 백작위를 지키는 데 성공한 티보는 1222년 21살의 성년이 될 때부터 백국을 직접 통치했다. 그는 시와 노래를 짓는 것을 무척 즐겼기에, "음유시인 티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223년 11월, 프랑스 국왕 루이 8세유대인들이 기독교도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매긴 이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티보는 낭시에 거주하는 부유한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통한 추가 수입을 받아내는 대가로 그들의 재산을 보장하는 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루이 8세의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 자신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티보를 괘씸하게 여긴 루이 8세는 1226년 아비뇽 공성전을 치를 때 티보를 일방적으로 질책했다. 그는 이에 반감을 품고 40일만에 '최소 복무'를 마쳤다는 이유로 허락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돌아갔다. 루이 8세는 그가 떠난 직후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각지에서 티보가 루이 8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그는 루이 9세의 대관식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주변의 영주들이 선왕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1229년부터 1230년까지 샹파뉴를 침략했다. 바르 백작 앙리 2세는 동쪽에서 샹파뉴를 공격했고, 티보는 이에 맞서 로렌 공국과 동맹을 맺고 바르 백국을 공격했다. 지난날 샹파뉴 계승 전쟁 때 반란 세력을 위해 싸웠던 조인빌의 시몬은 이제 티보와 동맹을 맺고 조인빌의 북쪽 경계에 있는 바르를 약탈했다.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 위그 4세는 샹파뉴 백국이 바르 백국에 쏠려 있는 틈을 타 남쪽에서 샹파뉴를 침략했다.

티보는 급히 군대를 돌려서 침략자들을 물리쳤지만, 샹파뉴 일대가 황폐화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로 인해 경제가 피폐해지고 빚을 감당할 길이 없게 되자, 티보는 선조들이 대대로 보유했던 파리 서쪽의 백작령을 모조리 매각해야 했다. 1233년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1세와 샹파뉴 백작 앙리[1] 사이의 딸이자 키프로스 왕국의 섭정인 알릭스(알리스)가 진정한 샹파뉴 백작은 바로 자신이라며 샹파뉴 계승 전쟁을 재차 벌이려 들자, 티보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지불해야 했고, 이로 인해 빚을 더 많이 떠안아야 했다.

1234년 4월 7일 나바라 국왕이자 삼촌이었던 안초 7세가 오른쪽 다리에 생긴 정맥류 궤양과 관련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안초 7세는 자식을 낳지 못했기에, 나바라 왕위는 그에게 넘어갔다. 그동안 그와 경쟁했던 프랑스 귀족들은 그가 하루아침에 일국의 왕이 되자 그의 지위에 도전하기에는 너무 강하다고 여기고 물러섰다. 그리하여 한숨 돌리게 된 그는 국정을 샹파뉴 귀족들에게 맡기고 나바라를 4개 구역으로 나누었으며, 프랑스식 법률과 나바라 왕국 고유의 전통을 조합한 성문법을 기획했다. 또한 딸 블랑슈를 카스티야 왕자 알폰소(미래의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와 약혼시켰지만 결혼이 성사되지 않자 브르타뉴 공작 장 1세와 결혼시켰다.

1239년 프리드리히 2세의 제6차 십자군 원정으로 탈환했던 예루살렘 왕국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출진한 '귀족 십자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여기에는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 몽포르 공작 아모리 6세, 프랑스 궁재 로베르 드 코트네, 브르타뉴 전임 공작 피에르 1세가 참가했으며, 기게스 4세 드 포레즈, 앙리 2세 드 바르, 루이 드 산체르, 잔 드 브라네 드 마콘, 기욤 드 조그니, 앙리 드 그랑프레 등 하급 귀족들도 대거 참여했다. 티발트 1세는 1,500명의 기사들을 이끌고 1239년 8월에 프랑스를 떠났고, 9월 1일 아크레에 도착한 뒤 현지의 기독교 인사들과 접촉했다. 이후 아크레에서 아내에게 보낼 시를 짓는데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과 함께 온 귀족들에게 예루살렘 원정을 맡겼다.

귀족 십자군은 무슬림군을 몇 차례 격파하고 아스칼론과 예루살렘 인근 내륙 지대를 공략하는 등 상당히 선전했지만, 1239년 11월 13일 가자 전투에서 루큰 앗딘 알 히자위가 이끄는 아이유브 왕조군과 맞붙었다가 앙리 2세가 전사하고 아모리 6세가 포로로 잡혔으며 수백 명의 병사들이 사로잡히는 참패를 당했다. 이후 트란스요르단의 지배자 앗 나시르 도우드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공략했다. 이후 티발트는 아이유브 왕조와 평화 협약을 맺고 콘월의 리처드가 새 병력을 이끌고 현지에 도착하기 직전인 1240년 말에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갔다.

나바라 왕국에 돌아간 후, 티발트 1세는 팜플로나와 트루아를 오가며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그러나 1242년 팜플로나 주교로 선출된 페드로 히메네스 데 가졸라스와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었다. 급기야 그로부터 교구의 재산을 모조리 몰수당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자, 주교는 아라곤 왕국의 나바둔으로 피신한 뒤 1250년 2월 25일 우에스카, 비흐, 레리다, 사라고사, 발렌시아 주교들을 불러들여서 공의회를 개최한 뒤 티발트 1세를 파문했다. 그러나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교황청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나바라 국왕을 파문할 수 없다며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티발트 1세는 이후에도 통치를 무탈하게 이어가다가 1253년 7월 8일 팜플로나에서 사망했고, 팜플로나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장남 티발트 2세가 나바라 왕위를 물려받았다.

3. 가족 관계



[1] 샹파뉴 백작으로서는 '앙리 2세', 예루살렘 공동 왕으로서는 '앙리 1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