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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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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RAI 2에서 이탈리아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인’ 명단이다. 고대 로마 제국 시기의 인물들이 완전히 배제되고 투표율도 6%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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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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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3대 거장
Renaissance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
라파엘로 산치오
Raffaello Sanzio

<colbgcolor=#000><colcolor=#fff>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파일: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화상.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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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초상화.jpg
본명 레오나르도 디세르 피에로 다빈치[1][2]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출생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공화국 빈치
사망 1519년 5월 2일 (향년 67세)
프랑스 왕국 앙부아즈
묘소 앙부아즈 성
직업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해부학자, 지질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지리학자, 작가, 요리사, 수학자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레오나르도 다빈치 서명.svg

1. 개요2. 이름3. 생애4. 작업5. 작품6. 대중매체
6.1. 기타 매체
7. 여담

[clearfix]

1. 개요

피렌체 공화국예술가.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 예술의 기반을 제시한 선구자이자 인류 지성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평가받는, 그야말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유명하며, 이탈리아의 위인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이름과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모나리자는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음악가, 작가, 해부학자, 지질학자, 식물학자, 지리학자, 요리사, 수학자, 등 다방면에서 완벽에 가깝게 두루 활약한 자타공인 다중천재(Polymath)이며, 키, 외모, 목소리 등 외적 용모 또한 뛰어났다. 또한 운동을 즐겨 강인한 완력과 쉽게 지치지 않는 근골격계를 가졌으며, 검술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의 다재다능함과 창의성으로 르네상스 인간(Renaissance Man)이라 불릴 만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걸출한 회화 작품들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며, 대표작으로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등이 있다. 흔히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라파엘로 산치오 등과 함께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손꼽힌다.

2. 이름

흔히 다 빈치라고 줄여 부르는 경우가 많아 '다 빈치'를 성씨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다 빈치'는 성씨가 아니라 그냥 '빈치(Vinci) 출신'이라는 뜻의 칭호이다. 레오나르도 본인은 성씨가 없으며, 이는 이탈리아가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성씨가 늦게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와 같은 성 + 이름 방식이 아직 확립되지 않던 당시에는 다른 사람 (특히 동명이인)과 구별하기 위한 기호로써 자신의 출신 지역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한 동네에 레오나르도가 세 명 산다면 그 셋을 구별하기 위해 각각 '방앗간 집 레오나르도' 와 '앞골짜기 레오나르도', '빈치 사람 레오나르도' 식으로 불렀다.[3]

이 점에서 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부를 때 현대의 성처럼 '다 빈치 씨'라고 부르기에는 적절치 않지만, 레오나르도 본인이 다른 성씨를 가진 적이 없으므로 현대에도 그를 호칭할 때 성씨와 비슷한 구실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성씨가 보편화 된 것은 1563년에 열린 제3차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모든 이의 성명을 포함한 가톨릭 교회 본적 기록부를 의무화하면서부터다. 이전에는 이탈리아에서 아직 성씨를 쓰지 않는 이들이 많아서[4] 이름으로만 부르는 경우가 보편적이었다.

따라서 '다 빈치(빈치에서 온)'의 의미가 더 잘 전달되는 서양권에서 그를 언급할 때는 주로 이를 생략하고 보통 레오나르도라고 부른다. 비슷한 예로, 잔 다르크(Joan of Arc/아크의 조앤)도[5] 국내에선 풀네임으로 '잔 다르크'라고 많이 호칭하지만 서양권에서는 '잔(Jeanne)', '조앤(Joan)' 같은 식으로 짧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6]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한국어 영상영어 영상의 코멘트를 보면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한국인들은 '다 빈치는', '다 빈치가' 같이 언급하는 반면 해외에서는 '다 빈치'라고 부르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레오나르도는', '레오나르도가' 같이 언급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생애

레오나르도 "피에로"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밤 3시경 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빈치 마을에서 태어났다. 레오나르도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부모인 변호사 아버지 안토니오 피에로와 농민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아들이었다. 처음 태어나서는 어머니의 집에 살다 대여섯이 돼서 아버지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레오나르도를 돌봐준 것은 아버지보다는 숙부였고 숙부는 어린 레오나르도에게 자연과 세상을 조금씩 가르쳐주었다.

어머니 카테리나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소작농의 딸로 체르케스인 출신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아버지가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인식한 뒤, 레오나르도는 14살쯤 피렌체로 이사를 가 안토니오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공방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20살이 되어 베로키오의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수로 참여해 꼬마 천사 두명을 맡았는데, 당시에 일반적이던 템페라 기법에 새로 알려지기 시작한 유화를 같이 실험해서 그렸다. 세간에는 베로키오가 그걸 보고 현타가 찾아와 화가를 은퇴했다는 야사가 전해지지만, 이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베로키오는 그 뒤에도 잘만 작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그림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베로키오는 다빈치를 정식으로 화가 길드였던 성 루카 조합에 가입시켜주게 했다.

30살이 된 1482년 다 빈치는 밀라노 공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밀라노 공이었던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다빈치를 지원하면서, 다 빈치는 여러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암굴의 성모>나 <기마상> 등이 이때 만들어졌고[7], 그 중 가장 유명한 건 <최후의 만찬>이다.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이 일어나면서 1499년에 프랑스 왕국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점령하고 루도비코는 프랑스에 투옥되며 밀라노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다 빈치는 잠시 베네치아에서 일을 하다가 1500년 피렌체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1501년 <성 모자와 성 안나> 제단화를 그린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연구 스케치와 관찰을 남겼다. 헬리콥터나 인체비례도 등 잘 알려진 다빈치의 과학자/기술자적 면모는 이 때의 스케치로 알게 된 것. 1503년에 피렌체 시청에 벽화작업을 의뢰받아 <앙기아리 전투> 작업을 시작했는데, 재밌는 건 옆편 벽에서 라이벌인 미켈란젤로가 <카시나 전투>를 작업하고 있었다는 것. 또한 1503년에는 그 유명한 모나리자 작업을 시작해 죽을 때까지 그림을 손에 놓지 않는다.

1506년에는 루이 12세의 요청을 받고 다시 밀라노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밀라노를 떠나는 1513년까지 다빈치는 다양한 작업과 연구를 하면서 지냈는데, 제3차 이탈리아 전쟁으로 1512년 교황이 밀라노를 공격하고 프랑스는 물러난다. 그렇게 프랑스가 떠나면서 다 빈치는 교황령의 로마로 가서 교황청 작업을 주로 하게 되었지만 완성작 없이 취소되었고,[8]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 루아르 강의 앙부아즈 궁에 기거하게 되고, 여기서 <모나리자>가 완성된다. 그러나 말년에 가면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어[9] 그가 좋아하던 작업은 할수없게 되었으며 소일거리만 하게 되었다. 결국 1519년 4월 23일 죽음을 직감한 그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1519년 5월 2일 프랑스의 클로 뤼세(Clos Lucé)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레오나르도는 독신인터라 그가 자식처럼 아낀 제자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10]가 모든 재산을 상속받는다.

4. 작업

그의 기록은 해부학, 역학, 공학, 식물학, 조경 분야 등 미술뿐 아니라 정말 다방면에 이름이 남아 있다.[11] 그러나 다 빈치가 관심을 가졌던 방대한 분야에 비하면 실제로 만들어지거나 남아있는 작품의 숫자는 적은 편이다. 게다가 본인이 작품에 서명하지 않았던 탓에 다 빈치의 작품인지 아닌지 이견이 갈리며 불확실한 작품들이 많다. 거기다가 워낙 본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보니 다 빈치와 딱히 관련이 없는데도 아무데나 다 빈치가 관여했다는 소문이 붙어버리는 상황이다. 예를 들면 근거가 전혀 없음에도 일반적으로 스파게티 면이나 포크까지 발명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12][13][14]
파일:1374px-Mona_Lisa,_by_Leonardo_da_Vinci,_from_C2RMF_retouched.jpg
그의 유명한 작품인 모나리자
파일:Peter_Paul_Ruben's_copy_of_the_lost_Battle_of_Anghiari.jpg
앙기아리 전투의 페테르 파울 루벤스 모사본. (밀라노 공국베네치아 공화국)
파일:attachment/leonardodacecilia.png
흰 담비를 안은 귀부인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자기소개서에선 대부분을 군사용 공격 병기를 구상해 이야기하였고, 그림의 재능을 마지막에 소개했지만 오늘날 다 빈치의 그림 실력은 그의 능력 중 높게 평가되는 부분이다. 그가 남긴 그림은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한 것들이다. 그는 그림 실력 그 자체로써도 출중했지만, 새로운 화법의 실험이라는 면에서 높게 평가할 만한 인물로, 자신의 그림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 최초로 기름을 사용한 유화를 시도한 화가들 중 하나였다.[15] 그 결과로 모나리자에서 공기 원근법을 처음으로 구사해내는 등 좋은 결과도 여러 차례 얻어냈다. <암굴의 성모>나 <에르마인을 안고 있는 숙녀>는 르네상스 최고의 초상화로 손꼽히는 명작들이다. 반대로 지나치게 실험정신이 투철했던 나머지 프레스코 그림에 프레스코와는 상극인 유화 기법[16]을 써서 그림이 그대로 녹아내리는 바람에 망치는 일도 있었다(<앙기아리 전투>). 그리는 도중에 그림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그림을 빨리 말리기 위해 화로까지 동원했지만, 결국 아랫부분 일부를 제외한 작업분이 전부 녹아내리는 바람에 그대로 버려졌다고 한다. 문제는 이 작품이 미켈란젤로와의 대결작이었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카시나 전투>라는 작품을 그려내지만, <앙기아리 전투>는 현재 라파엘로 등 다른 화가들의 스케치 모사 밖에 남아있지 않다. 본 문서의 앙기아리 전투 그림도 루벤스가 그린 모사본이다.
파일:attachment/davincilastsupper.jpg
최후의 만찬

<앙기아리 전투>를 너무 대차게 말아먹어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지만 실험 정신이 지나쳐 망가진 사례는 이외에도 많다. 심지어 유명한 <최후의 만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최후의 만찬은 완벽주의적인 그의 성격으로 당시 유행하던 프레스코 벽화 기법[17]이 아닌 템페라로 그려져 바로 퇴색이 시작되는 등[18] 그의 도전이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대에 확립된 그의 천재 미술가적 이미지는 사실 그의 작품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것에 기인하는 바가 매우 크다.

실제로 그가 서양사에 오래토록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금기로 여겨지던 해부를 행하는 등 여러 시도를 통해 인체의 많은 부분들을 실질적으로 관찰해냈다는 것 때문이다. 인간의 태아를 최초로 그린 사람이기도 하고 많은 해부 스케치를 남긴 바 있다. 다 빈치의 스케치인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인체 비례에 대한 상징처럼 여겨질 정도로 유명하다. 다만 이 또한 대표적인 다 반치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우선 르네상스 시대에 교회에서는 인체 해부를 공식적으로 금지한 적도 없고, 실제로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 해부쇼가 유행할 정도였으며 당시 다른 유명한 화가들도 다들 해부를 하고 해부도를 그렸다. 당장 라이벌(?)인 미켈란젤로만 하더라도 엄청나게 뛰어난 해부도를 남겼다. 애초에 다 빈치의 해부도는 여자의 자궁을 척추와 연결해버리거나 하는 등 동시대 제대로 의학을 배운 이들이 그린 해부도에 비해 뒤떨어지는, 틀린 부분이 상당히 많다. 즉 흔한 레오나르도 과대 평가 떡밥 중 하나이다. 무슨 사회적 터부를 어기면서까지 진리 탐구에 몰두하고 시대를 앞서가고 그런 건 아니란 소리. 오히려 다 빈치의 해부가 불법이었던 건 다 빈치가 정규 의대생이 아니었던 탓이 크다.

그렇게 생전에 완성한 그림이 얼마 되지 않고, 성격이 괴팍하기는 했지만 그 그림 실력 하나만큼은 천재적으로, 그의 스승 안드레오 델 베로키오는 그 당시에 유명한 화가였으나, 자신이 그리던 <그리스도의 세례>를 레오나르도가 몇 가지를 덧붙였는데, 스승 베로키오가 레오나르도의 솜씨를 보고는 '다시는 물감에 손대지 않겠노라'고 맹세한 기록이 있다. 이 당시의 나이가 스무 살. 하지만 실은 베로키오가 재능넘치는 도제에게 더 많은 그림을 위임하고 자기는 수익성이 높은 조각상 제작에 전념하겠다는 사업상의 결정을 내렸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작품을 완성시키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밀라노의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동상을 수년간 연구만 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일도 있으며, 오스만 제국에는 젊은 시절의 그가 메흐메트 2세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메흐메트 2세가 그 도무지 끝이 안 보이는 제작기간에 질려서 돌려보냈다는 식의 설화도 있을 정도였다.[19] 이외에도 오스만 제국 보스포루스 해협에 다리를 디자인했는데 당시 기술로서는 도무지 이게 만들 수 있냐고 오스만 제국 황실에서 부정적이라 끝내 이뤄지지 못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냥 평범하게 나무로 길쭉한 다리로 만들어진다. 요즘에는 한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른 그림에 손을 대었던 것이 성인ADHD의 증상이 아니었나 하는 해석도 있다. 물론 모두 본인의 잘못은 아니었는데, 예를 들면 체사레 보르자에게 인정받아 도시 계획의 총책임자급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지만 체사레가 몰락한 탓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또한 목차에는 건축가라 되어 있지만 진짜로 훌륭한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라파엘로에 비해 다 빈치는 건축 분야에서 딱히 뚜렷한 결과물을 남기지 못했다. 애초에 본인이 설계하거나 감독으로서 건축을 해본 경험 자체가 없다. 물론 건축면에서 큰 발전이 있었던 르네상스 시대인 만큼 레오나르도 역시 건축에 관심이 많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에서 건축 자문으로 활동하며 건축에 관련된 스케치를 다수 남겼지만, 레오나르도 본인이 독자적인 건축가로 활동하지는 못했다.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의 샹보르 성의 이중 계단에 대한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남겼고, 이 성의 건축가였던 도메니코 다 코르토나가 그것에 따라 설계했다는 '설'이 유명하지만 레오나르도가 그에게 그림을 넘기거나 도메니코가 레오나르도에게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2010년 6월 20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Surprise Secret에서는 그가 요리사 활동한 적이 있다고 한다.[20] 198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발견된 코덱스 로마노프가 레오나르도가 남긴 요리에 관련된 문서이다.[21]

2014년 11월 30일자 서프라이즈에서는 그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그림이 후세에 그려진 가짜라는 주장을 다루었다. 레오나르도의 모작을 업으로 하던 화가가 가짜 자화상을 그려서 사기를 치자는 음모에 가담해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속 플라톤의 얼굴을 토대로 그린 것이고, 그의 다른 초상화와 비교해 봐도 얼굴에서 차이나는 부분이 많은데다 그만의 빗금선의 특징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실제로도 다른 초상화는 비교적 샤프한 인상인 데 비해 후덕한 편이기는 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보다 100년 먼저 중력 실험 연구를 하였다는 스케치가 해독이 되었다. 해당 스케치에는 이탈리아어로 '운동의 등가성'이라고 적혀있는 등 당시의 수학 수준이나 실험도구가 부족한 시대였음에도 중력 가속도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 단, 중력이 가속운동 이라는 것은 이미 르네상스 이전 14세기에도 알려진 사실이었고, 다빈치의 노트는 '그 가속도가 얼마인가?'를 연구한 것이다. 물론 이걸 연구한 것도 대단한 건 맞지만, 물리학 발전에 딱히 구체적으로 기여하질 못했다. 이는 두 새로운 과학이라는 역학에 대한 교과서를 써서 후세에 영향을 준 갈릴레오와 비교되는 면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사실 애초에 갈릴레이부터가 중력 가속도에 관한 최초 연구자가 아니었고, 당시 이탈리아 여기저기서 많은 이들에 의해 훗날 뉴턴의 물체 운동론에 기초가 되는 연구들이 자잘하게 사회 일반에 보고되고 그런 소문들이 정착해 갔던 시기이다. 그러나 이론적 배경과 명확한 증명이 불명이었다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비로소 웬만큼 정돈이 된 것이다. 삼각형이면 구슬들이 일정 속력으로 떨어진다는 건데, 속도와 가속도에 관해 조금만 수리학적으로 정돈해 봐도 면피할 수 있는 착오다. 결론은 다빈치의 노트는 물체운동 이치에 관한 당대의 흔한 오개념들 일부를 다빈치는 그림으로 나타내 본 것뿐이다.

5. 작품

제목 시기 소장처 비고
수태고지 1472~1475년경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우피치 미술관
동방박사들의 경배 1481년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우피치 미술관
암굴의 성모 1483년~1485년
1495년~1508년

[[프랑스|]][[틀:국기|]][[틀:국기|]] 루브르 박물관

[[영국|]][[틀:국기|]][[틀:국기|]] 내셔널 갤러리
[22]
최후의 만찬 1490년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흰 담비를 안은 귀부인 1490년
[[폴란드|]][[틀:국기|]][[틀:국기|]] 차르토리스키 미술관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1490년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아카데미아 미술관
[23]
자화상
모나리자 1503년~1506년경(추정)
[[프랑스|]][[틀:국기|]][[틀:국기|]] 루브르 박물관
살바토르 문디 1505년~1515년경(추정)
[[사우디아라비아|]][[틀:국기|]][[틀:국기|]] 무함마드 빈 살만
[24]

6. 대중매체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인데다 시대를 앞서간 여러모로 기이한 면이 많아서 다양한 미디어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하거나 본인을 등장시키곤 한다. 기이한 천재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먹고 들어가고 예술가의 모습보다는 주로 과학자나 기술자, 발명가, 공학자의 모습에 비중을 둬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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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기타 매체

7. 여담

파일:external/www.museoscienza.org/balistalanciasassi_180.jpg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고안한 투석기.
"진실로 인간동물의 왕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잔인성이 동물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통하여 살아가는 살아있는 묘지이다. 나는 어렸을 때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며, 내가 그랬듯이 다른 사람들도 동물 살해를 살인과 똑같이 여길 날이 올 것이다."
* 동물들을 사랑했고 전쟁을 경멸한 사람이었다고도 전해진다. 무기를 제작 및 디자인하긴 했지만 이건 필요로 하는 물체를 연구하다보니 자연스레 한 것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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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망스어게르만어권의 인명이나 지명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번역하자면 레오나르도, 빈치 출신인 피에로 선생의 아들.[3] 그래서 디스크월드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패러디 캐릭터인 레오나르도 드 퀌은 퀌에서 온 레오나르도라는 뜻이 된다.[4] 물론 몇몇 상류층은 이전에도 성씨가 있었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나, 조반니 보카치오가 대표적인 사례.[5] 다만 잔 다르크의 출생지는 동레미(Domrémy)이며, 아크(=다르크)는 출생지가 아닌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따온 성씨격이다.[6] 한국 관점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김두한이 성씨가 없었고 그냥 '종로의 두한'이라고 알려져 있다고 해보자. 이 경우 한국인들은 보통 앞의 수식어를 떼고 '두한'이라고 부를 것이다. 반면 '다 빈치' 같은 호칭은 사람을 단순히 '종로의'라고 부르는 셈이다.[7] 다만 이 기마상은 이탈리아로 쳐들어온 프랑스 군사들이 활쏘기 과녁으로 삼아서 마구 석궁의 화살을 쏘아대는 바람에 커다란 고슴도치로 변해버려, 결국 완성되지 못하고 버려졌다.[8] 이 때 유명한 날틀 '오니솝터'를 개발하게 되었는데 제자 프란세스코와 함께 비행 실험도 했지만 당시에는 비행에 대한 기술이 부족함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9] 건강 악화로 인해 평생을 그렸던 모나리자를 완성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10] 레오나르도와는 스승과 제자보다는 부모와 자식 같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특히 프란세스코는 레오나르도의 곁에 항상 있었고 임종도 함께 해줄 정도였다.[11] Fritjof Capra, '다 빈치처럼 과학하라', 강주헌 옮김, 김영사, 2011[12] 포크는 고대 이집트 시절 유물에서도 확인이 가능한, 인류가 사용한 오래된 식기류 중 하나이고, 동로마 제국에서 처음 상용화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태어나기 100여 년 전의 인물인 샤를 5세 또한 금과 은으로 만든 포크를 가지고 있음이 확인 되는 만큼 포크 자체를 발명한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포크가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전파 된 데에는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국가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유명한 발명가인 다 빈치가 발명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듯하다.[13] 스파게티면도 마찬가지로 고대 로마의 유물 중에 스파게티틀이 발굴되어 다 빈치의 발명품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14] 자전거의 스케치라고 알려졌던 것도 후대의 분석 결과 원래 안경을 그린 스케치에 후대의 누군가가 자전거 핸들과 안장, 페달을 덧그려 자전거로 바꾼 것으로 밝혀졌다.[15] 단 그는 유화보다는 템페라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16] 유화는 습기와 열에 극도로 취약한데, 프레스코화는 회칠을 한 벽면에 그리는 그림이다.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려야 하기 때문에 벽면이 당연히 습기로 축축하며, 회반죽이 굳으며 화학반응이 일어나 이 발생한다.[17] 프레스코 기법은 벽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완성해야 하고 수정하기도 매우 힘들기 때문에 완벽주의적인 다 빈치는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때문에 템페라로 그린 최후의 만찬은 역사상 가장 불행한 그림중 하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18] 템페라는 광물을 곱게 갈아서 달걀 노른자와 섞어 만든 물감으로 전통적으로 이콘을 그리는 데 많이 쓰였다. 다만 이콘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템페라 물감은 변색이 쉽게 되고, 특히 성당같은 경우 항상 초와 향을 쓰기 때문에 그을음이 달라붙어 시간이 지날 수록 새까맣게 변하게 된다. 때문에 아직도 템페라 물감으로 그리는 이콘은 70-80년마다 한 번씩 덧칠을 해준다.[19] 어린이용 교육책에 종종 올라오는 일화 중에 어느 장수의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은 화가가 활 하나만 그리는데 그리고 버리고 그리고 버리고를 반복하다 십년 넘게 걸렸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꼬려고 만든 일화라는 주장도 있다.[20] 밀라노 대공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궁정에 있을 때 일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요리를 만들어 평판은 그저 그랬다. 이탈리아 요리는 풍성하면서도 화려한 것을 기대하는데, 레오나르도의 요리는 엔초비 한 마리와 곁들이는 채소 정도로 소박했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었던 것.[21] 대한민국에는 2002년 책이있는 마을에서 '한 천재의 은밀한 취미' 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항목 아래쪽에는 동물을 사랑해서 고기를 먹지 않겠다 라고 했다는데 그 문서에 따르면 글쎄...? 이 내용은 EBS 지식채널e 에서도 다뤘다. 상당히 개그스러운 에피소드.[22] 같은 작품이 두 점 존재한다.[23] 인체 비례도(Canon of Proportions)라고도 한다.[24] 다 빈치의 작품 중 유일한 개인 소장품. 다 빈치의 작품이 맞는 가에 대한 진위 논란이 현재진행형이다.[25] 심지어 관련 퀘스트의 대부분이 유저들을 전국일주하게 만들 정도로 경로도 그렇고 과정도 복잡해 상당한 원성을 듣고 있다.[26] 레오나르도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어머니가 이탈리아에 갈 당시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림을 보고 반응한다고 해서 붙인 것이다.[27] 당근 조각을 곁들인 생선이나 꽃으로 장식한 음식 등. 현대 21세기에는 많이 대중적이고 예술적인 음식이었지만 당시에는 많은 양의 고기 요리에 익숙한 손님들은 불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사실상 시대를 앞서가버린 셈.[28] 미술사학자 노성두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건 완전히 거짓이라고 한다. 웃으라고 써놓은 글을 진짜로 받아들인 결과라고.[29] 이 수식들이 정립되지 않았어도 나중에 다른 형태로 유사한 이론이 정립됐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만약에 그랬다면 인류의 과학 기술의 발전은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거나 기술이 고도화 되는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가능성이 높다[30] 이로 인하여 문학작품에서 양손잡이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다른손잡이였다.[31] 원래는 레오나르도가 그림을 가르쳐줄 제자로 쓰기 위해서 고용했으나, 살라이가 그림에 대해 소질이 없자 할 수 없이 그를 곁에 두고 자신이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도와주는 조수로 삼았다. 그리고 레오나르도는 죽기 전에 자신이 가진 유산인 포도밭을 살라이한테 넘겨주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할 만큼, 살라이를 아꼈다.[32] 당시 밀라노의 대표인 스포르차 가문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