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도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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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34><colcolor=#ffffff> 기옌 공작 샤를 드 기옌 Charles de Guyenne | |
이름 | 샤를 드 기옌 (Charles de Guyenne) |
출생 | 1392년 2월 6일 |
프랑스 왕국 파리 호텔 생폴 | |
사망 | 1401년 1월 13일 (향년 8세) |
프랑스 왕국 파리 벵센 성 | |
아버지 | 샤를 6세 |
어머니 | 이자보 드 바비에르 |
형제 | 이자벨, 잔, 마리, 미셸, 루이, 장, 카트린, 샤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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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도팽, 기옌 공작. 샤를 6세의 첫번째 도팽이다.2. 생애
1392년 2월 6일 프랑스 왕국의 수도 파리의 호텔 생폴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와 이자보 드 바비에르의 둘째 아들이자 다섯 번째 자녀로 출생했다. 그는 1386년에 출생한 후 3개월 만에 사망한 형 샤를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출생 직후 프랑스의 도팽이자 기옌 공작에 선임되면서 왕위 후계자로 선임되었다. 1392년 8월 5일, 샤를 6세가 브르타뉴 원정 도중 르망 숲을 행진하다가 광기에 휩싸였다. 이후 샤를 6세가 정상적으로 통치하지 못하게 되면서, 아기 샤를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으며, 샤를 6세의 동생이자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의 아내인 발렌티나 비스콘티는 도팽 샤를을 독살해 남편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려는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비난에 시달렸다.1394년 7월 9일, 샤를 6세의 삼촌이자 부르고뉴 공작으로서 프랑스 국정을 이끌고 있던 호담공 필리프는 아들 용맹공 장의 장녀이자 자기 손녀인 마르그리트를 도팽 샤를과 약혼시키는 것에 대한 삼부회의 동의를 얻어냈다. 1396년 1월 공식적으로 약혼 계약이 체결되었고, 1396년 1월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는 "마담 라 도팽(Madame la dauphine)"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그러던 1399년, 도팽 샤를이 중병에 걸렸다. 이자보는 도팽 샤를을 치료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군중은 여러 차례 왕궁에 달려와서 이자보에게 도팽 샤를을 발코니에 데려와서 자신들에게 보여서 아직 살아있는지 확인해달라고 강요했다.
1401년 1월 13일, 도팽 샤를이 파리의 벵센 성에서 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유해는 생드니 대성당으로 옮겨져 1386년에 사망했던 형 샤를 옆에 안장되었다. 도팽과 기엔 공작 직위는 즉시 남동생인 루이 드 기옌에게 넘어갔고,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는 1403년 5월 4일 루이 드 기엔과 약혼한 뒤 1404년 8월 31일에 결혼했다.