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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22:21:06

가르치아 4세 산치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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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arcia_(III)_Sanches_de_Navarra_-_Compendio_de_crónicas_de_reyes.png
Gartzia IV.a Santxitz
출생 1012년
팜플로나 왕국
사망 1054년 (향년 42세)
카스티야 아타푸에르카 계곡
가문 세메노 왕조
재위
기간
팜플로나 왕국 국왕 1035년 - 1054년
아버지 안초 3세
어머니 무니아도나
형제 페르난도 산치츠, 세메나 산치츠, 온찰루 산치츠, 라미로 산치츠(이복형제)
배우자 푸아의 에스테파니아
자녀 안초 4세, 라미로 가르체이츠, 우라카 가르체이츠, 헤르메신다 가르체이츠, 페르난도 가르체이츠, 라몬 가르체이츠, 세메나 가르체이츠, 메요르 가르체이츠, 안차 가르체이츠, 안초 가르체이츠(사생아), 멘치아 가르체이츠(사생아)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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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팜플로나 왕국 제10대 국왕. 가르치아 산치츠 3세라고도 불린다.

2. 생애

1012년경 나바라 왕국 제9대 국왕 안초 3세와 카스티야 백작 산초 가르시아의 딸 무니아도나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페르난도 산치츠, 세메나 산치츠, 온찰루 산치츠가 있었고, 이복형제로 라미로 산치츠가 있었다. 1035년 안초 3세가 사망한 뒤, 그가 생전에 확보한 영토는 자식들에게 분할되었다. 그는 팜플로냐 국왕이 되었고, 라리오하, 부레바, 아라바, 비스카야 등지가 그의 영지로 편입되었다. 아라곤 백작위는 이복형제 라미로 산치츠의 것이 되었으며, 페르난도 산치츠는 카스티야 백작을 맡았으며, 온찰루 산치츠는 소브라베와 리바고르자의 왕이 되었다. 1037년 안초 3세에게 축출된 뒤 갈리시아에 망명했던 베르무두 3세가 왕국을 되찾기 위해 쳐들어오자, 페르난도 산치츠와 함께 이에 맞서 싸워 1037년 9월 4일 타마론 전투에서 베르무두 3세를 전사시켰다. 페르난도 산치츠는 곧바로 레온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1세가 되었다.

1043년, 라미로는 자신이 가진 영역을 확장하거나 이복형 가르치아 4세가 소유한 팜플로냐 왕위를 빼앗을 의도를 품고 사라고사, 투델라, 우에스카 등 무슬림 토후국들과 함께 팜플로냐로 쳐들어갔다. 가르치아 4세는 페르난도와 동맹을 맺고 이에 대항했다. 양측은 타팔라에서 맞붙었고, 가르치아 4세-페르난도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가르치아 4세는 수많은 무기와 보급물자를 노획했는데, 그 중 라미로가 타고 다녔던 검은 말을 노획해 자신에게 바친 알페레스(alférez: 중세 이베리아의 왕실 고위 관리) 오르티 산치츠에게 오로비아 마을을 하사했다.가르치아 4세는 토레타와 바랑켈에 승리를 기념하는 큰 바위를 세웠다. 이후 가르치아 4세와 라미로는 무니아도나의 중재하에 화해했고, 때마침 소브라베와 리바고르자의 왕 온찰루 산치츠가 사망하자 라미로가 그 땅을 물려받게 했다.

1045년 칼라호라를 공략한 뒤 나이아라 데 리오하에 안드레 마리아 수도원 건설을 명령하고, 왕실 거주지를 그곳으로 옮겼다. 1054년경 병환에 시달리던 가르치아 4세는 자기가 죽으면 페르난도가 자신의 아들들을 몰아내고 팜플로나 왕국을 삼키려 들 거라 예상하고, 병문안을 하러 온 페르난도를 체포해 카에 성에 가두었다. 하지만 페르난도는 간수를 매수해 극적으로 탈출한 뒤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가르치아 4세가 무슬림들과 연합하여 카스티야를 침공하자, 아라곤 백작 라미로 산치츠와 함께 동맹을 맺고 대항했다. 양군은 아타푸에르카 계곡에서 맞붙었는데, 전투 도중에 가르치아 4세가 전사했다. 다만 팜플로나군은 해질 무렵까지 전투 대열을 유지했고, 왕의 시신을 수습한 뒤 팜플로나로 이송하여 안장했다. 이후 아들 안초 4세가 새 국왕으로 즉위했다.

3. 가족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